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복합문화공간인 문화역서울284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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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서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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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서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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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서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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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서울역사
KTX 개통 20주년 기념 철도문화전
[Journey Beyond Plus]
문화역서울284 1층 로비에 전시 중인
[퓨처 디오라마]
[퓨처 디오라마]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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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등 대합실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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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등 대합실
3등 대합실에 있는
조형물 앞에서
이성수
3등 대합실에 있는
조형물
문화역서울284 1층 로비에 전시 중인
[퓨처 디오라마]
1&2등 대합실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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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등 대합실의 전시물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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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등 대합실의 전시물
부인 대합실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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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대합실의 작품
귀빈 수행자 대기실(귀빈 예비실)의
작품
귀빈 수행자 대기실(귀빈 예비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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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역장실의 작품
[풍경을 위한 시냅틱 무브먼트]
옛 역장실의 작품
[풍경을 위한 시냅틱 무브먼트]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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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빈실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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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빈실의 전시품
귀빈실
KTX 개통 20주년 기념 조형물
복원 전시실로 올라가는 계단
복원 전시실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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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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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전시실
대식당 그릴에서 전시 중인
KTX 개통 20주년 기념 철도굿즈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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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식당 그릴에서 전시 중인
KTX 개통 20주년 기념 사진전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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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식당 그릴에서 전시 중인
KTX 개통 20주년 기념 사진전
대식당 그릴에서 전시 중인
KTX 개통 20주년 기념 사진전
대식당 그릴에서 전시 중인
KTX 개통 20주년 기념 사진전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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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식당 그릴에서 전시 중인
KTX 개통 20주년 기념 사진전
숯과 열차의 연계성을 보여주는 작품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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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과 열차의 연계성을 보여주는 작품
구 회의실의 작품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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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회의실의 작품
문화역서울284의
카페와 기프트 판매점
2024년04월07일(일요일)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조계사&대한민국역사박물관&국립기상박물관&농업박물관&쌀박물관&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문화역서울284] 탐방기 탐방지 :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조계사&대한민국역사박물관&국립기상박물관&농업박물관&쌀박물관&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문화역서울284] 탐방코스 : [회현역 7번 출구~(0.5km)~한국은행 화폐박물관~(1.6km)~조계사~(0.3km)~대한민국역사박물관~(1.9km)~국립기상박물관~(0.9km)~농업박물관~(0.1km)~쌀박물관~(1.0km)~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0.7km)~문화역서울284~(0.1km)~서울역 경의중앙선 1번 출구] [7.1km] 탐방일 : 2024년04월07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중구 최저기온 8도C, 최고기온 23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4시간55분 소요) 12:42~13:12 연신내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충무로역으로 가서 4호선으로 환승하여 회현역으로 간 후 회현역 7번 출구로 나옴 [30분 소요] 13:12~13:18 서울 중구 회현동1가 192-1 번지에 있는 회현역 7번 출구에서 탐방 출발하여 서울 중구 남대문로 39 번지에 있는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이동 13:18~14:08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을 관람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종목 사적 제280호(1981년 9월 25일 지정) 면적 2,409m2 시대 일제강점기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39 (남대문로3가) [한국은행 구본관] 좌표 북위 37° 33′ 43″ 동경 126° 58′ 50″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한국은행 화폐박물관(韓國銀行 貨幣博物館)은 2001년에 설립되었다. 박물관이 위치한 한국은행 구본관은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사적 제280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박물관은 크게 전시 공간과 보조 공간으로 나뉘어 있는데, 전시 공간은 우리의 중앙은행, 화폐의 일생, 돈과 나라경제, 화폐광장, 상평통보갤러리, 금과 화폐실, 화폐기기실, 기증화폐실, 모형금고, 세계의 화폐실, 체험학습실, 기획전시실, 한은갤러리로 구성되어 있다. 보조 공간으로는 자료안내실, 뮤지엄샵, 카페 등을 두어 이용자들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건물 연혁 한국은행 옛 본관건물의 준공 당시 명칭은 조선은행(朝鮮銀行) 본점이다. 일제는 본격적인 대한(對韓) 침략정책에 따라 1905년부터 정부 국고금의 취급, 화폐 정리, 은행권의 발행 등을 담당할 일본 제일은행(第一銀行)의 한국 총지점인 경성 지점(京城支店)을 설립하였다. 그런데 1909년 10월 한국은행을 설립하면서 한국은행은 제일은행 경성지점의 업무를 인계 받아 중앙은행으로서 기능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으로 한국은행은 1911년 조선은행으로 개칭되었고, 조선총독부 직속 금융기관으로서의 구실을 담당하였다. 본 건물은 1907년 11월 제일은행 경성지점으로 착공되어 1909년 7월 11일 정초(定礎)되었고, 1912년 1월 조선은행 본점으로 준공되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2,625평 규모로서 설계자는 다쓰노 깅고(辰野金吾), 시공사는 시미즈 구미(淸水組), 감독관은 나카무라 요시헤이였다. 이 건물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석조로 마감하였다. 의장적으로 중요하게 처리된 지붕은 철골ㆍ철판을 장식적으로 조립했다. 평면은 ‘井(정)’자형 장방형이다. 그 중앙에는 약 160평(529m2)의 객장(客場)이 있으며, 1,6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한다. 그 지하에는 당시 조선 최대의 대형 금고를 설치하였다. 건물 전면부는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이다. 중앙에는 현관부를, 그 좌우에 주 벽체부와 페디먼트부를 두고, 원형의 탑을 덧붙였다. 현관은 투스칸 오더(Tuscan order)의 화강석 원주로 받쳐진 캐노피 형태이고, 승하차가 가능하다. 중앙 현관의 상부 지붕에는 반원 아치 지붕의 솟은 천창을 두어 중심성을 강조하였다. 주 벽체부에서 1층 벽의 창호는 화강석 수평 띠를 돌출시키고, 2층 창문은 중앙에 홍예석을 둔 세그멘탈 아치로 하고, 창 아래는 난간석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페디먼트부는 앞으로 약간 돌출되었으며, 벽부는 주 벽체부와 같으나 지붕에 페디먼트를 장식하였다. 여기에 원형의 탑을 붙였다. 원탑은 좌우측 끝과 측면 모서리 3곳에 설치됐는데, 그 지붕에는 돔을 얹어 놓았다. 전체적으로는 유럽 성관풍(城館風)의 르네상스양식이다. 이 건물은 광복 직후 화재로 내부 일부가 소실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폭격 등으로 내부가 거의 파괴되었으나 1956년 5월부터 1958년 10월까지 복구되었다. 1981년 9월 25일에는 국가 중요문화재(사적 제280호)로 지정되었다. 1987년 12월 이 건물 후면에 한국은행 신관(현 본관)이 준공되면서, 1989년부터 이 건물은 원형 복원되어 2001년부터 화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화폐박물관 조성을 위한 설계 및 시공 과정에서 실내 공간의 높은 천장, 육중한 기둥 등 건축미를 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정보 주소 : 서울 중구 남대문로 39(남대문로3가 110) 한국은행 건물 개장 시간 : 화요일~일요일 10:00∼17:00 입장료 : 무료 휴일 : 월요일 / 12월 29일-1월 2일 / 설 연휴와 추석 연휴 ] 14:08~14:32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55 번지에 있는 조계사로 이동 14:32~14:37 조계사를 사진촬영 [대한불교 총본산 조계사(大韓佛敎 總本山 曺溪寺)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수송동 44) 설립 : 1395년 (태조 4년) 주지 : 원명 등급 : 직할교구의 교구본사 목차 1. 개요 2. 역사 3. 시설 3.1. 대웅전 3.1.1. 조계사 대웅전과 보천교 십일전 3.2. 극락전 3.3. 관음전 3.4. 불교중앙박물관 3.5. 불교대학 3.6. 구 조계사종 3.7. 기타 4. 천연기념물 백송 5. 사건사고 6. 기타 1. 개요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수송동)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의 교구본사이자 총본산(總本山)이다. 봉은사와 함께 서울 시내 시주가 많이 들어오는 대표적인 사찰이기도 하다. 사찰 규모는 소박한 편이나 대한민국 불교 최대 종단의 본사(本寺)답게 경복궁 근정전에 맞먹는다는 거대한 대웅전이 있고, 입구에는 '大韓佛敎總本山曹溪寺(대한불교 총본산 조계사)' 현판이 걸린 거대한 일주문이 정문 역할을 한다. 경내 대중전 옆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백송(Pinus bungeana)이 자란다. 500년 이상 묵은 노송이지만, 대도시 한복판 조계사에 있는 관계로 생장환경이 열악해 전반적인 상태는 좋지 않다. 2. 역사 삼각산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조선 태조 이성계 재위 4년(1395)에 창건되었다고 말하나, 실질적 창건은 구한말 순종 융희 4년(1910)에 되었다. 현 조계사는 그 역사가 비교적 짧으나 얽힌 사정은 매우 복잡하다. 대한제국 시절, 한국불교에는 구심점이 될 종단이 없어 계속 들어오는 일본불교 세력에 밀리기만 하였다. 이런 상황에 개탄하여 만해 한용운 등 민족적 불교인사들이 새 종단을 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1902년, 흥인지문 밖 지금의 창신동 창신초등학교 자리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고, 1908년에 각 도의 사찰 대표 65인이 원종(圓宗) 종무원을 설치한다. 원종의 주 목표 중에는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우는 것도 있었다. 조선왕조 내내 유교 성리학을 숭상하고 불교는 억제하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멀쩡한 절도 산자락으로 추방당하거나 방화로 사라지는 판에, 한양도성 사대문 안에 절이 생기는 건 조선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게다가 1895년까지는 승려는 천민급 신분으로, 도성 출입마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이 때문에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운다는 것은 억압받던 한국 불교계에 있어 의미가 컸으며, 또한 시대가 달라졌음을 뜻했다. 이에 3개월 동안 백미 1천 석, 6천여 환을 모아 중부 박동(薄洞)에 있던 동녕위궁(東寧尉宮)을 3천 환에 사서 허물고 1910년, 그 터에 각황사(覺皇寺)를 세웠다. 이 자리는 현 조계사의 바로 옆이며, 이 각황사가 조계사의 전신이다. 각황(覺皇)이라는 이름은 '깨달음의 황제'라는 뜻으로 부처의 별명이기도 하지만, 드디어 깨달은(승려 도성 입성 금지를 해제하고 도성 내 절 설립을 허가한) 대한제국 황실에 감사한다는 뜻도 있었다. 그런데 원종의 창종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 각황사를 설립하고 원종 종무원의 설립인가를 한성부에 신청했으나 서류 처리 도중에 나라가 쫑났다. 원종 종무원의 대표격이었던 이회광(李晦光)은 잘못된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그는 일본불교의 힘을 빌어 원종을 인정받고자 했다. 일본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를 원종 고문으로 추대하고, '연합맹약'이란 것을 맺어 연합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조동종 밑에 원종이 들어가는 꼴이었다. 이회광은 인품이 훌륭하다는 글도 전해지는 승려였지만,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보지 못하고 친일행적을 저질렀다. 이 소식을 듣고 전라도 백양사의 박한영(朴漢永), 화엄사의 진진응(陳震應), 북쪽에서는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이회광의 경솔한 행위를 규탄하였다. 이들은 경상도와 전라도에 있는 각 사찰에 통문을 돌려 1911년에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열어 임제종(臨濟宗)을 설립했고, 북의 원종과 남의 임제종이 양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원종의 신청을 기각도 승인도 하지 않고 싸움을 지켜보다가, 1911년에 사찰령 등을 내려 한국불교를 조선총독부가 직접 관할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더 이상 일본불교를 앞세워 조선침략을 꾀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한국불교마저 총독부가 직접 통제하려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이듬해부터 해인사를 시작으로 30본사를 선정, 사법을 인가함으로써 조선총독부 직할체제인 30본말사제를 시행했고 곧 임제종과 원종이란 명칭을 못 쓰게 했으며 임제종은 저항 끝에 강제 해산되었다. 이회광과 원종은 곧 '조선불교선교양종각본산주지회의원'으로 바꾸고 존속하려고 했으나, 조선총독부는 이 쓸모없어진 원종의 기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원도, 승인도 안 해줬고 결국 1912년에 원종은 사라진다. 원종의 친일적 주지승들은 '삼십본산연합사무소'로 들어가 종명이 '조선불교선교양종'이 된 한국불교 30본사 전체를 총괄하게 된다. 한편 강제해산당한 한용운 등 임제종 승려들은 '임제종중앙포교당'을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찰령에 의거한 30본산제도에 대응하는 한국불교계의 새로운 대표기관을 세우고자 '조선불교회'와 '불교동맹회' 등을 조직하고자 했으나, 조선총독부가 방해하여 실패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불교에 대한 적극적인 발전과 포교를 지원해주겠다고 교묘하게 회유하였으니, 과거 조선시대 600년 동안 천민 취급을 받던 승려들은 이에 감격하여 많은 수가 친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 역시 30본산제 체제의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용운 등 지각 있는 승려들은 서서히 민족적인 사상을 가다듬으면서 3.1 운동, 만당(조선불교청년총동맹) 등을 주도하며 일제에 저항을 계속 이어나갔다. 1930년 무렵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세운 사찰 박문사(博文寺)를 건축하고 모든 불교의 총본산으로 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었다. 그러자 한국불교 중 뜻있는 인사들은 이를 저지하려고 했고, 1935년에 한용운과 해인사 주지 회광, 마곡사 주지 만공 등이 주축이 되어 '31본산주지회의(30본산 + 화엄사)'를 열고 총본산 설립과 '조선불교선교양종종무원'이라는 대표기관의 구성, 각황사 교당 개축을 결의하였다. 이에 1937년에 보천교 십일전 건물을 매입하여 각황사 옆자리에 새로 절을 건축하고, 1938년에 완성하자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太古寺)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하여 태고사라고 개칭하였다. 한국 조계종의 창시자였던 태고 보우국사를 모시던 태고사를 이어받겠다는 의지이자 한국 조계종의 본산에 어울리는 이름을 칭하려는 의도였다. 각황사는 1938년 현재의 조계사가 완공된 후 건축비용 마련 차원에서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을 이전하였다. 이후 일본식 본당 등이 철거되어 사라진 듯하다. 1941년 조선의 사찰 및 승려를 통할하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이 인가를 얻어 조선불교 조계종이 발족되었다. 광복 이후인 1954년에는 대처승과 같은 왜색불교 정화운동의 과정 중 안국동의 선원에 있던 비구승들이 태고사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서로 갈등을 빚어 원래의 태고사란 이름과 비구승들의 조계사라는 이름이 같이 붙게 되었는데, 결국 1954년 이러한 감정은 '비구승 vs 대처승 분규 사건'으로 폭발하였고, 이승만 등이 지원함에 힘입어 비구승들의 승리로 끝났다. 비구승의 주도로 1962년 통합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이 세워지자 태고사 역시 조계사로 개칭되어 지금까지 유지된다. 비록 과정에 문제가 있었지만 전통적인 비구승들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대처승들을 몰아내었음은 불교계가 전통적인 모습으로 부분회귀하는 데 성공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조계종은 내부분규 사태나 지나치게 순수불교를 지양하면서, 정작 전통불교에서 멀어지거나 무리한 불사 등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조계종과 조계사 그리고 한국 근대 불교의 역사는 친일 행적과 민족적 행적이 뒤섞인 모습이다. 전체를 친일이냐 민족이냐로 규정하기 전에 상당히 불행했던 역사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역사를 창피하게 느끼는지 많은 글에서 조계사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간략하게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조계종/태고종이나 조계종/태고종 주도로 펴낸 불교 관련서적과 일반 학자들이 쓴 불교사 책를 비교해 보면 여러 부분에서 차이가 있지만, 특히 이 부분에서 차이가 크다. 일반 학자들이 쓴 책이 중도적인 입장에서 서술한다면, 각 종파들이 낸 책은 유혈충돌 부분은 최소화하면서 자기 종파의 정통성 강조에 특히 집중한다. 3. 시설 3.1. 대웅전 대웅전에 불상 3좌를 봉안하여 이를 삼존불이라고 부른다. 좌로부터 각각 아미타여래(아미타불), 석가여래(석가모니불), 약사여래. 이 세 불상은 법당 내에 모신 불상 중에선 매우 큰 편에 속한다. 실제로 보면 크기에 압도된다. 불단 오른쪽 아래에는 미니사이즈 석가모니불이 있는데 이는 대웅전 중수 당시 영암 도갑사에서 모셔온 불상이다 조계사 대웅전은 1.6 m 높이 돌 기단 위에 아름드리 나무 기둥 34개를 세웠으며, 정면 7칸, 측면 4칸, 길이는 정면 30 m에 측면 17 m이다. 원래 십일전보다는 대웅전이 약간 작고, 부분적으로 다르다고 하지만 정확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사진상으로는 거의 비슷한 느낌이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근정전에 맞먹을 정도의 규모지만 근정전보다는 좀 작다. 일단 근정전의 기단은 이성석축기단(二成石築基壇)이기에 조계사 대웅전의 석축은 가볍게 뛰어넘는다. 다만 대웅전의 기단이 단층석축기단이긴 해도 기단 높이는 1.6m에 이른다. 그리고 아마 이 점이 오해의 원인이겠지만, 근정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조계사 대웅전보다 칸 수는 적지만 오히려 면적은 정면 30 m에 측면 21 m로 더 넓다. 1칸의 길이가 근정전이 훨씬 커서 일어난 오해일 것이다. 높이 또한 단층인 조계사 대웅전보다 중층팔작(重層八作) 지붕인 근정전이 당연히 더 높다. 다만, 사실 근정전도 경회루에는 데꿀멍 한다. 그러나 확실히 이 건물은 상당히 건방진데(…), 지붕 아래 삐죽삐죽 튀어나온 공포의 형식에서 그러한 면을 느낄 수 있다. 조계사 대웅전의 공포는 외부 5출목, 내부 7출목으로 근정전보다 외부, 내부 모두 2출목씩 많다. 부분적인 형식면에서는 조선의 정궁보다 위에 더 화려한 것이다. 그래서 이 건물을 보고 있으면 유난히 높고 화려해 보인다. 실제로 창덕궁 대조전 중건을 맡았던 정5품 도편수 최원식이 건축을 지휘한 건물이다. 아래 문단에서 나오듯 원래 증산종교 계열의 보천교 본당으로 쓰던 건물이었기에, 기본적으로 문짝 등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과 문양들이 불교와는 맞지 않다. 그래서인지 조계사에서는 2004년 대웅전을 해체, 보수공사를 하면서 내부구조를 개수하여 불교에 맞지 않는 도교적인 색채를 없애는 등 전통불교 양식으로 단장하였다. 그런데 역사적인 관점으로만 사물을 보는 문화재/역사 관련 학계에서는 이것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컸다. 참고로 현 대웅전 현판은 화엄사 대웅전 편액의 탁본을 바탕으로 복제한 것인데, 해당 편액의 글씨는 선조와 인빈 김씨의 8남인 의창군 이광(1589~1645)이 썼다고 한다. 3.1.1. 조계사 대웅전과 보천교 십일전 보천교 진정원의 십일전(十一殿). 본래 이 대웅전은 일제강점기 증산 계통의 종교인 보천교의 본당인 십일전이었다. 보천교의 교주인 차경석(188?~1936)은 전라북도 정읍에 진정원을 세웠고, 십일전을 진정원의 본당이었다. 그런데 일제가 보천교를 해체하면서 시설들을 압수해 헐값으로 매각하였고, 이때 진정원의 십일전 목자재들을 불교계에서 매입하여 1937년 11월 26일에 지금의 대웅전을 짓게 되었다. 조계사는 대웅전을 완성한 이듬해에 단청을 칠하고 화엄사 대웅전 편액의 탁본을 떠서 현판을 만들고, 전라남도 영암군 도갑사에서 본존불상을 가져와서 대웅전에 안치하였다. 3.2. 극락전 대웅전 옆의 건물 1층에 위치한 작은 법당. 시끌벅적한 대웅전과 달리, 이곳은 조용히 염불이나 참선하기 좋은 분위기이다. 특히나 조계사 신도들의 49재나 천도재 등을 이곳에서 하는지라 더더욱. 3.3. 관음전 2015년 현재 조계사 앞쪽에 새로이 '관음전'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건물은 그냥 현대식 사각형 시멘트 건물이다. 법당에는 관음좌상이 안치되었다. 드나드는 사람도 많고 법회도 많이 열려 분위기가 시끌벅적한 대웅전과 달리, 이 곳은 그야말로 고요한 좌선실 분위기 그 자체다. 사실상 24시간 개방인 대웅전과 달리, 17:00경이면 문을 닫으므로 좌선이나 참배를 하려면 그 전에 가야 한다. 3.4. 불교중앙박물관 조계사 안에는 불교중앙박물관이 있는데, 여느 절의 박물관과는 수준이 달라서 나름대로 소장품의 질이나 전시의 질이 꽤 좋은 편이다. 한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눈여겨 볼 만하다. 소장품 목록에 나오듯 대한민국의 보물을 10여점이나 보유 중이다. 3.5. 불교대학 정식 4년제 단과대학이 아니라, 불교에 대해 심층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신도와 승려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체 교육기관이다. 신도들에게 불교교리 및 문화강좌가 진행되는 곳. 일종의 불교교양대학이다. 불교대학 2년 4학기, 불교대학원 2년 4학기를 운영한다. 3.6. 구 조계사종 과거에 조계사에 걸렸었던 범종으로 광복 이후 국보에서 해제되면서 위작이냐 진품이냐를 놓고 논쟁이 뜨거웠지만 현대의 조사 결과 신라시대 범종이 맞다는 설이 대세. 그러나 국보 재지정 논란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이다. 현재는 경기도 파주시 보광사에 소장 중이다. 3.7. 기타 2013년 11월 26일에 사천왕상을 일주문 앞에 새로 설치하였는데 아주 멋과 위엄이 넘친다. 철판을 잘라서 겹쳐 만들었단다. 위 사진에서 왼쪽은 증장천, 오른쪽은 지국천. 철로 만들어 무게는 개당 1톤에 달한다. 제대로 천왕문을 만들어 사천왕상을 설치할 공간이 없기 때문에 일주문 네 기둥 앞에 하나씩 세웠다. 기사 조계사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상에 따르면 직접적인 제작기간은 6개월에 못 미쳤으나 디자인을 구상하고 다듬는 문제로 3년이 소요되었다. 통상적으로 말하는 사천왕의 지물과 조계사 일주문에 설치된 사천왕상의 지물이 서로 다른데, 조계사 사천왕상은 조선에서 17세기부터 나타나는 사례를 따랐다. 비파를 들면 보통은 지국천왕이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다문천왕이다. 이를 모르면 지물만 보고 사천왕의 이름을 착각하기 쉽다. 조계사 주지 도문 스님이 조계사에 사천왕상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차에, 금속공예가 이근세를 만나 작품을 주문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일주문 밖에서 일주문을 바라보아 왼쪽부터 증장천, 광목천, 다문천, 지국천 순으로 일주문 기둥 앞에 일렬로 세웠다. 그러나 나중에 마치 천왕문을 통과할 때처럼 (사천왕이 통로의 중심을 바라보도록) 일주문 안쪽 양 옆으로 2개씩 세웠다. 사실 대웅전은 크지만 기타 건물이나 부지가 좁아서 기본적인 사찰 가람 구조도 갖추지 못한 느낌도 있다. 차차 정비를 해서 제대로 된 사찰의 모습을 갖춘다고 하는데 2016년이 넘어도 아직 멀었다는 느낌. 저 웅장한 대웅전을 빼면, 사찰 건물다운 건물은 대웅전 뒷쪽에 있는 범종루와 극락전밖에 없다. 조계종의 본산이라는 이름에 비해서는 초라함이 사실. 사실 절의 위치가 서울 도심 한복판이라서 확장이 굉장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근처 호텔 부지를 매입해 확장하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여러 가지로 잡음이 많았다. 조계사 길 건너편에는 '템플스테이'라는 건물이 있다. 여기에는 불교 서적을 파는 서점, 불교용품을 파는 가게, 템플 스테이 등 불교 관련 프로그램을 취급하는 곳 등이 있으며, 2층과 5층에는 사찰음식을 파는 발우공양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사찰 요리 전문가로 유명한 비구니 대안 스님이 총책임자로 있는 식당인데, 대부분의 식재료는 승려들이 직접 기르거나 만든 것을 사용한다. 2층은 뷔페식 메뉴와 일품요리 및 도시락, 5층은 좀더 비싼 코스요리를 파는데, 모두 채식이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채식이나 사찰음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볼 만하다. 2층은 그렇지 않지만, 5층은 며칠 전까지 예약 필수. 2층 식당 '발우공양 콩'은 적자 누적으로 인해 2015년에 폐업했다가 같은 해 '삼소'라는 식당으로 재개업했다. 이 곳 역시 사찰음식 전문점으로 점심에는 뷔페, 저녁에는 단품메뉴를 판매힜는데, 얼마 못 가 다시 폐업하여 현재는 사찰음식 교육관이 들어섰다. 조계사 바로 옆에 조선 말 우정총국 건물이 붙어있다.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곳이다. 한국 최초의 우체국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다. 조계사를 가면 잊지 말고 들리자. 지금은 우정 박물관으로 쓰인다. 조계사는 선종으로 분류되는데, 굳이 연원을 따지자면 중국의 소림사와도 닿는다. 조계사의 직할 말사 중에 한자도 똑같은 소림사가 있다. 종로구 홍지동 상명대학교 입구 부근에 있으며, 태조 5년 암자 규모로 창건되어 나중에 절규모로 중건 승격되었고 조계종이 자리잡은 이후에 흡수된 절이므로 본사인 조계사보다 오히려 연원이 깊은 절이다. 4. 천연기념물 백송 천연기념물 지정일 : 1962-12-07 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다. 조계사 백송의 나이는 약 5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4m, 뿌리부분 둘레 1.85m이다. 조계사 뜰 안 대웅전 옆 가까이 서 있고, 대웅전 쪽으로 뻗은 가지만 살아있다. 나무의 한쪽은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에 바로 접해있고, 다른 한쪽은 건물에 인접해 있어서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고 생육상태도 좋지 않은 편이다. 백송은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소나무이고,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5. 사건 사고 불교계라고 불화가 없을 리는 없고, 조계사는 조계종의 총본산이며 교구들의 통합회의가 열리는 곳이니, 조계종에서 분규가 일어나면 항상 투기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승려들이 대웅전 기왓장을 뽑아다 던지고 유리조각을 수리검처럼 날리는 일대 활극이 경내에서 벌어져왔다. 1994년의 분규 사례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는 이유는 고질적인 파벌 문제인데, 그 원인은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한국불교의 25교구 본사제는 일제 사찰령에 의한 31본산제로부터 유래한다. 31본산제는 본래 일제의 행정부가 종교를 통제하기 위한 제도였다. 이 때문에 해방 후 일제의 잔재청산과 자주교단을 설립하고자 한국불교는 31본산 제도를 폐지하고, 각 도에 교무원을 두는 교무제 실시를 결의했지만, 박정희에 의해 5·16이 발생하고 이후 1962년 통합종단이 발족하면서 다시 해방 이전의 본산제를 부활시켰다. 그것이 오늘날 25교구 본사제도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각자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절들은 이제 본사와 말사로 묶여 파벌이 되었고, 파벌 싸움과 비효율적인 교구운영과 의사결정제도가 겹쳐 한국 불교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나 일단은 1999년을 마지막으로 대대적이지는 않아도 간간히 물리적 충돌이 벌어진다. 게다가 불교계 신문 광고란마다 주지 자리나 임원 자리를 놓고 선전광고를 띄우며 여론싸움을 한다. 2008년 촛불시위 때 시위 참가자 일부가 한때 은신하기도 했으며, 일부 개독교 인사들이 "하나님을 믿으라!!"고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우는 사건도 있었다. 자세한 것은 개신교/대한민국/사건사고/종교적 항목 참조. 경내에서는 민족 및 불교문화 수호를 위한 집회가 열리기도 하며, 2010년 하반기부터 한나라당이 예산안에서 템플 스테이 관련 예산을 삭감한 데 항의하여 일주문에 '한나라당 소속 의원의 조계사 출입을 금함' 이라는 현수막이 한동안 내걸리기도 했다. 2012년 5월, 성호라는 승려가 조계사의 전 주지승려를 비롯, 고위 인사들이 호텔에서 수억대 도박판을 벌였다는 폭로를 시작으로 조계사 인사들의 성매수, 몰래 부인 두기(은처), 해외 원정 도박 등을 연쇄적으로 폭로하면서 조계사를 넘어 대한민국 불교 전체가 혼돈의 카오스로 빠져들었다. 저것들이 전부 사실로 밝혀질 경우 1990년대 조계사 투기장 사태에 버금가는, 어쩌면 그 이상의 흑역사로 기록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2013년 전국철도노동조합 파업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수배가 내려진 철도노조 지도부들이 조계사로 피신하여 다시금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를 주도한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 조계사에 피신해 있다가 자수하였다. 사실 군사독재 시기에도 민주화 운동 투사들이 체포를 피해 명동성당으로 피난하고, 전두환도 5공 당시 비리가 터져나오자 수사를 피해 백담사로 몸을 숨기는 등, 대대로 종교시설은 좌우를 막론하고 체포를 피하는 피난시설로 애용되었다. 종교시설은 종교단체와 그 신자들이라는 큰 빽을 업고 있는 만큼, 잘못 건드렸다가는 수십만 표 이상이 날아갈 수 있기에 부담이 크기 때문. 또한 유권자들의 표심뿐만 아니라 국제 여론 악화의 우려도 있다. 특히 가톨릭 같은 경우, 비록 성당이 바티칸의 치외법권 같은 건 아닐지라도 국제적으로 정부가 조리돌림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이 때문에 조계사가 현대판 소도라는 비판까지 받고 있으며, 종교시설이 공권력까지 막는다는 점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6. 기타 조계사 바로 길 건너편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서울중앙교회가 있고, 종각역 방향으로 내려가면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중앙 감리교회가, 한 블록 넘어서 인사동 쪽으로 더 들어가면 천도교 중앙대교당 건물이 있다. 수 많은 종교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다. 162번, 606번, 1020번이 정차하는 정류장은 우정국 앞에 있다. 안국역(162번 한정)이나 경복궁(경복궁역 말고)[28]에서 환승한다면, 위 3개 노선 중 하나를 이용시 좀더 가깝다. 〈심슨 가족〉 시즌30 제17화에 등장한다. 조계사를 방문한 호머 심슨이 소금 만다라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이를 통해 내린 결단이 결말에 영향을 준다. 참고로 소금 만다라는 조계사에서 실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다. 조계사 맞은편에 중동고등학교, 중동중학교, 숙명여자고등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들은 모두 강남구로 이전했으며 이적지에는 학교 터였음을 알리는 기념비가 남아있다.] 14:37~14:42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198 1~8층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이동 14:42~15:24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관람 [대한민국역사박물관(大韓民國歷史博物館) National Museum of Korean Contemporary History 개장 : 2012년 12월 26일 운영 주체 : 문화체육관광부 휴관일 : 신정, 구정·추석 당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98 (세종로 82-1) 연락처 : 02-3703-9200 목차 1. 개요 2. 상세 3. 역대 관장 4. 비판 4.1. 개관 당시 무성의한 전시 4.2. 박정희 정부 업적 강조 논란 4.2.1. 추후 변화 4.3. 6.25 전쟁 전시관 개편 논란 4.3.1. 추후 변화 5. 기타 6. 관련항목 1. 개요 대한민국 국립 근현대사 박물관. 행정조직법상으로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소속기관이다. 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관장은 제5대 한 수(전 공주박물관장). 2. 상세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말한 것처럼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조명할 수 있는 역사박물관을 건립하겠다는 취지 하에 세워졌다. 기존의 문화체육관광부 본 청사를 박물관 건립지로 지정, 문체부 본 청사가 세종로 독립청사에서 국립서울과학관 본관으로 이전한 후 건물을 리모델링 형식으로 정림건축의 설계 하에 전면 개조하였다. 2년 후인 2012년 5월 23일에 공식 완공되었고 그 해 11월 23일 공식 개관하여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본래 이 청사는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본회가 있었던 건물이다. 후에 기획재정부의 전신인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본 청사로 쓰였다가 1986년부터 문화부가 들어오면서 2010년까지 문체부 독립 청사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 청사와 나란히 옆에 같이 지어진 주한미국대사관 건물 두 동 모두 미국 국제개발청의 자금 지원을 통해 미국의 태평양건축 엔지니어(PA&E)와 빈넬(Vinnel)사가 주체가 되어 지은 것이다. 이때 빈넬사의 주임 기사였던 건축가 이용재도 건설에 참여하였다. 출처 1, 출처 2, 출처 3 한 때 '정부에서 미국 대사관 건물을 베껴서 지었다'라는 루머가 있는데,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사실이 아니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먼저 한국 측을 위한 청사 건물을 지은 뒤 공사 자금이 남자 유솜(USOM: 주한미국경제협조처) 빌딩을 같은 공법으로 짓기로 한 것. 그리고 이 유솜 빌딩에 이후 미국 대사관이 입주한 것이다. 문체부 청사 시절에는 민원상의 이유를 제외하면 일반인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으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바뀐 후 누구나 관람이 가능한 공간으로 변경되었다. 주변에 주한미국대사관, 건너편에 정부서울청사와 광화문, 경복궁이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상설전시는 통사를 전시중인 역사관, 체험형 전시로 구성된 체험관, 그리고 주제별 전시를 하는 주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바로 3층으로 올라가고 3층부터 5층까지는 상설 전시실이다. 3층은 상설전시 주제관과 기획전시실, 기증관으로 이루어졌다. 4층은 10개의 세대로 캐릭터를 부여받아 역사를 경험하는 체험관이다. 5층은 일반적인 박물관 전시로 이뤄진 통사를 다루는 역사관이다. 대한제국 시대를 전후한 1890년대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관련된 자료와 유물, 그리고 증표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 1~2는 동학농민운동부터 광복 직전까지, 이야기 3~4는 광복부터 1987년 민주화운동 직전까지, 이야기 5~6은 1987년부터 현재까지를 다루고 있다. 6층에는 강의실이 있고, 7층에는 관장실이 위치하며, 8층은 옥상정원이다. 옥상정원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경복궁과 그 뒤로 병풍처럼 늘어선 인왕산과 북악산, 북악산 자락에 자리를 지키고 선 청와대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광화문 일대로 눈을 돌리면 세종문화회관 주변으로 고층 건물이 빌딩 숲을 이룬 풍경도 볼 수 있다. 서울의 산과 도심, 그리고 고궁이 어우러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도심 속 보물 같은 전망대이다. 3. 역대 관장 초대 김왕식 (2012~2016) 2대 김용직 (2016~2017) 3대 주진오 (2017~2020) 4대 남희숙 (2021~2023) 5대 한수 (2023~현재) 4. 비판 현대사 관련 박물관이다 보니, 정부의 정책 노선, 이념적인 지향성에 따라 전시 내용이나 성향이 좌우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주로 상설 전시관인 역사관(5층)과 특별 전시관인 주제관(3층)의 전시 내용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2023년에는 특별전시관에 유엔군과 한미동맹 관련 전시실이 개설되었는데, 이는 한미동맹 70주년(보다 정확히는 한미 상호방위조약 70주년) 기념에 맞춘 한시적 성격의 전시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5층에 있는 역사관도 세밀한 부분에 한해 정치적인 이의제기가 있기는 하지만 정권에 따라 큰 폭으로 개정된 적은 없다. 4.1. 개관 당시 무성의한 전시 개관 당시에는 현대사 왜곡과 내용 졸속 논란이 있었고 실제로 전시 내용이 성의가 없었다.# 전시관 입구에 그 시대의 대략적인 내용이 적혀있고 설명 없이 이름만 있는 전시물들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4.2. 박정희 정부 업적 강조 논란 경부고속도로나 새마을운동 같은 박정희 대통령과 산업화 시대의 업적들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5.16 군사정변 이전의 제2공화국은 정치, 사회, 경제 부문에서 설명 끝마다 실패했다는 식으로만 서술되어 있어 5.16 군사정변에 정당성을 실어주려는 의도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1960~80년대의 경제발전에 관한 내용이 전시실3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었는데, 거기서 생긴 노동문제에 대한 것은 '전태일이 분신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와 같은 설명밖에 없었다. 민주화와 관련된 전시는 같은 전시관 출구 쪽에 있지만 20여 년 간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전시 내용을 다 합쳐도 경부고속도로에 대한 설명의 반도 안 된다. 4.2.1. 추후 변화 이러한 부분에 대해 역사박물관 측이 조금이나마 의식은 하고 있는지 다음과 같은 개편이 이루어졌다. 2015년 5월, 1층 외곽 부근에 민주화운동 사진전(4.19 혁명 - 한일협정 반대 시위 - 유신 반대 시위 - 5.18 민주화운동 - 6월 항쟁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기존에 있던 파독 간호사, 광부 등에 대한 내용을 대폭 줄이고 제2공화국 시절 전시물의 보강과 1987년 이후의 전시관을 개장하는 등으로 바뀌었다. 정치사 중심의 거시적인 현대사 일변도에서 벗어나 생활사, 미시사적 요소들도 전시하고 있다. 2021년 2월 28일 기준으로 서울의 봄 시기에 검열로 연재되지 못한 고바우 영감,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의 물건 등이 전시되고 있다. 4.3. 6.25 전쟁 전시관 개편 논란 6·25전쟁 왜곡 논란…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 개편 (서울경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개편…'6·25는 북침' 北신문 철거 (중앙일보) 편향·왜곡·오류 논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전시관 개관 (뉴시스) 북침 선전 ‘해방일보’ 1면 철거···재개편한 역사박물관 ‘6·25전쟁 전시 코너’ (경향신문) “6·25는 북침” 北신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서 떼냈다 (조선일보) 왜곡 오류 논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전시 코너 재개관 (문화일보) ‘역사 왜곡·오류 논란’ 대한민국역사박물관...한국전쟁 전시코너 개편, 설명·자료도 보강 (경상일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2012년 12월 개관했으며, 현재의 상설관은 문재인 정부에서 관장이 된 주진오 전 관장이 2020년 6월 개편한 것이다. 상명대 교수를 지낸 주 전 관장은 과거 ‘좌편향’ 논란을 빚었던 천재교육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필자였다. (조선일보. 2022. 8. 2.) 전시품 중에는 1950년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당시 ‘해방일보’ 1면(1950년 7월10일자)이 있었는데 전쟁 발발 원인을 ‘북침’으로 선전하고 있어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박물관은 지난 6월 이 부분을 일시 폐쇄하고 자문위원 10여 명과 함께 전시물을 점검하고 개편 방향을 논의해왔다. (경상일보. 2022. 8. 3.) 이 때문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지난 6월25일 전쟁 발발 제72주년을 앞두고 이 코너를 폐쇄·휴관하기도 했다. 국민의힘 신원식 의원은 6.25 전쟁 쪽 전시관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6.25 전쟁에 대해서 북한의 침략에 대한 언급은 없이 '전쟁은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라는 식의 표현으로 북한의 침략 사실을 흐렸다. -북한군의 학살 내용은 없이 한국군을 학살자로 모는 내용이 적혀있다. -북한이 서울 침탈을 기념하여 발행한 우표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서울해방기념 우표'라며 전시하였다. -북한의 토지개혁을 설명하는 자료 등도 북한 체제에 대한 우호적인 방식으로 전시가 이루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4.3.1. 추후 변화 위에 제기된 문제점들은 윤석열 정부 시기에 변화가 이루어졌다. 전시실을 개편하면서 북한의 남침 관련 한국 정부 자료 등을 새로 추가했다. UN군 참전 기록도 추가했다. 남희숙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관장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균형감 있는 전시를 보여드린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금번 개편 작업을 통해 우리 국민의 역사적 상식과 기억에 충실히 부합하는 전시 콘텐츠를 선보일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자문위원들은 국방대학과 육사 소속 학자, 냉전사를 전공한 학자, 진보 및 보수 언론사 소속 언론인 등을 포함한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9년부터 자문 활동하던 분들이 다수다. (개편에) 별 이견이 없었다” (경향신문. 2022. 8. 2.) 2023년 8월 기준상 북한의 남침을 재차 강조하고 있고, 북한 옹호적인 서술도 제거되었다. 또 북한 측의 인명 피해는 비교 목적으로 디스플레이에서만 짧게 언급하고 한국군, 한국 국민 중심으로의 인명 피해를 좀 더 강조하였다. 북한 관련 토지 개혁 부문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그 밖에 정치사 중심이었던 전시 내용들이 다소 축소되고 미세사(생활사) 비중이 늘어났다. 이는 특히 4층 체험관에서 두드러진다. 2023년 기준으로는 기존의 3부를 6부(이야기1 ~ 이야기6)으로 좀 더 세분화하여 전시하였다. 정치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내용들을 제거하고 객관적인 서술이 좀 더 강조되었다. 그 밖에 한류(KPOP), 성소수자 등 초현대적인 내용도 담겼다. 5. 기타 개장시간은 10:00~18:00까지다. 다만 수요일, 토요일은 21:00까지 야간개장을 한다. 휴관일은 신정, 설날, 추석이다. 8층 옥상정원에 경복궁과 청와대, 광화문광장이 잘 보이는 전망 명소가 있다. 이 건물에서 야경을 찍으려면 수요일이나 토요일에 방문하도록 하자. 경복궁 야간개장일도 같이 보고 움직여도 좋다. 경복궁이 문닫는 화요일엔 이 곳에 올라가서 경복궁과 멀리 청와대를 내려다 볼 수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전시 내용이 좌편향적이라는 국민의힘 일각의 주장이 있었다. YTN과 JTBC가 팩트체크 결과 허위사실로 밝혀졌다. 6. 관련항목 서울역사박물관 -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시립박물관으로, 일부 겹치는 포지션도 있지만, 이곳은 한양-서울 역사에 보다 중점을 둔 전시관이다.] 15:24~15:47 서울 종로구 송월길 52 번지에 있는 국립기상박물관으로 이동 15:47~16:10 국립기상박물관을 관람 [국립기상박물관 조선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우리나라 기상 문화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국내 최초 기상과학역사 박물관이다. 서양보다 200여 년 앞서 발명된, 세계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측우기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公州 忠淸監營 測雨器)’를 소장하고 있다. 국립기상박물관이 설립된 이곳 서울기상관측소는 우리나라 근현대 기상 역사의 중심지이다. 1907년 경성 원남동에서 시작된 근현대 기상관측은 낙원동을 거쳐 이곳 송월동으로 이전하였다. 1932년 설립 당시의 건물과 1939년 증축된 건물이 현재까지 유지되어왔고, 1998년 기상청이 서울 동작구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지속적으로 기상업무를 이어왔다. 이러한 연속성으로 2017년 세계기상기구(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에서 ‘100년 관측소’로 선정되었다. 박물관 건립을 시작한 2016년, 국가기록원에서 보관되어 있던 20세기 측후소 건축도면을 바탕으로 ‘서울기상관측소’를 원형으로 복원하였으며, 4년 간에 걸친 실내외 공사로 2020년 10월 30일에 개관하였다. 우리나라 기상의 중심지인 국립기상박물관에서 날씨의 변화와 역사를 감상해볼 수 있다. 전화번호 : 070-7850-8493 이용시간 : 10:00 - 18:00 휴무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운영 요일 : 화요일 - 일요일 유모차 대여 : 있음 장애인 편의시설 : 장애인화장실 장애인 전용 주차장 : 접근가능 장애인 안내(휠체어 대여 및 기타) 이것만은 꼭! - 서울의 벚꽃 개화시기와 단풍 절정시기의 기준이 되는 계절 관측목 관람하기 -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측우기 관람하기 - 영어 전시 해설 가능 이용요금 : 무료 주소 : 03178 서울 종로구 송월길 52 (송월동, 국립기상박물관) 교통 정보 :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 ]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公州 忠淸監營 測雨器) 종목 국보 제329호(2020년 2월 27일 지정) 수량 1점 시대 조선시대 1837년(헌종 3) 소유 국유 관리 기상청 규격 : 높이 32.1cm, 지름 14.9cm, 무게 6.2kg 재질 : 청동 형식 :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된 원통형 측우기 주소 서울 종로구 송월길 52 국립기상박물관 좌표 북위 37° 29′ 37″ 동경 126° 55′ 1″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公州 忠淸監營 測雨器)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국립기상박물관에 있는, 조선시대의 천문지리기구이다. 1971년 12월 21일 금영 측우기(錦營 測雨器)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었다가, 2020년 2월 27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329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국보 승격 직후까지는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위치한 기상청에서 보관하다가, 2020년 국립기상박물관이 개관하면서 대중에 전시되고 있다. 개요 빗물을 그릇에 받아 강우량을 재는 측우기는 조선 세종 23년(1441년)에 만들어진 후 여러차례 다시 만들어졌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헌종 3년(1837년)에 만들어진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가 유일하다. 높이 31.5cm, 지름 29.4cm의 이 측우기는 원통형의 표면 3곳에 대나무처럼 도드라진 마디가 눈에 띤다. 원통형의 동그란 통은 빗물을 받는 그릇으로 여기에 주척이라 부르는 자가 있어 측우기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쟀다. 화강석 받침에 새겨진 글에는 조선 영조 46년(1770년)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받침대는 대구에 있던 것으로 측우대와는 별도의 것이다. 과거 명칭인 '금영 측우기'의 어원은 조선시대 충청도 감영을 달리 이르던 말인 '금영(錦營)'에서 따왔다. 측우기는 1910년 당시 공주감영에 있던 것으로, 그 뒤 주척과 함께 기상청으로 옮겨졌다가, 1971년 3월에 반환되어 현재 국립기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정 사유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公州 忠淸監營 測雨器)'는 1837년(헌종 3)에 제작된 것으로, 측우대는 없고 측우기만 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 충남지역 감독관청이었던 공주감영[錦營]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공주 감영에 보관되어 있다가 일본의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에 의해 발견되어 1915년 일본 기상청에 옮겨졌으나, 1971년에 대한민국으로 반환되었다. 2012년 3월 20일, 반환 이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정부에서 측우기를 제작해 전국의 감영에 보냈기 때문에 여러 점이 만들어졌으리라 예상되지만, 지금까지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만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1442년(세종 24)에 발명된 측우기는 서양보다 약 200년 앞서 발명된 세계 최초의 과학적 강우(降雨) 측정기이다. 조선의 측우기는 땅에 스며든 물의 깊이를 측정하던 이전의 비합리적인 강우 측정방식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강수량을 정량적으로 측정 가능케 한 발명품이라는 점에서 세계과학사적인 의미가 매우 크다. 조선시대 측우제도를 유일하게 증명하고 있는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의 제작시기와 크기 등에 대해서는 중단의 바깥 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확인된다. 명문에 의하면 이 측우기는 1837년(헌종 3)에 만들었으며 높이는 평균 1자[尺] 5치[寸], 직경 7치, 무게 11근으로 오늘날 치수로 환산하면 높이 32.1cm, 지름 14.9cm, 무게는 6.2kg에 해당하며, 이는 세종 대에 처음 만들어진 측우기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아울러 바닥면의 명문을 통해 통인(通引), 급창(及唱), 사령(使令)의 직책을 가진 관리들이 관련 업무를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표면에 새겨진 이러한 규격 사항은 바로 이 측우기가 조선시대 측우기 제작 지침에 맞게 만들어졌음을 실질적으로 의미한다고 하겠다. 측우기 중단의 명문 :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높이가 1자 5치, 지름은 7치, 도광 정유년(1837)에 만들었고 무게는 11근이다.(錦營/測雨器/高一尺五寸/徑七寸/道光丁酉製/ 重十一斤) 측우기 바닥면의 명문 : 입번은 통인, 급창, 사령이 담당함(入番通引/及唱/使令/次知) 구성을 보면, 원형의 청동 주물로 제작되어 있으며 하단과 중단 3단의 세 단으로 분리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하단의 아래쪽은 바닥이 막혀 있어 물을 담아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으며 중단과 상단은 서로 접합시키는 구조이다. 사용 시에는 접합부에 납땜을 해 고정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과학적 조사를 통해 중단과 하단의 접합부에 납땜 흔적이 다수 발견된 것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접합부는 미세하게 상부가 넓고 하부가 좁아 서로 끼워 맞추도록 하였고 구연부는 대나무 마디처럼 만들어 기형(器形)의 변형을 막고자 한 것으로 보아 정확한 강수량 측정을 위해 고도의 정밀한 형태로 고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는 비록 19세기에 만들어졌으나, 세종시대 이후 비의 양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음을 증빙해준다. 따라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물로서만 그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관측 시스템의 구축과 지속적인 관측에 이어 이를 농사에 활용하여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는데도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므로, 인류과학사적 의미가 지대해 국보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특징 높이 315mm, 내부 직경 140mm의 원통형으로, 높이는 1척 5천, 지름은 7촌으로 그 크기가 새겨져 있다. 3단으로 분리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특히,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의 평균 치수인 높이 32.1cm, 지름 14.9cm를 주척(周尺, 1자 206~207mm)으로 환산했을 때 명문에 표기된 '높이 1자 5치[高 1尺 5寸]와 직경 7치[經 7寸]'와 근사한 값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측우기는 주척을 기준으로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측우기 각 동체(胴體)가 약 5치의 크기로 만들어져 굳이 자를 대지 않아도 몸체가 대력적인 강수량을 알 수 있는 척도로서 기능을 했음을 말해준다. 관측 기록 1800년대에 공주 감영에서 강우량을 측정한 기록이 《각사등록(各司謄錄)》에서 발견되었다.] 16:10~16:20 서울 중구 새문안로 16 농협중앙회에 있는 농업박물관으로 이동 16:20~16:32 농업박물관을 관람 [농업박물관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충정로 1가 개관일 1987년 11월 운영자 농업협동조합중앙회 농업박물관(農業博物館)은 대한민국 서울 중구 충정로 1가에 있는 농업 전문 박물관이다. 농협중앙회가 1987년 11월에 설립한 이 박물관은 지상 2층, 지하 1층 구조이다.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개장하며, 입장료는 무료다. 연면적은 약 3461.1726m3이고, 5,000여종의 유물을 소장 중이며 그중 2,0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1층의 농업역사관에서는 선사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시대별 농업정보와 중요한 농업관계의 역사적 사건들을 볼 수 있다. 2층의 농업생활관에서는 논밭의 사계절 모습과 한국 전통 농가의 생활상, 전통 장터의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곳은 세종 때 북방에서 6진을 개척한 김종서의 집터이다. 연혁 1985년 7월 : 설립안 확정. 1985년 10월 : 농업유물 수집운동 실시. 대한민국에서 약 1300여개 농협과 그 조합원 참여. 1987년 11월 : 충정로 1가에 개관. 1996년 8월 : 농업생활관 개관. 1997년 9월 : 갤러리 개관. 2002년 12월 : 농협중앙회 서울지역본부로 이전. 2005년 7월 : 현재의 자리에 신축 개관.] 16:32~16:33 서울 중구 새문안로 16 번지에 있는 쌀박물관으로 이동 16:33~16:44 쌀박물관을 관람 [쌀박물관 쌀박물관은 농협중앙회가 어린이들과 일반인들에게 쌀의 가치와 영양학적 우수성 등을 널리 알려 올바른 식습관을 형성할 목적으로 운영하는 농업박물관이다. 2012년 1월 10일 개관하였다. 서울특별시 중구 새문안로 16에 있다. '쌀박물관'은 1층 전시홍보관과 2층 체험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홍보관에는 벼의 성장과정 및 전파경로, 쌀의 효능, 국산 쌀 브랜드 등을 전시하고 있다. 쌀로 만든 가공식품과 홀태, 매통 등 조상들이 사용하던 옛날 농기구들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체험관은 요리교실과 문화교실로 운영되며 쌀을 주제로 한 요리, 문화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어린이와 주부, 일반인 등 연간 1만명 정도가 체험할 수 있다. 간단한 쌀 음료와 음식도 시식해 볼 수 있다. '쌀박물관'은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열며 입장료는 무료이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쌀의 종류 쌀은 흔히 일본형(Japonica)과 인도형(indica)으로 크게 나누는데 일본형은 일본, 한국, 중국 중부와 북부,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브라질과 스페인 등지에서, 인도형은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남부, 미국 남부 등지에서 생산된다. 논에서 재배되는 것을 수도, 밭에서 재배되는 것을 육도라 하는데 한국에서는 대부분 수도를 재배한다. 수도와 육도는 영양면에서 차이가 별로 없지만 육도로 지은 밥은 끈기가 없으며 밥맛도 수도보다 떨어진다. 멥쌀과 찹쌀의 차이는 아밀로오스와 아밀로펙틴의 함량 차이이다. 멥쌀은 약 20%의 아밀로오스와 80% 내외의 아밀로펙틴을 함유한 반면, 찹쌀은 아밀로펙틴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아밀로오스는 거의 들어 있지 않다. 멥쌀은 보통 밥을 지어먹으며 찹쌀은 찰밥을 지어먹거나 인절미를 만들 때 쓴다. 일본형과 인도형 세계에서 생산되는 쌀은 일본형(Japonica)·인도형(indica)·자바형(javanica)의 3가지로 분류되는데 자바형은 인도형과 유사하므로 흔히 일본형과 인도형으로 크게 나눈다. 일본형은 일본, 한국, 중국의 중부와 북부,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브라질과 스페인 등지에서 생산되고 인도형은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남부, 미국의 남부 등지에서 산출된다. 인도형은 일본형에 비해 쌀알이 길고 밥을 지었을 때 끈기가 없어서 한국인의 식성에 맞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에 들어 일본형과 인도형을 교잡시켜 만든 통일벼 품종을 개발했는데 이 품종은 키가 작아 잘 쓰러지지 않고 내비성과 내병성이 강하며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벼의 낱알이 쉽게 떨어지고 밥맛이 별로 좋지 못한 단점이 있었다. 그 후 유신·밀양23호·만석·조생통일 등의 품종을 개발하면서 통일벼의 단점을 보완해왔다. 수도(paddy rice)와 육도(upland rice) 논에서 재배되는 것을 수도, 밭에서 재배되는 것을 육도라 하는데 한국에서는 대부분이 수도이고 육도는 농업용수가 부족한 산간지역에서 재배되고 있으나 그 생산량은 국내 전체의 1% 정도에 불과하다. 수도와 육도는 영양가 면에서 차이가 별로 없지만 육도로 지은 밥은 끈기가 없으며 밥맛도 수도보다 떨어진다. 멥쌀[粳米 non-glutinous rice]과 찹쌀[糯米 glutinous rice] 멥쌀과 찹쌀의 차이는 아밀로오스와 아밀로펙틴의 함량 차이이다. 멥쌀은 약 20%의 아밀로오스와 80% 내외의 아밀로펙틴을 함유한 반면, 찹쌀은 아밀로펙틴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아밀로오스는 거의 들어있지 않다. 멥쌀은 반투명하며 비중은 1.13이고, 전분의 호화온도는 65℃이며 아이오딘 반응에서 청자색을 낸다. 찹쌀은 유백색으로 비중은 1.08이고 전분의 호화온도가 70℃이며 아이오딘 반응에서 적갈색을 나타낸다. 멥쌀은 보통 밥을 지어먹으며 찹쌀은 찰밥을 지어먹거나 인절미를 만들 때 쓴다. 찹쌀의 생산량은 전체 쌀 생산량의 10% 정도이다.] 16:44~16:53 서울 중구 칠패로 5 번지에 있는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으로 이동 [서소문 성지 서소문 밖 역사 유적지의 교회사적 의의 조선시대에 소의문(昭義門)이라고도 불리었던 서소문(西小門)은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에 있었던 간문(間門)이었으며, 도성 안의 시신을 밖으로 들어내는 문 즉, 시구문(屍軀門)이기도 하였다. 아현에서 서소문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일대는 강화도를 거쳐 양화진·마포·용산 나루터에 도착한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의 물류가 집결되어, 도성으로 반입되는 통로였으며, 도성 내외를 잇는 육로가 교차되어 성저십리(城底十里) 중 가장 번화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위치적 특성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는 17세기부터 칠패시장과 서소문시장이 서로 이어지며 번성해 종루가상(鐘樓街上), 이현(梨峴)과 함께 한양의 대표적 시장으로서 상업적 농업·수공업이 성행하였다. 아울러 중국으로 향하는 조선시대의 1번 국도인 의주로(義州路)와 접해 있어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는 한양도성 밖의 대표적인 외교와 상업활동의 중심공간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서소문 밖은 정부 사법기관인 형조·의금부와 가까워 부대시참(不待時斬, 법으로 정한 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참형(斬刑)을 집행하는 일)의 집행에 편리하였고,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칠패시장과도 인접하여 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적합한 장소였다. 또한 조선시대 형장은 일반적으로 물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서소문 밖에는 한강의 지류인 만초천이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시대 국가 공식 참형지(斬刑地)가 되었다. 이는 사직단 서쪽에 처형장을 두어야 한다는 ≪예기≫(중국 고대 유가(儒家)의 경전으로, 오경(五經) 중 하나)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1784년 가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일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을 당했다. 정조(1776~1800년) 사후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1873년)를 거치는 동안 순교자들은 칼 아래 참혹하게 스러져갔다. 즉,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의 신분제 사회에 맞서 하느님 앞에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서로 사랑할 존재임을 증거한 순교자의 터가 된 것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신유박해 때 한국 천주교회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 명례방 회장이었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그의 장남 정철상 가롤로, 성호 이익의 제자로 녹암계(주자학에 구애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유교의 경전을 해석하여 새로운 학설을 추구했던 학파)를 형성한 권철신 암브로시오, 평신도 회장 최창현 요한과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가 순교하였고, 기해박해 때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이자, 정약용의 조카인 정하상 바오로와 그의 누이 정정혜 엘리사벳, 북경을 오가며 성직자 영입 운동에 크게 공헌한 조신철 가롤로, 허계임 막달레나와 그녀의 큰 딸 이정희 바르바라, 둘째 딸 이영희 막달레나,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부인 권희 바르바라, 남명혁 다미아노 등이 순교하였다. 그리고 병인박해에 이르러서는 흥선대원군의 승정원 승지였던 남종삼 세례자 요한, 최초 신학생 중 한 명인 최방제 프란치스코의 형 최형 베드로, 전장운 요한이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쳤다. 이중 이영희 막달레나, 이정희 바르바라, 허계임 막달레나, 남종삼 세례자 요한, 최형 베드로 다섯 분의 성인 유해는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 모셔져 있다. 1925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시복식으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가 복자품에 올랐고, 1968년에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추가로 시복되었다. 이후 한국교회 설립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재한 시성식에서 이들 103위 복자들은 성인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44명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또 지난 2014년 8월 16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 시복식에 앞서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를 먼저 찾아 참배하고, 그 이후 열린 시복식에서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 123위’를 복자로 선포하였다. 이 중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복자는 27명이다. 따라서 교회사적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단일 장소에서 최다(最多) 성인과 복자를 배출한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가 되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이렇듯 숭고한 삶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의미 깊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에 합당한 모습을 갖출 수 없었다. 근대의 상징인 철도의 개통과 더불어 이 지역은 철도 시설 용지로 수용되어 고립되기 시작했다. 1927년 철로 안에는 수산시장이 개설되어 참형터의 흔적이 사라졌다. 1966년에 고가차도가 건설되면서 서소문 밖은 통과지대가 되었으며 서소문 밖의 존재는 잊혀져 갔다. 1973년에는 지하에 공영주차장과 쓰레기 재활용 집하장 등의 시설과 함께 서소문 근린공원이 조성되었지만, 경의선 철로와 서소문 고가차도로 인해 접근이 어려웠고 염천교가 가로질러 이 땅은 마치 도심 속의 닫혀진 섬과 같았다. 1958년, 당시 경향잡지사를 맡고 있던 윤형중 신부가 경향잡지를 통해 순교자 기념관을 짓자고 주장하였으나 좌절된 이후 사그라들었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 대한 관심은 한국천주교회 설립 200주년 기념사업 중 시성식을 준비하면서 되살아났다. 1984년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요한 바오로 2세 방한과 103위 성인 시성을 기념하여 서소문 근린공원 내 현양탑이 자리한 땅을 매입하고, 이 땅의 장소성과 역사성, 그리고 교회사적 가치를 기념하기 위해 같은 해 12월 22일 서소문 순교자 현양탑(임송자 리타 作)을 건립한 후, 서울시에 기부 채납 하면서 서소문성지 조성사업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러나 1997년 공원 리모델링 공사로 인해 순교자 현양탑이 약현성당 내 기도동산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1999년 5월 성령강림대축일에 새로운 현양탑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후 2011년 자치구인 중구청이 이곳을 청소차 차고지로 사용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보다 의미 있는 장소로의 전환을 위해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정부와 서울시, 그리고 자치구인 중구에 ‘서소문 밖 역사유적지 관광자원화 사업’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8년간의 준비를 거쳐 지상은 역사공원으로 지하는 성 정하상 기념경당을 비롯한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하여, 2019년 6월 1일 개관하기에 이르렀다. 2018년 9월 14일 교황청에서는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가 포함된 천주교 서울 순례길을 아시아 최초 국제 공식 순례지로 지정하였다.] 16:53~17:25 [순교자 현양탑~박물관 입구~지하1층 로비~지하1층 순교자의 길~지하2층 성 정하상 기념경당~지하3층 콘솔레이션 홀 ~지하2층 기획전시실(2024년 제17회 세계자폐인의 날 기념 오티즘(autism) 작가 특별전시)~지하1층 최종태 기증작품 전시실(영원을 담는 그릇)~지하3층 (상설전시1관&상설전시2관)~지하3층 하늘광장~하늘길~지하1층 로비~박물관 입구]의 동선으로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을 관람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순교한 천주교인들을 기리는 곳이자 건축 디자인으로도 유명한 곳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칠패로 5 2019년 6월 개관한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은 순교한 천주교인들을 기리는 곳이지만 건축 디자인으로도 유명하여 많은 사람의 발걸음을 이끄는 곳이다. 서소문 일대에서는 60여 년간 수많은 사람이 천주교 박해를 받았으며, 희생당했다. 따라서 서소문 역사 공원에는 박해받은 천주교인들의 영혼들을 기리는 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2014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이곳을 방문할 정도로 한국의 천주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며. 건축 디자인 면에서도 특별해 2019년 서울시 건축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건물 내부는 굵은 직선과 곡선으로 이뤄졌으며 외부는 붉은색 벽돌로 지어져 강렬한 인상을 준다. 박물관에서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한 전시와 예술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매주 목요일에 서소문 역사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어 서소문 성지와 천주교의 역사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은 독특하게 지하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하 2층에서는 상설 전시를 만나 볼 수 있다. 계단을 따라 지하 3층으로 내려오면 하늘광장을 만나게 된다. 하늘광장은 경건함을 가득 담은 공간으로 절제된 사각형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 빛, 직선만이 존재하는 이 공간은 천주교 박해의 먹먹함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있다. 문의 및 안내 : 02-3147-2401 홈페이지 https://www.seosomun.org 이용시간 09:30~17:30 (입장마감 17:00) 휴일 : 매주 월요일 / 1월 1일 / 설·추석 당일 주차 : 가능 (216대) 주차장 이용요금 : 무료] [세상을 밝히는 명작전 2024년 제17회 세계자폐인의 날 기념 오티즘(autism) 작가 특별전시회 기간 : 2024.04.02 ~ 2024.04.21 시간 : 9:30~17:30 장소 : B2 기획전시실 이용 요금 : 무료 이용 안내 : 자유롭게 관람이 가능 주최·주관 : 한국자폐인사랑협회 문의 : 02-445-5444 (작품 구입 및 후원 문의) 오티즘 작가 특별전시회「세상을 밝히는 명작전」은 오티즘 작가만의 독특하고 다채로움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고, 오티즘 작가가 장애를 넘어 모두의 예술가로 활동하며 자립하기 위해 한국자폐인사랑협회가 기획한 오티즘 문화예술 지원사업입니다. 세상을 밝히는 빛과 색채 - with my own Gaze -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창조된 예술이 왜 우리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가, 어째서 이 예술은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는가, 그것은 언젠가 우리 안에서 존재했고 경험했던 것이지만 어느 순간 잃어버린 것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으며 어떤 것들은 무의식 속에 감추어져 있다. 하지만 예술적 자극을 받는 순간 이 모든 것들은 숨어있던 그리움과 함께 감성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내 마음의 우주가 펼쳐지는 것이다. 마음의 우주는 원래 우리 모두가 처음부터 지니고 태어나는 잠재성이자 본래적으로 소유한 것이지만 살아가며 사회화와 획일적인 교육화의 과정에서 상실된 것들이다. 혹자는 문명화의 오염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전시의 작가들은 문명화의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운 창작자들이다. 인간의 감각이 오감으로 분리되고 발달되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원초적 에너지가 넘쳐나는 감각의 풍부함을 유지하며 창조적 예술에 몰두한다. 작가들 개개인의 독창적 시선으로(with my own gaze) 바라보고 인식된, 일상의 모든 것이 예술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창작물로서 사회는 예술적 관찰 · 경청 · 해석을 통해 주변적 예술로 변화되어 그들과 공감하기 시작한다. 우리 세상은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 이곳에는 작가들의 자발적 감각으로(with my own gaze) 창작한 작품에서 흘러넘치는 빛으로 충만하다. 작가들은 스스로 마음의 우주가 만들어내는 실재감의 빛과 색채감으로 세상을 밝히는 창작을 즐겁게 이어간다. 그들에게 그림이란 고난을 극복했다거나 뜻밖의 능력을 가진 오티즘의 현상이 아니다. 작가들에게 창작 작업은 세상과 소통하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개개인의 ‘삶의 프로젝트’이며 ‘소통의 언어’로서 작가의 생각을 전하는 중요한 도구인 까닭이다. 소통, 타자와의 소통은 사회학 철학 및 모든 문화영역에서 중요시되는 문제의식이다. 작가들의 작품은 사회적 타자들의 소통과 주체화에 중요한 고리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작가들은 선과 색채의 언어로 지속적으로 말을 걸어오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라는 물음을 던져보지만 여전히 사회는 아직 충분히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부족하다고 정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기 <세상를 밝히는 명작전> 전시는 사회가 작가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여는 시도가 되는 시발점이 되리라 기대해 본다. 우리 사회의 귀가 명쾌하게 열린다면 단순히 오티즘의 특별한 재능이라고 여겨진 그림 작업이 아닌, 한 사람의 개인과 그림의 관계에서 주고받는 긍정에너지가 개개인의 고유한 창작물로서 언어만큼이나 섬세한 대화가 가능하게 된 작가들의 즐거운 언어라는 사실이 논증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이 가진 적성이자 나만의 감수성으로서(with my own gaze) 감각의 자유로움이 주는 진정성의 스토리를 들을 수 있는 예술적 가치로 빛날 것이다. 예술 칼럼니스트 김 은 정 참여 작가(가나다 순, 53명) 강경원 강선아 강원진 금채민 김경재 김도은 김동후 김범중 김수광 김유현 김지우 김치형 류현비 박병준 박재영 박주원 박준수 박찬흠 박태현 선시우 손림성 손우진 신현채 심안수 안드레 양서연 양예준 연호석 오원찬 윤진석 이다래 이민서 이승윤 이은규 이재영 이종훈 임성현 임이정 임정은 임지호 장예현 전민재 전유현 정인준 조민준 조현준 최윤호 최재용 표거연 한성범 한승기 황성제 황진호 *한국자폐인사랑협회는 2006년 12월 보건복지부의 인가를 받아 설립된 국내 유일의 자폐성장애 중심 비영리단체로, 자폐성 장애인과 가족의 권익을 대표하고, 삶의 질 향상과 사회통합을 위한 복지사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작품 구입과 후원에 대해서는 한국자폐인사랑협회 사무국(02-445-5444)으로 문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오티즘 정기 후원하기 : https://online.mrm.or.kr/v1eW7Hp *한국자폐인사랑협회 바로가기 https://autismkorea.kr/ 관람 포인트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오티즘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이해를 증진하려는 노력에 동참하고자, 2023년부터 오티즘 작가 특별전시회「세상을 밝히는 명작전」을 무상대관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콘솔레이션 홀(CONSOLATION HAL) 위로, 위안을 뜻하는 이곳 콘솔레이션 홀은 조선시대 이 땅에서 목숨을 다한 과거 모든 이들을 위로하고,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위안과 평화로움을 주는 공간이다. 고구려 무용총의 내부 구조에 모티브를 둔 이 공간 속에 박해 시기에 순교한 성인 다섯 분의 유해를 모신 곳이 자연광으로 비추어지고 있어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콘솔레이션 홀(CONSOLATION HAL)에서 3가지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 | 6분 20초 중림동 약현성당과 명동대성당 내부 스테인드글라스를 주제로 한 360° 타임랩스 영상이다. 이 땅에서 순교한 모든 이들에게 헌정하는 의미를 담아 상영되고 있다. 사적 제252호인 중림동 약현성당은 1892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 교회건축물이며, 사적 제258호인 명동대성당은 1898에 세워져 한국 교회 최초로 본당이 되었다. 레퀴엠을 위한 영상 | 금민정 | 14분 영상 속 견고한 시멘트에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도 결국엔 스며들듯 흡수되어 사라지는 물방울처럼, 다양성을 수용하지 않았던 조선 후기 사회의 경직성과 그 이면에 싹트는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파도의 물살에 견고했던 바위가 모래알이 되듯,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오듯, 경직된 조선 후기 통치질서 아래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품고 발전된 사회를 지향한 많은 이들이 있었음을 영상으로 표현하였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금강내산전도金剛內山全圖 | 6분 이 땅에서 목숨을 다한 모든 이들을 위로하는 의미로, 조선인의 마음속 무릉도원이었을 아름다운 우리 금강산의 전경이 겸재 정선의 필치로 펼쳐진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세계를 연 겸재 정선의 〈금강내산전도〉는 베네딕도회 한국 선교 100주년인 2005년에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한국 왜관수도원으로 영구대여의 형식으로 반환된 《겸재 정선 화첩》에 수록된 그림이다.] 17:25~17:32 서울특별시 중구 통일로 1 번지에 있는 문화역서울284로 이동 17:32~18:05 문화역서울284을 관람 [문화역서울284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통일로 1 (봉래동2가 122-28) 구 서울역사(舊 서울驛舍) 면적 : 2,964㎡ 건축시기 : 1925년 대한민국 사적 제284호 지정일자 : 1981년 9월 25일 소유자 : 문화재청 관리 : 문화체육관광부 서울특별시 중구 통일로 1 (봉래동2가 122-28) 소재. 역 건물 자체를 한 곳의 지번으로 분리해 놓았으며 주변 지역은 122-17이다. 한국 철도의 중심지로 1981년에 사적 284호로 지정될 정도로 여러 가지 많은 역사(歷史)가 살아있는 역사(驛舍)이다. 옛 서울역은 1923년부터 2003년 10월까지 약 80년 동안 서울의 관문으로 교통과 교류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2004년 KTX 신역사가 생기며 문을 닫았던 서울역은 2년여의 공사 끝에 2011년 복합문화공간으로서 ‘문화역서울284’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284는 옛 서울역의 사적 번호라고 한다. 내부 천장에는 태극 문양을 중심으로 강강술래를 형상화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1층에 8개, 2층에 6개의 전시 공간이 있고 건물 오른편에는 RTO 공연장도 마련돼 있다. 문화역서울284 RTO는 옛 서울역이 공연장으로 탈바꿈한 공간이다. 1900년 남대문 정거장이 있던 자리로, 1925년 경성역으로 준공됐다. 1947년 서울역으로 역명이 변경됐고, 2004년까지 기차역으로 운영됐다. 이후 2009년부터 2년간 원형 복원 공사를 거쳐 2011년 복합문화공간 문화역서울284가 개관했다. 2017년 11월 28일부터 문화역서울 284로 개조된 서울역 구 역사의 여객업무 기능이 부활했다. 종래 서부역에 있던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승강장을 반대편 북단으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물론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안에 개찰구를 놓을 수 없으므로 승차장에 설치했으며, 출구는 정문 오른쪽의 'Cafe 자리' 바로 옆에 개설되어 있다. 원래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대비용 임시 조치이지만, 향후 서부역으로 위치가 되돌아갈 일은 없어 보인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바로 내려갔지만 길은 ㄷ자였다. 이 까닭은 바로 앞이 선로라서 그랬다. 애초에 KTX 승강장 선로에 경의선 승강장을 유치한 것이라 공간이 날 수가 없었다. 지금은 맞이방 공사를 하면서 ㄱ자로 동선이 줄었으며, 대부분 지하로 가서 갈아타므로 이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좋아졌다. 올라갔다가 두 번 내려가면 1호선 승강장이다.] [문화역서울284 소개 지나온 이야기 문화역서울284는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무대이자 교통과 교류의 관문이었던 구 서울역사의 원형을 복원하여 2011년 복합문화공간으로 개관했다. 문화·예술의 창작과 교류가 이루어지는 플랫폼으로서 전시, 공연, 워크숍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1900년 남대문정차장을 시작으로 경성역, 서울역을 거쳐 지금의 문화역서울284가 있기까지 시간을 따라 100여년 역사를 소개한다. 경성역, 서울에 근대적 감성을 전하다 한국의 철도 역사는 경인선에서 시작되었다. 1900년에 경인선이 서울 남대문역까지 진입하게 되었고, 당시의 목조 역사를 남대문정거장이라고 불렀다. 이는 경성역의 시초이자 역사의 시작이었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3년동안의 공사기간에 걸쳐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새롭게 신축하였다. 쓰까모토 야스시가 설계하고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건립한 새 역사는 경성역으로 역사명을 변경하였다. 경성역은 규모도 상당했지만 붉은 벽돌, 화강암 바닥, 인조석을 붙인 벽, 박달나무 바닥으로 이루어진 유럽식의 이국적인 외관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특히 2층의 최초의 양식당 ‘그릴’은 양식당 자체를 그릴이라고 통용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기차역에서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다 2004년에 구역사가 폐쇄되고 2009년부터 2011년까지 2년동안 경성역 원형복원 공사를 진행했다. 경성역의 건립 당시의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100년전 역사내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2011년에 완공된 과거의 서울역은 현재 복합문화공간인 문화역서울284로 활용하고 있다. 여기서 284는 옛 서울역의 사적 번호로, 역사와 예술경험이 한데 어우러지는 문화역서울284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다 문화역서울284는 시간이 켜켜이 쌓인 역사적인 공간이면서 새로운 예술을 만나면서 변모하는 공간이다. 르네상스 장식들, 스테인드글라스, 붉은 벽돌과 같은 과거의 물건들과 실험적이고 현대적인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는 특이점은 기존에 알려진 미술관과는 색다른 전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전시기간 외에 문화역서울284에 방문하시면 1925년 경성역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00년전 옛 서울역을 살펴볼 수 있는 멋진 기회도 가질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다 1900 ~1925 ~2004 ~2011 ~ 1900년 남대문정차장, 역사의 시작을 알리다 경인철도의 개통과 함께 1900년 남대문정차장이 문을 열었다. 용산역과 서대문역 사이의 간이역 역할을 하는 정차장으로 40평 크기의 목조 바라크 건물이었다. 1900년07월, 남대문정거장 영업 개시 1905년03월 24일, 남대문역으로 역명 변경 1915년10월 15일, 기존 목조로 된 남대문정차장을 철거하고 신역사와 승강장, 부대시설을 갖춘 '남대문역사' 준공 및 영업 개시 1923년01월 01일, 경성역으로 역명 변경 1925년 서울에 르네상스를 꽃피우다 돔 형태의 지붕과 벽돌로 지어진 르네상스식 외관, 은그릇과 은촛대로 장식된 최초의 양식당 그릴. 경성역은 서울의 모더니즘의 중심이었다. 1925년09월 30일, 경성역(현 문화역서울284) 준공 1925년10월 15일, 경성역 영업 개시 1925년10월 25일, 경성역 2층 양식당 개업(서울역 그릴 전신) 1936년12월 01일, 경성-부산간 6시간 45분 소요되는 특별 급행 여객열차 아까스끼호 신설 1943년11월 25일, 부산-북경 사이에 운행되던 급행열차를 경성-북경으로 변경 1947년11월 01일, 서울역으로 역명 변경 1957년12월 30일, 서울역 남부역사 준공 1969년02월 14일, 서울역 서부역사 준공 1974년08월 15일, 서울지하철 (서울-청량리) 개통 1975년09월 18일, 철도청 서부역사 준공 1981년09월 25일, 서울역사를 사적 제284호로 지정 1988년09월 11일, 서울역 민자역사 개시 1993년12월 17일, 서울역 문화관 개관 1997년04월 01일, 서울역 철도박물관 서울역관 개관 2004년 구 역사의 막을 내리다 경성역은 1947년 서울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00여년간 경성역과 서울역이라는 이름으로 영업해오던 구 역사가 2004년에 신 역사가 완공되면서 역사의 영업을 마쳤다. 2004년 KTX 고속철도 개통 및 구 서울역사 폐쇄 2007년08월, 철도청의 공사전환으로 국유문화재(사적 제284호) 소유권 이전 2007년08월 30일, 문화재청에서 문화체육관광부로 관리 위임 2011년 문화역서울284로 새롭게 시작하다 2008년부터 2년간 경성역 초기 공사 당시 사진을 바탕으로 원형 복구 공사에 착수하였다. 2011년 8월에 ‘문화역서울284’라는 이름으로 구 역사를 새롭게 개장하였다. 이름에 붙은 284는 구 역사의 사적번호로서, 1981년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정되었다. 2011년04월 15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 위탁 운영 2011년08월 08일, 복원공사 준공 완료 2011년08월 09일, 문화역서울284 개관] [옛 서울역에서 ‘KTX 개통 20주년 철도문화전’…속도혁명 이룬 20년 조망 부산일보 기사 입력 : 2024-03-28 김덕준 기자 casiopea@busan.com 3월 29일부터 4월 21일 개최 철도 재해석한 예술작품 선봬 KTX와 탑승한 사람들 이야기 한국철도공사(코레일)가 KTX 개통 20주년(4월 1일)을 앞두고 3월 29일부터 4월 21일까지 문화역서울284(옛 서울역)에서 철도문화전을 개최한다고 28일 밝혔다. 이번 문화전은 문화역서울284의 1~2층과 외부를 모두 활용해 총 13개 전시관을 운영한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철도문화전의 전시 주제는 ‘저니 비욘드 플러스: 여정 그 너머’다. KTX와 철도가 일으킨 변화상을 탐구한 예술작품과 철도 유물 및 기술품 체험전시로 구성됐다. 전시 총감독은 밀라노 디자인위크, 공예트렌드페어에서 예술감독을 맡은 강신재 공간디자이너가 맡았고, 문화체육관광부 파리메종오브제 예술감독을 역임한 김미연 디렉터가 큐레이터를 담당한다. 전시는 미디어·조각·설치·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10여 명의 신진‧중진 작가와 협업해 철도를 재해석한 예술작품을 선보인다. 대한민국에 속도혁명을 촉발한 교통수단으로서의 KTX의 의미를 조명하고, 사회와 시간을 잇는 통합의 수단이 된 KTX와 그 안에 탑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미시적으로 탐구한다. 특히, 철도 기술품은 코레일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번에 볼 수 있는 아카이브 방식으로 전시했다. 시설·전기·차량·연구 등 4개 분야에서 개발한 철도 장비와 부품을 통해 지속적인 진보와 발전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연도별로 변화한 열차 모형을 좌우측과 중앙에 배치한 대형 모니터를 통해 디지털 트윈으로 경험할 수 있다. 대형 디오라마와 3D 영상, VR 체험, AI와 포인트 클라우드 기술로 구현한 시냅틱 무브먼트 등도 체험할 수 있다. 전시장 외부에서는 KTX 해설강의 영상을 관람할 수 있다. 코레일이 KTX 20주년을 기념해 편찬한 KTX 브랜드북 ‘달려온 20년, 달라진 대한민국’에 대해 역사 커뮤니케이터 최태성 강사가 해설하는 1시간짜리 강의다. 전시 기간 내 매주 토·일요일 하루 3회(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4시) 송출된다. 28일 오후 열린 개막식에는 한문희 코레일 사장과 장동광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장, 코레일 명예기자단 등이 참석했다. 한편 이날 코레일은 가수 영탁을 코레일 홍보대사로 임명하는 위촉식도 함께 개최했다. 영탁은 “국민의 동반자인 KTX와 함께 기분 좋고 긍정적인 기운을 전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문희 코레일 사장은 “철도가 대한민국의 일상과 문화를 변화시킨 순간들을 다채롭게 보여드리도록 준비했다”며 “우리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철도의 모습을 느껴보시길 바란다”고 밝혔다.] 18:05~18:07 서울 중구 통일로 1 번지에 있는 서울역 경의중앙선 1번 출구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8:07~18:12 서울역에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는 경의중앙선 전철 승차 대기 18:12~18:38 서울역에서 경의중앙선을 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26분 소요]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위치도 [국립기상박물관&대한민국역사박물관&조계사] 위치도 [농업박물관&쌀박물관] 위치도 [쌀박물관&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위치도 문화역서울284 위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