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2021년 4월 29일(목)
젊은 개혁군주 정조의 발자취를 따른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신 융릉의 건립은 정조의 오랜 꿈이었으나 왕이 된 후에도 숱한 반대 속에서 장장 13년을 심사숙고했다
마침내 습하고 초라했던 묘를 당대의 최고명당으로 이름난 수원부 화산으로 옮기고 보란 듯이 화려하게 꾸민 아버지의 능으로 향하는 참배의 길이며 애절한 사부곡이 담긴 그 길을 걷는다
수원과 화성의 경계인 배양교에서
제6길 - 화성효행길은 시작된다
배양교를 뒤로 하고
황구지천 둑방길을 따라 걷는다
황구지천
황구지천이라는 이름은 '큰 고지가 있는 강'이라는 뜻이며, '뻗친 내'라는 뜻의 우리말 '느러곶이내'가 '놀곶이내'로 되면서 항곶포라고 표기하였다가 '항'이 황으로 변한 것이며 '구지'는 '고지·곶이(곶)'를 가리킨다
안성천의 지류이며, 유역면적 259.66㎢², 총연장 30.4km의 하천으로 경기도 의왕시 부곡동 일대에 서 발원하여 군포시, 다시 의왕시로 흘러가서 왕송호수(왕송저수지)를 지나 수원시, 화성시, 오산시와 평택시를 거쳐 안성천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정확하게는 발원지부터 호수까지는 다른 이름이며, 왕송호수 수문 하류가 황구지천이다)
표지판 따라
배양1리 마을회관을 지나면
백천장에 관한 안내판이 있고
♤ 백천장
고려시대 문과에 급제한 후,한림학사(翰林學士)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원나라에 유학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우승상(右承相),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등을 역임했다
원나라의 순제에게 나이가 많아 고국에 돌아갈 것을 청하여 귀국한 후 수성백(隨城伯)에 봉해졌고 그 후 수원에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충선왕이 애도하는 마음에 예관(禮官)을 보내 제사를 치르게 하고, 시호를 문익(文益)이라 하였다
(원 간섭기라는 시대적 배경 아래 원나라로 가서 그 문재(文才)를 날렸던 것으로 보인다)
인근에 백천장 묘가 있다
백천장 묘 (경기도 화성시 기안길 65, 기안동 140-1)
고려시대 문신이었던 백천장 선생의 묘로 1985년 9월 20일 경기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정조 때 사도세자의 능을 이 근처로 옮기면서 세자의 능에서 10리 이내의 산소는 모두 이장하게 했으나, 그의 묘소는 조정에서 그대로 보존하였다
최근 새롭게 단장하여 고려 후기 무덤 양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 순조 13년(1813)에 세운 묘비와 그 즈음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장명등과 문인석이 있다
수원성감리교회 수양관이었던 곳이
어느새 (주) 수지로드텍으로 바뀌었고
(하얀 교회건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
화산터널과
화산 1지하차도를 지나
용주사에 도착했다
용주사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 송산동 188)
854년(신라 문성왕 16)에 염거화상(도의국사에 이어 가지산문 제2대 조사)에 의해 갈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고려 광종 때는 혜거국사가 머물며 국가의 축원도량 으로 삼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지만 갈양사는 병자호란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
<오층석탑 - 2009년 3월 10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2호로 지정되었다>
갈양사가 다시 중창하게 된 것은 조선 제22대 정조 때다
정조는 즉위 13년을 맞던 해 전농동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수원화성과 행궁을 만드는 대대적인 역사를 벌인다
<상량문 -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아버지 묘와 화성의 건설과정을 보기 위해 수시로 이곳까지 거둥하게 되자 아예 시흥으로 질러가는 새로운 길을 만들기도 하고 안양의 만안교라는 돌다리도 새로 만들어 놓게 된다
<천보루 - 1983년 9월 19일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다>
이때 정조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 보일스님은 정조 에게 부모은중경의 내용을 설해주었다고 한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 - 2012년 2월 22일 보물 제1754호로 지정되었다>
정조는 보일스님이 들려준 부모은중경의 내용에 깊은 감명을 받아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고 그 주변에 폐사된 갈양사터에 절을 새로 중창하여 용주사라 이름 붙여서 사도세자 묘의 능침사찰로 삼았다
<대웅전 후불탱화 -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용주사는 이렇듯 정조대왕의 효성이 깃든 효심의 본찰이자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80여 사찰을 거느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로 오랜 역사와 문화재 그리고 수행의 전통을 간직한 사찰이다
<동종 - 1964년 3월 30일 국보 제120호로 지정 되었다>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전적 일괄 - 1991년 9월 30일 보물 제1095호로 지정되었다>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는 까닭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護聖殿)을 건립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헌경왕후 정조와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1년에 6번의 재齋를 모셔 왔지만, 1907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로 재가 중단되었다)
♤ 용주사와 승무
조지훈의 시 '승무(僧舞)'는 용주사에서 비롯되었다
1939년 서울 혜화전문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조지훈은 용주사에서 큰 제(祭)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용주사를 찾아 제를 지내는 과정에서 승무를 보고 시로 정리한 것이다
♤ 일주문 사천왕상
♤ 효행박물관
♤ 비석
???
주차장 해설사의 집 옆에 있는 수탬프함에서 6길 유일한 스탬프를 찍고
잠시 삼남길에서 벗어나 인근에 있는 융건릉 으로 간다(시간 관계로 버스 타고 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