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통해 미래를 보다: 하느님 말씀의 예견력
다니 2,31-45; 루카 21,5-11 /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2023.11.28.
성서 주간의 두 번째 날인 오늘은 성서와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는 역사의 교훈을 놓치지 않는 하느님 말씀에 담겨 있는 예견력을 살펴보는 일로 이어집니다. 과거에 대한 역사를 보면 미래를 내다보는 전망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과 하느님의 말씀이 다른 결정적인 차이는 말은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만 말씀은 현재의 현실을 창조하는 힘이 있으며 미래를 내다보는 힘 즉 예견력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서들은 모두 다 이 예견력을 검증받은 기록들입니다.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선포했을 때 그 즉시 공인된 것이 아니라 그 당대에 예언자들과 소통하며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던 아나빔들에 의해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그 예언이 후대에 들어서서도 들어맞아서 과연 하느님께로부터 전해 받은 말씀임이 검증된 후에야 비로소 예언서라는 성경 기록으로 검증받아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를 통해 고난을 겪은 후에야 현재의 예언서들은 물론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 오경의 율법서가 기록으로 편찬된 구약성서 형성 과정을 보아서도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장차 오실 메시아의 고난을 내다본 이사야의 예견력은 독보적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고난을 통해서 메시아께서 이룩하실 하느님 나라의 미래까지도 내다보았습니다. 이는 마치 우주의 천체를 이루는 저 수많은 별들이 창조 이래 일정한 궤적을 그리면서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기 때문에 과거의 궤적을 관찰하여 미래의 궤적과 별자리의 움직임을 내다볼 수 있듯이, 나라와 문명의 역사적 궤적을 관찰하면 미래의 운명도 내다볼 수 있는 이치에 입각한 판단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하느님 나라의 미래를 추상적이고 포괄적으로만 내다볼 수 있었지만, 부활 신앙으로 구체적이고 선택적으로 내다보실 수 있으셨던 분은 단연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하느님의 권능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했거니와, 그러면서도 먼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고 나서야 발설되었기에 당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의 말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습니다(루카 4,32 참조).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서 역사를 보는 눈은 개인적인 일상사에 매여 살기 쉬운 우리에게 현재는 물론 과거와 미래로 눈을 높이 들게 하여 지금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은 물론 먼저 살다 간 이들과 우리 뒤에 살게 될 이들의 삶에도 관심을 가지게 해 주는 안목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성서가 일깨워주는 역사적 안목으로 살아가면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보게 해 주며,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까지도 대비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하느님 말씀으로 역사와 미래를 보는 안목의 기준은 하느님 나라와, 특히 부활 신앙입니다.
다니엘은 당시 오리엔트로 불리던 넓은 강역을 지배하며 패권을 차지했던 바빌로니아 제국을 통치하던 왕의 꿈을 풀이해주면서 그 이후 지역 패권이 흘러갈 가까운 역사를 예언하였는데 마지막 패권을 차지할 나라는 로마제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머지않아 파괴될 것을 내다보시고 로마 이후 인류가 겪게 될 먼 역사까지도 예언하셨습니다. 4세기의 교부 아우구스티노 또한 이러한 예수님의 안목을 본받아 멸망하는 로마제국의 흥망성쇠 역정을 통해 생겨난 하느님 나라의 씨앗인 교회가 하느님 나라의 문명을 영원히 지속할 것으로 내다보고 ‘신국론’을 저술한 바 있습니다. 이 빼어난 역사적 저술에서도 기반이 되는 것은 부활 신앙입니다.
개인의 인생이 자유 의지로 하느님의 섭리를 향해 가는 여정이듯이, 인류의 역사도 집단적인 자유 의지로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여정입니다. 하나의 정치 단위에서 사회적 모순이 축적된 끝에 공동선 질서가 무너져서 더 이상 그 사회가 유지되기 어려울 정도가 되면 외부의 더 강한 세력이 나타나서 조금 더 진보된 가치를 내세우며 패권을 차지하지만, 이 패권도 때가 되면 비슷한 경로로 교체되기를 반복해온 흥망성쇠의 흐름이 국제 정세의 흐름입니다.
다니엘이 예언하는 지역 패권의 흐름이 뒤바뀌기를 거듭하는 한동안 하느님께서는 지켜 보시다가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지배할 당시에 개입하셨습니다. 그것이 구세주 예수님의 강생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인류 역사의 흐름이 집단적인 자유 의지라는 변수 말고도 예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출현한 교회라는 변수가 작용하여 흘러가게 됩니다. 인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움직이는 신앙인들의 존재가 하느님 섭리의 도구가 되어 역사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20세기 프랑스의 신학자 떼이야르 드 샤르뎅(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은 인류 역사가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진화하고 있으며, 그 정점 즉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내다보았습니다. 생물학적 진화를 연구하던 고생물학자요 하느님의 섭리를 설명하는 신학자로서 그는 역사의 흐름은 오로지 인간의 개별적이거나 집단적인 자유 의지만으로 작동되는 자율 진화의 흐름으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이 자율 진화의 흐름이 빙산의 일각처럼 나타나지만, 그 속에는 빙산의 거대한 몸체처럼 하느님의 섭리와 구원계획을 믿고 하느님의 역사 개입의 도구가 되고자 하는 신앙인들에 의해 시도되는 계획 진화의 흐름이 있어서 역사의 흐름을 좌우한다고 본 것입니다. 개인의 인생이건 인류의 문명이건, 개별적이거나 집단적이라는 차원만 다를 뿐, 자유 의지와 하느님 섭리의 작용 결과라는 점에서는 그 본질이 똑같습니다.
자유 의지만으로는 시대와 공간이 달라질 뿐이기 때문에, 개별 인생이나 집단 문명이나 겉모습이 바닷가의 파도처럼 뒤바뀔 뿐 특정한 목표 없이 흘러갑니다. 300만 년 전 구석기 시대에나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에서든, 이런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아무개가 살던 인생이나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21세기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살아가는 인생이 겉모습을 빼면 그다지 다를 것도 없는 것이고, 네부카드네자르가 바빌로니아 제국을 세워 패권을 차지하던 시절의 국제정세나 강대국 정치가들이 국익을 지키고 패권을 유지하려고 노심초사하는 최근의 국제정세가 본질적으로는 크게 달라진 것도 없습니다. 개인들이라면 의식주 등 먹고 사는 일이 주된 관심사이며, 국가 단위라면 식량과 에너지 등의 경제 사정과 서식지라는 영토 관리가 주된 관심사일 터입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가치 실현과는 동떨어진 것들입니다.
그런데 다니엘과 예수님께서 공통적으로 말씀하시는 역사적 가르침은 하느님께서 몸소 세우실 나라에 관한 것으로서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개별 인생에서는 물론 집단 문명에서도 똑같이 적중할 계획 진화의 내용이 됩니다. 개별 인생에서 일상사가 중요하기는 해도 그에 매몰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부침을 거듭해온 문명의 흐름에서도 패권의 향방이 중요하기는 해도 그에 매몰될 필요는 없습니다. 천차만별인 인생에서나 흥망성쇠를 거듭하기 마련인 제국적 패권이 주도하는 문명에서나 인간의 개별적이거나 집단적인 자유 의지로 갈 데까지 다 가서야 축적된 모순이 폭발하여 달라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개입하도록 인생이나 문명을 전환하려는 계획 진화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는 이런 외적인 흐름에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역사적 변화가 언제 일어날지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때에 관해서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고, 오직 그러한 변화들을 앞당길 수도 있고 뒤로 늦출 수도 있는 변수에 유의하라는 것입니다. 그 변수란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이며 그 섭리를 깨닫고 도구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움직임입니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인생에서 하느님을 믿겠다고 선언하는 세례가 새로운 탄생으로서 인생의 새로운 계기가 되듯이, 인류의 문명에서도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구원 계획의 징표를 알아차리고 준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동시대인들과의 수평적 의사소통이나 연대만큼이나 앞선 세대가 남겨준 역사적 통찰을 잘 식별하여 후 세대가 이어받을 수 있도록 현재의 현실을 만들고 준비할 수 있는 수직적이고 통시적인 역사의식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이것이 성서가 일깨워주고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 깨어 준비하는 일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준비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눈 여겨 보아야 할 역사의 징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21세기에 들어서서 한민족의 국운이 상승하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주는 징표로서, 세계적으로 유례 없이 크게 유행하고 있는 한류 현상입니다. 이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힘이 없어서 식민 지배를 받아야 했던 불과 백 년 전의 상황이나, 우리 민족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민족이 분열되고 국토가 분단되었으며 동족 상잔의 전쟁까지 치러야 했던 겨우 70여 년 전의 상황과는 정반대의 현상입니다.
한류(韓流,Korean Wave)는 ‘외국인들이 한국 대중문화 및 순수문화를 좋아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각종 문화가 전세계에 퍼지며 알려지는 현상’을 뜻합니다. 구미 선진국의 언론은 물론 석학들도 이 한류 현상을 그 이전에 한때 유행했던 일부 선진국들의 문화 현상과는 궤를 달리 하는 것으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류 현상은 군사력이나 경제력 같은 힘(Hard Power)에 기반하지 않고 선한 영향력(Soft Power)에 기반한 공감을 폭넓게 불러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대중문화의 성공은 독립된 몇몇 개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이야기, 즉 식민지 경험을 지닌 개도국 출신의 분단된 작은 나라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루는 과정에서의 피, 땀, 눈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사 속에 유니크한 한국의 위상을 맥락으로 합니다. 게다가 한국은 충분히 부와 군사력을 지니면서도 이를 다른 민족에게 강요하려는 의지가 없이 상호 공존 번영하려는 국가입니다. 한류는 영화, 드라마, 음악 등의 대중 문화에서 시작되었지만, 미술, 문학, 역사, 철학 등으로 얼마든지 확대되어 갈 수 있습니다.
한류 현상이 이처럼 유행하기도 전인 1970년대에 이를 내다본 사람은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1975)입니다. 필생의 과업으로 삼아 문명 당위로 역사를 연구해 온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어 대략 5,000년 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면서 건국이념으로 설정한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 또는 제세이화(濟世理化), 곧 '널리 두루두루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것과 ' 세상을 다스림에 있어서 진리에 맞게 다스린다'는 의미에 주목하고 "21세기에 세계가 하나 되어 돌아가는 날이 온다면 그 중심은 동북아시아일 것이며, 그 핵심사상은 한국의 홍익인간 사상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동아일보 인터뷰, 1973.01.01)고 피력하기도 하였습니다.
문명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석학이 피력한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구미의 많은 석학들이 동조하고 있으며, 교황청에서도 이런 국제 여론을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지식인 평신도들이 스스로 진리를 찾다가 선교사 없이 스스로 교회를 세웠고, 박해가 들이닥쳐 지식인 평신도들로 이루어졌던 지도부가 모조리 와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민중 출신으로 세례를 받은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전국에 교우촌을 세워 백 년의 박해를 이겨낸 저력을 교황청에서는 대단히 높이 사고 있습니다.
1984년과 1989년에 두 차례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2014년에 방한한 교황 프란치스코 역시 한국교회의 이런 저력을 적극 격려해 준 사실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서 두 교황을 비롯한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은 한민족에 대한 긍정적인 국제 여론에 동조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한류 현상을 하느님 나라의 가치로 변화시키는 복음화 노력이 향후 인류의 미래를 진보시킴과 동시에 보편교회에도 신앙의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주요 변수라고 내다 보고 있습니다.
가히 역사를 통해 미래를 보는 하느님 말씀의 예견력을 방불케 하는 이러한 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기대가 실제로 현실화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이는 한민족의 문화 역량에 달린 문제이며, 특히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복음화 의지에 따라 달라질 운명일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복음 환호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