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줄 비는 날 / 강 서
가을이 오니 바람도 신나서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흩뜨려 놓는다. 하지만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삭풍으로 변할 것이다. 겨울이 오기 전에 제주 사람들은 가을에 걷어 들인 곡식을 말려서 고방에 갈무리했다. 고구마는 땅을 파서 저장했다. 비나 눈이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띠로 엮어 만든 주저리를 씌운다.
해안도로를 걷는데 어느 묵정밭에 베어 낸 흔적이 없는 새(띠)가 한쪽으로 누워있다. 초가지붕이 많았던 옛날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밭 주인이 벌써 베어갔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보셨으면 “저 정도면 열대엿 뭇은 충분히 나올거여.”라며 아까운 눈으로 쳐다보셨을 것이다.
일 년이나 이 년에 한 번 가을이면 초가지붕을 이어야 하는데 지붕을 덮고 줄을 꼬았으니까 새는 귀했다. 길이가 긴 것은 다양한 용도로 쓰였으므로 가격이 높다. 다음은 집줄 놓는 용인데 좀 짧다. ‘각단’이라 불렀는데 한 뭇(한 단)에 1980년대 초반에는 이천 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외할아버지는 새왓(띠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밭)과 소들을 위한 촐왓(꼴밭)도 있었고, 땔감을 위한 소낭(소나무)밭도 가지고 있었는데, 우리집을 비롯한 대부분의 농부들은 농사짓는 밭이 전부였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출발해 소나무밭이나 들판의 덤불에서 자라는 새를 베었다. 베어 낸 것은 한 뭇 두 뭇 묶어서 세워 놓는다. 그래야 종일 수고한 것을 잊지 않고 가져올 수 있다.
어머니는 새벽밥을 지어놓고 자는 우리를 깨운다. 만장굴 어디쯤 무슨 나무가 있는 데서 새를 베고 있을 테니 학교가 끝나면 손수레를 가지고 그곳으로 오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 작업을 ‘새 뽑으러 간다’고 했다. 야생의 새는 온갖 잡초와 가시들 사이에서 자라기 때문에 사실 한 올 한 올 뽑는 것과 같다. 여러 뭇을 베어 낼 수 있게 무더기로 자란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어쩌다 그런 곳을 발견하면 행운이다. 너나없이 초가집에 살았으니 새는 비쌌다.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그곳은 우리의 마음을 붙잡는 것으로 가득하다. 잘 익은 머루와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의 열매를 탐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또 무더기로 피어있는 들국화는 어떤가. 꽃을 꺾어 들고 온갖 세상 구경을 다 하다가 어머니 계신 곳에 다다르면 그제서야 제정신이 든다. 길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이다. 꽃은 얼른 버리고 너무나 먼 들길을 걸어와 기력이 다한 양 급히 피곤한 기색으로 어머니를 대한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는 다 알고 계셨을 것 같다. 하지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손수레에 새를 가득 싣고 남는 것은 지게에 졌다. 점심을 먹었던 그릇이 걸을 때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어둠을 등에 지고 돌아왔다.
다른 집의 어머니는 혼자 그런 일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집안을 돌보지 않고 술만 마시며 세월을 보내는 두르웨(정신 빠진 사람) 같은 가장도 있었다. 아내가 물질하며 곡식을 거둬들여도 집안 살림 돌아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술 마시고 큰소리치며 무위도식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 못했다. 몇 날 며칠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두 불 세 불 조밭의 검질을 매는(두 벌 세 벌 조밭의 김을 매는) 부인과 달리 일하지 않았다. 제주에서의 조는 보리와 함께 밥을 지어 먹는 일 년 양식이다. 정성으로 키워 소출이 좋아야 어린 자식들의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해 질 무렵이면 한길에서부터 인사불성이 되어 “내 손은 대통령과 악수한 손이여.”라고 웨울리는 소리에(크게 울리는 소리에) 동네 사람들은 그가 오늘도 고단한 하루를 살아낸 부인을 괴롭힐 것이며, 깊은 밤이 되어 술이 깨면 큰아이에게 주전자를 들려 보내 외상술을 받아오게 할 것을 예견했다.
도와줄 딸이 없고 어린 아들만 있는 집의 어머니 또한 고생이 막심했다. 밭일이며 물질, 빨래와 식사 준비 등 집안일까지 혼자 했으니 말이다. 그때는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지 않았다. 물을 길어 오는 것이나 땔감을 구하는 일도 여자의 몫이었다. “쇠로 못 나 여자로 난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여자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물이 귀했으므로 물을 길어다 부엌의 항아리부터 채워야 한다. 중산간 주민들은 식수로 쓸만한 물이 나오는 곳까지 가서 물을 길어와야 했다. 흘리는 물을 최소화하기 위해 입구가 좁은 물허벅을 사용했다. 물을 쓰는 데도 ᄌᆞ냥정신(절약정신)이 있었다. 먹는 물도 그렇고 허드렛일하는 물조차 아껴 썼다. “돼지 한 마리 잡는데 물 한 허벅.”이라는 말에서 물의 귀함을 알 수 있다.
농부 중에는 아내와 같이 밭을 오가는 부지런한 남편도 많았다. 그런 집은 겨울에도 훈내가 나고 아이들은 큰 고생을 몰랐다. 우마차를 끌고 가서 새를 뽑아 왔으니, 아이들은 지게를 가지고 다닐 일이 별로 없었다.
‘제주도에서는 초가지붕이 태풍과 같은 거센 바람에 날리는 것을 막기 위해 굵은 집줄로 지붕을 바둑판처럼 단단히 얽어맸다. 2년에 한 번 가을, 집마다 집줄을 꼬는 일은 필수적인 작업이었고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초가집을 얽어매는 줄을 ‘집줄’이라고 한다. 집줄을 한 갈래씩 꼬는 일을 ‘집줄 놓는다’라고 한다. 두 갈래를 한데 엮어 꼬는 것을 ‘집줄 어울린다’라고 한다. 넓은 집 마당이나 긴 올레에서 많은 일꾼이 모여 집단으로 줄을 놓거나 어울리는 작업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가 바로 ‘집줄 놓는 소리’이다.
이 노래는 각단이라는 짧은 띠로 한 갈래씩 집줄을 꼬면서 부르기 시작하여, 두 갈래 줄을 하나로 어울려 굵은 줄을 만드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끝날 때까지 구성지게 부른다. 선소리꾼이 유장한 가락으로 먼저 소리를 메기면 일꾼들은 후렴을 받는다.
집줄 놓는 소리는 제주도의 수눌음(품앗이)이라는 미풍양속이 반영된 남성 노동요이다. 집을 새로 짓거나 한꺼번에 안채와 바깥채의 초가지붕을 이는 작업을 할 때는 일가친척과 마을 사람이 함께 모여 작업을 하면서 노래와 웃음으로 괴롭고 힘든 일을 치러냈다. 집줄 놓는 소리는 제주도 전통 초가지붕을 이는 일과 관련된 협업 노동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독특한 노래로서, 일부 지역에서만 드물게 전승되는 희귀한 건축노동요라는 점이 주목된다.’
집줄 놓는 노래
스르릉 스르릉 오호 허어어 오호
줄 놓는 소리야(줄을 꼬아 가면서 부르는 소리로구나)
오널 하루해도 오호 어허어 호호
서산에 걸렸구나
진줄이라근(긴 줄은) 오호 어허어 오호
정낭톡 ᄒᆞ고(정낭이 있는 곳까지 가도록 하고)
ᄍᆞᆯ른줄이라근(짧은 줄은) 오호 허어어
엿돌ᄒᆞᆫ ᄒᆞ라(잇돌까지 가도록 한다.)
진줄이라근 오호 허어어
큰아덜 비곡(큰아들이 꼬고)
ᄍᆞᆯ른 줄이라근 오호 허어어
말젯놈이 비라(셋째 아들이 꼬아라)
이 줄 비라 저 줄 비라 오호 허어어
ᄒᆞᆫ저나 비라(어서 비어라)
잘도나 비여나가는구나 오호 허어어
쌀대같이 비여나간다
뒷집의 고서방이라근 오호 허어어
진줄 어울리곡
ᄍᆞᆯ른 줄이라근 오호 허어어
앞집의 송서방 어울리라
이 줄 비라 저 줄 비라 오호 허어어
ᄒᆞᆫ져덜 비라(빨리들 꼬아라)
비는 사름은 비여나 가곡(줄을 비는 사람은 비고)
놓는 사름은 놓아나 간다(줄을 놓은 사람은 놓아 간다)
각단 뭇에 소웽이도 하구나(새 각단에 엉겅퀴도 많구나)
우리네 인생은 오호 허어엉
ᄒᆞᆯ 일도 하다(할 일도 많다)
줄 호렝이(줄을 꼬아 가는 도구의 명칭) 빨리 돌려근 오호 허어이
이 줄을 비여나간다. 오호 허어어
기름떡이나 먹었는지
문질문질 잘도나 어울려간다
각단 뭇 안에 무쉐 가시나 캐어내라
저녁밥이랑 ᄑᆞᇀ이나 놓으라(저녁밥엔 팥을 넣어라)
메누리라근 초마기나 허여근(며느리는 열무김치나 내놓고)
콩국 끓여근(날콩가루를 넣어 국을 끓여서) 오호 허어어
허리끈 클러근 먹게 (허리끈을 풀고 먹자) 오호 허어어
솔각불이근 싸지도 말게(불은 켜지도 말자)
어둡기도 전에 요 일을 ᄆᆞ쳐보자(어둡기 전에 이 일을 마쳐보자)
(집줄 놓는 소리–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덕수리에서만 전승되는, 초가집을 단단하게 엮을 띠줄을 놓으면서 부르는 노래
‘집줄을 꼬는 것을 ‘줄 빈다’ 또는 ‘줄 놓는다’라고 한다. 한 사람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로 각단 뭇을 풀며 줄을 놓는다. 줄 꼬는 작업은 ‘호렝이’를 이용하며 날을 정해 한 가족 단위 혹은 공동으로 치러진다. 줄 놓은 날은 아주 흥성스럽고 부산한 날이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들어와 큰 줄을 만들기 위해 두 개의 작은 줄을 어울리며, 손이 부족할 것 같으면 도와주고 막걸리라도 한잔 마시게 된다.
큰 줄을 만들 때는 작은 줄을 다시 뒤치는 도구를 이용하여 두 줄을 어울려 하나로 만든다. 굵기가 굵고 긴 줄은 지붕 상머루의 가로줄로 쓴다. 그리고 작은 줄은 세로줄로 사용한다. 세 칸 집에는 큰 줄이 30여 개, 작은 줄 60~100개의 수가 필요하다. 초가집은 해마다 또는 2년에 한 차례 새로 바꿔 줘야만 제주도의 겨울바람에 안심이 된다.’
바람이 많이 부는 제주의 환경상 초가의 지붕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막기 위해 집줄로 묶어 잘 고정해 주어야 한다. 거센 바람이 불고 나면 제때 지붕을 일지 못한 집은 헤쳐진 머리칼처럼 묵은 띠가 일어서 있곤 한다.
지붕에 새를 펼쳐 집줄로 고정하는 일을 ‘지붕 인다’라고 한다. 지붕을 일 때에는 친척이나 동네 사람들이 도와주는데 이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미풍양속이다. 지붕을 이는 일은 숙련된 이들이 한다. 바람이 잔 시간에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다. 지붕에 펼친 새는 미끈거려서 잘못하면 사람이 아래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지붕 위에 올라 작업하는 이들에겐 일당을 주거나 수눌음을 해 준다.
지붕에 사람이 올라가면 밑에서는 거왕대(굵은 대나무)에 묶인 집줄을 자른다. 햇수가 지나다 보니 오래되어 삭아서 풀지 못하므로 낫으로 베어 내는 것이다. 위에서는 그 줄을 걷어서 내려준다. 묵은 집줄은 불땀이 좋아 제삿날 두부를 만들거나 떡을 찔 때 귀한 땔감으로 사용된다. 꼬아 만든 것이기 때문에 불에 빨리 타지도, 쉽게 꺼지지도 않고 은근하게 오래 탄다.
지붕에 오른 사람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재작년에 아무리 지붕을 잘 일어도 굴곡이 생기게 마련이다. 지붕을 찬찬히 훑어보고 썩은 부분이 있는지 살핀다. 그 부분은 파내어서 각단으로 충분히 채워 준다.
이때부터 아래에서는 한 뭇씩 지붕에 새를 올린다. 이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긴 새 한 뭇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지붕에 오른 이들은 경험이 많은 나이 든 이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띠를 올리는 작업은 젊은 사람이 기운을 다해 수십 뭇의 띠를 지붕 위로 올려야 한다.
지붕에서는 새를 펴면서 줄로 묶는 작업이 이어진다. 온 사방에 새부터 펼쳐 놓으면 바람에 날아가 버리기도 하고 미끄러워서 일하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러니 새를 펼치고 나서 줄로 묶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줄의 간격을 똑바로 맞추어야 하고 교차로 묶어야 하므로 기술이 필요한 일이다. 이때 아래에서는 완전한 매듭을 짓지 않는다.
집을 일고 나서 보름이나 스무날 정도 뜸을 들이면 지붕이 착 가라앉는다. 그러면 다시 지붕에 올라 굴곡을 본다. 파인 데가 있으면 그때 다시 보완작업을 한다. 집줄을 풀어 그 부분에 각단을 채워 넣는다. 그러고 나서는 지붕 가지를 손 봐줘야 한다. 지붕 가지는 바람에 시달려 까진 곳이 많다. 그 부분을 들춰서 모양새 있게 각단으로 보충해 준다. 이때 모든 집줄을 힘껏 당겨서 완전히 단단하게 묶는다. 이 작업을 ‘집줄 봉우린다’ 라고 한다. 그러므로 집줄을 봉우릴 때도 각단이 또 필요한 것이다.
집줄을 묶고 나서 남는 것은 낫으로 깨끗이 잘라 준다. 이것으로 부엌에서 쓸 방석을 만든다. 나무로 만든 방석은 무겁고 딱딱하지만, 집줄로 만든 방석은 가볍고 오래 앉아도 엉덩이가 아프지 않다.
이 방석과 관련되어 제주 작가의 작품 한 부분을 소개한다. ‘초집 일 때 집줄을 ᄃᆞᆼ기멍 고쳐메고 남은 집줄은 ᄍᆞᆯ라내는디, 그 집줄을 데끼기 넘이 아까우난 집읏인 ᄃᆞᆯ벵이추룩 벵벵 감으멍 벵도글락ᄒᆞᆫ 방석도 멘들앙 정지서 씨기도 ᄒᆞ여십주. 메날 멜싹ᄒᆞᆫ 방석에 앚앙 불 ᄉᆞᆷ당 새판칙ᄒᆞᆫ 방석에 앚이민 나 지레도 막 커진 거 닮곡 ᄎᆞᆷ말 돈방석에 앚인 거 추룩 잘도 지꺼져서마씨.
초집을 다 일민 그슨새로 불 ᄉᆞᆷ을 때가 잘도 보드라우난 좋아양. 불이 보리낭추룩 와랑와랑 타도 안 ᄒᆞ곡 ᄎᆞᆷᄒᆞᆫ 아이추룩 잘 탓주만 불청은 잘도 하영 나와 난 거 닮수다.’
(초가집 일 때 집줄을 당기면서 고쳐 매고 남은 집줄은 잘라내는데, 그 집줄을 버리기 너무 아까우니까 집 없는 달팽이처럼 빙빙 감아 둥근 방석도 만들어 정지서 쓰기도 했지요. 매일 납작한 방석에 앉아 불 때다가 새로 만든 방석에 앉으면 내 키도 많이 커진 것 같아서 정말 돈방석에 앉은 것처럼 기분 좋았어요.
초가집을 다 일면 그슨새로 불 땔 때 보드라우니까 정말 좋아요. 불이 보릿짚처럼 화르륵 타버리지도 않고 참하게 잘 탔지만 재는 정말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
보통 집줄 놓는 일은 종일 걸리고 지붕 이는 작업은 오전에 바람이 자는 시간에 한다. 집줄 빌 때 호렝이(호롱이. 줄, 참바 따위를 뒤트는 제구)는 너무 빨리 돌려도 안 되고 너무 늦게 돌려도 안 된다. 줄이 굵어졌다 얇아졌다 하면 일 년도 되기 전에 끊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줄을 놓는 사람이나 비는 사람 서로의 속도가 맞아야 한다. 오래 비어서 팔이 아파 속도가 늦어지면 줄 놓는 사람은 비는 이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라며 호통친다. 해가 지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의 집줄 놓는 날엔 우리도 일손을 보탰다. 외할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이 아침 일찍 일손을 도우러 왔다. 시간이 좀 지나면 이웃집의 아이들도 오기 시작한다. 호렝이로 집줄을 꼬는 일은 팔이 아파서 아이들 여럿이서 교대하며 줄을 비었다. 이날은 점심이 무척 기대된다. 국수를 처음 먹어본 것도 이때였다. 보통 집줄 놓는 날엔 팥밥을 먹거나 칼국수를 먹었다. 옛날의 국수는 보기 어려운 고급 음식이었다. 제주에서는 1970년대까지도 국수는 쉽게 먹기 어려웠다.
무쇠솥에선 구수한 멸치육수가 팔팔 끓었다. 건면을 삶아 만든 한 그릇의 국수는 얼마나 맛있었던가. 쪽파를 다듬어 송송 썰어 넣은 국수는 씹지 않아도 후루룩 넘어가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메밀국수도 아닌, 밀대로 밀어서 만든 칼국수도 아닌 이 국수는 평생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1980년대 들면서 고기를 삶은 육수에 간을 하고 고기 몇 점을 썰어 넣은 고기국수를 대접하기 시작했다. 일 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한 고기국수의 그 베지근한 맛(고소하고 기름진 맛)을 어떻게 표현할까. 특별한 날에만 고기를 삶았으므로 큰마음을 먹어야 사는 것이다. 그만큼 큰일을 치를 때 대접했는데 그것이 제주도 고기국수의 시작이 아닌가 한다. 마을이나 동네의 큰 행사가 있을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옛날엔 쇠고기나 닭고기 먹기가 어려웠다. 집집에 통시(변소)가 있어서 흑돼지를 키웠다. 제주에서 고기라 하면 거의 돼지고기를 이르는 것이다. 명절 때는 돼지 추렴을 하여 제수용으로 쓰기도 했지만, 여전히 쉽게 먹는 집은 많지 않았다. 더구나 조냥정신(절약정신)이 투철한 제주 사람이 먹는 것에 큰돈을 쓸 리는 만무하다. “ᄒᆞᆫᄃᆞᆯ에 개역 시번, ᄌᆞ배기 시번 ᄒᆞ민 집안 망ᄒᆞᆫ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한 달에 미숫가루 세 번, 수제비 세 번 해 먹으면 집안 망한다는 말이다.
농사짓는 보통 사람들이 입에 좋은 음식을 자주 만들어 먹거나 낭비하는 것은 있을 수 없거니와 그럴만한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입 ᄌᆞ냥(입 절약)’을 강조한 속담은 많다. 큰 마을이 아니면 정육점도 없었다. 농사나 할 줄 알았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장사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이 많았다. 밭갈이 전날 콩나물과 두부를 사러 가게에 간 날, 그 집의 아이는 방에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집줄 비는 날, 고기 한두 근을 사 오면 삶는 냄새만으로도 흡족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심부름하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국수 그릇 하나에 고기 석 점이 올려지면 이때만큼은 어른이나 아이의 구분 없이 한 그릇을 차지하는 것이다. 줄 비는 아이나 줄 꼬는 어른이나 평등하게 한 그릇의 국수를 먹는다. 평화롭고 흡족하고 남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식사였다.
제사 때 나누어 주는 반(한 사람 몫의 음식)을 받으면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뚜렷했다. 마루나 방에 빙 둘러앉은 어른에게 주는 반에는 여러 가지 떡은 기본이고 돼지고기 산적이 들어있다. 그 위에 얇게 썬 사과 한 조각과 기름떡(찹쌀 반죽을 별 모양으로 찍어내어 기름에 지져 설탕을 뿌린 떡)이 올라가 있지만 아이들 반에는 돼지고기 산적과 사과, 기름떡 등이 없었다.
옛날엔 음식이 귀해서 더 맛있었나 보다. 국수를 먹는 집줄 비는 날은 특별한 음식을 먹는 날이어서 어른이나 아이 다 좋아하는 날이다. 어른들은 막걸리를 한두 잔씩 마셔서 기분 좋은 상태로 오후의 나머지 일을 시작한다. 더 부지런히 줄을 비어야 한다. 개수에 맞춰 해가 지기 전에 일을 마쳐야 하는데 자칫 시간을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오후 서너 시가 되어 가면 일하는 사람들이 점점 지쳐가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한 목청 좋은 어른이 노래를 부르며 어서 끝내자고 독려한다.
우리 동네는 몇 집을 빼고 거의 1980년대부터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했다. 지붕 개량을 위해서는 지붕에 몇십 년 쌓인 그슨 새(그을린 새. 불을 때었기 때문에 연기가 지붕으로 올라가 그을음이 생긴 띠)를 걷어내야 한다. 주부들은 앞다퉈 지붕에 올라간다. 땔감으로 쓰려는 것이다. 얼굴이 검게 변하는 것도 아랑곳없이 바람이 잘 때 많이 걷어내야 한다.
일이 끝나고 마당에 내려왔을 때는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다. 마치 갱에서 나온 광부 같기 때문이다. 머릿수건은 까맣게 되었고 온몸에 검댕을 뒤집어쓰긴 했지만, 단시간에 많은 땔감을 얻은 게 어딘가. 이런 기회를 준 집 주인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게 일하고 나서 그들은 다시 바다나 밭으로 일하러 간다.
우리 집의 집줄 비는 날이 떠오른다. 마당에는 띠가 가득 쌓여 있고 남자 어른들이 많이 왔다. 일을 도와주려고 온 동네 아이들도 있다. 즐거운 점심 만찬이 끝나고 저녁을 먹고 나면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며칠 지나 지붕을 이은 날엔 마침내 끝났다는 안도감이 든다. 큰바람이 불어도 걱정 없다. 너나없이 그렇게 살아서 그런지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부러워했던 친구도 없고 그런 집도 없었다. 보고 또 봐도 허기가 지고 설레었던 것은 만화방의 만화책뿐이었다.
초가집이지만 아늑한 우리 집, 아궁이에 불만 때도 따뜻했던 온돌방에 마실 온 어른들이 ㄷ자로 앉아 드라마 「토지」를 보았다. 늦은 밤, 쌩쌩 부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비로소 아랫목은 우리 차지가 되었다. 불을 끄고 누우면 낮에 보았던 만화책이 아른거린다. 어른이 되면 키 높이까지 쌓아놓고 원 없이 보겠다고 생각하며 단잠에 빠진다.
참고문헌 :김신자 『보리밥 곤밥 반지기밥』,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 향토문화전자대전
구술 : ‘해녀와 초가집 민박’ - 김백윤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