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구 송파대로37길 77 번지에 있는
서울 송파 책박물관
송파책박물관
요약 :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위치한 구립박물관. 도서 관련 전시, 교육, 보존, 학술연구 사업을 진행한다.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송파대로 37길 77
문의 및 안내 : 02-2147-2486
규모 : 연면적 6,212㎡
관람시간 : 오전 10시~오후 6시 (오후 5시 30분 입장마감)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1일, 추석 당일, 설 당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위치한 송파구청 운영의 공립 책 전문 박물관으로 2019년 개관하였다.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아우르는 각 시대별 도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도서 관련 전시, 교육, 보존, 학술연구 사업을 진행한다. 연면적 6,212㎡ 규모로 지하 1개 층, 지상 2개 층을 갖추고 있다.
주요 시설
전시실은 박물관 지상 2층에 위치해 있다. 상설전시실은 “향유-선현들이 전하는 책 읽는 즐거움,” “소통-세대가 함께 책으로 소통하는 즐거움,” “창조-또 하나의 세상, 책을 만드는 즐거움” 3개 주제로 구성된다.
제1부 “향유” 상설전시실은 생활 속 조선 사대부의 독서, 조선의 독서광, 조선의 장서문화, 조선의 장서가, 조선 후기의 독서환경, 수진본의 6개 소주제를 통해 조선시대 독서문화를 조망한다.
제2부 “소통” 전시실에서는 1910년 이후 100여년 간 전개된 독서문화를 소개하는 도서와 관련 자료를 전시한다.
제3부 “창조” 전시실은 책을 집필하는 작가의 방,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출판 기획자의 방, 출판 편집자의 방, 책을 디자인하는 북 디자이너의 방 4개 소주제를 통해 도서 제작 과정을 소개한다.
지상 2층에는 도서문화 관련 특별전이 개최되는 기획전시실도 위치해있다.
전시시설 외에 디지털 콘텐츠 열람공간인 미디어 라이브러리, 도서 관련 창작 활동 공간인 북스튜디오가 지상 2층에 마련되어 있다. 지상 1층에서는 어린이 책 체험전시실과 전시 연계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키즈 스튜디오가 운영된다. 지하 1층 오픈 스튜디오에서는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수장고를 관람할 수 있다.
주요 소장품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 역, 계환(戒環) 주해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1433년 편찬된 종합의학서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 1480년 간행된 『춘추집전대전(春秋集傳大全) 』, 지석영이 출간한 국한문(國漢文) 단어집인 『언문(言文)』 등의 서적과 책장, 책 반닫이, 백자연적 등의 유물이 알려져 있다.
부대시설
전시 및 교육시설 이외에 행사 및 강연을 위한 어울림홀, 카페, 야외 정원이 운영된다.]
[조선 5대 독서광 : 세종대왕, 이황, 이이, 김득신, 이덕무]
[다독 시인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
노력하는 자가 성공한다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천재도 있고 둔재도 있다. 한 자를 가르치면 열 자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 번을 가르쳐도 한 자를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지능이 떨어진다고 해서 공부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에서 알 수 있듯이 노력하는 자가 오히려 성공한다.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은 1604년(선조 37년)에 태어나 문명을 크게 떨친 인물로, 화가 김득신과는 동명이인이다. 그는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지각이 발달하지 못해 노둔한 편이었다. 김득신의 아버지 김치는 이러한 아들을 질책하기보다 격려했다. 김치가 김득신에게 당부했다.
"학문의 성취가 늦는다고 성공하지 말란 법이 없다. 그저 읽고 또 읽으면 반드시 대문장가가 될 것이다. 그러니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마라."
"그래, 열심히 읽다 보면 반드시 외울 수 있을 것이다."
김득신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했다. 김득신은 그때부터 책을 잡으면 수없이 반복하여 읽었다. 『사기열전』 중 「백이전」을 11만 3천 번을 읽었고, 다른 책들도 1만 번 이상 읽었다.
한유 문장 사마천 『사기』를 천 번 읽고서야 韓文馬史千番讀
금년에 겨우 진사과에 합격했네 菫捷今年進士科
김득신은 스스로 시에서 『사기』를 천 번 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득신은 많은 시를 남겼는데 「용호(龍湖)」 「구정(龜亭)」 「전가(田家)」 등의 시가 유명하다. 어촌이나 산촌과 농가의 정경을 그림같이 묘사하여 한문 사대가로 불리는 이식으로부터 "그대의 시가 당금 제일이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문명이 널리 알려졌다. 그는 『백곡집(柏谷集)』을 남기고 80세에 죽었다.]
[이덕무(李德懋)
자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고증과 박학의 대가
출생 – 사망 : 1741 ~ 1793
조선후기 서울 출신의 실학자 그룹인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의 한 가지를 형성한 이덕무는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과 더불어 청나라에까지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날린 실학자이다. 그는 경서(經書)와 사서(四書)에서부터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출세에 제약이 많았다. 그러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여 서얼 출신의 뛰어난 학자들을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과 함께 검서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박물학에 정통한 이덕무는 사회 경제적 개혁을 주장하기 보다는 고증학적인 학문 토대를 마련하여 훗날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등에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정조에게 발탁된 서자 출신의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정종(定宗, 조선의 제2대왕)의 서자인 무림군(茂林君)의 10세손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인데 이 밖에 형암(炯庵)ㆍ청장관(靑莊館) 또는 동방일사(東方一士)라는 호도 사용했다. 특히 즐겨 사용한 청장(靑莊)이라는 호는 일명 신천옹(信天翁)으로 불린 해오라기를 뜻하는데, 청장은 맑고 깨끗한 물가에 붙박이처럼 서 있다가 다가오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청렴한 새라고 한다. 청장으로 호를 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성격을 상징한 것이라 하겠다.
이덕무는 서울 출신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성호(聖浩)이고 어머니인 반남 박씨는 토산현감 사렴(師濂)의 딸이었다. 할아버지 필익(必益)은 강계부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6살에 아버지가 아들인 이덕무에게 한문을 가르치고자 중국 역사책인 [십구사략]을 읽혔는데, 1편도 채 끝나기 전에 훤히 깨우친 영재였다. 16세에 동지중추부사 백사굉의 딸 수원 백씨와 혼인하였고, 20세 무렵에는 남산 아래 장흥방(현재 종로구 부근)에서 살았다. 이 무렵 집 근처 남산을 자주 오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많이 지었다.
이덕무는 가난한 환경 탓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학문에 비상하고 시문에 능해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사후에 그의 행장을 지은 연암 박지원은 시문에 능한 이덕무를 기리며 “지금 그의 시문을 영원한 내세에 유포하려 하니 후세에 이덕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또한 여기에서 구하리라. 그가 죽은 후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만나볼까 했으나 얻을 수가 없구나”하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이덕무는 청장이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호리호리한 큰 키에 단아한 모습, 맑고 빼어난 외모처럼 행동거지에 일정한 법도가 있고 문장과 도학에 전념하여 이욕이나 잡기로 정신을 흩뜨리지 않았으며, 비록 신분은 서자였지만 오직 책 읽는 일을 천명으로 여겼다고 한다. 가난하여 책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굶주림 속에서도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백 권을 책을 베꼈다. 이덕무의 저술총서이자 조선후기 백과전서라 할 수 있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史實)에 대한 고증부터 역사와 지리, 초목과 곤충,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적 편력은 실로 방대하고 다양하여 고증과 박학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묘지명을 지은 이서구(李書九)는 이덕무를 두고 “밖으로는 쌀쌀한 것 같으나 안으로 수양을 쌓아 이세(利勢)에 흔들리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인물”이라 평했다.
이덕무는 1766년 그의 나이 26세 때 대사동으로 이사한 후, 서얼들의 문학동호회인 백탑시파(白塔詩派)의 일원으로 유득공ㆍ박제가ㆍ이서구를 비롯하여 홍대용, 박지원, 성대중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적 재능에 비해 신분적 한계로 천거를 받지 못하다가 1779년 그의 나이 39세에 정조에 의해 규장각 초대 검서관(檢書官)으로 기용되면서 벼슬길이 열렸다. 1789년에는 박제가, 백동수와 함께 왕명에 따라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기도 했다. 검서관 이후에 사도시주부, 광흥창주부, 적성현감 등을 역임했다.
중국 시단에 알려진 조선의 시인
이덕무는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와 함께 사가시인으로 중국 청나라 문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시가 중국 시단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77년부터이다. 친구이자 유득공의 숙부이기도 한 유련(柳璉, 柳琴으로 개명, 1741~1788)이 1776년 중국을 방문하면서 훗날 사가(四家)로 불린 이덕무를 비롯한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4명의 시를 담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청나라 시인이자 학자로 이름 높았던 이조원(李調元, 1734~?)과 반정균(潘庭筠,1742~?)에게 소개하였고, 1777년 청나라에서 [한객건연집]이 간행되었다. 이 시집에 실린 이덕무의 시는 총 99수로 그 내용은 자연과 여정, 인물, 송별, 역사에 이르기까지 실로 매우 다양하다. 중국에 가 본적도 없던 이덕무였지만, 그의 시는 중국 시단에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한객건연집]이 소개되고 2년 뒤 이덕무는 연행단을 따라 중국을 방문했다. 이미 지명도를 쌓은 이덕무는 반정균을 비롯하여 이조원의 동생인 이정원, 기균, 옹방강, 축덕린 등 청조의 문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고, 이들을 통해 그의 시명(詩名)은 청조 시단에서 더욱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조원은 이덕무의 시를 가리켜 “건실하고 격조를 갖추어 네 사람 중에서 가장 노련하다”고 평했다.
시에 대한 그의 재주는 정조도 익히 인정한 바였다. 한번은 정조가 규장각 신하들을 불러놓고 [성시전도(城市全圖)]에 대한 백운시(百韻詩)를 짓게 하고는 각각 점수를 매겼는데, 이덕무가 1등을 차지했다. 정조는 “신광하의 시는 소리가 나는 그림 같고, 박제가의 시는 말하는 그림, 이만수의 시는 좋고, 윤필병의 시는 풍성하고, 이덕무의 시는 우아하고, 유득공의 시는 온통 그림 같다.”고 평했다. 정조는 이덕무의 시권(詩卷)에 우아하다는 의미의 ‘아(雅)’자를 썼는데, 이후로 이덕무는 아정(雅亭)이라는 호를 지어 사용하였다.
18세기 그들이 나누었던 우정
청나라에 소개된 [한객건연집]의 저자들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는 백탑파 혹은 이용후생파로 불리는 실학자이며, 지기(知己)의 정을 쌓은 벗이기도 하다. 특히 박제가ㆍ유득공과는 서자라는 비슷한 처지에서 오는 신분적 공감대가 있었다.
이덕무가 천애지기(天涯知己) 박제가를 알게 된 것은 24세 되던 1764년이다. 이덕무의 처남인 무인 출신 백동수의 집에 갔다가 현판 위에 써진 박제가의 ‘초어정(樵漁亭)’이라는 글씨를 인상 깊게 본 것이다. 3년 후 이덕무는 백동수의 집에서 박제가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그와의 첫 만남을 두고 “너무 맘에 들어 즐거움을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을 정도로 기뻐했다. 이덕무와 박제가의 우정은 1793년 이덕무가 죽을 때까지 근 30년간 이어졌다. 30년 동안 이덕무가 있는 곳엔 박제가가 있었고 박제가가 있는 곳엔 항상 이덕무가 있었다.
가녀리고 큰 키의 이덕무는 고상하고 조용했던 반면에, 박제가는 작은 키에 박력있고 자기 주장과 고집이 강한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외모와 성격은 달랐지만, 뜻이 맞았고 항상 서로를 그리워했다. 눈이 내린 어느 겨울날, 착암 유연옥의 집에서 해금 연주를 듣던 박제가는 한밤중에 자신의 벗 이덕무가 보고 싶어졌다.
“올 적엔 달빛이 희미했었는데 취중에 눈은 깊이도 쌓였네. 이러한 때 친구가 곁에 있지 않으면 장차 무엇으로 견딜 것인가. 내게는 즐겨 읽던 [이소]가 있으니 그대는 해금을 안고 야심한 밤 문을 나서 이덕무를 찾아가세.”
- 박제가의 [정유각집(貞蕤閣集)] 중에서
두 사람은 1778년 중국 연행에도 함께 갔을 정도로 인연이 깊었고, 1779년에는 규장각 검서관에 동시에 등용되어 십수년간 동료의 정을 나눴다. 잦은 숙직과 힘든 근무 속에서도 두 사람은 의지해가며 규장각 도서들을 편찬해 갔다. 사실 이덕무는 박제가 보다 9살이나 연상이었으나, 이들에게 나이차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아주 가난한 삶을 살았다. 하루는 빈곤을 겪던 이덕무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집안에서 제일 값비싼 것을 팔았는데, 그것이 [맹자(孟子)]였다. 글을 하는 선비가 책을 내다 판다는 것은 가지고 있던 전부를 내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덕무는 책을 팔아 밥을 해먹고는 유득공을 찾아가 크게 자랑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유득공 또한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그대가 옳다’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이덕무와 함께 술을 마셨다.
이덕무와 유득공은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左丘明,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학자)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술잔을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며 박장대소했다. 두 사람은 밤새 술을 마시며 맹자와 좌구명을 칭송했다. 1년 내내 굶주리며 책을 읽기만 한다고 해서 살 방도가 나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책을 팔아 끼니를 마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의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말에는 평생 글을 읽어봐야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었던 서얼들의 신분적 한계가 자조적으로 담겨 있다. 그러나 그의 기구한 현실은 유쾌하고 장난스런 태도로 승화되었고, 세상의 출세와 명예로부터 한 꺼풀 벗어난 자유인으로서의 경지로 나아갔다.
갑작스런 죽음과 남긴 저술
1793년 1월 25일 이덕무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본래 체력이 약한 데다가 규장각 검서관 생활에서 오는 고된 직무와 생활고를 겪다가 감기와 함께 폐렴 증상이 겹치면서 타계한 것이었다. 갑작스런 비보를 들은 박제가와 이서구, 박지원, 남공철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를 기리는 글을 지었고, 정조는 내탕금(內帑金: 임금이 개인적 용도로 쓰는 돈) 5백냥을 하사하여 그의 유고(遺稿)를 간행하게 하고 아들 광규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차했다.
이덕무의 박학다식은 이용후생파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가난하여 책을 사 볼 수 없어 집에는 비록 책이 없었으나, 책을 쌓아 둔 것과 다름없었다. 평생 동안 읽은 책이 거의 2만 권이 넘었고, 손수 베낀 승두세자(蠅頭細字: 파리만큼 작은 글자) 또한 수백 권으로서 자획이 방정하며 아무리 바빠도 속자(俗字: 원래 글자보다 획을 간단하게 만든 글자) 하나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쓴 책은 10여 종에 달하는데, “나의 글이 진귀하지 못한 것이라, 한번 남에게 보이면 사흘 동안 부끄러워진다. 상자 속에 깊숙이 넣어 두었는데 스스로 나올 날이 있을 것이다.”하여 처음 쓴 초집(初集)의 이름을 [영처고(嬰處稿)]라 하였다 한다. 또한 청장이라는 물새 이름을 자호(自號)한 뜻을 삼아 두 번째 문집을 [청장관고(靑莊館稿)]라 이름 지었다. 또한 듣는 대로 쓰고 보는 대로 쓰고 말하는 대로 쓰고 생각하는 대로 썼다는 의미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예절에 관한 [사소절(士小節)] 등이 있고, 그 외에 [청비록(淸脾錄)], [기년아람(紀年兒覽)], [청정국지(蜻蜓國志)], [앙엽기(盎葉記)],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 [예기억(禮記臆)], [송사보전(宋史補傳)],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등이 있다.
북학을 거부한 자국 중심의 세계관
북경유리창. 이곳은 이덕무와 박제가가 북경 연행 중에 중국 문인들과 만났던 장소이다. 이덕무는 박제가와 달리 청나라의 선진 문물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출처: 신영담,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
조선후기 특히 18세기는 실학자들의 중국 방문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시기였다. 홍대용과 연암 무리의 문인들인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가 모두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중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연행록(燕行錄)을 남겼는데, 이덕무는 [입연기(入燕記)]라는 연행록을 남겼다. [입연기]는 1778년 3월 17일 서울을 출발하여, 윤6월 14일 의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연행록이다.
이덕무는 중국을 다녀온 연암파 실학자들과 달리 청 왕조의 지배체제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인물이었다. 박제가와 절친한 사이였지만, 이덕무는 그의 친청적(親淸的)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을 다녀왔지만, 조선 선비들이 청을 오랑캐로 폄하하는 것을 비판한 박지원ㆍ박제가와는 서로 다른 중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덕무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국은 중국일 따름이고 조선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으니, 중원만 모두 옳겠는가? 비록 도회지와 시골의 구분은 있을망정 모름지기 평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대용과 박지원, 박제가와는 또 다른 자국 중심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그는 청나라와 조선을 자주적이고 평등한 관계로 인식하였다. 사실 청나라에 대한 이덕무의 생각은 전통적인 보수성을 띠면서도 자국 중심적이고 평등한 것으로 점차 변화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대명의리(大明義理)와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생각이 팽배했던 시기에 조선 선비들이 가졌던 청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이덕무를 통해 읽을 수 있다.]
송파구에 위치한 송파구청 운영의
공립 책 전문 박물관으로
2019년 개관한
송파 책박물관
석촌동 고분군의
제5호분에 관한
안내문
석촌동 고분군의
제5호분
석촌동 제5호분
분구를 흙으로 쌓은 봉토분으로서 유존 상태가 양호하고 또 이 일대에 남아있는 유일한 봉토분이므로 보존하기 위하여 분구 일부만 발굴 조사하고 내부 구조는 확인하지 않았다.
분구는 내부 구조 위에 흙을 다져 쌓아 덮고 그 위에 강돌과 막돌을 섞어 한 벌 깐 다음에 다시 그 위에 흙을 엷게 덮은 즙석분구이다.
이와 흡사한 즙석분구의 본토분인 가락동 제1·2호분이 이 고분에서 동분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2기의 고분은 1969년의 발굴 조사에서 그 내부 구조가 확인되었는데 가락동 제1호분은 토광 안에 목관을 안치한 목관토광묘 형식이었고 제2호분은 토광 안에 목관을 안치한 목관토광묘 협의의 것과 옹관묘 형식의 것이 함께 묻힌 구조형식의 고분이었다. 가까이에 있고 거의 같은 시기인 백제 전기 2기의 고분인 점으로 미루어 석촌 제5호분도 그 내부 구조는 목관토광묘 형식의 것으로 추측된다.
분구의 현재 크기는 지름 17m, 높이 3m인 원형봉토분이다.
석촌동 고분군의
제1호분에 관한
안내문
석촌동 고분군의
제1호분
석촌동 제1호분
일찍이 파괴된 고분 위에 흙이 덮이고 민가가 들어서 상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발굴 조사에서 드러난 적석 상태에 의하여 2기의 고분이 합쳐져 이루어진 쌍분으로 보인다.
즉 동서 9.9m, 남북 8.9m 크기의 북분과 동서 9.6m, 남북 9.8m 크기의 남분이 합쳐진 것인데 함침에 있어 남·북분 서쪽 기단부는 너비 3.2m의 적석단으로 이어졌다.
내부 구조는 남분에서만 확인되었는데 길이 20cm~30cm 크기의 표갠돌로 네 벽을 쌓고 바닥에 10cm 안팎 포갠 돌 조각·자갈 등을 깐 석곽 4개가 있었다. 4개의 석곽 중 중앙에 가장 큰 것이 장축을 동서 방향으로 놓였으며 작은 석곽 3개는 북쪽 적석벽에 잇대어 동서 방향으로 1열을 이루고 놓여 있었다. 가장 큰 중앙의 석곽은 길이 약 2.5m 너비 약 2.3m이고 1호 소형석곽은 길이 약 1.8m·너비 1.2m, 2호 소형석곽은 길이 1.6m·너비 1.4m, 3호 소형석곽은 길이 1.2m·너비 1.0m이다.
그리고 평면모양이 이 적석총과 거의 같은 것으로는 고구려의 적석총인 중국 길림성 환인현 고려묘자촌 제15호분, 평안북도 송암일 제45호분 등이 있다.
석촌동 고분군의
제1호분
내원외방형 돌무지무덤에 관한
안내문
내원외방형 적석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오래 전에 분구, 내부구조, 기단부 등이 파괴되어 흙이 덮이고 그 위에 민가가 들어서 고분의 원형을 밝힐 수 없으나 발굴 조사에 의하여 고분 기단부의 서남 모서리와 서·북쪽의 석축 기단 일부를 찾아냈다. 찾아낸 고분 기단부의 석축 부분을 바당으로 복원 정비하니 안쪽은 지름 11.4m의 원형을 이루고 바깥쪽은 변 길이 16m의 방형이 되었다.
이로서 이 적석총의 기단부의 모양은 내원외방형이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안쪽 원형 석축 바닥에서는 적석 토광묘 2기가 석관묘 3기가 드러났는데 이러한 적석 토광묘와 석관묘 위에 이 적석총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 고분에는 상부가 평면 원형이고 하부가 평면 방향인 상원하방분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평면의 모양은 이 적석총의 기단 평면 모양과 흡사하다.
내원외방형 돌무지무덤
제3호 움무덤에 관한
안내문
제3호 움무덤을 재현해 놓은
무덤
석촌동 제3호 토광묘
제3호 토광묘는 표토 밑 70cm에서 드러났고 평면은 네 모서리가 둥그스럼한 장방형이며 장축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두었다. 벽면은 수직이고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바닥의 북서쪽 모서리에 회청색의 목이 짧은 단지 1개가 놓여 있었다.
묘광의 규모는 길이 230cm·너비 84cm·높이 18cm이다. 이 모형 토광묘는 원형 토광묘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하여 원형 토광묘에 방수시설을 하고 그 바로 위 50cm 되는 곳에 원형 그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의 토광묘는 이 지역에서 3기가 드러났다.
석촌동 고분군 중
현재 발굴조사 작업이 진행중인 곳
석촌동 고분군 중
현재 발굴조사 작업이 진행중인 곳
석촌동 고분군에서 바라본
롯데월드타워
석촌동 고분군의 제2호분
석촌동 제2호분
제2호분은 복원 정비하기 이전에는 길이 약 25m, 너비 약 20m, 높이 3~4m 크기의 봉우리 모양을 이루고 남아있던 것으로서 봉우리 모양의 분구 기저부 주위에는 민가가 들어서고 돌담이 둘러 있었으며 파괴된 분구 위에는 약 10~3cm 두께로 흙이 덮여 있었다.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제2호분의 분구 축성은 제1단의 바깥둘레에 1m 정도 높이로 포갠 돌을 쌓고 그 내부에 진흙을 다져 채웠으며 제2단은 제1단의 적석 가장자리에서 얼마쯤 안쪽으로 들어가서 포갠 돌을 쌓은 다음에 다시 그 내부에 진흙을 다시 채우고 제3단은 제1, 2단과 같은 방법으로 축성하고서 정상부에서는 둥그렇게 흙을 덮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제1단의 동·서·남쪽 면에는 지탱석이 각각 1개씩 남아 있었다. 내부구조의 확인에 있어 동북 1/4구역과 서북 1/4구역의 일부만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전모는 알 수가 없고 다만 동북 1/4구역의 바닥에 자갈과 막돌조각이 섞여 깔려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며 깔린 돌 사이에는 붉은 갈색 연결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다.
복원 정비된 제2호분의 제1단은 길이 동서 16.4m, 남북 16.5m, 높이 90cm,단의 너비 2m이며 제2단은 길이 동서 12.5m, 남북 12.6m, 높이 0.9m,단의 너비 2m이며 제3단은 길이 동서 8.5m, 남북 8.6m, 높이 1.7cm, 단의 너비는 정상부에 흙이 덮여 있어 확실하지 않으며 전체 높이는 3.5m이다.
그리고 제1단 바닥 서북쪽에는 장축을 동북~서남 방향으로 둔 목곽 토광묘 1기가 드러났는데 크기는 길이 2.5m, 북쪽너비 1.6m, 중앙너비 0.4m, 남쪽너비 0.65m, 길이 0.1m~0.15m이다.
이러한 구조 형식의 적석총은 분구·내부 구조 등 고분 전체를 돌로 쌓아 축조한 고구려 식의 전형적 적석총이 변하여 백제화된 것으로 보인다.
석촌동 고분군의 제2호분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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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 고분군의 제2호분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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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 고분군의 제2호분
석촌동 고분군의 제4호분과
그 뒤로 보이는 잠실롯데타워
석촌동 고분군의 제4호분
석촌동 고분군의 제4호분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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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 고분군의 제4호분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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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 고분군 중 가장 거대하며
조성시기와 규모로 보아
근초고왕 혹은 근구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석촌동 고분군의 제3호분
석촌동 고분군의 제3호분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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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 고분군의 제3호분
석촌동 제3호분(가장 큰 고분)
제3호분은 가로 50.8m, 세로 48.4m, 높이 4.5m로 규모는 석촌동 고분군 중 가장 거대하며 조성시기와 규모로 보아 근초고왕 혹은 근구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석촌동 고분군의 제3호분
석촌동 고분군의 제3호분
서울 석촌동 고분군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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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 고분군~삼전도비]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롯데월드타워
[석촌동 고분군~삼전도비] 구간
탐방로 도중의
잠실호수교에서 바라본
롯데월드의 매직아일랜드
[석촌동 고분군~삼전도비] 구간
탐방로 도중의
잠실호수교에서 바라본
석촌호수 서호
[ 잠실호수교는
석촌호수 서호와 동호의 사이에 위치한 다리이다.]
삼전도비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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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비명이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인
삼전도비
서울 삼전도비(三田渡碑)
요약 :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戰勝碑).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사적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
시대 : 조선
크기 : 전체 높이 5.7m, 비신 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
1639년(인조 17) 청나라가 쳐들어온 병자호란 때 조선이 패배하고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은 후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세운 비석이다. 원래의 비명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이다.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이 글을 짓고, 글씨는 오준(吳竣), 비명(碑名)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비신은 대리석, 귀부는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5.7m, 기단을 제외한 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이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쪽 면에는 한문으로 새겼고, 다른쪽 면에는 만주문(滿洲文)과 몽골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비석 하나에 3개국 문자를 사용하였다. 비석의 모양은 머리의 이수(螭首), 받침돌의 귀부(龜趺) 조각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석조물의 특징적인 것으로 꼽힌다.
원래 석촌호(石村湖) 주변에 세워졌으나, 그 치욕적인 의미 때문에 1895년(고종 32)에 매몰하였던 것을 일제강점기인 1913년 일본에 의해 다시 세워지고, 1956년 당시 문교부에서 국치의 기록이라 해서 다시 땅 속에 묻었다가, 1963년에 다시 세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다가 2010년 4월 고증을 거쳐 최초의 위치인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겨졌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5.7m, 비신 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인
삼전도비
1639년(인조 17) 청나라가 처들어온 병자호란 때
조선이 패배하고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은 후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세운 비석인
삼전도비
삼전도비 앞에서 바라본
롯데월드타워
삼전도비
[삼전도비~한국 광고박물관]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롯데호텔 월드(잠실 롯데호텔)
[삼전도비~한국 광고박물관]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롯데월드타워
송파구 올림픽로35길 137 번지에 있는
한국 광고문화회관
3층에 한국 광고박물관이 있는
한국 광고문화회관
한국광고문화회관 건물의
층별 입주기관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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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고문화회관 건물 3층에 있는
한국 광고박물관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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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고박물관
한국 근현대 광고를 한 번에 조망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한국광고박물관
소재지 :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35길 137
한국광고박물관은 한국 광고계의 숙원사업으로 한국 근현대 광고 120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2008년 11월 7일에 서울 송파구 잠실에 개관한 교육.문화 인프라시설이다.
광고는 대량생산.소비되고 사라져버리는 단순 창작물이 아니라 광고는 정보이고 예술이며 또한 엔터테인먼트이면서 우리의 문화이다.
한국 근현대 광고역사는 1876년 강화도조약, 즉 한 · 일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 체결이후 서구문물이 유입되면서 신문발행과 같은 시대적 변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1883년 11월 20일『한성순보(漢城旬報)』제3호 회사설(會社設)에 ‘광고’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이후, 한국 최초의 근대 광고는 1886년 2월 22일『한성주보(漢城周報)』 제4호에 게재된 ‘덕상세창양행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이라는 광고였다.
이와 같이 한국의 근현대 광고는 19세기 후반 개항기와 함께 시작한 이래 100년을 훌쩍 넘어섰고, 이제는 세계10위권 안에 드는 광고대국이 되었다. 이렇게 100년이 넘는 한국 근현대 광고가 21세기 문화 · 예술, 정보 · 기술의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생활 콘텐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한국광고 박물관은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한국광고박물관은 광고를 사랑하는 모든 광고인들에게는 광고정보와 콘텐츠를 공유하는 교류의 장이 되며, 한편 생활 속에서 광고를 접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광고의 참가치를 이해하는 교육 · 체험의 장이 될 뿐만 아니라 여가와 휴식의 공간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설립목적 및 연혁
박물관 설립목적
한국 근현대 120년 광고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공익적인 교육ㆍ문화 인프라 시설 구축
일반인들에게 광고를 이해할 수 있는 교육 공간이면서 삶의 활력소가 되는 휴식ㆍ여가의 공간으로 자리매김
사장되어 가는 다양한 광고자료를 수집·보존하여 광고계에 필요한 광고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 광고문화 및 산업발전에 기여
광고의 순기능 홍보를 통해 방송과 광고의 이미지 제고
규모 및 장소 : 912.40㎡(276평), 광고문화회관 3ㆍ4층 〔전시장 : 667.77㎡(202평)/수장고ㆍ준비실 : 244.63㎡(74평)
전시장 구성 : 광고의 유래, 광고로 보는 한국사회문화사, 광고체험, 세상을 움직이는 광고, KOBACO와 공익광고 등 8개 전시 Zone
개관 : 2008.11.7.
박물관 연혁
한국광고박물관 설립 계획 수립(‘05. 3. 22)
한국광고박물관 설립공사 착공(‘08. 2. 22)
한국광고박물관 설립공사 완료(‘08. 10. 31)
한국광고박물관 개관(‘08. 11. 7)
전시관 안내
한국광고박물관은 광고산업과 광고문화 발전을 위한 광고인프라시설로서 2008년 11월 7일에 개관하였다. 광고박물관은 한국의 광고역사, 광고의 순기능, 광고제작과정 등을 유물, 광고자료, 멀티미디어 체험을 통해 이해 할 수 있는 광고 전문박물관으로서 국내 유일의 디지털아카이브관을 구축하여 사라져 가는 역사적인 영상 인쇄광고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
안내 데스크를 기준으로 시계방향으로 광고의 유래, 광고로 보는 한국사회문화사, 세상을 움직이는 광고, 광고제작 이야기, 광고 체험,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와 공익광고, 광고의 미래, 디지털 아카이브가 있다.
광고박물관 관람 안내
오늘날의 광고로 발전해오기까지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설명하는 영상으로 실사ㆍ애니메이션ㆍCG기법 등을 이용한 최첨단의 원형영상[Circle Vision]이며, 한국 최초의 근대 상업광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광고로 보는 한국사회문화사
9세기말 개항기부터 시작되는 한국의 근현대 광고 120년의 역사를 7개 시기로 구분하여 유물ㆍ영상ㆍ패널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마련한 역사공간으로 각 시기별 광고를 통해 당시 사회와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광고제작 이야기
현대 광고의 흐름을 인쇄광고와 영상광고 또는 국내광고와 해외광고로 이해할 수 있는 광고 갤러리와 같은 전시공간으로 광고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순기능과 우리 생활속에 광고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광고로 보는 한국사회문화사
광고의 생산에서 소비까지, 즉 각 매체별로 광고의 제작에서 소비과정을 광고주ㆍ광고 회사ㆍ광고매체ㆍ소비자의 광고 네 주체를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고, 광고제작을 위한 실무자들의 작업진행 방식을 영상과 모형으로 확인할 수 있다.
광고체험
관람자 스스로가 ‘광고사진촬영’과 ‘광고사진편집’을 통해 간편하게 간접적으로 체험함으로써 광고를 이해할 수 있고,모형 오토바이 시승과 영상을 통해 옥외광고를 체험할 수 있으며, 세계 3대 국제광고제인 ClioㆍNYFㆍCannes 광고제를 포함한 세계 10 대 광고제의 수상작품을 관람자 본인이 직접 감상할 수 있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와 공익광고
방송의 공공성 확보와 전파수익의 사회환원, 국민의 건전한 문화생활과 방송문화 발전 및 방송광고진흥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의 역사와 역할 그리고 이 사회를 맑고 밝게 만드는 공익광고를 이해할 수 있다.
광고의 미래 영상관
21세기 광고의 미래 모습은 광고매체, 과학기술의 발달, 소비자의 소비행태, 산업의 변화, 문화의 변화 등에 따라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할 수 있도록 영상을 통해 이해할 수 있고, 그 외 다양한 영상을 통해 광고를 이해할 수 있는 영상교육관이다.
광고 디지털 아카이브
TV광고, 라디오광고, 인쇄광고, 옥외광고, 인터넷광고 등 4만5천여 점의 한국 근현대 광고를 디지털로 전환하여 아카이브를 구축, 관람자들이 검색할 수 있도록 한 디지털 광고도서관으로서 광고를 전공하는 대학생과 광고산업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광고 제작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한 디지털 광고자료 센터이다.
광고역사
한국에 근대 광고가 도입된 것은 1876년 강화조약 체결과 함께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신문이 발행되고 광고도 등장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 광고는 1886년 2월 22일 자 제4호에 게재되었다. 그 뒤 현재까지 1세기를 넘는 기간의 한국 광고는 크게 해방 이전 2개, 해방 이후 5개, 모두 7개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개항에서 1910년 한일합병 때까지가 첫 시기이고, 그 다음 시기는 1945년 광복까지다. 1910년부터 10년간은 일제 무단정치 시기인데 우리말 신문이라고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하나뿐이었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이른바 일제의 문화정치로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광고는 번창했다. 그러다가 1940년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되며 광고가 쇠퇴하기 시작하다 1945년 일제 패망에 이르러 광고가 거의 사라졌다.
광복 이후는 5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해방에서 1968년까지인데 우리말 신문이 나오고 민간상업방송이 시작된 시기이다. 둘째 시기는 1968년에서 1980년까지인데 이 10여 년 사이에 한국 광고는 급성장을 했으며 광고회사가 자리를 굳힌 시기이다. 셋째 시기에는 1980년에서 1988년으로 언론통폐합이 있었고 컬러 TV가 등장했다. 넷째 시기는 88 서울 올림픽에서 1995년까지로 언론자유의 회복에 따라 언론의 수가 폭증하고 아울러 광고도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마지막 시기는 1995년 한국에서 인터넷이 상용화된 시기부터 현재까지인데 정보기술(IT)과 뉴미디어의 등장이 매체와 광고를 포함한 마케팅 그리고 나아가서는 사회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개화기-광고 도입기. 1886-1910
1883년 11월 20일 자 한성순보 제3호 회사설(會社設)에 <광고>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고 3년 뒤에 세창양행의 광고가 최초로 한성주보에 실렸다. 그 후 광고는 급속히 발전해서 신문, 잡지, 전봇대, 전차, 간판이 광고 매체로 이용 되었고 할인판매. 통신판매, 현상광고 등 광고 방법도 다양해졌다. 활자만으로 된 광고에 테두리 장식, 일러스트레이션, 검은 바탕에 흰 글자, 옆으로 누인 광고, 거꾸로 세운 광고 등 표현이 다양해지고 광고 카피도 점차 전문성을 띄게 되었다. 1906년에는 일본전보통신사가 광고대행업을 시작했고 1910년에는 한국인이경영하는 광고회사가 생겼다.
일제시대 - 광고의 성장과 쇠퇴기. 1910-1945
광고의 입장에서는 이 기간을 3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1919년3.1 독립운동까지 무단정치 시기로 언론 통제가 심했던 어두운 시기였다. 광고는 계속되었으나 광고제도는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둘째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한국인에게 신문 발행을 허가한 시기로 1940년 이 두 신문이 강제 폐간되기까지 약 20년간 일본광고가 절반을 차지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신문이 8면으로 증가했고 1930년대 중반에는 12면까지 증가했는데 광고가 늘었기 때문이다. 신문사가 주최하는 광고상, 광고강좌, 광고 해설 기사 등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으며 연희전문 상과(商科)에서는 광고 강의를 했었다. 셋째 시기는 광고 쇠퇴기이다. 태평양전쟁의 영향으로 광고는 심한 통제를 받았고 신문지면도 2면으로 줄었다. 민간회사가 전쟁 선전광고비를 부담하기도 했다. 상업광고는 거의 사라졌다.
광복, 광고 복구, 민간상업방송의 정착. 1945-1968
광복으로 국권을 찾았고 우리말을 찾기는 했으나 남북분단, 3년간의 한국전쟁은 광고에도 치명적이었다. 신문은 하루에 고작 4면이 발행되었으며 광고할 제품도 의약품과 영화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한국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하고 1960년대 초부터여러 민간상업방송이 등장하면서 광고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강의 기적>, 광고의 급성장, 현대적 광고의 정착. 1968-1980
60년대 말 광고대행업이 신종 산업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TV 보급은 가구 대비 2%에서 80%로 폭증하면서 사치품에서 필수품이 되었다. 따라서 TV는 강력한 광고매체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00억 원도 안 되던 광고비가 2,186억 원으로 천문학적으로 증가했다. 광고회사가 광고의 주축이 되는 시대로 바뀌었으며 광고단체와 시장조사회사가 생기고, TV광고 감독이 등장했다. 매체사가 주최하는 광고상이 제정되고 일본의 ACC, 미국 CLIO 광고상이 소개되었다. 대학에는 광고전공학과가 생겼다. 70년대에는 신문에 컬러광고가 등장했다. 광고주, 매체, 광고회사의 3자가 광고산업을 구성하는 현대적 광고시대로 정착한 시기였다.
언론통폐합, TV 컬러화,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창립. 1980-1988
제5공화국이 탄생하면서 언론기본법이 제정되고 언론이 통폐합되었다. 민간방송은 공영화되고 1981년에는 TV가 컬러화되었다. 그리고 모든 방송광고 판매를 대행하는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설립되었다. 신문은 하루 8쪽에서 12쪽 발행으로 증가했다. 한국 광고비는 국민총생산의 1% 선에 이르는 선진국형이 되었고 아시아에서 일본다음으로 큰 광고비 보유국이 되었다. 한국 광고시장 개방에 대한 압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개방 시대. 1988-1995
1987년 언론기본법이 폐기되면서 1988년 이후 일간신문의 수는 2배, 3배로 늘었다.신문 발행 면수의 제한도 풀렸으며 민간방송이 부활했다.1991년에는 한국 광고시장이 개방되었다. 한국은 세계 10대 광고비 보유국이 되었다.
인터넷, IT의 뉴미디어 시대. 1995 이후
1995년부터 인터넷이 상용화되면서 IT(정보통신) 시대가 열리고 뉴미디어시대가 왔다. 매체는 물론 마케팅과 광고, 광고 표현까지도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1998년 한국은 IMF를 맞으면서 광고시장도 큰 타격을 받았다. 당시 한국 광고시장은 전년 대비 35%나 줄었다가 다시 회복되었지만 성장을 계속하던 광고시장은 90년대 말부터 저 성장기로 접어들었다. 현재 한국광고의 시장 규모는 2007년 기준 8조원 대로 세계 10위권이다.
한국 광고문화회관에 관한
안내문
송파구 올림픽로 424 번지에 있는
올림픽회관
2024년04월10일(수요일) 서울 [송파 책박물관&석촌동고분군&삼전도비&한국 광고박물관&올림픽공원 9경&한성백제박물관&방이동고분군] 탐방기 탐방지 : 서울 [송파 책박물관&석촌동고분군&삼전도비&한국 광고박물관&올림픽공원 9경&한성백제박물관&방이동고분군] 탐방코스 : [송파역 4번 출구~(1.0km)~송파 책박물관~(0.8km)~서울석촌동고분군~(1.5km)~삼전도비~(0.9km)~한국 광고박물관~(1.6km)~올림픽회관~(0.4km)~올림픽공원 세계평화의문~(0.3km)~몽촌해자 음악분수(3경)~(0.3km)~소마 미술관~(0.2km)~조각공원의 조각작품 대화(4경)~(0.9km)~몽촌토성 산책로(5경)~(0.5km)~나홀로 나무(6경, 몽촌토성 안에 있음)~(0.7km)~서울 백제어린이박물관~(0.6km)~올림픽 수영장 옆 88호수(7경)~(0.1km)~올림픽 수영장~(0.4km)~올림픽 체조경기장~(0.6km)~동1문 근방의 엄지손가락(2경)~(0.4km)~올림픽 핸드볼 경기장~(0.6km)~들꽃마루(8경, 올림픽공원의 동남쪽에 위치한 장미광장 옆에 있음)~(0.2km)~장미광장(9경)~(0.9km)~한성백제박물관~(1.4km)~방이동고분군~(1.2km)~오금역 7번 출구] [총 15.5km] 탐방일 : 2024년04월10일(수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송파구 최저기온 9도C, 최고기온 19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5시간26분 소요) 09:11~10:21 구산역에서 지하철 6호선을 타고 합정역으로 가서 2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잠실역으로 간 후 8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송파역으로 가서 송파역 4번 출구로 나옴 [1시간10분 소요] 10:21~10:33 서울 송파구 송파대로 345 번지에 있는 4번 출구에서 탐방 출발하여 서울 송파구 송파대로37길 77 번지에 있는 서울 송파 책박물관으로 이동 [송파책박물관 요약 :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위치한 구립박물관. 도서 관련 전시, 교육, 보존, 학술연구 사업을 진행한다.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송파대로 37길 77 문의 및 안내 : 02-2147-2486 규모 : 연면적 6,212㎡ 관람시간 : 오전 10시~오후 6시 (오후 5시 30분 입장마감)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1일, 추석 당일, 설 당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위치한 송파구청 운영의 공립 책 전문 박물관으로 2019년 개관하였다.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아우르는 각 시대별 도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도서 관련 전시, 교육, 보존, 학술연구 사업을 진행한다. 연면적 6,212㎡ 규모로 지하 1개 층, 지상 2개 층을 갖추고 있다. 주요 시설 전시실은 박물관 지상 2층에 위치해있다. 상설전시실은 “향유-선현들이 전하는 책 읽는 즐거움,” “소통-세대가 함께 책으로 소통하는 즐거움,” “창조-또 하나의 세상, 책을 만드는 즐거움” 3개 주제로 구성된다. 제1부 “향유” 상설전시실은 생활 속 조선 사대부의 독서, 조선의 독서광, 조선의 장서문화, 조선의 장서가, 조선 후기의 독서환경, 수진본의 6개 소주제를 통해 조선시대 독서문화를 조망한다. 제2부 “소통” 전시실에서는 1910년 이후 100여년 간 전개된 독서문화를 소개하는 도서와 관련 자료를 전시한다. 제3부 “창조” 전시실은 책을 집필하는 작가의 방,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출판 기획자의 방, 출판 편집자의 방, 책을 디자인하는 북 디자이너의 방 4개 소주제를 통해 도서 제작 과정을 소개한다. 지상 2층에는 도서문화 관련 특별전이 개최되는 기획전시실도 위치해있다. 전시시설 외에 디지털 콘텐츠 열람공간인 미디어 라이브러리, 도서 관련 창작 활동 공간인 북스튜디오가 지상 2층에 마련되어 있다. 지상 1층에서는 어린이 책 체험전시실과 전시 연계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키즈 스튜디오가 운영된다. 지하 1층 오픈 스튜디오에서는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수장고를 관람할 수 있다. 주요 소장품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 역, 계환(戒環) 주해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1433년 편찬된 종합의학서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 1480년 간행된 『춘추집전대전(春秋集傳大全) 』, 지석영이 출간한 국한문(國漢文) 단어집인 『언문(言文)』 등의 서적과 책장, 책 반닫이, 백자연적 등의 유물이 알려져 있다. 부대시설 전시 및 교육시설 이외에 행사 및 강연을 위한 어울림홀, 카페, 야외 정원이 운영된다.] [조선 5대 독서광 : 세종대왕, 이황, 이이, 김득신, 이덕무] [다독 시인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 노력하는 자가 성공한다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천재도 있고 둔재도 있다. 한 자를 가르치면 열 자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 번을 가르쳐도 한 자를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지능이 떨어진다고 해서 공부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에서 알 수 있듯이 노력하는 자가 오히려 성공한다.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은 1604년(선조 37년)에 태어나 문명을 크게 떨친 인물로, 화가 김득신과는 동명이인이다. 그는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지각이 발달하지 못해 노둔한 편이었다. 김득신의 아버지 김치는 이러한 아들을 질책하기보다 격려했다. 김치가 김득신에게 당부했다. "학문의 성취가 늦는다고 성공하지 말란 법이 없다. 그저 읽고 또 읽으면 반드시 대문장가가 될 것이다. 그러니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마라." "그래, 열심히 읽다 보면 반드시 외울 수 있을 것이다." 김득신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했다. 김득신은 그때부터 책을 잡으면 수없이 반복하여 읽었다. 『사기열전』 중 「백이전」을 11만 3천 번을 읽었고, 다른 책들도 1만 번 이상 읽었다. 한유 문장 사마천 『사기』를 천 번 읽고서야 韓文馬史千番讀 금년에 겨우 진사과에 합격했네 菫捷今年進士科 김득신은 스스로 시에서 『사기』를 천 번 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득신은 많은 시를 남겼는데 「용호(龍湖)」 「구정(龜亭)」 「전가(田家)」 등의 시가 유명하다. 어촌이나 산촌과 농가의 정경을 그림같이 묘사하여 한문 사대가로 불리는 이식으로부터 "그대의 시가 당금 제일이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문명이 널리 알려졌다. 그는 『백곡집(柏谷集)』을 남기고 80세에 죽었다.] [이덕무(李德懋) 자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고증과 박학의 대가 출생 – 사망 : 1741 ~ 1793 조선후기 서울 출신의 실학자 그룹인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의 한 가지를 형성한 이덕무는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과 더불어 청나라에까지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을 날린 실학자이다. 그는 경서(經書)와 사서(四書)에서부터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출세에 제약이 많았다. 그러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여 서얼 출신의 뛰어난 학자들을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과 함께 검서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박물학에 정통한 이덕무는 사회 경제적 개혁을 주장하기 보다는 고증학적인 학문 토대를 마련하여 훗날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등에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정조에게 발탁된 서자 출신의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정종(定宗, 조선의 제2대왕)의 서자인 무림군(茂林君)의 10세손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인데 이 밖에 형암(炯庵)ㆍ청장관(靑莊館) 또는 동방일사(東方一士)라는 호도 사용했다. 특히 즐겨 사용한 청장(靑莊)이라는 호는 일명 신천옹(信天翁)으로 불린 해오라기를 뜻하는데, 청장은 맑고 깨끗한 물가에 붙박이처럼 서 있다가 다가오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청렴한 새라고 한다. 청장으로 호를 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성격을 상징한 것이라 하겠다. 이덕무는 서울 출신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성호(聖浩)이고 어머니인 반남 박씨는 토산현감 사렴(師濂)의 딸이었다. 할아버지 필익(必益)은 강계부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6살에 아버지가 아들인 이덕무에게 한문을 가르치고자 중국 역사책인 [십구사략]을 읽혔는데, 1편도 채 끝나기 전에 훤히 깨우친 영재였다. 16세에 동지중추부사 백사굉의 딸 수원 백씨와 혼인하였고, 20세 무렵에는 남산 아래 장흥방(현재 종로구 부근)에서 살았다. 이 무렵 집 근처 남산을 자주 오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많이 지었다. 이덕무는 가난한 환경 탓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학문에 비상하고 시문에 능해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사후에 그의 행장을 지은 연암 박지원은 시문에 능한 이덕무를 기리며 “지금 그의 시문을 영원한 내세에 유포하려 하니 후세에 이덕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또한 여기에서 구하리라. 그가 죽은 후 혹시라도 그런 사람을 만나볼까 했으나 얻을 수가 없구나”하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이덕무는 청장이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호리호리한 큰 키에 단아한 모습, 맑고 빼어난 외모처럼 행동거지에 일정한 법도가 있고 문장과 도학에 전념하여 이욕이나 잡기로 정신을 흩뜨리지 않았으며, 비록 신분은 서자였지만 오직 책 읽는 일을 천명으로 여겼다고 한다. 가난하여 책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굶주림 속에서도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백 권을 책을 베꼈다. 이덕무의 저술총서이자 조선후기 백과전서라 할 수 있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史實)에 대한 고증부터 역사와 지리, 초목과 곤충,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적 편력은 실로 방대하고 다양하여 고증과 박학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묘지명을 지은 이서구(李書九)는 이덕무를 두고 “밖으로는 쌀쌀한 것 같으나 안으로 수양을 쌓아 이세(利勢)에 흔들리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않은 인물”이라 평했다. 이덕무는 1766년 그의 나이 26세 때 대사동으로 이사한 후, 서얼들의 문학동호회인 백탑시파(白塔詩派)의 일원으로 유득공ㆍ박제가ㆍ이서구를 비롯하여 홍대용, 박지원, 성대중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적 재능에 비해 신분적 한계로 천거를 받지 못하다가 1779년 그의 나이 39세에 정조에 의해 규장각 초대 검서관(檢書官)으로 기용되면서 벼슬길이 열렸다. 1789년에는 박제가, 백동수와 함께 왕명에 따라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기도 했다. 검서관 이후에 사도시주부, 광흥창주부, 적성현감 등을 역임했다. 중국 시단에 알려진 조선의 시인 이덕무는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와 함께 사가시인으로 중국 청나라 문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시가 중국 시단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77년부터이다. 친구이자 유득공의 숙부이기도 한 유련(柳璉, 柳琴으로 개명, 1741~1788)이 1776년 중국을 방문하면서 훗날 사가(四家)로 불린 이덕무를 비롯한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4명의 시를 담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청나라 시인이자 학자로 이름 높았던 이조원(李調元, 1734~?)과 반정균(潘庭筠,1742~?)에게 소개하였고, 1777년 청나라에서 [한객건연집]이 간행되었다. 이 시집에 실린 이덕무의 시는 총 99수로 그 내용은 자연과 여정, 인물, 송별, 역사에 이르기까지 실로 매우 다양하다. 중국에 가 본적도 없던 이덕무였지만, 그의 시는 중국 시단에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한객건연집]이 소개되고 2년 뒤 이덕무는 연행단을 따라 중국을 방문했다. 이미 지명도를 쌓은 이덕무는 반정균을 비롯하여 이조원의 동생인 이정원, 기균, 옹방강, 축덕린 등 청조의 문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고, 이들을 통해 그의 시명(詩名)은 청조 시단에서 더욱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조원은 이덕무의 시를 가리켜 “건실하고 격조를 갖추어 네 사람 중에서 가장 노련하다”고 평했다. 시에 대한 그의 재주는 정조도 익히 인정한 바였다. 한번은 정조가 규장각 신하들을 불러놓고 [성시전도(城市全圖)]에 대한 백운시(百韻詩)를 짓게 하고는 각각 점수를 매겼는데, 이덕무가 1등을 차지했다. 정조는 “신광하의 시는 소리가 나는 그림 같고, 박제가의 시는 말하는 그림, 이만수의 시는 좋고, 윤필병의 시는 풍성하고, 이덕무의 시는 우아하고, 유득공의 시는 온통 그림 같다.”고 평했다. 정조는 이덕무의 시권(詩卷)에 우아하다는 의미의 ‘아(雅)’자를 썼는데, 이후로 이덕무는 아정(雅亭)이라는 호를 지어 사용하였다. 18세기 그들이 나누었던 우정 청나라에 소개된 [한객건연집]의 저자들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는 백탑파 혹은 이용후생파로 불리는 실학자이며, 지기(知己)의 정을 쌓은 벗이기도 하다. 특히 박제가ㆍ유득공과는 서자라는 비슷한 처지에서 오는 신분적 공감대가 있었다. 이덕무가 천애지기(天涯知己) 박제가를 알게 된 것은 24세 되던 1764년이다. 이덕무의 처남인 무인 출신 백동수의 집에 갔다가 현판 위에 써진 박제가의 ‘초어정(樵漁亭)’이라는 글씨를 인상 깊게 본 것이다. 3년 후 이덕무는 백동수의 집에서 박제가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그와의 첫 만남을 두고 “너무 맘에 들어 즐거움을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을 정도로 기뻐했다. 이덕무와 박제가의 우정은 1793년 이덕무가 죽을 때까지 근 30년간 이어졌다. 30년 동안 이덕무가 있는 곳엔 박제가가 있었고 박제가가 있는 곳엔 항상 이덕무가 있었다. 가녀리고 큰 키의 이덕무는 고상하고 조용했던 반면에, 박제가는 작은 키에 박력있고 자기 주장과 고집이 강한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외모와 성격은 달랐지만, 뜻이 맞았고 항상 서로를 그리워했다. 눈이 내린 어느 겨울날, 착암 유연옥의 집에서 해금 연주를 듣던 박제가는 한밤중에 자신의 벗 이덕무가 보고 싶어졌다. “올 적엔 달빛이 희미했었는데 취중에 눈은 깊이도 쌓였네. 이러한 때 친구가 곁에 있지 않으면 장차 무엇으로 견딜 것인가. 내게는 즐겨 읽던 [이소]가 있으니 그대는 해금을 안고 야심한 밤 문을 나서 이덕무를 찾아가세.” - 박제가의 [정유각집(貞蕤閣集)] 중에서 두 사람은 1778년 중국 연행에도 함께 갔을 정도로 인연이 깊었고, 1779년에는 규장각 검서관에 동시에 등용되어 십수년간 동료의 정을 나눴다. 잦은 숙직과 힘든 근무 속에서도 두 사람은 의지해가며 규장각 도서들을 편찬해 갔다. 사실 이덕무는 박제가 보다 9살이나 연상이었으나, 이들에게 나이차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아주 가난한 삶을 살았다. 하루는 빈곤을 겪던 이덕무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집안에서 제일 값비싼 것을 팔았는데, 그것이 [맹자(孟子)]였다. 글을 하는 선비가 책을 내다 판다는 것은 가지고 있던 전부를 내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덕무는 책을 팔아 밥을 해먹고는 유득공을 찾아가 크게 자랑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유득공 또한 이덕무와 마찬가지로 ‘그대가 옳다’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이덕무와 함께 술을 마셨다. 이덕무와 유득공은 “맹자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左丘明,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학자)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술잔을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며 박장대소했다. 두 사람은 밤새 술을 마시며 맹자와 좌구명을 칭송했다. 1년 내내 굶주리며 책을 읽기만 한다고 해서 살 방도가 나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책을 팔아 끼니를 마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의 그의 생각이었다. 그의 말에는 평생 글을 읽어봐야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었던 서얼들의 신분적 한계가 자조적으로 담겨 있다. 그러나 그의 기구한 현실은 유쾌하고 장난스런 태도로 승화되었고, 세상의 출세와 명예로부터 한 꺼풀 벗어난 자유인으로서의 경지로 나아갔다. 갑작스런 죽음과 남긴 저술 1793년 1월 25일 이덕무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본래 체력이 약한 데다가 규장각 검서관 생활에서 오는 고된 직무와 생활고를 겪다가 감기와 함께 폐렴 증상이 겹치면서 타계한 것이었다. 갑작스런 비보를 들은 박제가와 이서구, 박지원, 남공철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그를 기리는 글을 지었고, 정조는 내탕금(內帑金: 임금이 개인적 용도로 쓰는 돈) 5백냥을 하사하여 그의 유고(遺稿)를 간행하게 하고 아들 광규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특차했다. 이덕무의 박학다식은 이용후생파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가난하여 책을 사 볼 수 없어 집에는 비록 책이 없었으나, 책을 쌓아 둔 것과 다름없었다. 평생 동안 읽은 책이 거의 2만 권이 넘었고, 손수 베낀 승두세자(蠅頭細字: 파리만큼 작은 글자) 또한 수백 권으로서 자획이 방정하며 아무리 바빠도 속자(俗字: 원래 글자보다 획을 간단하게 만든 글자) 하나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쓴 책은 10여 종에 달하는데, “나의 글이 진귀하지 못한 것이라, 한번 남에게 보이면 사흘 동안 부끄러워진다. 상자 속에 깊숙이 넣어 두었는데 스스로 나올 날이 있을 것이다.”하여 처음 쓴 초집(初集)의 이름을 [영처고(嬰處稿)]라 하였다 한다. 또한 청장이라는 물새 이름을 자호(自號)한 뜻을 삼아 두 번째 문집을 [청장관고(靑莊館稿)]라 이름 지었다. 또한 듣는 대로 쓰고 보는 대로 쓰고 말하는 대로 쓰고 생각하는 대로 썼다는 의미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예절에 관한 [사소절(士小節)] 등이 있고, 그 외에 [청비록(淸脾錄)], [기년아람(紀年兒覽)], [청정국지(蜻蜓國志)], [앙엽기(盎葉記)],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 [예기억(禮記臆)], [송사보전(宋史補傳)],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등이 있다. 북학을 거부한 자국 중심의 세계관 북경유리창. 이곳은 이덕무와 박제가가 북경 연행 중에 중국 문인들과 만났던 장소이다. 이덕무는 박제가와 달리 청나라의 선진 문물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출처: 신영담,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 조선후기 특히 18세기는 실학자들의 중국 방문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시기였다. 홍대용과 연암 무리의 문인들인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가 모두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중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연행록(燕行錄)을 남겼는데, 이덕무는 [입연기(入燕記)]라는 연행록을 남겼다. [입연기]는 1778년 3월 17일 서울을 출발하여, 윤6월 14일 의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연행록이다. 이덕무는 중국을 다녀온 연암파 실학자들과 달리 청 왕조의 지배체제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인물이었다. 박제가와 절친한 사이였지만, 이덕무는 그의 친청적(親淸的)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을 다녀왔지만, 조선 선비들이 청을 오랑캐로 폄하하는 것을 비판한 박지원ㆍ박제가와는 서로 다른 중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덕무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국은 중국일 따름이고 조선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으니, 중원만 모두 옳겠는가? 비록 도회지와 시골의 구분은 있을망정 모름지기 평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대용과 박지원, 박제가와는 또 다른 자국 중심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그는 청나라와 조선을 자주적이고 평등한 관계로 인식하였다. 사실 청나라에 대한 이덕무의 생각은 전통적인 보수성을 띠면서도 자국 중심적이고 평등한 것으로 점차 변화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대명의리(大明義理)와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생각이 팽배했던 시기에 조선 선비들이 가졌던 청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이덕무를 통해 읽을 수 있다.] 10:33~10:38 서울 송파구 석촌동 248 번지에 있는 서울 석촌동고분군으로 이동 [서울 석촌동 고분군(서울 石村洞 古墳群) 대한민국의 사적 제243호(1975년 5월 27일 지정) 면적 49,999m2 시대 백제 주소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61-6번지 좌표 북위 37° 30′ 7.86″ 동경 127° 6′ 8.25″ 서울 석촌동 고분군(서울 石村洞 古墳群)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 있는 백제 초기의 무덤이다. 1975년 5월 2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43호 석촌동백제초기적석총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지역명 병기 및 한글맞춤법(띄어쓰기)을 적용하여 문화재 명칭이 서울 석촌동 고분군으로 변경되었다. 개요 이 일대에는 1916년 조사 당시 90여 기의 적석총(돌무지무덤)과 봉토분(흙무덤)이 분포하고 있었으며, '석촌'이라는 마을 이름도 돌무지무덤이 많다고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광복부터 1960년대 초까지 나라에 많은 전쟁과 난이 일어나며 고분 유적지는 잊혀지다시피 방치되며 무덤 위에 무허가 민가들이 들어설 정도로 마구잡이로 훼손되었다. 이후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차에 걸쳐 암사동 유적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이후 도시개발 등으로 유구가 99% 이상 사라지고 고분군의 서쪽 일부만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남았다. 발굴조사 1960년도에 들어서 일제시대 이후 처음 자체적인 한강지역 백제 유적들의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옛부터 일어난 홍수로 인해 유적들이 대부분 파괴된 상태였다고 한다. 1970년 서울에 거주 중인 미국인 에디와 넬슨이 토기 파편을 주우러 강변을 다니다 한강변에 지붕의 서까래 같은 것이 꽂혀 있다는 제보를 하였다. 본격적인 발굴은 하지 못하고 있다가 1971년부터 이 지역이 잠실지구개발사업에 따라 매몰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국립박물관에서 급히 구제적 발굴을 실시하게 된다. 1974년 가을 김원룡 교수가 이끈 서울대박물관 발굴단이 3·4호분을 긴급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국내성(환런·桓仁) 인근의 고구려 적석총과 유사한 백제 적석총의 구조와 축조양식이 확인되며 1975년 5월 27일에 1513평이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었다. 1983년에 고분들 사이를 관통하는 도로공사가 시행되며 3호분의 기단부가 잘려나간다. 이때 이형구 교수의 노력으로 석촌동 3호분과 그 일대가 다시 조사되면서 대형 돌무지무덤 7기와 널무덤, 독무덤 등 30여 기 이상이 확인되며 1983년 문화재위원회가 사적의 지정면적을 기존 1513평에서 4928평으로 넓히기로 결정했다. "백제 고분이 3분의 2가량 잘려나가면서 그 안에 안장돼 있던 백제인의 유골들이 포클레인 날에 찍혀나간 흔적을 보았습니다. 잘려나간 판축에서 갈비뼈와 다리뼈가 보였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4호분을 돌아봤습니다. 고분의 판축이 역시 파괴되었습니다.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묘도)과 무덤방(묘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분화구 같이 파였습니다." — 이형구 한국정신문화원 교수 2년 뒤인 1985년에 정부는 석촌동 고분을 포함한 강남 일대의 '백제유적보존령'을 내리며 석촌동·방이동 고분군과 몽촌토성 등에 519억원을 들여 정비하고, 백제왕릉으로 추정되는 석촌동 고분군은 1513평의 사적면적을 10배가 넘는 1만7000평으로 확대한다. 1987년에는 인근의 민가들이 철거되면서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고 백제고분공원이 조성되었다. 이곳의 적석총은 외형상 고구려의 발달된 기단식 적석총과 같지만 내부 구조면에서는 서로 다른 유형이다. 즉 3호 적석총은 무덤의 안팎을 모두 돌로 쌓은 고구려식이며, 2호와 4호 적석총은 기단과 계단 외부를 돌로 쌓았지만 내부를 흙으로 채웠다는 점에서 백제식이다. 기단부만 남은 1호 적석총은 두 기의 무덤이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남분은 고구려식이고 북분은 백제식이다. 무덤 내부와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와당, 금제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3호 적석총은 밑변 50m, 높이 4.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4세기 후반경의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2015년에 싱크홀이 발생한 후로 현재 계속 발굴조사중에 있다. 2020년 조사결과 여러 호의 적석총이 이어져있는 연접적석총의 형태로 확인이 되었고, 적석총의 밑에 목곽분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화장 후 분골한 인골이 발굴되었다. 석촌동 제1호분 일찍이 파괴된 고분 위에 흙이 덮이고 민가가 들어서 상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발굴 조사에서 드러난 적석 상태에 의하여 2기의 고분이 합쳐져 이루어진 쌍분으로 보인다. 즉 동서 9.9m, 남북 8.9m 크기의 북분과 동서 9.6m, 남북 9.8m 크기의 남분이 합쳐진 것인데 함침에 있어 남·북분 서쪽 기단부는 너비 3.2m의 적석단으로 이어졌다. 내부 구조는 남분에서만 확인되었는데 길이 20cm~30cm 크기의 표갠돌로 네 벽을 쌓고 바닥에 10cm 안팎 포갠 돌 조각·자갈 등을 깐 석곽 4개가 있었다. 4개의 석곽 중 중앙에 가장 큰 것이 장축을 동서 방향으로 놓였으며 작은 석곽 3개는 북쪽 적석벽에 잇대어 동서 방향으로 1열을 이루고 놓여 있었다. 가장 큰 중앙의 석곽은 길이 약 2.5m 너비 약 2.3m이고 1호 소형석곽은 길이 약 1.8m·너비 1.2m, 2호 소형석곽은 길이 1.6m·너비 1.4m, 3호 소형석곽은 길이 1.2m·너비 1.0m이다. 그리고 평면모양이 이 적석총과 거의 같은 것으로는 고구려의 적석총인 중국 길림성 환인현 고려묘자촌 제15호분, 평안북도 송암일 제45호분 등이 있다. 석촌동 제2호분 제2호분은 복원 정비하기 이전에는 길이 약 25m, 너비 약 20m, 높이 3~4m 크기의 봉우리 모양을 이루고 남아있던 것으로서 봉우리 모양의 분구 기저부 주위에는 민가가 들어서고 돌담이 둘러 있었으며 파괴된 분구 위에는 약 10~3cm 두께로 흙이 덮여 있었다.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제2호분의 분구 축성은 제1단의 바깥둘레에 1m 정도 높이로 포갠 돌을 쌓고 그 내부에 진흙을 다져 채웠으며 제2단은 제1단의 적석 가장자리에서 얼마쯤 안쪽으로 들어가서 포갠 돌을 쌓은 다음에 다시 그 내부에 진흙을 다시 채우고 제3단은 제1, 2단과 같은 방법으로 축성하고서 정상부에서는 둥그렇게 흙을 덮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제1단의 동·서·남쪽 면에는 지탱석이 각각 1개씩 남아 있었다. 내부구조의 확인에 있어 동북 1/4구역과 서북 1/4구역의 일부만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전모는 알 수가 없고 다만 동북 1/4구역의 바닥에 자갈과 막돌조각이 섞여 깔려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며 깔린 돌 사이에는 붉은 갈색 연결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다. 복원 정비된 제2호분의 제1단은 길이 동서 16.4m, 남북 16.5m, 높이 90cm,단의 너비 2m이며 제2단은 길이 동서 12.5m, 남북 12.6m, 높이 0.9m,단의 너비 2m이며 제3단은 길이 동서 8.5m, 남북 8.6m, 높이 1.7cm, 단의 너비는 정상부에 흙이 덮여 있어 확실하지 않으며 전체 높이는 3.5m이다. 그리고 제1단 바닥 서북쪽에는 장축을 동북~서남 방향으로 둔 목곽 토광묘 1기가 드러났는데 크기는 길이 2.5m, 북쪽너비 1.6m, 중앙너비 0.4m, 남쪽너비 0.65m, 길이 0.1m~0.15m이다. 이러한 구조 형식의 적석총은 분구·내부 구조 등 고분 전체를 돌로 쌓아 축조한 고구려 식의 전형적 적석총이 변하여 백제화된 것으로 보인다. 석촌동 제3호분(가장 큰 고분이 3호분) 제3호분은 가로 50.8m, 세로 48.4m, 높이 4.5m로 규모는 석촌동 고분군 중 가장 거대하며 조성시기와 규모로 보아 근초고왕 혹은 근구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석촌동 제2호 토광묘 석촌동 제2호 토광묘는 생토층을 파서 묘광을 만들었는데 평면은 장방형이고 장축은 동남동에서 서북서로 두었다. 벽면은 바닥에서 위로 향하여 약간 경사졌고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바닥의 동쪽에는 회백색의 목이 짧은 단지 1개가 놓여 있었으며 묘광 바닥에서 약간 위인 흙속에서 지름 1.6~1.7cm 크기의 민 고리 금귀고리 1개가 드러났다. 토광묘의 크기는 길이 223cm, 너비 76cm, 높이 21cm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형식의 토광묘는 제3호분과 근접한 동쪽 지점에서 10여기가 드러났는데 적석총 바닥보다 아래층에 위치한 점으로 미루어 토광묘는 적석총보다 앞선 시기의 묘제였음을 짐작케한다. 내원외방형 적석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오래 전에 분구, 내부구조, 기단부 등이 파괴되어 흙이 덮이고 그 위에 민가가 들어서 고분의 원형을 밝힐 수 없으나 발굴 조사에 의하여 고분 기단부의 서남 모서리와 서·북쪽의 석축 기단 일부를 찾아냈다. 찾아낸 고분 기단부의 석축 부분을 바당으로 복원 정비하니 안쪽은 지름 11.4m의 원형을 이루고 바깥쪽은 변 길이 16m의 방형이 되었다. 이로서 이 적석총의 기단부의 모양은 내원외방형이라고 보게 된다. 그리고 안쪽 원형 석축 바닥에서는 적석 토광묘 2기가 석관묘 3기가 드러났는데 이러한 적석 토광묘와 석관묘 위에 이 적석총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 고분에는 상부가 평면 원형이고 하부가 평면 방향인 상원하방분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평면의 모양은 이 적석총의 기단 평면 모양과 흡사하다. 석촌동 제3호 토광묘 제3호 토광묘는 표토 밑 70cm에서 드러났고 평면은 네 모서리가 둥그스럼한 장방형이며 장축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두었다. 벽면은 수직이고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바닥의 북서쪽 모서리에 회청색의 목이 짧은 단지 1개가 놓여 있었다. 묘광의 규모는 길이 230cm·너비 84cm·높이 18cm이다. 이 모형 토광묘는 원형 토광묘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하여 원형 토광묘에 방수시설을 하고 그 바로 위 50cm 되는 곳에 원형 그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의 토광묘는 이 지역에서 3기가 드러났다. 석촌동 제5호분 분구를 흙으로 쌓은 봉토분으로서 유존 상태가 양호하고 또 이 일대에 남아있는 유일한 봉토분이므로 보존하기 위하여 분구 일부만 발굴 조사하고 내부 구조는 확인하지 않았다. 분구는 내부 구조 위에 흙을 다져 쌓아 덮고 그 위에 강돌과 막돌을 섞어 한 벌 깐 다음에 다시 그 위에 흙을 엷게 덮은 즙석분구이다. 이와 흡사한 즙석분구의 본토분인 가락동 제1·2호분이 이 고분에서 동분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2기의 고분은 1969년의 발굴 조사에서 그 내부 구조가 확인되었는데 가락동 제1호분은 토광 안에 목관을 안치한 목관토광묘 형식이었고 제2호분은 토광 안에 목관을 안치한 목관토광묘 협의의 것과 옹관묘 형식의 것이 함께 묻힌 구조형식의 고분이었다. 가까이에 있고 거의 같은 시기인 백제 전기 2기의 고분인 점으로 미루어 석촌 제5호분도 그 내부 구조는 목관토광묘 형식의 것으로 추측된다. 분구의 현재 크기는 지름 17m, 높이 3m인 원형봉토분이다.] 10:38~10:58 서울 석촌동고분군을 탐방 [백제 무덤에 남은 고구려와 신라의 흔적, 석촌동·방이동 고분군 석촌동은 고구려식 돌무지무덤 형식, 방이동에선 신라 토기 발견 비즈한국 기사 등록일 : 2023.08.22.(화) 필자 : 구완회 여행작가 [비즈한국] 사극 속 백제 왕이나 귀족들은 대개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 하지만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은 낮다. 백제의 도읍은 가장 오랜 기간 서울이었고, 나머지는 충청도 공주와 부여였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지구는 공주와 부여지만, 서울에도 백제 고분군 두 곳이 이웃해 있다. #피라미드를 닮은 돌무지무덤, 석촌동 고분군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의 도읍이 서울이던 한성백제 시기 조성된 왕과 귀족의 무덤군이다. 일제강점기 조사에 따르면 90기 가까이 있었는데, 이 지역이 개발되면서 아쉽게도 지금은 단 4기만 남았다. 하지만 다른 지역 백제 고분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모습이어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또 거대한 무덤 주위로 소나무길 산책로를 만들고, 곳곳에 벤치를 놓아 한가롭게 고분을 둘러보기 좋다. 석촌동 고분군의 특징은 돌을 계단식으로 쌓은 돌무지무덤이라는 점이다. 얼핏 보면 거대한 피라미드의 밑단 일부만 남은 모양이다. 이는 장군총 등 고구려 무덤과 같은 형식으로 백제의 지배층이 고구려 출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배다른 형 유리가 나타나자 고구려를 떠나 백제를 세웠다. 석촌동 고분군에는 고구려와 다른 백제만의 특징도 있다. 겉모습은 고구려 고분과 같지만, 내부를 흙으로 채우고 나무널로 관과 덧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고구려 고분은 내부도 돌로 채워 넣고, 돌방과 돌덧널을 두었다. 네 개의 무덤 중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이 절반, 백제식이 절반이어서 고구려에서 내려온 지배세력이 현지화하면서 무덤 양식도 바뀐 것으로 보인다. 가장 규모가 큰 3호분은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가로 50.8m, 세로 48.4m의 밑단을 포함해 총 3단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몇 단이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덤 안에서 중국 도자기와 금 장신구 등이 나왔으나 중요한 유물들은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이 지역 주민들이 무덤의 돌을 가져다 돌담을 쌓아서 석촌동(돌마을)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백제 혹은 신라의 굴식돌방무덤, 방이동 고분군 석촌동 고분군에 약 2km 떨어진 곳에 방이동 고분군이 있다. 방이동 고분군은 석촌동보다 무덤이 작아서 좀 더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난다. 무덤 주변에 작은 숲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지역 주민들이 많이 이용한다. 이곳 무덤은 돌무지무덤이 아니라 굴식돌방무덤이다. 돌방을 만들어 관을 넣고 흙을 쌓은 뒤 다시 돌방까지 굴을 파서 들어가는 길을 만들었다. 이런 형태의 무덤은 4세기 고구려에서 시작되어 다른 나라로 퍼져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모두 8기의 무덤이 있는데, 이러한 형태의 굴식돌방무덤이 모여 있는 건 다른 서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출입이 쉬운 굴식돌방무덤의 특성 탓에 모두 이미 도굴되어 남은 유물이 몇 점 안 된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한성백제 시기 무덤으로 추정했는데, 1976년 6호분에서 전형적인 신라 토기가 발견되면서 신라 고분으로 보는 학자들도 생겨났다. 이는 단순히 무덤의 국적을 넘어 당시 삼국의 세력권과 교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처음엔 이 지역을 백제가 지배했으나, 나중에 신라 세력이 진출하면서 신라인의 무덤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방이동 고분군에서 석촌동 고분으로 가는 길 중간에는 을축년(1925년) 대홍수 기념비가 있다. 을축년 대홍수는 한강 유역에서 발생한 사상 최대의 홍수로 기록적인 피해를 남겼다.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는 홍수 이듬해 지역 주민들이 세운 것으로, 뒷면에는 6·25 전쟁 때 났다는 총알 자국도 보인다. 바로 옆 ‘암행어사 이건창 영세불망비’는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된 것을 다시 찾아 이곳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여행정보> 서울 석촌동 고분군 △위치: 서울시 송파구 가락로 7길 21 △문의: 02-2147-2001 △관람 시간: 상시, 연중무휴 서울 방이동 고분군 △위치: 서울시 송파구 오금로 219 △문의: 02-2147-2800 △관람 시간: 09:00~20:00, 연중무휴 필자 구완회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여성중앙’, ‘프라이데이’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랜덤하우스코리아 여행출판팀장으로 ‘세계를 간다’, ‘100배 즐기기’ 등의 여행 가이드북 시리즈를 총괄했다.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역사와 여행 이야기를 쓰고 있다.] 10:58~11:14 서울 송파구 잠실동 47 번지에 있는 서울 삼전도비로 이동 11:14~11:18 삼전도비를 사진촬영 [서울 삼전도비(三田渡碑) 요약 :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戰勝碑).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사적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 시대 : 조선 크기 : 전체 높이 5.7m, 비신 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 1639년(인조 17) 청나라가 쳐들어온 병자호란 때 조선이 패배하고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은 후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세운 비석이다. 원래의 비명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이다.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이 글을 짓고, 글씨는 오준(吳竣), 비명(碑名)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비신은 대리석, 귀부는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5.7m, 기단을 제외한 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이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쪽 면에는 한문으로 새겼고, 다른쪽 면에는 만주문(滿洲文)과 몽골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비석 하나에 3개국 문자를 사용하였다. 비석의 모양은 머리의 이수(螭首), 받침돌의 귀부(龜趺) 조각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석조물의 특징적인 것으로 꼽힌다. 원래 석촌호(石村湖) 주변에 세워졌으나, 그 치욕적인 의미 때문에 1895년(고종 32)에 매몰하였던 것을 일제강점기인 1913년 일본에 의해 다시 세워지고, 1956년 당시 문교부에서 국치의 기록이라 해서 다시 땅 속에 묻었다가, 1963년에 다시 세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다가 2010년 4월 고증을 거쳐 최초의 위치인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겨졌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1:18~11:35 잠실역 7번 출구를 거쳐서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35길 137 번지에 있는 서울 한국 광고박물관으로 이동 11:35~11:42 한국 광고문화회관 3층에 있는 한국 광고박물관에서 휴식 [한국광고박물관 한국 근현대 광고를 한 번에 조망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한국광고박물관 소재지 :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35길 137 한국광고박물관은 한국 광고계의 숙원사업으로 한국 근현대 광고 120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2008년 11월 7일에 서울 송파구 잠실에 개관한 교육.문화 인프라시설이다. 광고는 대량생산.소비되고 사라져버리는 단순 창작물이 아니라 광고는 정보이고 예술이며 또한 엔터테인먼트이면서 우리의 문화이다. 한국 근현대 광고역사는 1876년 강화도조약, 즉 한 · 일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 체결이후 서구문물이 유입되면서 신문발행과 같은 시대적 변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1883년 11월 20일『한성순보(漢城旬報)』제3호 회사설(會社設)에 ‘광고’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이후, 한국 최초의 근대 광고는 1886년 2월 22일『한성주보(漢城周報)』 제4호에 게재된 ‘덕상세창양행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이라는 광고였다. 이와 같이 한국의 근현대 광고는 19세기 후반 개항기와 함께 시작한 이래 100년을 훌쩍 넘어섰고, 이제는 세계10위권 안에 드는 광고대국이 되었다. 이렇게 100년이 넘는 한국 근현대 광고가 21세기 문화 · 예술, 정보 · 기술의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생활 콘텐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한국광고 박물관은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한국광고박물관은 광고를 사랑하는 모든 광고인들에게는 광고정보와 콘텐츠를 공유하는 교류의 장이 되며, 한편 생활 속에서 광고를 접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광고의 참가치를 이해하는 교육 · 체험의 장이 될 뿐만 아니라 여가와 휴식의 공간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설립목적 및 연혁 박물관 설립목적 한국 근현대 120년 광고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공익적인 교육ㆍ문화 인프라 시설 구축 일반인들에게 광고를 이해할 수 있는 교육 공간이면서 삶의 활력소가 되는 휴식ㆍ여가의 공간으로 자리매김 사장되어 가는 다양한 광고자료를 수집·보존하여 광고계에 필요한 광고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 광고문화 및 산업발전에 기여 광고의 순기능 홍보를 통해 방송과 광고의 이미지 제고 규모 및 장소 : 912.40㎡(276평), 광고문화회관 3ㆍ4층 〔전시장 : 667.77㎡(202평)/수장고ㆍ준비실 : 244.63㎡(74평) 전시장 구성 : 광고의 유래, 광고로 보는 한국사회문화사, 광고체험, 세상을 움직이는 광고, KOBACO와 공익광고 등 8개 전시 Zone 개관 : 2008.11.7. 박물관 연혁 한국광고박물관 설립 계획 수립(‘05. 3. 22) 한국광고박물관 설립공사 착공(‘08. 2. 22) 한국광고박물관 설립공사 완료(‘08. 10. 31) 한국광고박물관 개관(‘08. 11. 7) 전시관 안내 한국광고박물관은 광고산업과 광고문화 발전을 위한 광고인프라시설로서 2008년 11월 7일에 개관하였다. 광고박물관은 한국의 광고역사, 광고의 순기능, 광고제작과정 등을 유물, 광고자료, 멀티미디어 체험을 통해 이해 할 수 있는 광고 전문박물관으로서 국내 유일의 디지털아카이브관을 구축하여 사라져 가는 역사적인 영상 인쇄광고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 안내 데스크를 기준으로 시계방향으로 광고의 유래, 광고로 보는 한국사회문화사, 세상을 움직이는 광고, 광고제작 이야기, 광고 체험,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와 공익광고, 광고의 미래, 디지털 아카이브가 있다. 광고박물관 관람 안내 오늘날의 광고로 발전해오기까지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설명하는 영상으로 실사ㆍ애니메이션ㆍCG기법 등을 이용한 최첨단의 원형영상[Circle Vision]이며, 한국 최초의 근대 상업광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광고로 보는 한국사회문화사 9세기말 개항기부터 시작되는 한국의 근현대 광고 120년의 역사를 7개 시기로 구분하여 유물ㆍ영상ㆍ패널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마련한 역사공간으로 각 시기별 광고를 통해 당시 사회와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광고제작 이야기 현대 광고의 흐름을 인쇄광고와 영상광고 또는 국내광고와 해외광고로 이해할 수 있는 광고 갤러리와 같은 전시공간으로 광고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순기능과 우리 생활속에 광고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광고로 보는 한국사회문화사 광고의 생산에서 소비까지, 즉 각 매체별로 광고의 제작에서 소비과정을 광고주ㆍ광고 회사ㆍ광고매체ㆍ소비자의 광고 네 주체를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고, 광고제작을 위한 실무자들의 작업진행 방식을 영상과 모형으로 확인할 수 있다. 광고체험 관람자 스스로가 ‘광고사진촬영’과 ‘광고사진편집’을 통해 간편하게 간접적으로 체험함으로써 광고를 이해할 수 있고,모형 오토바이 시승과 영상을 통해 옥외광고를 체험할 수 있으며, 세계 3대 국제광고제인 ClioㆍNYFㆍCannes 광고제를 포함한 세계 10 대 광고제의 수상작품을 관람자 본인이 직접 감상할 수 있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와 공익광고 방송의 공공성 확보와 전파수익의 사회환원, 국민의 건전한 문화생활과 방송문화 발전 및 방송광고진흥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의 역사와 역할 그리고 이 사회를 맑고 밝게 만드는 공익광고를 이해할 수 있다. 광고의 미래 영상관 21세기 광고의 미래 모습은 광고매체, 과학기술의 발달, 소비자의 소비행태, 산업의 변화, 문화의 변화 등에 따라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할 수 있도록 영상을 통해 이해할 수 있고, 그 외 다양한 영상을 통해 광고를 이해할 수 있는 영상교육관이다. 광고 디지털 아카이브 TV광고, 라디오광고, 인쇄광고, 옥외광고, 인터넷광고 등 4만5천여 점의 한국 근현대 광고를 디지털로 전환하여 아카이브를 구축, 관람자들이 검색할 수 있도록 한 디지털 광고도서관으로서 광고를 전공하는 대학생과 광고산업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광고 제작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한 디지털 광고자료 센터이다. 광고역사 한국에 근대 광고가 도입된 것은 1876년 강화조약 체결과 함께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신문이 발행되고 광고도 등장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 광고는 1886년 2월 22일 자 제4호에 게재되었다. 그 뒤 현재까지 1세기를 넘는 기간의 한국 광고는 크게 해방 이전 2개, 해방 이후 5개, 모두 7개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개항에서 1910년 한일합병 때까지가 첫 시기이고, 그 다음 시기는 1945년 광복까지다. 1910년부터 10년간은 일제 무단정치 시기인데 우리말 신문이라고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하나뿐이었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이른바 일제의 문화정치로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광고는 번창했다. 그러다가 1940년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되며 광고가 쇠퇴하기 시작하다 1945년 일제 패망에 이르러 광고가 거의 사라졌다. 광복 이후는 5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해방에서 1968년까지인데 우리말 신문이 나오고 민간상업방송이 시작된 시기이다. 둘째 시기는 1968년에서 1980년까지인데 이 10여 년 사이에 한국 광고는 급성장을 했으며 광고회사가 자리를 굳힌 시기이다. 셋째 시기에는 1980년에서 1988년으로 언론통폐합이 있었고 컬러 TV가 등장했다. 넷째 시기는 88 서울 올림픽에서 1995년까지로 언론자유의 회복에 따라 언론의 수가 폭증하고 아울러 광고도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마지막 시기는 1995년 한국에서 인터넷이 상용화된 시기부터 현재까지인데 정보기술(IT)과 뉴미디어의 등장이 매체와 광고를 포함한 마케팅 그리고 나아가서는 사회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개화기-광고 도입기. 1886-1910 1883년 11월 20일 자 한성순보 제3호 회사설(會社設)에 <광고>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고 3년 뒤에 세창양행의 광고가 최초로 한성주보에 실렸다. 그 후 광고는 급속히 발전해서 신문, 잡지, 전봇대, 전차, 간판이 광고 매체로 이용 되었고 할인판매. 통신판매, 현상광고 등 광고 방법도 다양해졌다. 활자만으로 된 광고에 테두리 장식, 일러스트레이션, 검은 바탕에 흰 글자, 옆으로 누인 광고, 거꾸로 세운 광고 등 표현이 다양해지고 광고 카피도 점차 전문성을 띄게 되었다. 1906년에는 일본전보통신사가 광고대행업을 시작했고 1910년에는 한국인이경영하는 광고회사가 생겼다. 일제시대 - 광고의 성장과 쇠퇴기. 1910-1945 광고의 입장에서는 이 기간을 3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1919년3.1 독립운동까지 무단정치 시기로 언론 통제가 심했던 어두운 시기였다. 광고는 계속되었으나 광고제도는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둘째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한국인에게 신문 발행을 허가한 시기로 1940년 이 두 신문이 강제 폐간되기까지 약 20년간 일본광고가 절반을 차지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신문이 8면으로 증가했고 1930년대 중반에는 12면까지 증가했는데 광고가 늘었기 때문이다. 신문사가 주최하는 광고상, 광고강좌, 광고 해설 기사 등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으며 연희전문 상과(商科)에서는 광고 강의를 했었다. 셋째 시기는 광고 쇠퇴기이다. 태평양전쟁의 영향으로 광고는 심한 통제를 받았고 신문지면도 2면으로 줄었다. 민간회사가 전쟁 선전광고비를 부담하기도 했다. 상업광고는 거의 사라졌다. 광복, 광고 복구, 민간상업방송의 정착. 1945-1968 광복으로 국권을 찾았고 우리말을 찾기는 했으나 남북분단, 3년간의 한국전쟁은 광고에도 치명적이었다. 신문은 하루에 고작 4면이 발행되었으며 광고할 제품도 의약품과 영화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한국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하고 1960년대 초부터여러 민간상업방송이 등장하면서 광고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강의 기적>, 광고의 급성장, 현대적 광고의 정착. 1968-1980 60년대 말 광고대행업이 신종 산업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TV 보급은 가구 대비 2%에서 80%로 폭증하면서 사치품에서 필수품이 되었다. 따라서 TV는 강력한 광고매체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00억 원도 안 되던 광고비가 2,186억 원으로 천문학적으로 증가했다. 광고회사가 광고의 주축이 되는 시대로 바뀌었으며 광고단체와 시장조사회사가 생기고, TV광고 감독이 등장했다. 매체사가 주최하는 광고상이 제정되고 일본의 ACC, 미국 CLIO 광고상이 소개되었다. 대학에는 광고전공학과가 생겼다. 70년대에는 신문에 컬러광고가 등장했다. 광고주, 매체, 광고회사의 3자가 광고산업을 구성하는 현대적 광고시대로 정착한 시기였다. 언론통폐합, TV 컬러화,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창립. 1980-1988 제5공화국이 탄생하면서 언론기본법이 제정되고 언론이 통폐합되었다. 민간방송은 공영화되고 1981년에는 TV가 컬러화되었다. 그리고 모든 방송광고 판매를 대행하는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설립되었다. 신문은 하루 8쪽에서 12쪽 발행으로 증가했다. 한국 광고비는 국민총생산의 1% 선에 이르는 선진국형이 되었고 아시아에서 일본다음으로 큰 광고비 보유국이 되었다. 한국 광고시장 개방에 대한 압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개방 시대. 1988-1995 1987년 언론기본법이 폐기되면서 1988년 이후 일간신문의 수는 2배, 3배로 늘었다.신문 발행 면수의 제한도 풀렸으며 민간방송이 부활했다.1991년에는 한국 광고시장이 개방되었다. 한국은 세계 10대 광고비 보유국이 되었다. 인터넷, IT의 뉴미디어 시대. 1995 이후 1995년부터 인터넷이 상용화되면서 IT(정보통신) 시대가 열리고 뉴미디어시대가 왔다. 매체는 물론 마케팅과 광고, 광고 표현까지도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1998년 한국은 IMF를 맞으면서 광고시장도 큰 타격을 받았다. 당시 한국 광고시장은 전년 대비 35%나 줄었다가 다시 회복되었지만 성장을 계속하던 광고시장은 90년대 말부터 저 성장기로 접어들었다. 현재 한국광고의 시장 규모는 2007년 기준 8조원 대로 세계 10위권이다.] 11:42~11:59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424 번지에 있는 올림픽회관으로 이동 [올림픽공원 안에 있다.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서울 올림픽대회를 치르기 위한 준비작업의 하나로 1986년 완공하였다. 면적 1만 7,305㎡, 지하 2층 지상 15층 규모로서 전통 건축양식을 살린 저층 부분과 현대적 감각을 살린 고층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안에는 올림픽 준비 업무 당시 강당과 대회의실 등으로 사용하였던 서울올림픽기념관과 사무실·회의실·전시실·자료보관실·대연회실 등이 있다.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와, 서울 올림픽경기대회 때는 조직위원회 사무실로 쓰였고, 그 뒤로는 대한체육회회관으로 사용되어 대한체조협회, 대한양궁협회, 대한핸드볼협회, 대한하키협회 등이 들어와 있다.] 11:59~12:03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424 번지에 있는 올림픽공원 세계평화의문으로 이동 12:03~12:17 간식 12:17~13:37 [올림픽공원 세계평화의문(1경)~몽촌해자 음악분수(3경)~소마 미술관~조각공원의 조각작품 대화(4경)~몽촌토성 산책로(5경)~나홀로 나무(6경, 몽촌토성 안에 있음)~서울 백제어린이박물관~올림픽 수영장 옆 88호수(7경)~올림픽 수영장~올림픽 체조경기장~동1문 근방의 엄지손가락(2경)~올림픽 핸드볼 경기장~들꽃마루(8경, 올림픽공원의 동남쪽에 위치한 장미광장 옆에 있음)~장미광장(9경)]의 동선으로 올림픽공원 9경을 탐방 [올림픽공원 9경 올림픽공원의 가장 아름다운 곳, 9경 도심속 쉼터인 올림픽공원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9개의 장소'와 '구경하다'의 의미를 내포하는 구경(九景)은 한국사진작가협회에서 추천한 사진촬영 명소이다. 1경 세계평화의문 김중업 작품 (규격 : 62.0×37.0×24.0m) 서울올림픽기념 상징조형물로,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음 1경 Story telling : 평화를 기원하는 한민족의 얼이 담긴 세계평화의 문 서울올림픽 정신을 기리기 위한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 1988년 7월 건축가 김중업씨의 설계로 건립된 조형물로, 한민족의 저력과 기량을 전 세계에 떨친 88서울올림픽대회를 기념하기 위해 “세계평화의문”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높이 24m, 폭(전/후) 37m, 전면 길이 62m(날개 정면폭)의 규모로 아름답고 장중한 외양이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 작품은 한민족의 우수성과 그 저변에 자리한 우리 얼을 표현한 작품으로, 세계평화의문은 한국 전통건축의 둥근 곡선을 활용, 비상과 상승의 이미지를 강조하였다. 고구려 벽화 사신도와 열주탈로 형상화한 우리 얼 천정부분인 날개 하단에는 서양화가 백금남씨가 한국 전통양식을 주조로 하여 우측에는 현무와 주작, 좌측에는 청룡과 백호를 단청으로 그려서 고구려 벽화 사신도를 형상화 하였고, “세계평화의문” 앞쪽 좌ㆍ우에는 조각가 이승택씨가 만든 열주탈이 각각 30개씩 늘어서서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2경 엄지손가락(조각) 세자르 발다치니(프랑스)작품 (규격 : 청동 3.6×2.7×6.0m) 2경 Story telling : '미완의 사랑'을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 으뜸을 상징하는 인체의 일부를 극적으로 확대한 작품 프랑스의 국보급 조각가, 세자르 발다치니의 청동작품 1988년 제작된 ‘엄지손가락’은 세계에 7개밖에 없는 대형 엄지손가락 조각상이다. 프랑스의 국보급 조각가 세자르 발다치니의 작품으로, 그는 고철과 산업쓰레기 등을 이용해 산업사회의 일회성 가치를 신랄하게 풍자해 신사실주의의 기수로 불리고 있고, 인체의 특정 부위를 크게 만드는 작업을 한 인체 조각가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에 있는 ‘엄지손가락’은 6m이며, 프랑스에 있는 것은 12m이다. 특히 이곳 올림픽공원 만남의광장 주변에 설치된 엄지손가락을 제작할 당시 작가는 두 번이나 위암 수술을 받고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면서 완성한 거작이다. 세자르 발다치니의 생전에 본인 작품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3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문화사절단 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2박 3일동안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나라와 커다란 인연이 있는 세자르 발다치니는 1998년에 세상을 떠났다. 3경 몽촌해자 음악분수 140여곡의 멜로디에 따라 14,000가지의 모양을 연출하며 30m 높이까지 물을 뿜어 올리는 음악분수 3경 Story telling : 아름다운 선율이 자아내는 1만 4천개의 황홀경 역사의 숨결을 오롯이 간직한 백제의 유적 해자란 성벽 바깥을 따라 도는 물길로서, 적이 성벽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군사방어시설이라 할 수 있다. 몽촌해자는 1983년 몽촌토성 외곽을 발굴조사할 때 성벽 아래에서 발견된 도랑 흔적을 기초로 주변 경관과 어울리게 새로 만든 인공호수이다. 둘레 1,800m, 총면적 53,500㎡, 수심 1.4~2m, 담수량 76,000톤이며,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자연생태 교육공원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몽촌해자 중앙에는 포항제철에서 기증한 음악분수가 1989년 9월 설치되어 시원한 물줄기가 최고 30m까지 치솟으며 총 140여곡의 멜로디에 맞춰 14종 14,000여 가지의 환상적인 모양을 연출한다. 희귀 야생동식물이 서식하는 도심 속 생태천국 해자 주변에는 600m의 자연형 호안이 있고, 6개로 이루어진 216㎡의 인공 식물섬에는 각종 동식물이 서식한다. 분수 가동기간 : 5월 ~ 10월(6개월) 4경 대화(조각) 모한 아마라(알제리)작품 (규격 : 화강암 6.0×1.8×3.3m)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교환하려 애쓰는 모습을 조각을 통하여 형상화 4경 Story telling : '너와 나'를 넘어 '우리'가 되는 유일한 길 알제리의 세계적인 조각가 아마라 모한은 1987년 7월부터 8월까지 50일간 한국에 머물면서 거대한 화강암을 깎고 다듬어 6.0×1.8×3.3m 크기의 ‘대화’조각상을 직접 제작하였다. 소통의 법칙 하나. 입은 다물고 귀를 열라! 이 조각상은 서로 똑같이 생긴 쌍둥이가 몹시 사이가 좋지 않고 매일 싸움만 하여 대화를 단절하자 이에 분노한 신이 벌로 눈을 빼앗아 서로 볼 수 없게 한 뒤, 평생 옆에 붙어 대화를 하도록 했다는 이야기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입은 다물어져 있지만 서로를 향해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말하기 보다는 먼저 경청하는 것이 대화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고, 또 서로 이야기를 잘 듣기 위해 머리가 포개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모습이 의사소통을 위한 노력을 표현하는 듯하다. 동서화합의 물꼬를 튼 서울올림픽정신 형상화 이 조각상은 지리, 언어, 문화, 정치 등의 장벽을 뛰어넘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나누는 대화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올림픽을 통해 세계평화를 이룩한다는 올림픽의 숭고한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특히, 올림픽공원은 세계5대조각공원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88호수 주변, 평화의광장, 만남의광장 등 올림픽공원의 다양한 장소에서 세계 유명 조각 작가 작품 약 177여점 및 한국작가들의 작품 34여점 등 약 211여개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5경 몽촌토성 산책로 전경이 매우 아름다운 산책코스 (약 2.3km) 올림픽공원 산책로는 호반의 길, 토성의 길, 추억의 길, 연인의 길, 젊음의 길이 있음 5경 Story telling : 새들도 날개를 접고 거니는 꿈결 같은 길 몽촌토성은 고대 백제 사람들이 남한산에서 뻗어 내린 낮은 구릉에 만든 토성으로서, 성벽 둘레 2,285m이며, 성벽 안쪽의 면적은 216,000㎡이다. 성벽 바깥의 몽촌해자, 88해자, 성내천 일부 등을 합하면 총면적 542,542㎡이며, 몽촌(夢村)이란 순우리말로 ‘꿈마을’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올림픽공원 주변에 높은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전에는 서쪽 성벽 위에서 행주산성(고양시)이 보였다고 한다.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1983년부터 1988년까지 몽촌토성을 연차적으로 발굴조사하여 동문, 남문, 북문 등의 성문과 해자, 목책, 외성 흔적을 확인하였으며, 성 안에서 각종 건물, 연못, 창고 등을 발견하였고, 몽촌토성은 1982년 7월 22일 사적 제297호로 지정되었다. 겨울이면 갈대가 장관을 이루는 ‘호반의 길’ 가장 짧은 ‘호반의 길’은 몽촌토성의 해자 일부를 한 바퀴 도는 코스(평화의광장 -> 곰말다리 -> 평화의광장)로, 길이가 1.302㎞이며 산책하는 데 18분가량 소요된다. 탁 트인 전망, 아름다운 경관이 으뜸인 ‘토성의 길’ 전체 코스가 몽촌토성 위로 길이 이어져 있으며 주변 경관도 좋아 몽촌토성의 코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다. 2.21㎞에 30분 정도 소요된다. 백제유적지를 돌며 역사를 돌아보는 ‘추억의 길’ 몽촌토성을 거쳐 백제집자리전시관 등을 걸으며 백제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코스(곰말다리 -> 토성중심 -> 백제집자리전시관 -> 토성순환 -> 피크닉장 -> 곰말다리)이다. 3.35㎞에 45분 정도 걸리며 공원 내부를 걸을 수 있는 조용한 길이다. 호적한 데이트코스로 제격인 ‘연인의 길’ ‘토성의 길’과 교차하며 이어지는 코스(곰말다리 -> 토성중심 -> 몽촌역사관 -> 88호수 -> 88마당 -> 삼거리 -> 토성중심 -> 피크닉장 -> 평화의광장 -> 곰말다리)이다.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 4.29㎞에 약 1시간이 소요된다. 마라톤 코스로 애용되는 ‘젊음의 길’ 몽촌토성 외곽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코스로,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코스이다. 3.15㎞에 40분 정도 소요된다. 6경 나홀로 나무 수종 : 측백나무(높이 약 10m) 각종 영화, 드라마, 광고 등의 배경으로 사랑받고 있으며 일명 "나홀로 나무"라고 불림 6경 Story telling : 푸른 하늘, 넓은 들, 내 마음의 쉼표 올림픽공원의 명물인 나홀로 나무는 주위에 나무가 없고 혼자 우뚝 서 있다 해서 나홀로 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나홀로 나무가 홀로 된 진짜 이유는? 나홀로 나무가 홀로 서있게 된 것은 1985년 86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88서울올림픽대회를 앞두고 몽촌토성 안에 있던 30여채의 민가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키가 크고 모양이 예쁜 나무만 남기고 모두 베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7경 88호수, 팔각정(오륜정) 규모 : 12,700㎡ (15,000톤) 인공호수 주변에 약 13개의 조각작품이 있으며, 대표작품으로는 “날갯짓”이 있음 7경 Story telling : 자연과 사람, 문화가 어우러진 낭만지대 88호수는 성내천의 유수지 역할을 하는 인공호수로, 호수 한 쪽에 팔각정이 있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12,700㎡의 면적에 수심이 약 2m이며, 담수량은 15,000톤으로 앞쪽에 자리 잡은 수변무대는 각종 행사와 공연무대로 활용되고, 특히 웨딩촬영 명소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인간과 자연이 함께 만든 예술작품, 날갯짓 88호수에는 일본의 조각가 스스무 싱구가 설치한 ‘날갯짓’이 있는데, 이 작품은 모두 17개의 조형물로 이루어져 있다. ‘날갯짓’은 물과 바람, 햇빛 등의 자연 요소를 이용해 조형물의 움직임을 보여주며 부표 원리에 의해 호수 위에 떠 있는 17개의 날개들이 바람에 의해 좌우, 위아래로 움직인다. 88호수에서 인간과 자연이 함께 연출해내는 예술작품, 인공미와 자연미의 조화를 직접 두 눈으로 감상할 수 있다. 9경 스탬프 투어의 하나인 88호수를 찾아 호수의 아름다운 광경과 더불어 팔각정을 찾아 12지간 석상을 둘러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이다. 8경 들꽃마루 계절별로 다양한 들꽃 감상 가능 봄꽃(5~6월/꽃양귀비, 유채 등), 가을꽃(9~10월/노랑 코스모스 등) 8경 Story telling : 철따라 꽃잔치가 열리는 도심 속 정원 들꽃마루는 장미광장과 올림픽문화센터 옆쪽 들꽃마루 휴게 쉼터와 함께 조성되어 있는 2,800㎡ 면적의 야생화단지이다. 마루는 꼭대기 혹은 최고를 뜻하는 순우리말로, 들꽃마루 언덕 위에는 원두막이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종류의 들꽃들이 양쪽 경사로를 따라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선사한다. 들꽃마루에서 5~6월에는 꽃양귀비, 유채 등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9~10월에는 노랑코스모스 등이 색다른 경관을 연출한다. 9경 장미광장 13,260㎡에 165종 18,500주의 장미가 식재되어 있음 개장 : 2010. 6(13,260㎡) / 위치 : 공원 내 K-아트홀와 올림픽홀 사이 9경 Story telling : 서울에서 가장 프러포즈하기 좋은 곳 싱그러운 장미향 그윽한 올림픽공원의 새 명소 장미광장은 2010년 6월에 개장한 새로운 휴식공간으로, 서울 도심에서 다양한 장미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올림픽공원의 상징성을 살리기 위해 고대올림픽과 근대올림픽의 만남을 주제로 제우스 등 올림푸스 12신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12개의 장미화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중간 중간 열주를 세워 고대 그리스의 도시 분위기를 연출했으며, 총 13,260㎡의 면적에 마리아 칼라스, 엘르 등 외산장미 146종 16,300주의 장미가 식재되어 있다. 진선미 등 19종의 순수 국산장미로만 별도의 테마화단을 조성했다. 문화와 예술이 흐르는 낭만지대 장미광장에 오시면 다양한 꽃말을 지닌 수많은 종류의 장미꽃들을 감상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비너스의 탄생' 등 고풍스러운 그리스 벽화를 함께 보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 8월 초순부터 9월 중순까지는 가을장미를 준비하는 기간이라 장미꽃을 감상하실 수 없다.] [소마미술관 자연과 소통하는 도심 속의 예술 쉼터 세계의 조각 작품들과 조경이 조화를 이룬 조각 공원 안에 자리 잡은 소마미술관은 서울 올림픽의 성과를 예술로 승화하는 기념공간이자 휴식공간이다. 미술관에서 나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조각 공원의 황톳길을 따라 걷다 보면 조각 작품들과 자연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창밖으로 조각 공원의 전경이 펼쳐지는 개방적이고 확장된 공간이 되는 실내 전시공간을 갖춘 1관 그리고 지하철 9호선과 연결된 2관 등 소마미술관은 자연과 인간, 예술과 건축이 어우러진 색다른 풍경을 만들어 자연과 공존하는 소통의 공간구조를 더욱 실감하게 한다. 문의 및 안내 : 02-425-1077 홈페이지 : http://soma.kspo.or.kr 주소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 424 이용시간 : 10:00~18:00(입장마감 17:30) ※ 단, 전시마다 달라질 수 있음 휴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추석 당일 주차 주차 가능 이용요금 - 개인 : 성인 3,000원/청소년 2,000원/어린이 1,000원 - 단체 : 성인 1,500원/청소년 1,000원/어린이 500원 - 통합권 : 성인 4,000원/청소년 3,000원/어린이 1,000원 ※ 단체 20인 이상 ※ 예술인 패스 및 대학교 학생증 소지자, 군인(하사이하) : 청소년 요금 적용 ※ 무료 : 만 6세 미만, 만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장애인] 13:37~13:51 서울 송파구 위례성대로 71 번지에 있는 한성백제박물관으로 이동 13:51~14:53 한성백제박물관을 관람 [한성백제박물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성대로 71 개관일 : 2012년 4월 30일 운영자 : 서울특별시청 한성백제박물관(漢城百濟博物館, Seoul Baekje Museum)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서울시립박물관이다. 올림픽공원 내부에 있으며, 지하3층과 지상2층으로 나뉘어 있다. 상설전시는 서울의 선사·고대문화를 중심으로 백제 탄생 이전과 탄생 후 멸망까지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 공간은 지하 2층부터 지상 1층까지이다. 2012년 4월 30일 개관하였고, 총면적은 19,423m2 정도이며, 대지면적은 14,894m2, 건축면적은 2,901m2이다. 관장은 지방학예연구관으로 보하되, 지방임기제공무원으로 보할 수 있다. 건립 배경 및 목적 서울은 678년의 백제 역사 중 493년 간 백제의 수도였으며, 현재 서울에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 백제 한성기의 핵심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있고, 출토된 유물만도 수만 여점에 이른다. 이러한 유적과 유물을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하여 관광자원, 문화기반 시설을 구축하며 수도 서울의 2천년 역사를 재조명함으로써 문화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몽촌토성이 바라보이는 올림픽공원 내에 한성백제박물관을 건립하였다. 역사도시로서의 서울의 정체성을 확장하고 이를 통해 서울 시민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자 한다. 더불어 유구한 서울의 역사성 보전과 출토유물의 종합적이고 체계적 전시를 통해 국내외 관광객 유치의 기반이 되고자 한다. 설치 근거 및 소관 사무 설치 근거 「서울특별시 행정기구 설치조례」 제77조제1항 소관 사무 박물관의 운영·관리에 관한 사항 박물관 자료의 수집·보존·전시 및 조사·연구 전시유물의 조사·보존 및 관리에 관한 사항 연혁 2010년 10월 20일: 건축 준공. 2010년 12월 6일: 유물 1차 이관(902점). 2011년 4월 15일: 유물 2차 이관(18점). 2011년 4월 21일: 미리보는 한성백제박물관 개장. 2012년 1월 1일: 서울역사박물관의 하부기관으로 한성백제박물관 설치. 2015년 7월 1일: 서울특별시청 직속기관으로 개편. 전시현황 전시실 안내 스마트폰에 “U-전시안내 앱”을 설치한 후, 안내데스크에서 RFID 태그를 수령하면, 각 전시실별 RFID 리더기에 태그를 터치하여 유물정보 및 전시 설명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 iOS, 안드로이드가 모두 지원되며, 안내데스크에서 RFID 태그를 발급받는다. 스마트폰을 소지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태블릿 PC를 대여해준다. 상설전시 프롤로그 (역사 속으로) 제1전시실 (서울의 선사): 서울의 선사문화, 백제의 여명 제2전시실: 백제의 꿈, 한강에서 꽃피다 제3전시실: 백제의 꿈, 한강에서 꽃피다 조직 관장 총무과 전시기획과 교육홍보과 유물과학과 백제학연구소] 14:53~15:17 서울 송파구 오금로 219 번지에 있는 서울 방이동고분군으로 이동 15:17~15:37 서울 방이동고분군을 탐방 [서울 방이동 고분군(서울 芳荑洞 古墳群) 대한민국의 사적 제270호(1979년 12월 28일 지정) 면적 : 31,154m2 시대 : 백제 주소 :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산47-4번지 좌표 : 북위 37° 30′ 29″ 동경 127° 7′ 4″ 정보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개요 방이동 고분군이라고 하면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과 가락동 일대에 걸쳐 형성된 높지 않은 구릉지대에 위치하는 고분군으로 모두 8기의 삼국시대 고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고분군을 지칭한다. 1979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70호 방이동백제고분군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인 서울 방이동고분군으로 변경되었다. 1917년에 가락동 고분군과 함께 방이동의 고분들이 처음으로 확인이 되었으며 이후 70년대에 들어서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연구소에 의해서 조사되면서 총 8기의 고분 가운데 1호, 4호, 5호, 6호를 조사하였다. 이후 한동안 발굴이 없다가 최근에 한성백제박물관에 의해서 방이동 3호분이 조사되었다. 한성백제박물관 홈페이지의 왕도 유적 가상체험 페이지에서 실감나게 볼 수 있다. 제1호 무덤은 봉토의 지름이 12m, 높이 2.2m로 널길(연도)과 널방(현실)을 가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도굴로 인해 남아 있는 유물이 없었으나, 주민에 의해 3접의 토기가 수습되었다. 4호 무덤은 아치형천장(궁륭식천장)을 한 굴식돌방무덤으로, 자연적으로 유약이 입혀진 회청색경질 굽다리접시(고배)와 굽다리접시뚜껑을 비롯한 토기류와 철제류가 출토되었다. 6호 무덤에서 나온 회청색경질 굽다리접시의 경우 굽구멍(투창)이 전형적인 신라토기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이는 6세기 이후 한강유역이 신라영토로 되었을 때 만들어진 신라무덤일 가능성도 있다. 방이동 고분군은 소재지의 남서쪽에 연이어져 있는 가락동 고분군과 성격이 비슷한 관계로 학계에서는 가락동·방이동 고분군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더러 찾아볼 수 있다. 조사경과 및 내용 1970년대 잠실지구를 개발하면서 급속하게 발굴 조사가 행해졌다. 방이동 고분군은 가락동 3,4,5,6 호분과 같이 조사되었다. 당시 발굴의 수준은 수백미터 간격으로 탐색 트렌치(구덩이)를 파거나, 육안 관찰로 봉분이나 유물산포지를 확인하고 발굴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수많은 유적들이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얼마나 날림으로 했는지 일제강점기 때 조사된 분포도에 표시된 고분의 반의 반 정도 조사했을 뿐이었다. 축조 주체의 문제 방이동 고분군의 여러 고분들은 다른 공주 송산리 고분군이나 부여 능산리 고분군, 경주 대릉원과 같은 화려한 왕족의 고분들에 비해서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물론 잔디 깔린 무덤이라는 점은 한결같이 같지만 대중적인 관심을 이끌만한 유물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데 대부분 후장을 하지 않는 석실이라 부장품이 많이 없고, 석실이다보니 도굴이 용이하여 이미 역사시대를 거치며 다 털린 지 오래고 현대에 출토된 유물이 소량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성기 백제 석실의 자료가 비교적 영성한 탓에 신라와 구분되는 석실의 특징[9]을 쉽게 찾기 어려우며, 석실의 특징상 도굴이 쉽기 때문에 연대를 특정할 만한 자료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석실의 축조 주체에 대한 판별의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방이동 고분군이 백제 고고학에 관하여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일찍이 백제 고분 문화의 전개 과정을 방이동 고분군과 가락동 고분군의 축조 주체가 백제라는 것에 대한 찬성론과 부정론이 나뉜 상태에서 이후 웅진기, 사비기 백제에 대한 역사고고학적 연구가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방이동 고분군의 축조 주체와 관련된 논의는 여전히 주요한 쟁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방이동 고분군이 일견 유적 자체만 볼 때는 별 볼 일 없는 유적일 수 있지만 연결된 여러 분석들을 고려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축조 주체의 문제는 현재에 접어들어서는 백제 고분군이냐 신라(또는 고구려 혼재)의 고분군이냐의 문제로까지 세밀하게 접근하고 있다. 기존에는 거의 다 백제의 것 또는 신라의 것으로 보다가 현재 학계에서는 가락동 고분군까지 포함하여 가락동 3호는 백제, 방이동 5호의 수혈식 석곽은 신라로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편이다. 다만 세부적으로 논자마다의 개별 고분마다의 설정이 다소간 차이가 있다. 나아가 논의 자체가 백제냐 신라냐를 넘어서 석촌동 고분군과 가락동 서쪽의 일부 고분군이 백제의 고분군이고 방이동 고분군이 신라에 의해서 새롭게 형성된 고분군이라는 설과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 고분군 전체가 원래 백제의 고분군이지만 신라인들이 이를 일부 재사용하면서 신라 고분군'처럼' 보이게 한다는 견해로 크게 나뉘어져 있다. 나아가 석실 재사용론을 인정하면서도 백제 고분군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이하 가락동·방이동 고분군의 축조 주체를 백제로 보는 측을 인정론,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여러 세력이 축조 주체로 관여한 결과로 보는 측을 부정론으로 구분한다. 다만 인정론/부정론으로 구분하더라도 세부적인 견해는 인정과 부정이라는 각각의 큰 틀 속에서 논자마다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주요한 견해만 서술하는 것으로 한다. 또한 특정한 주장과 반론, 재반론 등은 아직 완전히 인정받는다고 할 만한 결론이 도출된 것이 아니므로 각 입장에서의 주장을 소개하는 형태로 서술한다. 석실의 구조에 대한 분석 가락동 방이동 고분군에서 확인되는 석실 및 출토 유물에 대한 분석이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이 증가한 자료들과 함께 아울러 볼 때 백제의 석실이 아니라 신라의 석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가락동 방이동의 축조 주체의 판별에 대한 문제가 점차 점화되기 시작하였다. 사실 이러한 논의는 원래 다양할 수 밖에 없는데, 위의 본문중에도 있듯이 "우리는 ㅇㅇ국 사람이니 ㅇㅇ국 스럽게 만들자"라는 식으로 무덤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횡혈식 장법이라하면 생긴게 다 비슷하다. 그렇다보니 석실의 구조 분석은 정답 없이 다양한 토론이 오가는 편이기도 하다. 그래도 주된 기준이 있다면 평면형태와 묘도의 양상 등이었다. 다만 최근에는 입체적 구조물인 석실을 평면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지적 속에서 천장가구의 형태나 장단벽의 장동화의 정도 등의 여러 기준이 보완되어 분석되고 있는 편이다. 또 묘도의 위치, 비교적 삐리하게 생긴 가락동 0호의 삐딱한 묘도부터 시작하여 우편재, 좌편재, 중앙연도 등의 구분마저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 나아가 수평묘도냐 경사묘도냐의 구분까지도 추가되어 검토되기도 하였다. 논의된 여러 주요한 구조적 속성 중 하나로는 배수로의 여부로써 여러 쟁점 중의 하나다. 인정론에서는 이러한 배수시설의 존재가 신라 석실의 구조적 속성에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신라 석실의 특징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부정론에서는 한성기 백제 석실의 특징으로 경사묘도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경사묘도라는 것이 현실 내부로 들어가는 무덤길이 내부로 기울어진 형태로 묘도를 따라서 배수되는 형태의 배수로를 설치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전형적인 신라석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까지 감자뿌리 뽑는 마냥 이어지면서 전형적인 신라 석실 고분군인 충주의 누암리 고분군이나 경주 금척리 고분군의 뒤에 있는 방내리 고분군의 구조까지 거론되었다. 누암리 고분군 및 방내리 고분군에서도 방이동 4호에서 보이는 배수시설이 확인되면서 부정론의 주장을 뒷받침 하였다. 다만 일정한 견해가 모아진 것은 아니고 사실상 인정론과 부정론 모두 석실에 대한 각 입장에서의 사용하던 분석 기준을 추구하다보니 석실 구조 분석으로는 토론이라기보다는 대립만 하고 있는 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의 부가적인 논의까지 추가적으로 인용되면서 석실 분석의 판별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타당함을 따지기도 하는데.. 여하간 점진적으로 다양한 주제에서 논의가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방이동 출토 신라토기 방이동 고분군에서는 1호분에서 토기 3점 등이 출토된 바 있다. 정식 발굴을 통한 유물은 아니었지만 이후 신고에 의해서 입수된 것으로 처음에는 백제 토기로 보고되었으나 추후에 이 토기들이 신라토기인 것이 밝혀지면서 방이동 1호를 백제의 석실로 판단하였던 주장과 방이동 1호를 신라의 석실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충돌하게 되었다. 토기에 대한 첫 판별 당시에는 발굴자료 및 연구 성과가 적었던 시절이다보니 그럴 수 있었던 일이 었다. 이후 후기 양식의 신라토기에 대한 연구가 누적되면서 방이동 1호 및 방이동 출토 토기를 신라로 보아야한다는 견해가 제기된 것이었다. 백제 석실을 주장하던 연구자들도 토기에 대한 인식을 백제가 아닌 신라 토기임을 인정하는 견해로 일부 수정하기도 하였다. 신라토기임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방이동 고분군은 "석실"이라는 점으로 "추가장"을 염두에 둔 시설이라는 것이다. 석실은 소위 폐기의 동시성이라는 것이 확보되지 않으므로 신라 토기가 나왔다고 해서 그것이 이 고분을 처음 만들 때 넣었던 부장품이 아닐 수 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신라토기의 존재로 하여금 축조 주체의 문제는 "신라의 석실 재사용"이라는 쟁점으로 넘어가기 시작하였다. 석실 재사용의 문제 위의 토기의 판별과 관련된 문제의 연장선으로써 백제인의 석실을 신라인이 한성을 점령하면서 다시 사용한다는 주장 속에서 개진된 것이다. 특히나 이 논의가 나올 즈음에는 서울 우면동 고분군 및 서울 경기 남부 각지에서 한성기 백제 석실이 확인되면서 다각적인 비교검토가 가능해졌던 시점이었으며 석실의 재사용을 알아볼 자료들이 추가되어 이러한 논의가 진전될 수 있었다. 몇 백제 석실에서도 신라 토기가 매납되어 있는 경우가 확인되었었다. 청원 주성리 1호, 안성 장원리 2, 3호 등의 고분이 바로 그러한 사례로 백제 석실에 신라 토기가 매납되는 현상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발굴결과를 살펴보면 석실 내부의 바닥의 층위를 살펴보면 기존의 백제 토기가 매납된 층 위로 신라 토기가 매납된 층위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인정론의 입장을 취하는 측에서는 백제인의 시신이 놓인 시상대(屍床臺)를 흙으로 덮고 새로 신라인이 자신들의 무덤을 쓴다는 것으로 보았다. 즉,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사망자를 위한 매장 시설을 마련할 여건이 없음을 이유로 기존의 백제 석실을 사용한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백제 권역에서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가야권 석실에서도 가야인들이 사용하던 석실에 신라 토기가 매납되거나 하는 현상이 상당수 있다는 근거를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방이동 고분군에서 나타나는 신라토기는 신라인에 의해서 재사용되면서 나타난 것일 뿐 원래의 석실은 백제의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반면 부정론에서는 일부 고분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현상이라는 정도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었다. 더 적극적인 반론으로는 소속 국가만 신라로 바뀌어 신라토기를 매납하였지 그들의 가족관계는 계속 이어진다는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부정론의 가족관계를 계승한다는 관점은 결과적으로 석실 재사용론이 위의 가락동 방이동 출토 신라토기와 관련된 석실의 국적 판별 문제를 근본적으로 반박할 타당한 근거가 아님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인정론에서는 백제 유물이 포함된 층위(백제 시상대 포함)를 덮는 현상에 대해서 적대적 행위로 규정한 반면 부정론에서는 이를 아래와 같이 분석하였다. 첫번째 인물이 사망하여 1차장 : 시신을 안치할 시상대(屍床臺)를 마련한다. 백제 토기가 매납된다. 이후 연속적으로 2차장 : 시신을 추가로 안치할 시상대를 또 마련한다. 백제 토기가 매납된다. 2+a차장 : 석실 내부 공간 부족으로 인해서 석실의 바닥을 새로이 정리하고 다시 시상대를 마련한다. 백제토기가 매납된다. 수 차례의 추가장 중 부패한 시신은 습골장(拾骨葬)의 맥락에서 따로 인골을 모아 토기 안에 담아 정리한다. 가장 끝으로 n차장 : 석실의 바닥을 정리하고 다시 시상대를 마련한다. 신라토기가 매납된다. 즉 가족장, 추가장을 위한 석실 내부의 공간 부족 현상에 따른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소위 습골장의 과정에서 끝에는 꼭 신라토기가 매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빼박 백제 석실, 빼박 신라 석실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으로 현대인 관점에서는 매우 놀랍지만 당대에는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한성기 백제 중앙의 석실 도입의 문제 방이동 고분군에 대한 인식과 분석 초창기에는 석실의 도입, 즉 새로운 장법의 등장은 완전히 직결되지는 않지만 해당 국가의 대내외적인 교류망의 수준이나 선진화의 척도로 보는 경향도 있다 보니 백제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자들의 입장에서는 한성기에 석실이 존재하였음을 반드시 상정해야만 하는 상황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서울 우면동 고분군을 비롯한 빼박 한성기 백제 석실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한 요건은 아니다. 다만 백제 중앙, 다시말해 백제의 왕묘역이라 할 만한 곳에서 석실이 사용되고 있는 가에 대한 보이지 않는 논의가 가락동, 방이동 고분군의 축조 주체와 관련된 논쟁 속에 숨어 있기 때문에 이 논쟁의 관전포인트로써 참고해 둘 만하다. 나아가 가락동 및 방이동 고분군의 석실이 한성기(475년 이전)이라고 고정할 수 있게 되면 백제 중앙의 석실로 볼 수 있는 것이며, 백제의 석실 도입과 관련하여 낙랑과 관련된 석실의 도입과정에 대한 문제가 비교적 말끔(?)하게 설명되기 때문에 중요하기도 하다. 결론 지금까지의 정리된 결론은 가락동의 서쪽 고분군은 석촌동 고분군과 같은 성격의 백제 고분군, 가락동 동북쪽 고분군 및 방이동 고분군은 백제의 가능성을 일부 갖고 있지만 신라/고구려 석실로 보는 것이 다소 대세적이다. 상술했다시피 인정론도 처음에는 다 백제고분군이었다가 견해의 일부 수정을 거치면서 몇몇 석실의 경우 신라 및 고구려 석실임을 인정하는 쪽으로 노선을 살짝 바꾼 상태였고 그런 상태에서 인정론과 부정론이 가락동 방이동의 특정한 몇 기의 고분이 백제냐 아니냐를 두고 논박하는 상황에 이르른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가락동 방이동 고분군 전체의 성격이 고구려 백제 신라 고분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는 상황이다. 추가로 한성백제박물관의 방이동 3호의 발굴을 착수하게 된 결심의 원인 중의 하나가 이러한 축조 주체의 문제를 해소할 단초를 얻기 위함이었으나 되려 더 많은 학술토론이 격발되는 촉매가 되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원래는 사적 명칭을 서울 방이동 백제 고분군으로 정하려다가 위와 같은 축조 주체의 복잡하기 그지 없는 상황 때문에 결국 서울 방이동 고분군이라고 정해졌다.] 15:37~15:47 서울 송파구 오금동 50-3 번지에 있는 서울 송파구 오금역 7번출구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5:47~15:50 오금역에서 연신내역으로 가는 3호선 지하철 승차 대기 15:50~16:53 오금역에서 3호선을 타고 연신내역으로 이동 [1시간3분 소요] 송파책박물관 위치도 서울 석촌동 고분군 안내도 서울 석촌동 고분군 지도 한국광고박물관 위치도 올림픽공원 9경 위치도 한성백제박물관 위치도 서울 방이동 고분군 안내도 서울 방이동 고분군 위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