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 태종•이방원^제26편
🎎 명나라는 욱일승천, 한편으로
고려는 한동안 시달리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방원은 우울했다.
아직도 북경은 640리가 남았다. 향제가 있는 곳은 복경이 아니라 금릉이었다. 일행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청룡하를 건너고 풍륜성을 통과하니 눈에익은 집들이 나타났다.
고려보다는 중국속의 고려촌이었다. 난리통에 불집혀온 고려의 유민들이 촌락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우리네 풍수 그대로 흰옷에 벼농사 짓고 쌀밥 해먹으며 살고 있었다.
본국의 사신들이 반갑다고 떡을
만들어 내왔는데 한입 베어 먹으면서 방원은 목이 메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같은 민족을 만난
다는 것이 너무나 반가웠고, 그들로
부터 우리의 음식을 대접받는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또한 이들이 머나먼 타국땅에서 조국을 그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이, 바로 자신을 포함한 위정자들 때문이라고 생각되
었을 때문이라고 방원은 심히 부끄러 웠다.
하정자 일행은 고려의 유민들이 향수를 달래며 모여 살고 있는 고려촌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오랫동안 해어졌던 친구들 만난 것과 같은 따듯한 정이 담긴 환대였다.
방원은 청국장 밥 먹어본 것이 언제
였나 싶었다. 잃어버린 고향을 오랫만에 찾아온 것과 같은 정겨운
대접을 받고 하룻밤 푹쉰 다음 발길
을 재촉했다.
하정사 일행은 연교보와 파리보를 지나 드디어 북경에 입성했다.
압록강에서 2030리, 39일 만이었다.
하지만 북경은 황제가 있는 수도가 아니었다. 황제는 그보다 남쪽 금릉에 있었다. 명 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이 여왕이 칭하고 다스리는
북방의 큰 거울에 불과했다.
대륙의 정복자 원나라를 북방으로
밀어내고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주원장은 26명의 아들이 있었다. 광활한 대륙을 석권한 주원장은 주요 거점을 아들들에게
할양하여 통치하도록 했다.
그 넷째 아들 주체에게 왕으로 봉해
준 곳이 오늘 날 북경이며 그 당시에
는 북평부라 불리었다. 훗날 조카 혜체를 폐하고 왕위에 오른 주체는
영락제가 되었다.
몽고족에게 짓눌렸던 설움을 털어버리고 한족의 웅비를 준비하며
생동감 있게 발전하고 있는 부평은 인상적인 도시였으나 방원은 지체할 수 없었다. 아직도 잘 길이 바빴다. 북평에서 심양가는 것과 비슷한 1400 여리를 더 가야 금릉에 닿는다. 명분이 하정사이니 만큼 새해가 되기 전 까지 금릉에 도착해야 했다. 사진 일행은 발길을 재촉하여 남행길에 올랐다.
한편, 이색을 정사로 한 하정사일행이 산해관을 동과하던 11월 초순. 개경에서는 이색의 밀명에 따라 또하나의 사신이 출발했다. 강준백을 정사로 하고 이방우물 부사로 삼은 주청사일행이었다. 이방우는 이성계의 맏 아들이다. 군부의 실력자 이성계를 견제하기 위하여 구 아들이 명나라 사신에 차출된 것이었다.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명 태조 주원장 으로 하여금 "고려 국왕은 친조하라" 는 명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나이 어린 창왕이 주원장의 눈도장을 받아야만 군부세력으로부터 고려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생각한 이색의 전략이었다.
의주에서 입록강을 건넌 주청사 일행은 요동에 도착했다. 도총관에게 횡제를 배알하러 가는 사신임을 동보하고 곧바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정사보다 먼저 금릉에 도착하기 위해서였다. 멀리 우회하는 육로 심양을 피하여 지름길을 태한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해로였다. 주청사 일행은 대련에서 뱃길을 이용하여 발해만을 따라 남행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직항로를 이용하여 서해를 건너지 않고 발해만으로 돌아간 이유의 첫째는 요동에서 사신 입국을 통보하는 것이요, 둘째는 바다에 대한 공포감이었다. 바다 끝으로 나가면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상존한 시대였으므로, 조그만 개성으로 대해를 횡단하는 것은 곧 그들에게 죽음의 길로 인식되었다.
당시 사신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뱃길을 이용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위험한 뱃길에서 불의의 사고라도 당하면 황제에게 바치는 표문과 동물이 훼손되는 것을 불경으로 간주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보다 표문을 더 중하게 여겼다. 대련에서 조그만 배에 몸을 실은 일행은 발해 연안을 따라 남향으로 계속했다. 강소성어귀에서 장갑을
거슬러 올라가 남경에 도착해 황제를 알현했다. 하정사 일행이 금릉에 도착하기 전에 황제를 알현하라는 인생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황제를 알현하고 떠난 직후 하정사 일행이 금릉에 도착했다.
황제가 있는 금릉에 두발을 딛고 서있다는 것이 방원은 꿈만 같았다.
시장과의 신분을 떠난 일개 자연인으로서 방원은 가슴이 뛰는 흥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사통팔달로 뚫린 도로는 수레 30여대가 한꺼번에 통과할 수 있으리만큼 늘었으며 길은 돌을 깔아 포장되어 있었다. 집들은 금색과 적색으로 화려하게 치장하였으며 길가에 늘어선 점방에는 갖가지 물건들이 그득 그득 쌓여 있었다. 한쪽이 6조에 걸쳐
도읍지로 선택했던 고도(古都)임을 말해주듯이 고색창연했다.
동쪽에 있는 종산과 서쪽 구릉 완남에 안겨있는 금릉은 일국의 수도로서 손색이 없었다.
방원은 삼국지를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무릎을 쳤다.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호걸 손권이 오나라를 세울 때 도읍지로 왜 금릉을 선택했는지 그 탁월한 혜안에 탄복했다. 그 뒤를 이어 동진. 송나라, 제나라, 양나라, 진나라, 남단등 새로운 왕조를 열어나간 중국의 군주들이 대륙천지에 하고많은 땅들을 놔두고 금릉에 도읍지를 정한 이유에 대하여 공감이 갔다. 한마디로 금릉은 천하의 명당이었다. 태어난 지 불과 20년밖에 되지 않은 명나라지만 참으로 좋은 곳에 도읍지를 정했다는 생각을 방원은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좋은 터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명나라는 욱일승천하겠지만, 한편으로 고려는 한동안 시달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방원은 우울했다. 동쪽에 우뚝 솟아있는 정상을 중심으로 높이 60여척(20m) 성벽이 1백여라 (33.67km)에 달라는 금릉성은 웅장했다. 대종정에는 몇 개월 전에 완성한 높이 14척(4백27cm), 구경 7.5척(2백29cm)에 무게가 자그마치 3만8천 근(23t)이나 되는 거대한 종이 매달려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높이 100척(30m)에 이르는 도로에 큰 북이 매달려 있었는데, 선내 어디에서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히 대국다운 풍모였다.
태종•이방원^다음 제27편~
첫댓글 그 시대에 기록을 남기니 이렇게 읽다보면 그 시대를 상상하게 되네요~
금릉성도 웅장할거 같네요.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비가오네요
비 피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