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5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6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7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8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다. 15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16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17 그때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제2독서 1베드 3,15-18
사랑하는 여러분, 15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16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선한 처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여러분을 중상하는 바로 그 일로 부끄러운 일을 당할 것입니다. 17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 18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복음 요한 14,15-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과 연구진은 호텔 청소원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 집단에만 청소가 건강한 삶을 위해 미연방 의무감이 추천하는 일이라는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두 집단은 똑같이 청소 작업을 했지만 4주 후 자기가 하는 일이 건강에 좋다고 믿은 집단에서만 체중, 혈압, 체지방, 허리-엉덩이 비율, 체질량 지수가 모두 감소했습니다.
생각을 달리 하는 것만으로도 체중을 줄이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임했을 때 좋은 결과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에는 신체를 지배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렇게 놀라운 힘을 하느님께서 넣어주셨습니다. 따라서 부정적인 마음으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단어의 선택부터 다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노래를 진짜 못해요.”라는 말보다는, “아직 노래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요.”라는 식으로 관점을 바꿀 수 있는 말이 필요합니다.
자기 불신의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긍정적이고 성장 가능한 마음이 나의 마음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인해 이제 더는 이 땅에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해 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보호자 성령을 약속하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히십니다.
성령은 아들과 다른 방식으로 위로하십니다. 성자와 성령, 두 분의 본성은 같지만, 보호자요 위로자이신 성령은 특별히 고통받는 이들의 짐을 덜어주십니다. 즉, 성령을 통해 위로를 받아 불신의 마음을 종속시키고 대신 긍정적이고 성장 가능한 마음을 갖게 하면서 희망으로 나아가도록 해주십니다. 그래서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하지만 이 성령의 선물이 우리 안에 드러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켜나가게 될 때 가능합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일본 속담이 있지요.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 가치 있는 것을 주어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성령의 활동이 내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 마음부터 변화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로써 이 세상 안에서 희망을 간직하면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는 항상 내가 강해지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길을 내 밖에서 찾아왔다. 그러나 그 길은 내 안에 있다. 항상 거기에 있다(안나 프로이트).
보호자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생명의 존중.
우리나라 나이와 서양의 나이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2008년 12월에 태어난 아이가 있으면, 우리나라에서는 13살이라고 하지만 서양에서는 11살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적기를 바라는 어른들은 서양의 만 나이를 말하고, 나이가 많기를 바라는 어린아이나 젊은이들은 우리나라 나이를 말하곤 합니다.
사실 서양의 나이 계산이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이는 생명의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는 어머니 뱃속에 태아로 생성될 때부터로 보고 있고, 서양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어머니 배에서 나왔을 때부터로 보는 것입니다.
생명의 기준점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기준점이 점점 서양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태아의 생명을 소홀히 하는 모습도 점점 많아지는 것이 아닐까요?
나이가 들었어도 그래서 나이 먹는 것이 더는 싫다고 생각해도, 우리나라 나이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만큼 생명의 소중함을 한 번 더 떠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호자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부활 6주일(요한 14,15-21)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그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이며 십자가에 목숨을 내놓기까지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 시간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일까요? 쌍방 통행일까요? 예, 좋습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베풀고 또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자식에게, 배우자에게 이웃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는데 남는 것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주고받는 것, 곧 쌍방통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랑하면 상대방이 알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채워줄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수고와 땀의 보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일방통행’이지만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죄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으시고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사랑입니다. 오히려 죄가 클수록 은총도 넘치는 사랑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고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하시며 죄인이 잃었던 권위를 회복시켜주는 사랑입니다. 우리도 베푸는 사랑에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청하여 영원히 함께하실 보호자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안다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해야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을 바라고 그분 계명을 지킴으로써 삶 안에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해 드려야 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정서적 사랑이 아니라 아낌없이 내어주는 행위로 이루어지는 실질적 사랑입니다. 말로 충분한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그 사람에게 좋은 것을 사랑하고,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을 행하고자 하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청하여 아버지께서 보내주시는 보호자를 받아들이고 그분과 하나가 되고자 합니다.
보호자는 누구이십니까? 진리의 영이십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에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을 갈망해야 합니다. 진리의 영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삶을 체험하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살 때 영을 알아보게 되고, 육적으로 사는 사람은 영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고, 보호자를 만나고자 한다면 우리의 육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 천상을 갈망하는 삶으로 바꿔야 합니다. 아니 천상을 여기서부터 살아야 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말합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36,26). 우리는 새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서 있다는 믿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도 많은 상처를 주고 또 받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사랑의 결과입니다. 사랑을 하면서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내가 이만큼 베풀었으니 너는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느냐는 보상심리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방식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써 상대방을 소유하고 지배하며 마음속에 묶어두면 사랑을 빌미로 상처를 더해갑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상대의 고유성을 인정해 주고 그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보상은 사랑입니다. 사랑함으로써 주어지는 기쁨과 평화, 보람이 이미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입니다.
우리 옛말에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설사 자식에게 업신여김을 받아도 부모는 자식을 미워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랑이란 내리 사랑이므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을 능가한다.’는 의미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는 많아도 아랫사람이 윗 사람을 사랑하는 경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윗사람이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이 전수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지 내방식의 사랑을 고집하여 상처를 키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 일서 3장 1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14,15).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14,21).라고 하셨습니다. 인격적인 사랑은 인격의 지성, 정서, 의지에 일치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대한 인격적 사랑은 그분의 비전과 열정에 동화될 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실천하는 것입니다.‘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기쁨, 예수님의 마음으로 모두를 사랑하는 가운데 평화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의 정신과 가르침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내적 진실은 실천하는 행동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요구를 헤아리고 그 것을 채워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도 하나 해내지 못하느냐? 이해하지 못하느냐?”하며 불평불만하지 말고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음을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우리 인생이 기계라면, 미움은 모래이고, 사랑은 기름입니다.”기계에는 반드시 윤활유가 필요합니다. 우리 삶에는 사랑이 필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주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납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주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듯 우리가 서로에게 다짐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사랑을 증거 합니다. 약속 이행은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느님과의 약속 배우자간의 약속, 부모와의 약속 자녀와의 약속 그리고 이웃과의 약속에 충실한 만큼 사랑을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첫 마음에로 돌아가서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과 이웃의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14,18).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의 영을 약속해 주셨고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오셔서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을 무시하고 고아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결코 떠나 본 적이 없다.’네가 나를 원망하는 그 순간까지.......
“아버지의 품 안에는 아홉 자식이 있을 곳이 있지만 아홉 자식의 어느 집에도 아버지가 있을 곳은 없다.”는 말이 크게다가옵니다. 부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복기(復棋)’을 합니다. 복기하는 과정에서 잘 된 착점은 어디인지, 실수 했던 착점은 어디인지 확인합니다. 상대방은 어느 곳에서 잘 하였는지, 상대방은 어느 곳에서 실수 했는지를 확인합니다. 전체 판세의 흐름이 어디에서 변하였는지 확인합니다. 날씨는 수시로 변하지만 기후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저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고수는 전체 바둑의 흐름을 여러 방향에서 복기할 수 있습니다. 복기를 잘 하는 사람은 실수는 줄이고, 흐름을 탈 줄 알기에 실력이 향상 됩니다. 정치도 그렇습니다. 총선의 과정에서 상대방의 장점은 무엇인지, 나의 단점은 무엇인지 살펴보면 다음번 총선에 도움이 됩니다. 정치 평론가들은 총선의 결과를 놓고 냉철한 평가를 하였습니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평가에 인색한 사람은 다음번 총선에서도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코로나19로 미사가 중단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엄격한 방역 기준을 정하고 미사를 재개하였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6주일입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과 주님 부활의 기쁨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려합니다. 부활의 삶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도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삶이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언제가 있을 미래의 삶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변화되었습니다.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도들은 고난과 박해를 당당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박해를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였던 식사를 재현하였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성체성사는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었고, 어려운 이웃을 기쁘게 도왔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부활 성야의 주제는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갈릴래아는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신 곳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복음의 기쁨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갈릴래아입니다.
부활 제2주의 주제는 ‘평화와 용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빌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부활은 분노와 복수가 아닙니다. 부활은 평화와 용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 토마사도는 주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주님의 부활은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신 주님, 길이 영광 받으소서.”
부활 제3주의 주제는 ‘엠마오’입니다. 엠마오는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우리의 마음이 자괴감에서 자부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열정과 희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숨어있던 다락방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시작됨을 아는 것입니다. 빈 무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부활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비록 넘어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임박해서도 하느님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며, 죽으셨지만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그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 마음 안에 벅찬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이웃에게 드러내고 증거해야합니다. 그런 삶이 바로 엠마오입니다.
부활 제4주의 주제는 ‘착한목자’입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십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서는 먼저 함께 사는 가족들의 음성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이웃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 병든 이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 회개의 길입니다.
부활 제5주의 주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길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전용도로도 아닙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희생의 길입니다. 자갈과 가시밭을 정리하는 개척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 드러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생명은 나만을 위한 생명이 아닙니다. 타인의 생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신앙입니다.
부활 제6주의 주제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신앙은 쉽고 빠른 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때로는 가시밭길이고, 십자가의 길이고, 시련과 고통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길을 가셨고, 사도들이 그 길을 걸었고, 성인들이 걸었던 길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 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그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은 또 어디 있으랴’ 길가에 피어나는 작은 꽃들도 다 저렇게 흔들리며, 비에 젖는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들의 인생 또한 때로 갈등의 바람에, 유혹의 바람에, 욕심의 바람에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근심과 걱정의 비가 내리고, 좌절과 고통의 비가 내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또한 충실하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 행복의 꽃이 필 것입니다. 사랑의 꽃이 필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제 아버지께서 보내 주실 협조자 성령께서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다시 알려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