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폐됐다. 어두컴컴하다. 주변의 시선 따윈 신경 안 써도 된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연인들의 욕망의 분출구로 이용된다.’
1990년대 돌풍을 일으킨 비디오방과 노래방의 공통점. 두 업계는 한 동안 유흥업의 쌍두마차로 대변될 만큼 사랑 받았다.
노래방은 여전히 2차 코스로 인기다. 반면 비디오방은 비디오업계가 차츰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과 동시에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던 비디오방이 이제는 시대의 요구에 맞춰 DVD(digital versatile disc)를 새롭게 접목하면서 또 다시 각광받고 있다. 여기에는 영화 상영 목적이라는 이전 비디오방의 순기능에서 다소 변질된, 연인들의 욕망의 분출구로 이용된다는 점이 사랑받는 더 큰 이유다. 이름은 디비디방으로 탈바꿈했지만, 여전히 경제적인 능력이 부족한 젊은 연인의 데이트 코스로 관심 받고 있는 것. 게다가 날이 갈수록 비디오방은 ‘더 은밀하게, 더 편안하게’라는 타이틀로 인기를 끌고 있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A비디오방. 주고객은 젊은 연인이다.
비디오방이 소위 한물 갔다고들 말하지만 A비디오방은 예외라는 게 업소 관계자의 말이다. 이곳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업 중이다.
“밤에는 남녀가 짝을 이뤄 이곳을 방문해요. 깊은 밤이 될수록 그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납니다. 낮 시간에는 청소년 커플까지 합세해요. 손을 잡고 당당하게 입장해요.”
A업소 관계자는 “대학생이나 청소년 커플 모두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당당하다”고 덧붙였다.
A비디오방은 외부에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해 보인다.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간판 한켠에 붙은 ‘커플전용’이라는 말 정도.
막상 내부에 들어가도 당장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로비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고, 음료수를 선택한 다음 돈을 지불한다. 비디오방이 붐을 일으키던 그때 그 시절과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은 순서다.
영화를 고르는 동안에도 커플들이 황급히 업소를 오가는 장면이 여러 차례 목격됐다. 간간이 직장인으로 짐작되는 커플들도 보였다. 이때의 시간 오후 1시.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귀사 하려는 듯, 그들의 움직임은 분주하기만 했다. 아직 고등학생 테를 벗지 못한 커플도 속속 등장했다. 이들은 주변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함께 영화를 고르며 큰 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DVD방은 비디오 대신 대형 스크린으로 DVD를 본다는 게 큰 차이. 게다가 비디오방 입구에서 느끼지 못했던 변화는 방문을 열자마자 한 번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방 내부에는 침대에 가까운 대형 쇼파가 놓여 있었다. 두 명이 몸을 누일 수 있는 트윈 쇼파다. 커플을 위한 배려였다.
쇼파의 머리맡에는 상자에 담긴 휴지가 놓여 있었다. 게다가 화장실 앞에는 콘돔자판기까지 준비돼 있다. 한마디로 모텔에서 보던 풍경과 같았다.
다시 돌아가는 길에 양옆을 살펴봤지만 모든 방은 내부를 전혀 볼 수 없는 구조로 돼 있었다. 복도에 흐르는 아스라한 조명은 한마디로 러브호텔을 연상케 했다.
발길을 돌려 다시 로비로 나왔다. 두 편 이상의 영화를 한꺼번에 빌리는 커플의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A업소 관계자는 “두 편의 러닝타임을 위함은 한 차례 일을 치르고 잠깐 눈을 붙일 시간을 버는 것”이라고 귀뜸 했다.
서울시내 어느 곳을 가도 사정은 비슷하다.
서울 영등포 B비디오방. 속칭 ‘대실 장사’로 돈맛을 톡톡히 보고 있는 곳이다. 일대 업계 관계자는 유흥업소에서 술을 마시고 부담 없이 성 관계를 나누기 위해 여관과 모텔 대신 비디오방을 찾는 커플이 많아졌다고 한다.
“목적이 불량(?)한 커플들은 아예 드러내놓고 구석에 외진 방을 요구해요. 심지어 러닝타임이 가장 긴 영화를 물어보기도 한다니까요.” B업소 관계자의 말이다.
“비디오방 업계는 지난 99년 유해시비로 손님이 눈에 띄게 줄면서 한동안 고사 위기에 처했어요. 일부 업주들이 성인 연령층을 흡수하기 위해 여관의 ‘대실’개념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또 다시 인기를 얻기 시작했죠. 한마디로 상황이 반전됐다고 할까요.”
공간을 빌린다는 개념의 대실은 모텔 용어의 하나. 시간에 쫓기거나 경제력 지지기반이 약한 성인 층을 흡수하겠다는 계산해서 비롯된 영업 전략이다. 여기에 돈 없는 대학생이나 청소년들까지 흡수됐다.
특히 문제되는 게 바로 청소년의 무분별한 출입이다. 비디오방(비디오물감상실업)은 청소년보호법상 청소년의 출입과 고용이 금지된 장소로 지정돼 있다. 비디오방의 업주 및 종업원이 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에는 최소 1개월의 영업정지를 당하게 된다.
그럼에도 비디오방에는 어색한 화장으로 나이를 감추려는 10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문 밖에는 버젓이 ‘청소년 출입 불가’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지만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비디오방은 1백% 청소년의 출입이 불가한 곳이지만 실제는 어디 그런가요. 노래방(노래연습장)도 역시 청소년출입금지 장소이지만 다들 출입하잖아요. 물론 노래방의 경우 예외적으로 담당관청의 허가를 통해 청소년실이 따로 마련된 업소에 출입할 수 있지만요,
B업소 관계자는 “비디오방에 오는 손님은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이 가장 많고 이 가운데 80% 이상은 영화보다는 다른 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염불보다 잿밥에 더욱 관심을 두는 셈이다.
밀폐된 공간에, 준비물까지 완벽하게 갖춰진 이곳에 들어간 청소년은 탈선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이다. 10대들도 유혹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만은 없어 보였다. 비디오방이 청소년 탈선의 장이 되고 있다는 우려가 실감됐다.
이 때문에 업계도 골머리를 앓기는 마찬가지. 입구에 “영화상영 외에 다른 목적이 있으면 아예 출입을 삼가 해 달라”는 호소문을 붙인 업소도 간간이 눈에 띈다.
“일단 밀폐된 방안에 들어가면 영화 상영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손님들을 절대 방해해서는 안 되죠. 그렇다고 사생활 침해라는 비난과 영업실적이 바닥을 칠게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감시카메라를 설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요.”
서울 성동구에서 C비디오방을 운영하는 이 업주는 “손님들이 나가고 난 뒤에 방에 들어가 보면 미리 준비해온 콘돔이 바닥에 뒹굴어 다니고 끈적한 액체가 묻은 휴지가 널부러져 있는 경우가 많다”고 답답해했다.
상황이 이렇지만 심지어 서울 강남의 한 비디오방에는 리얼돌(섹스용품으로 제작한 실제 사람크기의 인형)을 들여다 놓았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시간에 쫓기거나 바쁜 직장 남성을 위해 마련한 서비스. DVD대여와는 별도로 1만5천원을 내면 상영시간 내내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C 비디오방 운영자는 “강남에서 비디오방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들었다”며 “리얼돌을 들여놓고 나서부터는 직장남성들이 점심시간에도 소문을 듣고 찾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지역 어느 곳을 막론하고 일과시간에 직장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비디오방에서 시간을 보내며 깊은 밤에는 젊은 커플이 찾아와 은밀한 시간을 보내는 듯 했다.
“일부 비디오방이 욕망의 분출구 역할을 담당하는 등 부작용이 크다지만 그렇다고 국가가 나서서 개인의 욕망을 관리 할 수는 없잖아요.”
A업소 관계자는 비디오방이 단속의 대상이 돼선 안 되고 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소한 ‘청소년 보호’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비디오방에서 비디오 본다’는 말은 그야말로 옛말. 건전한 영상문화를 전달하는 비디오방의 취지가 무색할 지경이다. 어찌됐든 방문 목적 변경이 비디오방을 다시금 사랑 받는 장소로 떠오르게 한 이유가 됐다.
▲ 영화 고르는데 반나절 걸리는 커플
“유익한 비디오를 골라 보려는 뜻은 이해하지만 좀 심했다.”
▲ 들어오자마자 아무거나 고르는 커플
“영화에는 애당초 관심 없다. 괜히 늦게 고르다가 구석자리 놓칠까바 전전긍긍하는 커플이다.”
▲ 영화 제목은 안보고 상영 시간만 보는 커플
“이 커플 역시 목적은 하나. 성 관계도 즐기고 오래오래 쉬기도(?)한다는 계산이다.”
▲ 한 업소만 가는 커플
“단골 되면 구석의 VIP자리 예약 해주고 러닝타임 긴 영화 첫 번째로 제공하는 등 혜택이 크다.”
▲ 누가 볼까 ‘고개 숙인 커플’
“영화보고 나온 후에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나가는 커플도 있다. 이유는 방안에 남겨 놓은 흔적이 말해준다.”
▲ 여기저기 ‘기웃 커플’
“다 알면서 양 옆 칸 동태를 살피는 커플도 있다.”
▲ 저돌형, ‘대범 커플’
“방음도 잘 안되고 구석도 아닌데 안하무인격으로 성 관계를 나눠 오히려 지나가는 사람들 무안하게 만드는 커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