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나오는 메이저급 테니스 경기를 보다보면 나의 내부 장기는 어쩔 수 없이 바뀌곤 한다.
예를 들면 간은 콩알로 순식간에 줄어들고, 심장은 수시로 쫄깃대다 보니 젤리로 바뀌는 식이다.
아마도 피는 순간순간 마르길 반복하니 혈관이 아니고 빈 관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사실 올해 프랑스오픈 대회는 흙신 라파엘 나달이 일찌감치 1회전 탈락하는 바람에 내 장기의 변화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남자 결승전이 열리던 지난 6.9일 밤 10시 반에서 다음날 새벽 2시 넘도록 영락없이 그 지경을
겪어야 했다. 스페인의 알카라즈와 독일의 즈베레프가 결승전에서 격돌케 되었는데 즈베레프는 최근
상승세가 장난이 아니고 알카라즈는 팔 부상으로 조금 주춤한 상태라 즈베레프의 우승을 점쳤었다.
세트스코어 2대 1로 즈베레프가 앞서 가는데 난 지레 에구 저이가 3대1로 우승하려나 보네 하고
약간 낙심한 상황이었다. 승리를 예감한 즈베레프가 주렁주렁 목에 걸린 금목걸이를 입에 호기롭게
무는 표정이 그럴듯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경기장에 운집한 관중이나 전세계 시청자들에게 본전 생각 안나게 해주려는 예측 불허의 각본이었나?
4,5세트 들어서 알카라즈의 괴력이 되살아나 6대1, 6대2 믿기지 않는 스코어로 재역전극을 이뤄내고 말았다.
가만보면 알카라즈는 제 연령에 걸맞게 약간은 가볍게 보일 정도로 경기 내내 심각한 표정은 아니고 더러
위너를 작성할 때 "우위쒸"하는 표정으로 "바모스"을 천진하게 외쳐대서 경기장 분위기를 살리곤 한다.
더러 실수를 하더라도 이내 떨쳐버리고 다음 경기에 바로 몰입하는 것도 장점으로 보인다. 그의 코치
페레로는 냉정,침착,담백한 스타일로 요란하지 않게 그때 그때 사인을 보내서 알카라즈의 파이팅을
유도해 낸다.
즈베레프 쪽은 으례 그렇듯 아버지가 정좌하고 앉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래도 희로애락이
드러나서 아들래미는 게임하랴 아부지 심기 살피랴 애로사항이 많을 거 같다. 그리스 에이스 선수인
치치파스의 엄마 아버지, 덴마크의 신성 홀거 루네의 어머니도 만만치 않은 준코치 위상을 보여주는데
이길땐 상관없지만 질때엔 여러모로 편치 않은 표정들이라 좀 안쓰럽기도 하다.
이번 대회 여자 준결승까지 진출한 17세 소녀 러시아의 미라 안드레예바의 엄마는 선글라스를 장착하고
있어도 딸의 계속되는 에러에 얼굴이 벌개지는게 영락없이 드러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알카라즈의 부모님은 경기장에 나와도 코치진과는 뚝 떨어져서 단순 응원만 보낼 뿐
딱히 부담주는 제스쳐를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유에스 오픈, 윔블던대회 결승전을 계속 봐오면서
느낀 점이다. 그의 젊은 어머니는 상당한 미모이신데 더러 "바모스"를 외쳐가면서 열렬히 응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번에 막판 두세트를 월등한 스코어로 이겨 우승했음에도 알카라즈는 그 순간
클레이코트에 대자로 누워서 승리를 만끽했다.
남자 준결승에서 패한 이탈리아의 야닉 시너, 여자 결승에서 패한 역시 이탈리아의 자스민 파올리니의
기세를 보면서 어라 이번에 두 선수가 동반 우승하려나? 조금 기대를 해 보았다. 아쉽게 우승의
문턱에서 주저 앉았지만 이번 대회에서 나의 눈길을 가장 끈 선수는 이탈리아나 선수 파올리니였다.
지난 두바이 오픈때 어찌나 파워있게 경기를 이끌어 가는지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 1미터 63의
단신임에도 키큰 선수들을 꼼짝못하게 하는 그의 기량은 박수받아 마땅했다.
경기장에서 걸어 다니는 그녀의 모습은 약간 아장거리는 수준인데 경기할 땐 거의 여자 나달이
나타났나 싶을 정도로 박력이 넘쳤다.
테니스 선수들중 특히 여자선수들도 가만 보면 진지하다 못해 심각.아니 침울한 표정으로
경기를 하는 선수들이 많은데 파올리니는 불리한 순간에도 씩 미소를 띄우며 경기를 이끌어가서
"스마일 꼬북이"란 애칭을 얻었다나 뭐래나. 게다가 자신만만한 태도까지 보여주니 난 그만
"아니 저런 진주가 어디 숨어있다 이제야 나타난겨?" 감탄을 연발했다. 구력 10년을 자랑하는 그녀는
분위기는 그동안 메이저 대회 몇개쯤 우승한 거같은 여유로움을 풍기니 암튼 이번 대회를 계기로
많은 팬들이 생길 거 같았다.
이번 이탈리아의 약진으로 그 나라 테니스 선수들이 돋보이는 이유 등 여러 이슈들이
보도되었는데 테니스협회가 아주 짱짱하게 운영이 잘되어 대회도 많이 개최되고 국민들도
아주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게다가 협회장은 20년 넘게 재직해도 부정의 티끌 하나 안보인다나
어쩐다나 난 너무 부러워서 츄릅 침을 다 흘렸다.
주변 중국이나 일본, 특히 최근 중국은 으쌰으쌰 선수들이 제법 많이 출전해서 눈길을 끄는데
우리 나라는 권순우 혼자 외롭게 출전해서 초반에 탈락을 거듭하고 애국심을 발휘해서 응원할
기회조차 주질 않는다.
얼마전 스포츠TV 채널에서 챌린지급 테니스대회를 주말에 방영한다고 편성표에 떴길래
잔뜩 기대하고 TV앞에 앉았는데 웬 유로 축구대회, 자동차 경주대회, 격투기등을 아주
골고루 보여 주는것 아닌가? 편성이 바뀐거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나 이해를 구하는 일도 없이
그나마 많지도 않은 우리나라 테니스 팬들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셨다. 이런 식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무성의,무관심,무투자로 일관한다면 저기 어디 아프리카 어디메쯤 테니스 후진국들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스포츠 채널이 일관되게 골프, 당구,야구,
외국 축구경기만 보여주는데 우리 젊은이들이 실제로 운동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하기에는
방송 매체의 운영이 너무 안일한 듯 싶다.
이제 우리나라 청년들은 1미터 85는 되야 장신 축에 드는 거 같은데 그들이 테니스에 많이
입문해서 K-테니스의 붐을 일으켜 주길 간절히 기대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