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이 지나치게 붉다
또는 자색빛을 띈다.
이것은 건강이상으로 간주하고
1차에서 무조건 탈락!
🔊목이 퉁실퉁실 굵다.
처녀가 아님으로 보고 바로 탈락
🔊지엄한 대비마마가 질문할 때
우물쭈물하거나 귀가 벌게진다면
소심이로 보고 탈락
🔊말할 때나 평소 입술을 자주 적신다면
욕구 불만이 많을 것으로 보고 탈락
🔊침이 많은 것도 안된다??
긴장 된 탓에 입술이 바짝 말라
좀 침좀 적시면 탈락
🔊얼굴 외모를 볼 때 양 미간이
좁으면 음기가 쎈 여자로 간주,
세자가 잠자리에서 몸을 상할
수있으니 역시 탈락
🔊주걱턱! 심성이 착해~ 그래서 합격
요즘 턱깍은 렛미인들 조선시대엔
다 필요없구나..
🔊물에 밥 말아 먹는다면 근검 절약하는
성품이 있어서 조선의 국모가 될 자질이
있으니 일단 합격~
그런데 이거 모두
합격자 정해 놓고 하는
경합이란 소문이나서
사대부가 참가를 꺼린다네요~
📚조선시대 폐위되었다가 복위된 왕비
💕41명의 조선 왕비들 중에서 11명의 왕비가 폐위되었다.
그중 7명은 죽은 뒤, 또는 생존시에 다시 왕비의 칭호를 얻었으나, 나머지 4명은 영원히 폐비로 남고 말았다.
1.신덕왕후 강 씨
(1356 ~ 1396/태조의 계비)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아내이자, 조선 최초의 왕비이다. [첫째부인 신의왕후(1398년 추존)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1391년에 사망]
강씨는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을 제치고 자기 소생의 왕자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뜻이 맞은 정도전과 정치적 연합을 하여 의안대군을 왕세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장남도 아니고, 후처 소생의 차남이 왕세자가 된다는 것을 정안대군을 비롯한 신의왕후의 아들딸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계비인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을 지명했다.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이자 가장 정치적 야심이 컸던 방원은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1396년 9월 15일(음력 8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의안대군을 포함한 신덕왕후의 아들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사위도 살해당하여 딸인 경순공주는 여승이 되었다.
태종은 부왕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하고 정릉을 도성 밖 양주군 성북면 사한리(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천장하라 명했다.(원래는 정동의 영국 대사관 자리에 있었음)
신덕왕후 복위 문제는 왕대를 이어가며 논의를 거듭한 끝에 1669년(현종 10년) 우암 송시열에 의해 복위 되었다.
2.현덕왕후 권 씨 1418 ~ 1441
5대 문종의 세자 시절 휘빈 김씨(1429년 7월 18일 폐출)와 순빈 봉씨(1436년 10월 26일 폐출) 이후 세 번째로 맞은 세자빈으로(후궁 출신), 1441년 단종을 낳고 하루 만에 산후병으로 사망한다. 남편 문종이 즉위한 후 왕후에 추존되었다
현덕왕후의 어머니 아지(阿只 성명불상 아기라는 뜻)와 왕후의 동생 권자신(權自愼)이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었다. 이에 권자신과 아지는 1456년에처형되고,
단종은 1457년 7월 12일(음력 6월 21일)에 노산군으로 강등된다.
한편 이미 사망한 현덕왕후와 그 아버지 권전은 아지와 권자신의 죄로 인해 연좌되었고, 권전은 1456년 8월 7일(음력 7월 7일), 현덕왕후는 1457년 7월 17일(음력 6월 26일)에 각각 서인으로 격하되었다. 1476년(성종 7년) 5월 8일(음력 4월 15일)에는 그 여파로 현덕왕후의 신위를 불사르게 된다.
큰딸 경혜공주(단종 누나)는 노비가 되고, 사위 정종(? ~ 1461)은 능지처참되었다. 며느리 정순왕후(단종 비)는 노비가 되기까지 되었다.
단종은 숙종 조에 신원되었다
9대 성종 대에 와서 서인이 된 현덕왕후를 현덕빈(顯德嬪)으로 복위하였으나
이후 합의를 거쳐 성종 대에 와서 서인이 된 현덕왕후를 현덕빈(顯德嬪)으로 복위시켰다.
능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에 위치한 소릉(昭陵)이었다가, 1513년(중종 8년)에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현릉(顯陵)으로 옮겨 남편 문종과 합장되었다.
3.정순왕후 송 씨
(1440 ~ 1521/단종의 정비)
김종서의 사후 1454년에 간택령에 따라 왕비교서를 받고 즉위하였다. 1457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추진하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남편,상왕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고, 의덕왕대비는 군부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났다가, 관비가 되었다. 이후 7대 세조는 그를 노비이지만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 현재의 서울 숭인동에 있던 사찰 시누이인 경혜공주와 함께 정업원에 들어가서 한때 비구니 생활도 했음)
으로 보냈다. 남편 단종의 명복을 빌다가 사망하였으며, 그의 능의 소나무는 동쪽 방향으로 굽는다는 전설이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송시열과 김수황 등의 건의로 1698년 12월 7일(숙종 24년 음력 11월 6일), 단종과 그녀는 복위되어 시호를 받고 종묘 영녕전에 신위가 모셔졌다
그녀의 별세 때에는 대군부인의 격에 따라 치러진 장례로 경기도 양주군(楊州) 군장리(群場里, 현재의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매장됐다. 단종과 그의 복위로 종묘에 배향되면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했는데 이는 억울하게 살해된 남편을 사모(思慕)한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4.단경왕후 신 씨
(1487 ~ 1557/11대 중종의 정비)
할아버지 신승선은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사위이자 연산군의 장인이었으며, 아버지 신수근은 좌의정에다 연산군의 처남이었다. 작은아버지 둘은 모두 형조 판서를 역임했고, 작은어머니(신수영의 부인, 둘째 작은아버지)는 예종의 비 안순왕후의 여동생이다. 그녀의 고모는 다름 아닌 연산군의 정비인 폐비 신씨. 남편이었던 중종의 고조부와 단경왕후의 외고조부는 세종대왕으로 같기에 중종과 단경왕후는 8촌 관계이다. 또 단경왕후의 외조부인 한충인은 중종의 할머니인 소혜왕후의 사촌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당대 최고의 엘리트 집안의 딸이었던 인물이다.
13살이었던 연산군 5년(1499),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훗날 11대 중종)에게 시집갔다. 진성대군이 1살 연하였고, 결혼생활 7년 동안 자녀는 없었다고 한다.
고모 거창군부인 신씨가 연산군의 아내였으니, 거창군부인 신씨와 단경왕후 신씨는 고모-조카 사이이자 동서지간이 된다.
중종반정 (1506년)이 성공하면서 진성대군이 왕이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신씨도 중전이 되었으나, 하필 아버지 신수근이 폐주 연산군의 처남이었던 터라 역적이 되었기 때문에 반정세력의 요구에 따라 고작 7일 만에 폐출당하고 만다.이는 조선의 역대 왕비 중 가장 짧은 재위 기간이다.
기록을 보면 중종은 신씨를 폐출하는 일에 별다른 망설임이나 반대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1506년 9월 9일 초저녁에 신씨가 궐 밖으로 나가자, 다음 날 9월 10일에 새 왕비를 책봉하는 일을 허락한다.
상당수 역사가들은 "단경왕후는 단 하루도 왕비였던 적이 없으며 추존왕비에 불과하다"는 의견을 낸다. 실제로도 정식으로 왕비가 되려면 책봉식을 치러야 하는데, 단경왕후는 중종반정 당일 바로 중종과 강제 별거되었다. 7일이란 기간은 단경왕후가 왕비로 지낸 시간이 아니라, 중종이 아내를 내치지 않으려고 버틴 시간이라 봐야 한다
반정으로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남편 중종과는 강제 이혼당하는 등, 중종반정의 가장 큰 피해자로 전락했다.
중종 10년(1515년) 8월 8일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 등이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상소문을 중종에게 올리는 등 일부 대신들의 신씨를 복위시키자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중종이 태클을 걸었다.
결국 단경왕후 신씨의 생전 복위는 물거품이 되었다. 신씨는 사가에 거처하면서 독수공방하다가 중종이 죽은 지 13년이 지난 명종 12년(1557년)에 71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중종실록 중종 39년 11월 15일 기사에 따르면, 중종이 승하하기 전 한 여인이 은밀히 궁으로 들어갔는데, 세간에서는 "그 여인은 폐비 신씨이다. 왕이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전처의 얼굴이나 한 번 보려고 부른 게 틀림없다."고 수군거렸다. 마침 이 날이 바로 중종이 사망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관에 따르면 사실은 중종의 쾌유를 빌기 위한 여승이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팩션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도 이 일화를 채택해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을 아역 배우들의 모습을 빌려 연출했고, 채널A의 천일야사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이 두 부분을 접합하여 신씨가 여승으로 변장해 중종과 마지막으로 만난 것으로 그리기도 했다.
인왕산의 치마바위 전설이 단경왕후 신씨와 관계가 있다. 야사에 따르면 중종은 비록 반정공신들의 압박을 못 이겨 신씨를 내쫓고 후계 문제 때문에 신씨를 복위시키진 못했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매우 그리워해서 신씨가 폐출되어 나와 있던 사가 방향을 자주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 사실을 전해듣고 신씨는 자기 치마를 인왕산의 바위 위에 중종이 볼 수 있도록 걸어놨다고 한다.
그 뒤로 계속 폐비 신씨로 불리다가(당대 기록에선 단경왕후도 고모 거창군부인 신씨처럼 '폐비 신씨'라고 불렸기 때문에 헷갈리기 쉽다. 차이가 있긴 했는데, 고모와 달리 단경왕후는 '성+비'로 된 명칭인 신비(愼妃)로도 호칭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영조 때에 복위(1739년)되어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고, 휘호를 공소순열이라고 올리고, 양주 장흥에 있던 신씨의 무덤 역시 이때 온릉(溫陵)으로 승격되어 새로 왕비의 격식에 맞게 조성되었다. 온릉의 경우에는 교통도 좋지 않고, 주변에 코렁코렁한 시설이 있는 관계로 비공개 능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다 2019년 11월에 공개 능역으로 전환되었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신씨가 죽은 뒤 182년이 지난 후인 영조 15년(1739년)에 유생 김태남이
영조에게 신씨를 복위시킬 것을 주청하는 상소에 영조는 흔쾌히 복위시켰다
5.인목왕후 김 씨
(1584 ~ 1632/선조의 계비)
선조의 두번째 왕비이며, 의인왕후가 승하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선조와의 사이에서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았다.
광해군(조선 15대 왕) 즉위 후 계축옥사 (1608년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대북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여 역모하였다는 이유로 소북의 영수(領首) 류영경(柳永慶)을 죽이고 소북 인사들을 축출하였다.)
에 연루되어 아버지 연안부원군 김제남이 사사되고 아들 영창대군 (영창대군은 선조가 55세 때 얻은 유일한 적자이다.)
이 살해되었으며, 오빠와 남동생, 형부가 옥사에 연루되어 전부 처형되면서 멸문의 화를 당했다.
이일로 인해 인목왕후는 딸 정명공주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인한, 홍국영, 원빈 홍씨 등은 모두 그녀의 후손들이다.)
와 함께 경운궁 석어당에 유폐되었다.
--지식백과에서정리한글ㆍ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