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헌
장은수
우연히 다시 만난 검은 대숲 길목에서
식계태엽 되감듯이 회리바람 서걱댄다
죽담 위 비질자국이
획을 삐쳐 내리긋고
세월도 비껴 앉아 곧추선 가지마다
휘어진 산 그림자 초충도병* 그러안고
돌 틈새 비집고 나온
초록 죽순竹筍 돌올하다
오죽 뿌리 끝에 달린 한 사내 울음소리
다시금 되살아나 하늘문을 열고 있나
햇살이 등을 척 굽혀
젖꼭지를 물린다
* 식물과 벌레를 그린 신사임당의 그림.
-《정음시조》2022. 제4호
동굴, 혹은 둥글
전영임
찔러 보고 싶은 거야, 너랑은 다르거든
꾹! 눌러 상처 줘도 금방 튀어 오르니까
아닌 척 흉내 내기가 더 힘든 줄 모르고
쇠똥구리 한 마리가 힘들게 올렸어도
발 끝에 차인 순간 구렁 속에 빠졌지
시작한 처음보다도 굼깊은 나락으로
이번 생은 끝났어, 방심을 오래한 탓
오를 수는 없다는 걸 진즉에 알았거든
계단을 올라서려면 직선이어야 했어, 암만!
동그란 게 이젠 싫어 손가락을 고쳤어
우뚝하게 세운 다음 꼭 묶어 매단 깃발
아무리 바람 불어도 직각으로 나부낄,
하얀 톱풀이 점점 커진다
정옥선
액자가 목을 빼고 늦도록 너를 본다
마르는 잎사귀에 해가 잠깐 멈추고
커피가 선한 향으로 식어가는 오후 네 시
고무줄이 탁자에서 찌그린 원을 그린다
오해와 이해 사이, 넷 혹은 세 명이 있다
내용에 귀기울이는 하얀 톱풀이 커진다
하루를 필사하면 눈물이 말라 갈까
경고를 무시하고 연두를 찍고 다닐 때
딱새가 느티나무를 슬쩍 밟고 날아간다
지칭개
정진희
언젠가 그에게서 구원을 본 적 있다
열무 씨 한 개도 싹틔우지 못한 몸에
빠르게 번지는 변종
점점 나를 지배할 쯤
발아래 납작해서 비굴해 보였는데
바닥을 꼭 잡고 단단하게 퍼져있어
내 속을 꿰뚫어 오는
텅 빈 듯 꽉 찬 손짓
눈물 하나 샐 틈 없이 완벽한 자세였다
그 피와 살과 뿌리를 며칠 고아 마시고
열 몇 개 돌을 뱉어냈다
내 밭에 그가 왔다
가족사진을 보는 이유
조성국
저도 가끔 힘들 때는 한 번 꺼내 본답니다.
사진 밖과 딴판인 표정들 보면 드는 생각,
하기야 이것들과도 사는데 못 할 게 뭐가 있나…
-《정음시조》2022. 제4호
카페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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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調의맛과˚˚˚멋
장은수 시인의 <오죽헌> 외
안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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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7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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