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졸업하고나서 뜯지 않았던 것들 중에는 복합기가 있었습니다.
당장 프린트 할일도 없고, 설치하기도 귀찮기도 하여 그대로 깊숙히 쳐박아 뒀습죠.
그런디 요 근래 들어서 모의고사 시즌이 다가오니 컴퓨터 저장으로도 한계가 있어서,
직접 들고 보려고 프린트를 할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어머니께서 블로그 활동 한 번 해보시겠다고 스캔기능이 필요했던 것은 부가적이었지만요.
드디어, 근 6개월만에 복합기를 연결할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어디다 쳐박아 뒀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박스 사이를 열심히 찾고 또 찾아서, 찾기는 찼았습니다.
어머님께서 저기 박스 더미 속에 있지 않을까, 라고 하셨던 조언이 맞았습니다.
땀흘린 보람이 있군, 이라면서 연결해봤습니다.
...고장났습니다.
화가 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살려 보려고 AS를 맡겼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연락이 왔습니다. 4분이 넘는 대화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기 손승완 고객님 맞으십니까?
-거기는 어디요?
-아, 홍성의 공장입니다. 안심하세요. 부품문제로 고객님의 프린터를 급히 옮겼습니다.
-이보시오, 기술자양반. 며칠이 지나도 복합기 소식이 없으니 어떻게 된거요?
-아, 하필이면 영 좋지 않은 부분이 고장났어요.
-그건 무슨소리요?
-아, 오늘중에 디지털 프라자에 다시 가져다 놓으려 했는데,
잘 알아두세요. 선생님은 앞으로 프린터를 쓸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프린터가 영영 가버렸다는 말이오.
기종부터 부품까지 단종된 것이란 말입니다.
-뭐요? 이보시오, 이보시오, 기술자앙반!!
-오늘 내일 중에 삼성 AS센터 오셔서 찾아가세요.
전화를 통해서, 이사중에 프린터를 옮길 때에는 잉크를 껴 놓은 채로 옮기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옮길 때는 빼 놓았지만 무슨 상관입니까? 복합기님은 가셨는데.
소식을 들은 어머니께서는 이 기회에 하나 새로 장만하라 하셨습니다.
며칠동안 어머님께서는 설득하셨고, 우리집내에서는 전자기기 전문가인 동생도 새로 사는 것을 추천했습니다.
결국은 설득되어 새놈을 장만하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단지에서 눈여겨 보았던 복합기를 사기 위해 하이마트에 전화를 해보니,
할인 기간은 전화걸기 바로 전날까지였습니다. 지져스.
몇군데 알아보니, 전부 공통으로 할인 기간이 지났습니다. 이것들이 담합을 하다니!?
일이 이렇게 되자 '하나 장만해야지.' 정도였던 결의는 '질러주겠어!!'로 변질되었습니다.
삼성이 추석대목이라고 약간 가격을 깎아준다는 소식을 '동생'에게 듣고, 바로 가서 질렀습니다.
복합기, 그것도 레이져 프린터, 그것도 컬러로 질렀습니다. 돈 30만원 이상 깨진 것은 부수적으로.
차라도 끌고왔어야 했는데, 집에서 너무 당당히 걸어나와, 차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그 무거운 복합기를 집까지 들고 왔습니다. 같이 따라간 동생은 옆에서 응원해주었습니다. 갓뎀.
뭐 상관없었습니다. 새로 가족하나 들여놓았다는 기분이었으니 말입니다.
집에 떡하니 가져다 놓고, 우선은 연결부터 해볼까...
하고 밀봉 뜯고 프린트 꺼내고 설치 다하고 흐뭇해하고 있을 때,
동생의 한마디에 멘붕이 오고 말았습니다.
"형."
"왜."
"형 고장났다던 프린터, 여기 밖에 내놓은 복합기야?"
"음. 그런데, 왜?"
"...저거 내 프린터인디."
"..."
"..."
퍼뜩 정신이 들어서 옷장 안쪽을 뒤져보았습니다.
...있잖아?
혹시나 해서 연결해봤습니다.
...되잖아?
금전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거덜났습니다.
동생에게 사정을 듣고보니, 제 기종과 뒤번호 한자리인가만 다른 것으로, 외형은 거의 같은 것이었습니다.
좌절해있던 저에게 어머니께서는 위로의 말슴을 해주시면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놈 잘 쓰자고 다독여주셨습니다.
'저 멀쩡한 거 어쩌고?' 라고 하자, 동생이, 자기가 지금 복합기가 필요한데 마침 잘됬다라면서 자기가 가져가겠답니다.
아무튼 일은 어찌 되었던 물 흐르듯이 진행되어,
어머니께서는 새 복합기로 블로그에 올릴 작품 스캔 뜨셔서 기분이 좋으셨고,
동생은 고장난 복합기 대신해서 제 복합기 가져가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요? 저는 가진 비상금 거진 다 질러버리긴 했지만 어쨌던 프린터 쓸 수 있어서 다행이지 뭡니까.
...는 개불.
제가 프린터 설치하는 동안 둘이서 마주보면서 씨익 웃던거 모를 줄 알았나 봅니다...고시생을 호구로 만들다니...ㅠㅠ
첫댓글 뭐..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