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략)
유리병 속에 갇힌 말(言)은
자꾸만 말을 더듬거려
어떤 날은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책을 읽을 때도 더듬더듬 신발을 신을 때도 더듬더듬
줄넘기를 할 때도 더듬더듬 키가 작아 더듬거리는 일이 많았다
갇힌 언어들을 꺼내어 빵 바구니에 담았다
더듬거렸기에 또 다른 면이 생겼고
더듬거려서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동생이 집을 나가던 밤도 그랬다
유리병 속에서 나를 꺼내주던 것은 유리병이었다
-『부산일보/오늘을 여는 詩』 2022.07.19. -
'합동시집〈시골시인K〉걷는사람 | 2021' 중에서
일상에서 벌어지는 불안을 무덤덤하게 묘사하는 데 능한 시인은 이 시에서도 언어를 가진 자의 괴로움을 얘기하고 있다.
시를 쓰는 시인의 눈앞엔 지금 공군부대 부설고등학교가 창밖의 풍경으로 보이고 있나 보다. 창밖의 풍경은 뜻밖에 창의 내부처럼 유리병이 된다. 유리병 속의 말은 어떻게 꺼낼까. 시인은 말을 더듬거렸기에 ‘또 다른 면’이 생겼고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고 진술한다.
‘동생이 집을 나가던’ 불안의 밤에도 말을 더듬거렸던 시인. 유리병에 갇히고 만 자신을 꺼내 준 것이 갇힌 유리병이었다니! 공간과 장소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역시 더듬거리며, 공간과 장소를 절대적으로 인식하는 길밖엔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