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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종교적인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 꺼지지 않는 불꽃,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위하여
-- "성인(聖人)"의 시대를 살면서, “내가 안 바뀌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Society is not changed by example. Society may reform itself, it may bring about certain changes through political or economic revolution, but only the religious man can create a fundamental transformation in society; and the religious man is not he who practices starvation as an example to impress society. The religious man is not concerned with society at all, because society is based on acquisitiveness, envy, greed, ambition, fear. That is, mere reformation of the pattern of society only alters the surface, it brings about a more respectable form of ambition. Whereas, the truly religious man is totally outside of society, because he is not ambitious, he has no envy, he is not following any ritual, dogma or belief; and it is only such a man who can fundamentally transform society, not the reformer."
“사회라는 것은 무슨 본보기로 해서 변하는 게 아닙니다. 사회는 자체로 개혁이 일어날 수도 있겠고,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혁명을 통해서 어떤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겠지만, 오로지 종교적인 사람에 의해서만 사회의 근원적인 변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사람이란 사회의 관심을 깨우기 위해서, 남들 보라고 굶어가며 수행하거나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사람은 오히려 사회 소속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데, 그것은 사회라는 것이 욕심과 시기와 탐욕과 야망과 두려움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순하게 사회 모습을 개선한다는 것은 그 표면에 덧칠만 하는 것이라서, 야망을 좀 더 빛 좋게 치장할 뿐이거든요. 반면에 진짜로 종교적인 사람은 완전히 사회를 벗어나 있어요. 야망을 지니지도 않고, 시기하지도 않으며, 그 어떤 예배나 교리나 신앙을 따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개혁가가 아니라, 꼭 그런 사람만이 사회를 근원적으로 변혁시킬 수 있는 거지요.”
Krishnamurti 12월 3일 오전 1:20 · Italy Sicilia 팔레르모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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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9] 1,700만 명이 모여도 안 되는 일
어차피 저런 일은,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겠지요. “개인”으로서 ‘사회를 완전히 벗어나 있는 일’이라시니까는..
제 스스로 ‘잘 빚어지지 못한 질그릇 하나’쯤이라도 된다면 다행이다, 그런 생각입니다만. 끝내 ‘파지’로 그냥 깨뜨려질 운명이라면, 그 또한 어쩔 수도 없는 처지고요.
저렇게 무려 “종교적 인간”을 말씀하시는데, 아주 넘치게도 거기다가 자꾸 ‘토’를 달고 있군요. 도대체 제 분수에 맞는 형편도 아니지만, 그나마 이 세상에 와서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이거 하나뿐이라서 말씀입니다. 모쪼록 ‘저래서는 안 되겠더라’ 하는 흔적이라도 하나 남거나 말거나.. 누구 하나 시킨 일도 아니고, ‘나 하나야 어찌 돼도 좋으니’ 기어이 ‘안 해도, 그뿐’이지만.
그래도 어떻게, “사회를 근원적으로 변혁시킬 수 있다”는 말씀에 끌려서 한평생 이러고 있는 모양입니다. 게다가 아시아 동쪽 끄트머리 어디 흰 옷 입고 사시는 한 분께서, 이 보잘 것 하나 없는 인간을 몸소 찾아봐주셨기에.. 그분 풍모도 예사롭지가 않기도 했고 말씀입니다. 게다가 그분으로부터 꼭, 그 뭔가를 이어받은 듯한 느낌에, 그게 뭔지 모르면서도 나름대로 반드시 ‘이어가야 할 그 무엇인 것’ 같기도 하고 말씀이지요.
하기사, 그게 기어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라서, 나 스스로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달린 소용이겠지만, 생김새도 그렇고 사는 꼴을 봐도 미처 거기까지는 도대체 장담도 못 하겠고 자신도 없어서 말씀입니다. 오늘에 이르러 ‘그저, 이게 다란 말인가?’ 그런 ‘심사’일 뿐입니다. 그것도 거기에 매달려 있어서는 더 안 되는 일이겠지요? 이런저런 ‘심경’에서도 떠날 일이니까요.
안 그러면 어찌 ‘홀가분’하겠습니까. 홀가분하기로야 그저 그 어디에도 ‘마음’ 둘 일이 아니지요. 반드시 해야 할 게 있다면, 저절로 그리 되어야 할 터입니다. 그것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거기까지는 언제나 아득하기만 할 뿐이고요.
제가 제법 ‘강나루 건너서’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쯤 될 때에야, 누구 한 사람에게 친구나마 될 수 있겠지요.
[이게 이렇게도 중복이 되네요. 겨우 3일 뒤에 쓴 건데요. 한데 뭉친다는 의미로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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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2] ‘야망도 없이 시기하지도 않고’
“인생, 뭐, 별 거 있나?” 하는 말에, 속으로 ‘발끈’하는 꼴이 보이니, ‘반응이 아니라 행동이어야지..’ ‘발끈하는 꼴’도 여전히 반작용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도대체 ‘내가 저런 역할에 엄두라도 내 볼 수 있는 꼴인가?’ 그 생각이 먼저 드는 주제에도, 참.. 그야말로 ‘한없이’ 주절거리고 있군요. ‘이렇게라도 해보자..’ 하는 핑계로만 살다가, 역시 ‘괜히 왔다 가네!’ 하고 가야 할 팔자인지. 떠들어도 너무 떠들어놔서리, 칠판에 이름도 적히고!
아무리 봐도, 저 ‘종교적’인 향기는 아예 피우지도 못하고 있고요. 그저 세월아 네월아 그러고 말 ‘운명’인지.. ‘팔자’ 고칠 게 아니라, ‘나’를 고칠 일이다, 스스로 그렇게 중얼거려본들 딱 거기까지일 뿐입니다. ‘고칠’ 게 아니라, 아예 ‘사라져야’ 하겠거늘.. 오히려 진짜 ‘아무것도 안 한다’면, 뭔가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그 또한 ‘말’뿐인가 합니다.
“멍에”라는 노래였던가.. ‘나, 얼마를 더 살아야..’ 인간 꼴이 좀 되려는지.. 그저 이대로라면, 구구팔팔 아니라, 언제 어떻게 죽든지 별로 아까울 것도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면서도 말로만, “이 세상, 나 하나야 뭐 어찌 돼도 좋다.”는. 전혀 ‘아닌 것 같은’ 소리나 이런저런 궁시렁거림에 더할 뿐이고요. 무슨 수가 나도 ‘좀, 제대로 된 인간’들 쑥쑥 태어나는 꼴을 보고 죽어야 할 텐데 말씀입니다. 막상, 이런저런 거 전부 다 고작 ‘욕망’일 뿐이겠지요? 스스로 그만큼 더 괴로울 터이고요.
어디서 들은 말로, ‘멍때리기’ 해본다고 시골 어디로 옮겨 살아봐도, 그 자체가 이미 뭔가 ‘의도’적인 것이라면.. 모종의 ‘답’을 구하는 처사였을 터. 별로 ‘멍한’ 모습도 안 보입니다. 여기도 역시 사람 사는 데라서, 이런저런 걸리적거리는 일상이 거저 가실 날이 있으려나 하는 심정일 뿐이고요. 이런 거 저런 거 다 “고요”에는 택도 없는 하루하루에, 도대체 사는 게 이게 “관계”라고 할 수가 없으니. 이러고 보내는 나날에, 한 해 두 해 더 늘어가봤자겠습니다. “고요”라는 게 ‘참, 예삿일이 아니구나..’ 그런 깨달음 바라기도 과분하고요.
아마도 “고요”라는 건 몸에 배여서, 마치 기름틀에서 기름 배어나오듯이.. 아니, 그냥 그런 기운이 풍겨져야 하는 거겠지요? 그러니 어찌 감히 엄두도 못 내볼 처지군요. 모름지기 ‘딴 짓’이나 안 할 수 있으면, 그런 걸로나 ‘만족’해야 할 듯. 여전히 “인식의 영역” 안쪽이고요. 뭔가로 ‘만족’해야 하는 차원이 아니니까요. 가도 가도 그대로 ‘말’이나, ‘글’이나 써대는 꼴뿐이라서 말씀입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라!’ 그것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누구였던가, 명색이 ‘통령’으로 뽑아놓고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임기나 채워라!” 그러더니만. 골라 앉히던 조선 왕도 아니고..
도대체 뭐 하나 ‘나은 모습’은커녕, 그냥 좀 ‘다른 모습’도 안 보이니.. 본문 말씀의 ‘사회를 벗어나’ 있는 모습은 전혀 못 됩니다. ‘생각’이라는 것이 끝내 제 자신, ‘나’의 범주를 못 벗어나는 거라면서도, 단 하나 다를 거 없이 ‘쏙 빼닮은 꼴’이군요. 이쯤 되면, ‘초야에 묻힌다’는 말도 사치겠지요? 누구한테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스스로 분명하니까요. 삼천리 금수강산, 진짜로 그런 어느 분, 그립기만 합니다. 가까이 계신다 해도, 그분께 짐이나 될 뿐이겠습니다만. 옥체 잘 보전하고라도 계시기를.. 그러고 보니, ‘그립다’는 말도 이미 사치군요.
말로만 떠벌이는 “무위”에.. 하기사 그럴수록 더 예민하게 알아채야겠습니다만. 다른 이들과 똑같이 오로지 그게 하기 싫어서.. ‘이쯤이면 글 한 줄 완성인가?’ 그런 생각뿐이니 말씀입니다. 진짜 “멍때리기”가 뭔지,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어련하겠습니까. 막, 뭐라 그러시겠지만, “멍” 안 때리고 정신들 바짝 차린 결과, ‘아기 다리 고기 다리던’ ‘대망’의 “대멸종”이라는 거 아닙니까. 도대체 무슨 정신들 어떻게 차리고 살았다고.. 늦었다 해도, 지금이라도 진짜로 정신들 좀 차려야겠거늘.
조래도 안 되며 고래도 안 되고, 오로지 “종교적인 사람”에 의해서만 세상이 변할 수 있는 거라시는데, 대한민국 어떤 종교 어느 누구로 해서 변한 사회가, 오늘날 이 꼴이란 말일까요? 그러니 스스로 썩소에 ‘일종의 서어비스업 종사자’라고나 자조하고 마는 거지요. 남 얘기할 주제도 아닙니다만. 어쨌거나 인류사 수백만 년만에, “진리”의 “원본 말씀”을 지니게 된 인간 세상 아닙니까!
결국, 똑같은 말로 연결될 뿐이네요. ‘니나 잘 하세요!’ 어찌 틀린 말이겠습니까! 이래저래 한결같이 아득할 뿐입니다. 궁시렁거리지나 말든지. 그것도 안 되니.. 이게 어찌 “멍때리기”일 거라고. 그 말이 본래 저런 뜻은 아니라고 해도, 좀 더 높이고 더 깊이 있게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위기감으로 행한다면, 인생 만년에나따나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겠건만. 마냥 ‘끄적거리기’ 차원에 머물고만 있겠다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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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7] 세상을 바꾼다는 것
누구니 누구니 해도 실제로, 저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겠습니까? 우리 사회에 정작 필요한 것은 ‘개혁가’가 아니라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하시니 말씀입니다.
그래서 “자기로부터의 혁명”이겠지요. 정작, 바로 ‘자유인’이 필요하다는 말씀 아닙니까! “대자유인” 말씀이지요. 참으로 뜨거웠던 ‘촛불시민’이라도 그는 잘해야 ‘개혁가’ 쪽이지 ‘자유인’은 아니지요? 사실상 ‘개혁가’보다는 “자유인”이 필요하다는 말씀인데요. 그건 참된 “지성”이 필요한 거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꺼지지 않는 촛불’ 운운하면서 ‘자유인’과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설득하려는 게 아니라 사실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런 진리가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열흘 삶은 호박에 이빨이나마 들어가겠습니까? 무턱대고 ‘종교 적폐’ 얘기했다가는, 대한민국에서 진작에 페북 그룹들과 페이지로부터 쫓겨났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조직 종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앞잽이 소위 적폐라는 정치 세력 때문에 더 그렇겠지요? 그들이 끄나풀로 앞에 나서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래저래 당하고 있지만, 그런 두려움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설령 페북 무너지는 날이 온다고 해도, 그때는 또 예전처럼 ‘다음’ 사이트 ‘카페’ 하나 붙들고 가겠지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분명히 가기는 갈 테니까요. 한때는 ‘반달’이라는 동요 흥얼거리면서 살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가기도 잘도 간다..’ 일제 강점기도 아니건만..
저렇게 “자유인”이라는, 그래도 세상에 ‘등불’이라 할, 그 “인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 사회 어디 한 귀퉁이에 눌러앉아서 아등바등하고 있겠습니까? 겨우 그 사회의 ‘톱니바퀴’ 하나가 되고 말겠어요? 더더욱 그 톱니바퀴의 이빨 하나에 만족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끝내 훌훌 다 털어버리고 일어서겠지요. “홀로서기[獨立]” 말씀입니다. 분명히 그래도 ‘손 하나 잡아주는 사람’은 있습니다. 정말 ‘인간이 되어보자’ 하는 젊은이라면 이 점,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 손을 잡아주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지는 모르겠으나, 틀림없이 그런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난다니까요. 아예 “삶이 도와준다.”고도 하셨습니다. 또한, 그거야 어떻든 세상살이 ‘나 하나야 뭐가 어찌 되든지 상관 안 한다.’ 하고 살겠지요.
더구나 여러분들 시대가 되면, 대한민국에서의 크리슈나무르티 흐름, “진리의 흐름”도 강화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마음들이 모이게 되겠지요. 이 말이 미덥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게 어떤 일인데 그냥 흐지부지 된단 말이겠습니까! 막는다고 막아지는 흐름이 아닙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흐름을 어찌 막는단 말입니까! 항상 하는 말이지만, 고타마 싯타르타 이후, 2500 년 만에 완전히 새로 시작되는 흐름이라니까요! 더구나 대한민국은 ‘세상에 유례가 없는 마음’들이 저다지 엄청나게 모이곤 하는 나라 아닙니까! ‘촛불’이 꼭 이번 박근혜 국정농단 때문에 켜졌던 것만은 아니지요? 현대사에서는 그 시발로 ‘동학혁명’을 꼽지 않습니까? ‘국뿅’이 아니라, 이 나라는 확실히 뭔가 그런 흐름이 있는 “나라”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왜 오늘날 사회 꼬라지는 이렇게밖에 안 되었을까요? 참,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희은이 노래 부르자는 것도 아니고,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참 요상괴상한 일 아닙니까? 조선조는 망하는 운세여서 그랬다 치더라도, 또한 분단이야 외세에 의한 해방이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그 이후에나마 뭔가 사이좋게, 저런 ‘등불,’ ‘불꽃’의 흐름을 나눠가질 수는 없었을까요? 그마저 못했다고 치더라도, 이제부터라도 뭐 좀 그럴듯한 마음들이 오고 갈 수는 없겠습니까?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뭐라 하실지는 몰라도,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듯이 ‘생각의 자유’도 있지 않겠습니까? 젊은이들을 왜 여기 이꼴에서 더 나아가 훨씬 더 자유롭고 창조적인 생각도 못 해보게 가르친다는 말이겠습니까? 교육이라면서도 그런 ‘개념’이 없어서 그렇지요.
‘길을 찾는’ 젊은이들을 반드시 그렇게 키워야 할 것입니다. 사회가 제시하는 ‘가치’들로서는 결코 인간의 문제들이 해결 안 됩니다. 그런 가치를 가지고 수천 년 수만 년 넘게 살아왔지만 인간의 문제가 풀렸던 적이 없어요. ‘사회’라는 것은 꼭 ‘정체해서 썩어가는 게’ 그 속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속에서의 가치들로 온몸 가득 치장해봤자, ‘인생은 고해’다 하는 데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똑같이 ‘고해’로 살 거면서 거기서 뭔가 ‘뜯어고치자’ 해봤자, 역시 ‘고해’에서 벗어날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고해’ 아닌 얘기를 해보자는 겁니다. 그게 “행복”이라는 말씀 아닙니까! 이런들 저런들 전부 다 ‘거름 지고 남 따라 장에나 댕기는 짓’이고, 이렇게 저렇게 다 살아봤자 꼭 ‘그 나물에 그 밥’ 꼴이라면, 뭔가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젊은 사람이라면 말이지요. 각자가 진짜로 행복할 도리를 구해야지요.
물론 이게 무슨 ‘들불’처럼 일어날 일도 아니고, ‘촛불’처럼 수많은 민초들이 모여들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유형의 결과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해도, 무형의 역할은 반드시 하고야 마는 일이겠지요? 그것은 수치로 따질 수도 없는 “행동”입니다. “삶”이고 “행복”이지요. “성스러운 그 어떤 흐름”의 존재가치는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세상에 참으로 필요한 ‘마음,’ ‘가슴,’ ‘따뜻함,’ 그런 것들이 바탕에 깔려 있으려면, 우리가 살아온 이대로 꾸역꾸역 살아가서는 안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 비판의 대상이 어찌 한갓 박근혜, 김기춘, 우병우 또는 그 떨거지들.. 아니, 이완용 무리, 지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뿐이겠습니까? 가장 오랜 적폐는 따로 있지 않습니까?
비록 ‘헌법’에 보장돼 있다고는 해도, 그게 제대로 흘러가야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 아니라도, “자유”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아야지요. 아이들을 그렇게 키워야겠습니다. 진짜 “종교”적으로 말씀이지요. 안 그러면, 그저 “인생, 뭐, 별거 있냐?” 궁시렁거리며 괜히 왔다 갈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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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7] 세상을 바꾸는 종교, “세바종”
그러니 이게 무슨 ‘일벌백계’ 따위가 아니네요? 오로지 단 하나라도 더 ‘자유로운 사람’으로 키워갈 수 있을 뿐이겠습니다. 그것도 젊은이면 더 좋겠지요.
하여튼 우리 세대에서는 이왕 글러먹었으니, 다음 세대라도 누구 하나 그렇게 교육시키고자 해야 하련만, 그런 낌새조차도 감감무소식에 함흥차사입니다. 누가 ‘차사’를 보내기라도 했겠습니까마는.
그것도 이런 소리는 그저 징징거리는 넋두리로밖에 안 여길 것이고, ‘좀 조용히 하라!’고, ‘저기 어디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등이나 떠밀겠지요. 이런 거 저런 거 아니라도, 소위 전혀 ‘협조적’인 분위기가 아닙니다. 자기 입으로 자기네들을 ‘무지랭이들’이라고 부르니 소가지도 밴댕이겠지요. 간간이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평생을 혼자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만, 역시, 그런 건 “독립,” “홀로서기,” “종교적” 심성이 못 되는 거네요.
이거니 저거니 해도, 정말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자”면 ‘나’ 가지고는 안 됩니다. “무아,” 서구에는 아예 있지도 않은 개념. 어쨌거나 그 말 역시 어떤 무리가 독점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세상”이라는 이게 참으로 종교적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개인이 “자유인” 아니면 안 되는 것이군요. 그런데도 명색이 ‘종교’라면서 ‘나’ 문제도 해결을 못 한다면, 그게 어떻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말짱 도루묵에 도로아미타불, 그거겠지요.
그리고 정말 ‘나’를 문제 삼는 종교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아가서 “‘나’는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진리”를 바탕으로 말 그대로 “종교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구누구란 말이겠습니까? 최소한 마음이나마 “어느 겨울날 따뜻한 바위 곁에서 졸다 죽고 싶어야” 명함이나마 내밀 수 있는 처지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오로지 종교적인 사람을 제일로 필요로 하는 겁니다. 지금의 저런 사람들 말고 말이지요.
저렇게 룸살롱 술 퍼마시고 도박하고 성추행하고 해서야 어느 천년에 ‘중생 구제’하겠습니까? 게다가 교회세습·내절마련에 이르렀으니 이제 ‘바닥쳤다’고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바닥쳤으니 ‘매수타임’이겠군요? 개중에는 자신의 종단에 먹칠 안 한다고 하는 종사자들도 많겠지만, 사회 자체가 각종의 조직 ‘종교’들 때문에 더 “분열”되는 거라서 말이지요. 절간에 땅밟기, 불지르기 행태는 거의 애교 수준일까요? 그런 몰지각, 망나니짓들이 번듯하게 일어나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선도국’이라고.. 립서비스, 입에 발린 소리지요?
대한민국만 그런 게 아니라, 온 세상 전부가 다 소위 저 ‘종교’들 때문에 갈가리 찢어져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지 않아도 ‘온전’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 난장판에 말씀이지요. 그러니 “종교”가 제 역할하려면, 아니 세상이 그나마 좀 제대로 굴러가려면, 저 “종교”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서 문득 “도덕경”의 ‘소국과민’에, 저 ‘인디언 문화’가 생각나는 까닭은 또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개인으로서 “자유인” 안 되고는 풀릴 길 없는 이치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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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9] 세상을 바꾸는 사람, “세바사”
‘세바시’라는 강연 프로그램이 있지요? 거기 출강 의뢰를 했더니.. ‘15 분 만에 세상을 바꾸라 했다.’고.. 거절했다던가 기꺼이 출강했다던가, 그건 정확히 기억이 안 납니다만. 하여튼 ‘세바시’ 강연 가지고 어떻게, 얼마만큼 세상이 바뀌겠습니까?
‘그만큼이라도 바뀐다!’고 하시면, 글쎄요, 딱 ‘그만큼’이겠지요. 이런저런 ‘개혁’도 많지만, 어떻게 해서든 거기서 더 나아가보자 하는 게,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입니다. ‘세바시’에서는 다해봤자, 교육은 몰라도 기성 조직 종교에 대한 언급도 금기시 되고 있는 거 아닙니까?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걸까요? ‘다행’은 무슨..
조직 종교들은 굴러온 그대로 권력을 휘두르면서 꾸불텅꾸불텅 굴러가겠지요. 거기서 무슨 ‘루터’니 ‘종교개혁’이니 해봤자, ‘조직’을 벗어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알려진 대로 ‘조직’을 떠나는 “종교인”들도 계십니다. 그런 분 가운데 가장 기억나는 사람이, ‘어느 겨울날, 따뜻한 바위 아래서 졸다 죽고 싶다.’고 하셨다는 분입니다. 비로소 “개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 “개인”의 활동을 가리켜, “엔지아이[NGI]”라고 한다지요? “엔지오[NGO]” 말고 말씀입니다. 그런 엔지아이 가운데서도 진짜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세바사”는 좀 더 근원적인 인간상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비슷한 말’일까요?
“전쟁”마저 마다하지 않아온 소위 저 조직종교들로는 인생의 문제가 어찌 풀란다는 말이겠습니까. 끝내 저러한 참된 “종교인”들 아니면, 세상은 바뀌지 않을 거고요. 대한민국, 한반도, 만주땅, 홍산문화, 요하문명 그 너머까지, 그 속에 그런저런 사람들이 단 하나라도 더 많아져야지요.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온 세상 육대주에 걸쳐서 저 수많은 ‘개혁’들이 있어왔겠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 굴러왔지요? 여전히 꼭 그대로 굴러가고 있고요. 그러니 보다 근원적인 “삶”을 살아서 진짜로 “행복”한 사람들만이, ‘세상을 바꾸는 인간’에 해당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맨날 하는 소리지만, 진짜로 “행복”한 사람이 많아야 그게 행복한 세상이지요.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행복’은 “행복”이 아닌 겁니다. 실제로 전혀 행복하지 않고요.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 분’ ‘세바시’라는 강연 명칭에서 억지로 “세상을 바꾸는 종교”를 끌어냈고, 이어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을 꾸며냈습니다만, 어설프게 “세바종” “세바사” 이름이야 어떻게 부르던 간에, 그야말로 “자유인” 진짜배기 “인간”이라서 정말로 “행복한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이 그 말씀을 안 들어서 문제입니다만. 그러구러 다들 그냥 “인생은 고해다.”하고 허우적거리며 살다 갈 거 아니겠습니까? 한다고 해본다는 저 역시 거기서 빠질 수가 있겠습니까만, 어떻든 간에 “삶”을, 자신의 인생을 정말로 “행복”하게 가꾸어 가야지요. 그러나 이제나저제나 우리는 아이들마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왜 인생이 고해냐?” 등의 질문은 단 한마디 꺼내지도 못하게 들들 달달 득달 들볶아대는 거잖습니까?
며칠 전에 ‘수능’ 시험이 끝났습니다만, 우리 사회는 세대에 세대를 거치면서 아주 통째로 그 막강한 ‘시험’에 들고는 아예 옴짝달싹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런저런 거대한 ‘불만’들이 쌓이고 쌓여서 끝내 “폭발”할 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대학에서도 ‘교육’이라는 것이 “대학”은커녕 “소학”도 아닌, 제4차산업혁명 내지 인공지능 교육마저 제대로 담당할 교수가 없다고 합니다. 새삼스럽지만, ‘인문학’이 다 망했다는 소리 나온 지는 오래됐지요? 그런데도 여전히 허우적 헤매고만 있는 거 아닙니까? ‘첨단산업’에 대한 교육이야 해당 각 기업에서 떠맡을 수밖에 없다고 해도 말씀입니다. 그리고 한국외국어대학교뿐이겠습니까만, 그러한 ‘기업’이라는 측면에서라도, 해대는 꼴이 조만간 엄청나게 ‘부도’내고야 말 것 같지는 않으신지요? 등록금, 학생들이 모자라서라도 부도나게 생겼습니다. 어쨌거나 대학이라면서 그 얄팍한 소가지로 과연 무슨 ‘가치’를 그 얼마나 ‘부가’하고 있단 말일까요? “상아탑,” “지성의 전당..” 참 괜찮은 말이지요. 듣기에도 좋은 말입니다.
“사회 변혁”에 대한 말씀이신데, 우째 얘기가 좀 엇나간 것 같습니다. 모름지기 “혁명”을 일으키는 “개인”들이 “새로운 세상,” “참된 세상”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고, 역시 그 유일한 길이 바로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다음 세대라도 그렇게 키워야지요. 그렇지만 정작 “교육”에서는 거기에 관심도 없습니다. 종교 역시 스스로 ‘개혁’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지요? 하지만 ‘검찰’도 안 하려고 ‘이대로!!!’ 저다지 발버둥인데, 하물며 ‘종교’가 그 알량한 자정능력으로 개혁하겠습니까? 기껏해야 저런 지적을 경계·방어·은폐·엄폐·배척·무시·열외·제외·배제·매장하려고나 하겠지요. 그래도 이쯤에서 다시 기억나는 말씀, “시멘트를 뚫고 돋아나는 새싹을 본 적이 없나요(Have you ever seen the grass growing through cement)?” 그 말씀입니다. 이 길에는 그만한 “생명력”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저 문장이 참 안 잊혀집니다. 더 없이 좋은 ‘영어선생님’이기도 하신 거지요. 대담·강연하시는 거 보면, “회화선생님”이기도 합니다.
꼭 무슨 대학 수능 아니더라도, 인생살이 관혼상제를 위시해서 일상에서 마주치는 그 하나하나가 다 저 “불만의 불꽃”을 쌓아가게 하는 화두요 공안입니다. 인간들이 해대는 짓거리에 그 얼마나 많은 부조리 불합리 비리 불법 어거지 ‘엉터리’ 망나니 무지랭이 짓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까! 구태여 화두랍시고 ‘병 속의 병아리’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그 지점에서는 시스템이 먼저냐 사람이 먼저냐, 그런 거 따질 수도 없겠습니다. ‘고인물’에 비유들 하지만, 그 속성상 사회란 항상 이래저래 고여서 썩어가는 거 아닙니까? 제대로 보기만 본다면, 그런 것들 하나하나에 다들 ‘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을 터인데, 그런 “불만의 에너지”들을 채곡채곡 쌓아가기는커녕 그 귀한 “지성”을 전부 다 딴 데 엉뚱한 탈출구를 찾아 쏘다니면서 허비·낭비해버리고 마는 거거든요. 그게 우리가 말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진짜배기 “삶”은 온데간데없고 말씀이지요.
깨어 있는 진짜배기 “개인”이라고 할지, 바람직한 “종교인”이라고나 할지, 정말 “인간다운 인간”이라고나 할지.. 여튼 그런 사람들이 바로 위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지만, 실제로는 그런 인간들은 왜 이렇게도 안 보이는 걸까요? 그나마 세상이 좀 바르게 돌아가려면, 정작 저런 사람이 여기저기 더러 태어나곤 해야 말이지요. 참으로 아쉬운 일이지만, 설령 거의 기적같이 하나 태어날랑말랑 ‘조짐의 싹’이라도 보일라치면, 야간정숙보행 따위로 슬그머니 다가가서 지긋이 밟고 뭉개버리는 게 대한민국 사회입니다. 싹 하나 밟아 뭉개는 데 무슨 힘이 들겠습니까! 그 사회라는 게 ‘대학’이었을 경우에는 더 악랄했지요. 그마저 끝난 일도 아니고 여전한 진행형입니다. “대학”이라는 게 ‘종교’보다 더 썩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겠지요. ‘오늘날 대학이란 교육기관이 아니라 교수들이 동업하는 사업체일 뿐’이라는 소리도 오래된 거지요? 그나마 왕창 부도나게 생겼습니다. 그런 세상이니 더더욱 반드시 ‘변’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야말로 “혁명”을 일으켜야지요.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말씀입니다.
조직 종교들은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 IMF ‘이대로!!’ 유지해가면서 자신들 각자 ‘지꺼’ 챙기기나 일삼고 있지 않습니까? 보도 되는 ‘교회세습’이니 항간에 떠도는 ‘내절마련’이니.. 아주 갈 데까지 다 간 거 아니에요? 그래도 어찌 ‘중세 면죄부 판매’보다는 오늘날이 낫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마나 “오로지 종교적인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하시니.. 그러니까 역시 ‘조직’종교에는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되는군요. 현상과 완전히 부합하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대한민국에서는 더 구구절절이 맞아떨어지는 말씀 아닙니까? 저 말씀이 어찌 대한민국을 두고 하신 말씀이겠습니까마는.. 모름지기 모쪼록 부디, 아이들이나따나 꼭 저런 “인간” “개인” “자유인”으로 키울 수 있어야겠습니다. 구태여 그런 ‘학교’ 만들 궁리 필요 없이, “깨어 있는 선생님”이 먼저 있어야겠지요. 여기서 소위 “깨시민” “촛불시민”들이 생각나지만, 거기서도 한참 더 깊어져야 하는 일일 터입니다. ‘세상을 바꾼다는 것..’ 교육으로도 안 되고 종교로도 안 되니. 오로지 저 “개인”들만이 희망 아니겠습니까?
‘세상을 바꾼다’는 말씀에서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아집니다만.. 여기서의 “세상”이 어찌 꼭 대한민국에 국한된 영역일 수도 없지요? 우리더러 “선도국”이라고 불러줘서가 아니라, 마땅히 오늘날 요모냥요꼴의 지구촌 전체가 조금이나마 변해야겠고, 그 연장선에서 저 “홍익인간”을 들먹이기도 해보는 겁니다. 이어서 제세이화 경천애인 뭐 그런 말들도 여러 가지 따라 나올 수 있겠지요? “인내천” 또한 그 얼마나 고귀한 가치입니까! 그러나 실상으로서의 국제관계는 국내관계보다 역시 더 한층 폭력의 세계 아닌가 합니다. 국제 세계에서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나라라고 해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 할 수조차 없는 것 아닙니까. 거기서도 엄청 쓰라린 얘기가.. 미국이겠지요, 남는 밀가루 옥수수 등등.. 저 굶주리는 나라까지 보내는 운송비 때문에 그냥 태평양에 버린다고.. 그런 것들로는 바다 오염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무슨 “세계정부”라거나 그런 건 더 요원한 ‘관념’에 불과하겠지만, “개인”으로서 우리는 각자 할만큼 할 수 있을 뿐이겠지요. 그러나 그때도 역시 그 개인들은 됨됨이가 더 문제 아니겠습니까? 야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부부라도 둘이 똑같이 “그 나물에 그 밥” 꼴이라면, 거기서 뭐 하나 나아지는 게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째도 아이들을 보다 낫게 그렇게 키울 수밖에 없는 이치겠지요? “책”이나마 제대로 읽을 수 있게 해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만큼 번역을 제대로 해내야 하겠지요. 그 속에서도 다행한 일은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화된 덕에, ‘원서’를 바로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도 불행 중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읽기’를 제대로 해야 말이지요. ‘소개’도 못 해주게 하는데.. ‘정보’마저 최대한 차단시키고 있는 꼴인데 말씀입니다. 세상이야 망하든 말든, 사회야 무너지든 말든 그냥 ‘지꺼’나 챙기고 말겠다는 세력들이 저다지 이다지 방방 날뛰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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