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인점에서 ‘박사님’ 하고 부르면 10명 중 6~7명은 뒤돌아보고, 미용실에서 ‘사모님’ 하고 부르면 모두가 다 뒤돌아본다는 그곳. 대덕연구단지가 있는 대전 유성구다.
대덕이란 이름으로 인해 보통 대전 대덕구가 아닐까 생각하지만 대덕연구단지는 행정구역상 유성구에 속한다. 유성구에 사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유성구 사람들의 각양각색 삶의 단편들을 들여다본다.
◇ 유성구 어떤 곳인가 ◇
‘연구단지’와 ‘본토유성’으로 나뉘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호남고속국도로 꺾어진 후 나오는 두 번째 IC인 유성IC를 통과하자마자 눈앞에 거대한 스타디움이 펼쳐진다. 유성구의 상징물 중 하나라는 ‘대전월드컵경기장’ 뒤로 아파트 단지가 끝 간 데 없다. 대전의 떠오르는 부촌으로 분당급 신도시라는 ‘노은지구’다.
‘서울 못지않은 곳’이라며 감탄하는 것은 잠깐. 유성고속터미널 쪽으로 가기 위해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여기가 정말 도시가 맞을까’ 싶게 밭 천지다. 과수원과 화훼단지를 지나 시내로 들어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여느 군이나 면급 시골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줄을 잇는다. ‘첨단과학’과 ‘농촌’의 양면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 대전 유성구의 현황은 그렇게 유성IC를 넘어가면서부터 첫눈에 감지된다.
왜 하필 대전 유성구인가. 유성구라는 이름은 낯설지만 ‘대덕연구단지’는 이미 전국적인 브랜드다. 대덕연구단지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 바로 유성구. 전국에서 석·박사 비율이 가장 높다는 그 동네다.
대전 5개구(유성구, 대덕구, 서구, 중구, 동구) 중 하나인 유성구는 대전직할시 북부 거의 전부를 아우른다. 5개구 중 하나지만 면적만 놓고 보면 대전시 전체의 32%를 차지한다. 면적이 넓은 만큼 동도 많다. 동사무소를 공유하는 행정동은 8개에 불과하지만 실제 ‘동’ 이름을 갖고 있는 법정동은 53개에 이른다.
유성구에 거주하는 주민은 모두 24만여명. 이 중 박사 비율이 2.8%, 석사는 4%, 석·박사를 통틀면 7%에 육박한다. 이렇게 석·박사 비율이 높은 것은 대덕연구단지가 속해있기 때문이다. 생명공학연구원,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항공우주연구원 등 정부출연연구기관은 물론 쌍용기술연구소, LG화학기술연구원 같은 민간연구원까지 합해 현재 유성구에 자리 잡은 연구소만 250개가 넘어간다. 연구소뿐 아니다. 연구단지를 기반으로 한 벤처기업들도 줄줄이 자리 잡아 현재 벤처기업 수가 800개를 웃돈다.
■ 벤처 800여개, 석·박사 비율 7% ■
물론 유성구를 대덕연구단지와만 연결해서 설명할 수는 없다. ‘첨단과학과 관광의 도시’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유성은 원래 ‘유성온천’으로 유명했던 관광도시다. 지금도 유성온천의 명맥을 잇는 구(舊)유성 도심지가 유성구를 구성하는 중요한 또 하나의 축이다.
|
‘
대덕연구단지’와 ‘구유성 도심지’라는 단어에서 이곳이 아주 상이한 두 개의 문화가 함께 존재하는 곳임을 바로 알 수 있다. 유성구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한밭대로를 기준으로 왼쪽이 본토유성, 오른쪽이 연구단지다.
우선 대덕연구단지 쪽을 살펴보자.
카이스트 주변 어은동, 도룡동, 신성동 근처에 대덕연구단지가 넓게 분포돼 있다. 당연히 대덕연구단지 내 연구원과 벤처기업 등에 근무하는 직원들 가족은 이쪽 지역 아파트에 주로 거주한다. 특히 3000가구 규모로 유성구청 바로 뒤에 위치한 어은동 한빛아파트는 78년부터 유성으로 내려오기 시작한 초창기 연구원들이 이후 가족과 함께 살 터전을 만들기 위해 조합을 결성하고 건설한 조합아파트 중 하나로 연구원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대표적인 아파트로 꼽힌다.
이외에 엑스포아파트 단지로 지칭되는 전민동, 노은동 노은지구, 관편동 대덕테크노밸리도 연구원들이 선호하는 지역이다. 90년대 이후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개발된, 상대적인 신시가지들. 이들 지역에 대형 평형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어은동, 도룡동, 신성동 지역의 오래된 아파트에 살던 연구원 가족 상당수가 이쪽으로 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노은지구는 대전에서 조치원, 연기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행정도시 수혜지로 꼽히며 유성구에서 최고 집값을 자랑하는 지역으로 떠올랐다.
연구단지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 살기 좋은 곳’이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차들이 거의 없는 한가한 도로는 시원하게 쭉쭉 뻗어있고, 드문드문 위치한 연구소마다 수목이 무성하다. 마치 외국 어느 선진 도시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숲과 공터가 조화롭게 결합된 연구단지 주민들의 쉼터 과학체육공원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차로 5~10분 거리에 화폐박물관, 대전시민천문대, 지질박물관, 국립중앙과학관, 엑스포과학공원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대전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데이트 코스로도 유명한 대덕초등학교 정문 쪽의 도룡동 단독주택단지는 일산이나 분당의 근사한 단독주택촌을 연상시킨다.
■ 집값 싸고 교육여건 좋고… 연구단지 환경 좋지만 상대적 소외감 깊어■
“서울에서 못 살 것 같습니다”
“서울 강남에 언니가 두 명이나 삽니다. 언니 집에 다녀올 때마다 언니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싼 집 사느라 대출금에 허덕이고, 교육비는 교육비대로 엄청 나가고, 그러다보니 쓸 돈이 거의 없어요. 정말 강남거지라는 말이 저런 것이구나 싶더라고요. 그뿐인가요. 맘 편하게 애들 놀릴 공간이 있나요, 공기가 좋나요, 주변에서 눈만 뜨면 들려오는 남들의 재테크 성공 스토리에 스트레스는 또 얼마나 받는지요. 전 이제 서울에서 못 살 것 같습니다.”
남편은 물론 자신도 박사라는 A씨 설명이다. 어은동 한빛아파트 주민인 A씨를 비롯해 연구단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부의 상당수가 ‘유성구는 아주 살기 좋은 곳’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이 유성구를 살기 좋은 곳으로 꼽는 이유는 네 가지다.
우선 주변 환경이 자연친화적이어서 아이들 키우기에 최적이라는 것. 둘째 집값이 싸서 집 때문에 돈 걱정할 필요가 거의 없고 결과적으로 수입이 같다고 가정하면 서울에서 살 때보다 삶의 질이 훨씬 높다는 것. 셋째 부모들의 교육과 생활 수준이 서울 강남 못지않아 교육열이 높은 만큼 자녀 교육에도 유리한 조건이라는 것. 넷째 연구단지를 중심으로 조성된 지극히 가정적인 문화 때문에 특히 주부들의 천국이라는 설명이다.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카이스트 운동장에 가서 뛰어놀거나 충남대 농학부가 관리하는 밭에 가 자연학습을 하는 게 일상화돼 있습니다. 그뿐인가요. 주말이면 가족끼리 차로 5분 거리에 위치한 과학체육공원에 가서 피크닉을 즐기고 근처에 산재한 온갖 박물관과 천문대, 과학관 등을 섭렵하느라 바빠요. 정말 아이 키우기에는 최고의 환경이라 자부합니다.”
집값이 싼 것도 손꼽히는 장점이다. 현재 한빛아파트의 102㎡(30평형) 매매가는 1억200만~1억4000만원이다. 유성구에서 최고 부촌으로 꼽힌다는 노은지구 아파트 매매가도 3.3㎡(1평)당 840만원에 불과하다. 노은지구에서도 최고가 아파트인 열매마을 8단지 새미래아파트 정도가 3.3㎡당 1000만원 안팎을 넘나드는 수준이다. 지어질 당시만 해도 유성구를 넘어서 대전 최고 아파트로 꼽혔던 전민동 엑스포아파트 역시 188.43㎡(57평)가 4억원을 채 넘지 않는다. 거의 전 주민이 연구원, 교수, 의사라고 알려진 도룡동 연구원현대아파트는 132.23㎡(39평형)가 3억원 미만이다.
대부분이 서울에 연고를 두고 있는 연구원 가족들의 집값에 대한 체감가격은 이보다 훨씬 낮다. 워낙 3.3㎡당 3000만원이네, 5000만원이네 하는 얘기들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대치동 교육에 대한 내용이 크게 화제가 됐을 때 관련 책을 사서 본 일이 있어요. 그때 대치동 아이들이 받는 교육과 연구단지 아이들이 받는 교육에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동시에 내가 서울에서 살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라는 생각도 했지요. 선임연구원이래 봤자 연봉이 4000만원에 지나지 않아요. 그 돈으로 서울에서 살려면 집을 사기는커녕 전세금 올려주기에도 정신없었을 거예요. 당연히 지금처럼 아이 교육비를 쓸 수 없었겠지요. 그때 처음으로 연구단지에서 사는 게 참으로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도룡동 연구원현대아파트에 사는 한 연구원 부인 B씨의 귀띔이다.
대치동 아이들과 연구단지 아이들이 받는 교육 내용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B씨가 얘기할 만큼 유성구에서도 연구단지 내 지역 교육열은 서울 강남을 방불케 한다. 그중에서도 교육열이 가장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은 대덕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도룡동 일대다.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자녀를 한 명 둔 B씨의 일과는 하루 종일 빽빽하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순간부터 스케줄대로 학원에 태워다주고 기다렸다 다시 태우고 다른 학원으로 옮기고 하다보면 어느새 저녁 7시가 훌쩍 가까워져 있다. B씨는 “이곳 아이들은 절대 이곳 아이들을 경쟁자로 여기지 않는다”고 전한다. 과학고, 외고 등 특목고와 서울 명문대를 목표로 하는 아이들인 만큼 서울 강남 지역 아이들을 경쟁자로 여기고 그에 뒤지지 않게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서구처럼 가족 문화가 널리 퍼져 있는 것도 유성구 연구단지의 큰 특색이다.
연구단지 내부를 거닐다 보면 유모차를 끌고다니거나 축구공 하나를 끼고 아이와 손잡고 가는 아빠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어은동에 거주하는 주부 N씨는 “연구원이 다 근처에 모여 있어 직장이 가까운 데다, 외국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 많아 외국의 가족 문화에 익숙한 아빠가 많은 것도 한 이유”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대다수 연구원의 출퇴근 시간은 10분가량. 6시 30분에 퇴근하면 6시 40분쯤에는 집에 올 수 있다. 7시 30분 저녁 식사 시간까지 아이들과 함께 운동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확보된다.
한편 이 같은 문화가 답답해 촉망받던 연구원 생활을 그만두고 서울의 한 창투사에 취직함으로써 유성구를 빠져나왔다는 J씨는 ‘가족 중심으로 살 수밖에 없는 더 적나라한 이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준다.
유성구 연구단지 내 아파트 환경은 서울 못지 않다. |
본토유성에는 아직도 5일장이 설 만큼 농촌의 향취가 짙게 남아있다. |
본토유성에서 한평생을 살아왔다는 K씨는 “다른 때보다도 선거철에 더욱 속앓이를 하곤 한다. 연구단지에만 집중되는 각종 선거공약을 보면 유성 본토박이로서 속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 소외된 본토박이들 ■
“빈부격차 때문에 속 많이 상하죠”
본토유성에 사는 사람들은 유성구 발전상이 강 건너 남 일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토유성의 온천관광업 자체가 쇠퇴하면서 관광업에 기대 살던 사람들의 소득과 일자리는 외려 줄어들은 탓이다.
현재 본토유성에 속하는 동네는 구암동, 상대동, 장대동, 봉명동 등. 네 동을 통틀어 초등학교는 장대동에 위치한 유성초와 장대초가 유일하다. 그중 장대초는 장대동 아파트 단지 아이들이 중심. 장대초에 배정되지 않은 장대동 아이들과 나머지 세 개 동 아이들은 모두 유성초에 다닌다. 장대동에서 가장 거리가 먼 상대동에 거주하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려면 꼬박 30~40분은 걸어야 한다. 60년대 추억 어린 스토리가 아닌, 2007년도 현재의 모습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대부분의 학원이 셔틀버스를 통학버스로 활용하는 중이다. 자기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 중심으로 셔틀버스에 태워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것. 91년부터 구암동에서 학원을 운영해온 K씨는 “결손가정도 많고, 근처 식당 등에서 서비스를 하거나 농사를 짓는 부모가 대부분이다 보니 학원 셔틀버스 말고는 아이들이 학교에 갈 다른 수단이 없다. 어쩔 수 없이 학원이 문을 열지 않는 토요일도 셔틀버스 운행을 위해 새벽에 일어난다”고 했다. 그나마 학원에 갈 수 있는 아이들 얘기다. 가정 형편상 학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이마저도 이용할 수 없다.
아들이 유성고 3학년이라는 L씨는 아들과 함께 힘든 고등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대 합격자 9명을 배출한 유성고는 연구단지 안의 대덕고와 더불어 유성구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로 꼽힌다. 사실 유성고가 명문 고등학교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유성고가 명문고가 된 배경은 남녀공학이 아닌 남고라는 것. 남녀공학에서 여학생들에게 내신에게 밀릴 것을 걱정한 연구단지 내 남학생들이 남녀공학인 대덕고를 피해 남고인 유성고로 오기 시작하면서 명문의 근간이 만들어졌다는 설명이다.
L씨는 “초·중학교 때는 빈부격차를 거의 모르던 아들이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연구단지 쪽 아이들과의 환경 차이를 심하게 느끼면서 방황하는 날들이 많다. 아들은 물론 나도 너무 힘들게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있다”며 “차라리 연구단지 애들 없이 본토유성 아이들로만 채워진 학교를 다녔으면 싶은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한편 구청에서는 본토유성 발전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지만 유성 본토박이들은 그것조차 그림의 떡이라 생각한다.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에 주상복합을 짓는다는데 본토유성 사람들 중 거기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걸요. 또 버스터미널 근처에서 장사하던 사람이 주상복합 상가를 분양받아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여력이 있었으면 벌써 오래전에 이 동네 떴겠지요.”
‘첨단과학과 관광의 도시’ 대전 유성구의 두 얼굴이다.
첫댓글 제발..유성 시외버스터미널은 옮기면 안될까요..??? 유성갈때마다 2차선도로에서 시외버스 다닐라면 10분도 더 넘게 걸림.본토유성 정말 시골틱한데..조금 나와보면 완전 다른세계온것 같아서 깜놀 -ㅅ-
저희 외가가 본토유성인데요. 거기 진짜 10년 넘도록 건물, 도로 모 하나 제대로 변하는 게 없드라구요. 다 이유가 있었네..
저도 대덕고 가기 싫어서 만년고 썼다는..제동생도 여자애들한테 내신땜에 치일까봐 유성고 가고ㅋㅋㅋ그치만 연구원 자녀들중에 공부 그다지 못하는 애들도 많아요. 기사에 나온 연구원 부인들은 말하는게 좀 재수없네요.ㅎㅎㅎ 아, 근데 저기 자운대는 왜 빠졌나요? 자운대도 유성구예요... 유성구는 여러가지 모습이 공존하는 곳이라 좋다고 생각했는데 본토유성 분들은 이런 애로사항이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