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2021년 5월 12일(수)
평택의 옛 중심이었던 진위고을을 지나는 길!
맑음터공원에서 야막리 쪽으로 내려오면 평택시 진위면으로 접어들고 진위현 관아가 있었던 진위면사무소나 진위천 인근의 풍광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진위향교에서 옛 진위현의 위세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진위천을 건너 계속 길을 가다보면 ‘흰치고개’라고 불렸던 소백치와 대백치를 지나게 되고 흰치고개를 지나면 내리저수지 인근에 위치한 원균장군묘에 도착할 수 있다
맑음터공원 안에 있는 진위고을길의 안내판
맑음터공원의 남문을 뒤로 하고
갈곶동 들판을 지나
평택시 진위면 야막리에 도착한다
야막리
진위면 야막리(野幕里)는 조선시대 진위군 이서면 에 속했다
1914년부터 ‘야막리’라 했는데 야막(野幕)은 마을 이 형성될 때 미간지를 개간하기 위해 넓은 들판에 들막을 짓고 살아서 ‘들막’이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야막’이라 했다
또한 천교도 진위교구가 있던 곳으로 일제강점기 초 3·1운동을 주도한 지역이기도 하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시설채소 재배는 초기 비닐온상을 이용한 채소 모종 재배부터 시작하여 소나무, 대나무, 철골 파이프, 유리온실 등으로 시설을 현대화하여우리나라 시설원예를 선도한 지역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진위면의 야막리와 하북2리, 신리로 이어지는 시설원예 재배단지는「수도권 채소1번지」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진위 오이와 진위 애호박은 수도권 농산물도매시장에서 큰 명성을 얻고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전부 논과 밭이었는데 최근에 아파트가 많이 들어 섰다)
야막고가교(경부선 철로)를 건너기 위하여 계단을 오른다
야막고가교를 건너 오른쪽에 있는 육교를 다시 건넌다
육교를 건너 오른쪽(경가대로)으로 가다 진위2 일반산업단지 표지판이 보이면 왼쪽(산업단지)으로 직진한다
(이 길은 개설된지가 2년이 넘지 않아 삼남길 표지 가 보이지 않는다)
LG이노텍 앞에서 옛길로 접어들고
가곡4리 민원실과
가곡3리 다목적(?)회관을 지나면
삼남길 이야기가 있다
평택섶길도 함께 한다
평택섶길은 평택의 16개 코스 500리에 이르는 작은 길들로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수 곁에, 호젓한 숲에, 고즈넉한 시골 마을에, 유서 깊은 시내 골목과 재래시장 등 다양한 곳에 이야기와 문화유산과 기념물, 역사 인물에 대한 테마들이 있다
벌써 모내기를 마친 논도 보이고
보호수로 지정된 아름드리 느티나무(수령 약 390년)
그리고 고향집 생각나게 하는 기와집 한 채
토지주에게 허락맡으려 아무리 찾아보아도 토지주 가 보이지 않아 사유지를 삼남길에 내준 고마움에 그냥 벽에 대고 꾸벅 인사를하고 지나간다
소 사육장(믿음농장)을 지나면
경기삼남길 중에서 가장 좁은 오솔길을 만난다
(정말 옛길스럽다)
오솔길을 빠져 나오면 6형제이야기 안내판이 나온다
6형제 이야기
이회영 ·이시영 6형제(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 시영과 호영 사이에 딸 순영이 있다)는 임진왜란 승리의 주역인 이항복의 10대손으로 조선시대 8대에 걸쳐 정승과 판서를 지낸 조선 최고의 명문가 자제들이었다
일제에게 주권을 빼앗기자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소유한 토지와 재산을 정리하여 중국 만주에 있는 서간도로 망명을 떠나게 되는데 형제들이 급하게 재산을 처리하느라 제 값을 받지 못했는데도 약 40만 원이 모였다
(지금 가치로 치면 약 600억원 이상인데 제 값대로 받았다면 약 2조 원 정도라고 한다)
이 자금은 만주 한인촌 건설, 독립군 양성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 건설과 유지 등 모두 독립자금으로 사용했다
실제로 독립운동과 신흥무관학교는 하나의 공동체 였다
항일전사인 김좌진과 이범석, 김산을 비롯한 3,5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독립 의지를 불태운 것은 이회영 ·이시영 6형제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였다
이회영 ·이시영 6형제는 신흥무관학교 설립 10여 년이 되자 재정이 고갈되어 중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자리에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그나마 조국의 광복을 지켜 본 이시영 초대부통령을 제외한 다른 형제들은 쓸쓸하고 비참하게 생을 보냈다
남양주의 대부호로 99칸의 대궐집과 개인 절(사찰) 도 소유했던 이석영은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금을 책임질 정도의 갑부였지만 상하이의 빈민가를 떠돌다 아사하였고,
여섯째 이호영은 일본 순사에게 가족이 몰살당하며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으며, 6형제 중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시는 이회영은 66세 노년의 나이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해방 후에 이승만대통령은 독립운동을 위해 팔았 던 토지를 다시 되돌려 준다고 제안했지만 이시영 초대부통령은 단번에 거절하였다)
♤ 6형제 생가터 (서울시 중구 명동11길 20, 명동1가 1-6)
남사당과 유세기에 대한 안내판
남사당
남자 사당(한량으로 예능자를 말함)들로 조직된 유랑예인집단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조선 사회에 있어서 가장 천대받아왔던 부류이며, 광대(廣大)· 장인(匠人)·상인보다도 못한 집단이었다
길가에 돋아난 이름 없는 잡초들이 밟히면 밟힐수록 살아나듯이 남사당의 정신은 민중의 정신으로 살아 있으며, 풍물(농악), 버나(사발과 쳇바퀴돌리기), 살판(몸재주), 어름(조선줄타기), 덧보기(가면극), 덜미(꼭두각시 인형극)의 여섯 마당의 남사당놀이 속에 흥건히 젖어 있는 것이다
♤ 유세기
1900년 초 전국 5대 놀이패인 남사당 진위패(男寺黨 振威牌)를 창립한 아버지 유준홍(柳俊弘)과 어머니 박납천(朴納天)의 다섯째 아들로 1893년 태어났다
(유준홍이 육성한 남사당 진위패는 흥선대원군 앞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해 대원군으로부터 ‘진위군대도방권농지기’ 라는 농기와 3색의 어깨띠 를 하사받았고 당시 상쇠를 맡았던 김덕일에게는 ‘오위장五衛將’이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유세기는 일제강점기 우리 전통 풍습을 금지하는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폈을 때 경찰로 근무하면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사당놀이를 허가해줘 평택과 안성지역이 남사당의 본산이 될 수 있도록 했다
또 초대 한국농악협회장을 역임했으며, 시조에 매우 능해 시조 부르는 법을 자세히 소개한 시조 입문서 <시조창법(時調唱法)>을 발간하는 등 시조 보급 사업에 앞장선 인물이다
참 예쁜 돌벽집을 지나
진위면사무소(행정복지센터)에 도착하였다
진위현
본래 백제(또는 고구려)의 송촌활달인데, 후에 부산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진위현으로 개칭, 수성군(수원)의 영현아었으며 고려시대에도 1018년(현종 9)에 수주(수원)의 속현으로 병합되었 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후에 현령을 파견 함으로써 독립했다
조선 건국 후 수도를 한양으로 옮김에 따라 진위현 은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되어, 경기도 남쪽 끝에 위치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진위행궁이 세워졌으나 현재는 사라 지고 없다
구 진위군의 중심지로 구한말까지 진위군청 소재지 였으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강제 통폐합으로 인한 진위군 출범 당시에도 진위군청 소재지였다
1926년 군청이 병남면(평택읍)으로 이전되고 1938년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중심기능을 잃었으나, 이전부터 오랫동안 진위군청 소재지였음을 감안하여 1948년 4월 명칭을 북면 에서 진위면으로 변경했다
1995년 오산시에 인접한 갈곶리, 청호리, 고현리 각 일부를 오산시에 편입하였다
(은산리에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사당 문헌사 와 정도전 기념관, 가묘가 있으며 이곳의 산대마을 이 정도전 후손들의 집성촌이다)
진위관아 터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봉남길 61, 봉남리 229)
진위현 관아 터는 지금의 진위면 행정복지센터가 있는 진위면 봉남리 일대로 지금은 진위향교만 남아 있다
객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진위현 관아 터는 주춧돌 20여 점이 진위면 행정복지센터 마당에 전시되고 있어 이곳이 진위현 관아 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진위현 지도와 진위현 주춧돌로 진위현의 영화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는 것이다
객사의 일부였던 진위초등학교
(개교일 1900년 4월 7일로 120여 년의 역사가 깊다)
♤ 3.1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1일에 봉남리에서 천도교인들이 주축 이 되어 3.1운동 만세시위를 하였으며, 3월 21일에 는 봉남리와 야막리 주민 500여 명이 면사무소를 습격하였고, 3월 31일에도 박성택, 유동환, 진영록 등 봉남리 주민 400여 명이 면사무소에서 대대족인 시위를 하였다
이로 인하여 박성택, 유동환, 진영록 등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 외에도 진위면에서는 진위초등학교와
은산리에서도 만세 시위가 있었다
진위향교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진위로 49, 봉남리 167)
조선 초기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을 교화하기 위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본래 건물이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자 초가집 두어 칸을 지어 위패를 모시다가 1644년(인조 22) 기와집 건물을 짓기 시작한 후 여러 차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본래 건물이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자 초가집 두어 칸을 지어 위패를 모시다가 1644년(인조 22) 기와집 건물을 짓기 시작한 후 여러 차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강학(講學) 공간의 중심인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단층 팔작지붕이며, 외삼문은 맞배지붕을 이룬다
평면 형식으로 보아 좌우에 온돌방이 있고 중앙에 대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양쪽에 각각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다
(동재는 양반의 자제들이, 서재는 일반 상민의 자제들이 기숙하던 곳이다)
공자(孔子)·맹자(孟子)를 비롯한 선현의 위패를 봉안하며 2월과 8월에 석전의식을 행하고 있다
♤ 석전(釋奠)
학교에서 선성선사(先聖先師)를 추모하기 위하여 지내던 유교의례로 산천·묘사에는 여러 제향(祭享) 이 있는 반면에 학교에서는 오직 석전만 있다
향교 입구에 있는 비각
비각 안에는 조선시대 이곳을 거쳐갔던 현감들의 공덕비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