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 . 1 입춘이 지난 1935년 2월 문지방에 종아리를 얹고 시샘하는 두 손윗시누이 감시 속에 잉태되어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돌목재* 42번지 사벌국왕沙伐國王*의 34세손 선곡仙谷공*의 5세손 지구의 한 매듭으로 그해 11월 태어났다 탯줄을 잘라 말린 다음 이쁜 오색주머니에 담아 고이 간직해 두셨던 어머니 허나 어머니의 귀한 선물을 끝내 간직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나의 우매함이여
*돌목재 : 선유동仙遊洞 *사벌국왕沙伐國王 : 상주尙州박씨의 시조. 신라 54대 경명왕의 다섯째 아드님으로 경명왕 2년 견훤에게 지금의 상주 일대인 사벌주가 고립되자 사벌국이라 칭하고 11년간 통치하다가 견훤에게 패망하였음. *선곡仙谷공 : 조선 철종 때 사헌부 지평으로 통훈대 부로 추증 朴建中, 仙谷은 號임. `喪禮備要補` 12권 외 5권의 禮學書가 있으며 선유동 입구에 禮學碑가 있음.
DNA . 2 삼대 독자 열세 살 신랑과 열일곱 살 신부가 혼인을 했다 어린 신랑은 능청맞게 신부의 쪽두리를 벗기고 불을 끄자 신방지기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고 헤여졌단다 열일곱 되던 해 고향 뜨면 피눈물 쏟으며 돌아온다고 호통치는 종손 형님의 손을 뿌리치고 청주에서 자리매김을 하였다 아버지의 세상 공부는 시작되었다 매일 재판정에서 변론과 구형과 선고의 과정을 배우고 장사법도 익히고... 해마다 내 생일무렵이면 쌀구루마가 집으로 밀려들었다 나는 힘차게 살아오신 아버지를 타이거라 불렀다 DNA . 3 추운 겨울날 국민학교 2학년쯤 되었을까 일 년에 한 번 일본 전승기념일 제비뽑기에서 운좋게 운동화를 받아들고 집에 오면 어김없이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에게 빼앗겼다 억세게 재수 옴붙은 나는 발목까지 찬 눈 속에 게다짝 끌고 통학하며 뒷굼치에 뾰죽구두처럼 달라붙는 눈을 돌과 담벼락에 부딪쳐 떨구곤 추워서 울었다 서러워서 울었다 검정고무신이라도 얻어 신은 건 순전히 해방 덕분 어머니는 발보다 훨씬 큰 고무신을 사주셨다 고무신 코끝 안쪽은 보공補空*으로 찾고 발끝이 아파도 신이 나서 눈밭을 기분 짭잘하게 뛰어다녔다 강아지처럼 짖으면서
*보공補空 : 빈 곳을 메우어 채움
DNA . 4 청주 제2중학교* 운동장에 심어놓은 고구마 서리를 하는 동무들과 함께 있다가 서리꾼들은 모두 도망가고 옆에서 구경한 나만 붙들려 교무실로 끌려갔다 지팡이를 짚고 구부러진 허릴 가누며 달려온 할머니가 긴 칼을 찬 일본인 선생한테 가슴을 맞고 넘어지던 그때의 비참함이 아직도 남았다 그 사건 이후 나는 고구마도둑이란 오명을 꽤나 오래 매달고 다녔다
*제2중학교 : 주로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던 학교로 지금의 청주 기계공고 자리.
DNA . 5 1945년 8월 15일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11시깨나 되었을까 우리는 부끄쓰낑*을 둘러쓰고 방공호에 쭈그리고 앉아 날아가는 B29 폭격기를 올려다보며 굉장히 예쁘다고 느꼈다 그리고 나서 12시 교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히로히도천황의 방송을 들으며 우는 선생님들을 수군대며 기웃거렸다 집에 돌아와 "엄마, 우리나라 해방되었대" 옆집에 살던 고등계 형사가 담너머로 넘겨보자 어머니는 내 입을 틀어막으며 방안으로 끌고 들어가셨다 그날 오후 거리에는 태극기가 물결쳤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군이 진주해 들어오는 날 우리는 연도에서 올랜사인의 애국가를 목이 터져라 불러제쳤다
*보꾸쓰낑 : 일본말로 폭탄 폭풍을 막는 머리보호대 마치 남바위와 비슷하게 생겼음
DNA . 6 그날은 떨림의 날이었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흰 타이즈에 레이스 달린 짧은 치마를 입은 여학생 의 청아한 목소리에 실려 하얀 쪽배는 잘도 떠갔다 계수나무 아래 토끼의 방아소리에 맞추어 스스로 잘 도 흘렀다 열한 살 서년은 취했다 오금이 저리도록 취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직도 노래부르던 소녀의 솜털 보송보송한 앳된 하아얀 살갗이 눈에 남았다 DNA . 7 중학교에 갓 입학하여 수업을 받던 중 좌익쪽* 형들이 유리창을 열어제치고 붉은 비라를 뿌리고 달아났다. 그 뒤를 우익쪽* 형들이 쫓아가 난투극이 벌어지고 몽둥이가 튀고 피가 튀고 학교 담벼락엔 신탁통치 반대와 지지가 붉게 물들고 좌익쪽 선생님들과 형들은 경찰에게 묶여 끌려가고 우리는 그런 와중에서 공부했다 우리 또래들은 이년 후 찾아올 비극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엄청난 살육의 전쟁을
*좌익쪽 : 學生同盟으로 줄여서 學同이라 불렀음 *우익쪽 : 學生聯盟으로 줄여서 學聯이라 불렀음
DNA . 8 대포소리가 요란하다 전쟁이 터졌다 중 3년짜리 나는 흰 교복을 입고 선유동 고향으로 장대비를 맞으며 백삼십 리를 걸었다 며칠후 따발총과 따꿍총을 멘 인민군을 만났다 작은 형이 끌려갔다는 말을 듣고 청주로 오다가 구방리九芳里 전투 사이에 끼어 박격포 굉음에 귀를 막고 옆구리를 스쳐 날아가는 총알의 굉음에 놀라며 엉금엉금 기다싶이 전쟁터를 빠져나왔다 그날부터 청주에서 선유동 선유동에서 청주 왕복 이백육십 리 행군이 시작되었다 아니면 청주에서 용화龍華* 사흘이 멀다고 고개길을 넘어 그 먼 길을 헤매고 다녔다 내 옆에는 대부분 일곱살 터울인 누이가 있었다 그러나 누이는 갔다 나보다도 먼저 떠났다
*작은 형 : 머리 좋고 인물 좋은 秀才形의 둘째형 어쩌다 붉은 물이 들어 전향도 않고 숨어 지내다가 6.25직후 체포되어 행방불명되었음. *구방리 전투 : 충북 청원군 미원면에 있는 동네로 국군 김석원 17연대와 인민군이 격전을 치뤘던 곳. 용화龍華 : 속리산 뒷쪽에 있는 마을로 행정구역은 경북 상주군 화북면 중벌리
DNA . 9 1950년 한겨울에 또 피난을 가야 했다 핫바지를 입고 트럭 짐받이에 얹혀 용화의 절*로 숨어 들어갔다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 콩볶는 총소리에 놀라 젊은 이들 몇이 법당 부처님 엉덩이 밑 포장 안에 숨어 있다가 빨지산 병정*에게 잡혀갔다 그날부터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일원이 되어 총알 없는 장총을 메고 산을 넘어다니다가 용케도 줄행랑쳐서 부모님과 얼싸안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토벌꾼에게 밀려갈 때까지 천장 고무다락*에 며칠간을 숨어 지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학도병 청주 파견대의 정문에서 교복에 장총을 메고 나는 보초를 서고 있었다.
*용화의 길 : 이모할머니께서 보살로 계시던 절로 신흥사. *빨지산 병정 : 패잔병 집단인 유격대로 南部軍. *고무다락 : 안방 천장 위에 비밀히 만들어 놓은 작은 다락 창고
DNA . 10 ---스탈린* 드디어 죽다 1953년 3월 5일자 나의 일기장 한 쪽이다 금새라도 전쟁이 끝날 것 같은 기쁨에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통일은 세월처럼 남았고 전쟁에 지친 우방들은 휴전협상에 매달렸다 고 3짜리 우리들은 매일 머리에 흰 디를 두르고 휴전반대 데모에 열을 올렸다 그것이 관제 데무라도 좋았다. 어서 통일이 이루어져야지 아암 이루어져야지 어서 전쟁이 끝나야지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전쟁은 진행 중이다
*스탈린 : 1953년 3월 5일 사망한 구소련의 수상
DNA . 11 한달분 쌀 서말과 이부자리를 둘러메고 남산 밑 후암동 적산敵産 가옥 2층 친구의 자취집인 다다미방에 빌붙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양동이 물이 족히 오센치 두께로 얼어도 얼음으로 끓인 도레미국* 은 참말로 진미 쌀과 전차값이 떨어지면 매혈소에 가서 줄을 서다가 AB라 퇴짜 맞고 어쩌다 재수 좋게 걸리면 한 열흘쯤은 그럭저럭 살았지만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을 것 같아 좋기만 했다
* 도레미국 : 콩나물국
DNA . 12 미스 황이라면 그저 좋았다 수수한 옷차림 매니큐어를 칠하지 않은 손톱 입술연지를 바르지 않는 순수가 좋았다 한창 유행이던 타이트 스커트 대신 플레어나 주름치마를 입고 굽낮은 콤비구두를 즐겨 신는 그녀가 좋았다 장충단공원 개울가에서 200자 원고지 100여매가 넘는 첫 편지를 받아들고 바알개지던 그녀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며칠 후 동화음악궁전* 에서 내게 건네준 붉은 다알리아꽃은 웃음으로 하늘을 날았다 그녀와의 산책로는 삼선동에서 혜화동 대학로를 거쳐 동대문까지 오는 프라터너스 길 그렇게 3년이나 사귀면서도 손목 한 번 잡지 않고 입술 한 번 겹치지 않다가 평생의 인연을 맺었다 어언 46년이 지났다.
* 동화음악궁전 :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본점
DNA . 13 아내가 화관花冠을 쓴 지 1년만에 우리에게는 아들이 생겼다 누구의 탓인지 모르지만 형 내외는 무남무녀無男無女 핏덩이를 옆에 두고 아이를 달라며 두 분은 몇날 며칠을 울었다 집인의 평안을 위해 고집스러운 나를 설득한 장모님과 아내 덕에 핏덩이 아이는 아예 그분들의 핏줄로 등록되었다 아내는 울지 않았지만 안다 나는 안다 문드러진 그 속을 텔레비젼에 나오는 `별난 남자와 별난 여자`를 보며 기웅이 엄마가 내 아내라고 숙맥 같은 내 아내라고 단지 허공에 눈망울을 굴릴 뿐이다 DNA . 14 테니스를 치다가 공이 눈을 때려 두 눈은 사물을 두 개로 보이게 만들었다 ---1미터 간격으로 보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한 쪽 눈이 반쯤 감긴 것 자체가 영 불편했다 그로부터 6년 동안이나 병원을 들락거리며 머리를 갈라볼 생각까지 가지며... 아내는 지금도 그때 짜낸 한약 찌꺼기가 한 가마는 넘을 거라고 한다 그렇다 한 가마가 아니라 두 가마니는 족히 넘을 것이다 그녀의 손 마디마다 약물이 스며 검푸를 것이리라 아마도 그녀의 심장 속에는 남편의 건강과 약물로 가득 채워졌을 것이다 DNA . 15 고희를 넘었다 진저리나는 전쟁도 삶의 영욕도 모두 깊게 패인 얼굴의 주름살에 묻혔다 이젠 가라 하늘 높이 무산소無酸素든 땅 속 깊숙이 연옥이든 바다속 심해 암흑이든 어디든 가거라 아무래도 좋다 펄펄 끓는 용암에 묻혀 뼈다귀가 다 녹아 형체가 없어진다 해도 가거라 꺼져 버려라 나의 육신이여 넋이여
첫댓글 열다섯 편의 연작시를 모두 올리시다니요. 팔이 아파 혼나셨겠어요. 고맙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 잔잔한 감동을 느끼면서 읽고 또 읽고,, 읽고 또 읽고...... ^^* 이 게시판 하나 만드는데 한 5시간 쯤 걸렸습니다... ㅎㅎㅎ
선생님 시를 읽고 나니 가슴에... 다시 한번 시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건강하시구요.
이 시집에 편편들이 다 감동적이지만 DNA 연작이야말로 압도적인 울림으로 가슴에 오래 남는다.
DNA를 읽으며 저도 제 뿌리에 대해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그리고 다시 한 번 또 느낍니다. 어느 한 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시간은 없다고...
피의 대물림 역사가 실감납니다.그대로 우리 모두의 지난날이지요.발보다 큰 신, 몸 보다 큰 옷 . 옷이 맞을때 쯤엔 옷은 낡아지고 , 아픈 추억이지만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 때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린 DNA 자체가 달라 다른 일을 하다가도 미련이 남아 다시 끼를 부리며 공연을 하며살수 밖에 없다고.. 시인 박진섭 선생님은 DNA 부터 다릅니다. 아름다운 마음과 따뜻한 호흡이 내게 느껴집니다.
첫댓글 열다섯 편의 연작시를 모두 올리시다니요. 팔이 아파 혼나셨겠어요. 고맙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 잔잔한 감동을 느끼면서 읽고 또 읽고,, 읽고 또 읽고...... ^^* 이 게시판 하나 만드는데 한 5시간 쯤 걸렸습니다... ㅎㅎㅎ
선생님 시를 읽고 나니 가슴에... 다시 한번 시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건강하시구요.
이 시집에 편편들이 다 감동적이지만 DNA 연작이야말로 압도적인 울림으로 가슴에 오래 남는다.
DNA를 읽으며 저도 제 뿌리에 대해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그리고 다시 한 번 또 느낍니다. 어느 한 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시간은 없다고...
피의 대물림 역사가 실감납니다.그대로 우리 모두의 지난날이지요.발보다 큰 신, 몸 보다 큰 옷 . 옷이 맞을때 쯤엔 옷은 낡아지고 , 아픈 추억이지만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 때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린 DNA 자체가 달라 다른 일을 하다가도 미련이 남아 다시 끼를 부리며 공연을 하며살수 밖에 없다고.. 시인 박진섭 선생님은 DNA 부터 다릅니다. 아름다운 마음과 따뜻한 호흡이 내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