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안에서 누릴 자유
골 2:16-23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골 2:16-23 /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을 지키는 문제나 초하루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남의 비난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7) 이러한 것은 앞으로 올 일에 대한 상징에 불과합니다. 이것들은 다만 그 본체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18) 천사숭배를 거부했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벌이 내린다고 하는 말을 믿지 마십시오. 그들은 환상을 보았다고 하며 그 정당성을 주장하겠지만 이들 거만한 사람들은 겸손한 체하며 교묘한 말을 꾸며대고 있는 것입니다. 19) 그들은 그리스도와 한몸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결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강한 근육으로 서로 결합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분과 힘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20) [그리스도를 통한 새 생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선을 베풀고 여러 가지 규칙을 지켜야 구원을 얻게 된다는 따위의 이 세상의 생각에서도 해방된 것입니다. 21) 그런데 왜 여러분은 이런저런 음식은 먹지도 맛보지도 말고 손을 대지도 말라고 하는 등의 규칙에 아직까지도 얽매여서 살고 있습니까? 22) 이런 규칙은 ㄱ) 인간의 가르침에 불과합니다. 음식은 먹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먹으면 없어집니다. (ㄱ. 70인역 사29:13) 23) 이런 규칙은 엄격한 경건을 요구하고 과장된 겸손과 육체의 고행을 수반하는 것으로 훌륭하게 보이겠지만 그러나 그것으로는 인간의 마음속에 파고드는 악한 생각이나 욕망을 이겨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그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뿐입니다.
골로새 교회 내에 율법주의적인 사상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율법의 한계(롬 3:20)와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16-19) 골로새 교회가 겪고 있는 두 가지의 거짓 가르침을 이야기합니다. 먼저 규례와 의식에 대한 거짓 가르침이 골로새 교회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합니다(16). 공동체가 바르게 세워지고 그 안에서 사람이 정의롭게 살아가려면 규례와 법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필요하지만, 사람은 연약하기에 어떤 규례와 법규든지 완벽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규례와 법규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다 인정받게 됩니다. 또한 거짓으로 겸손한 척하며 천사를 숭배하는 자들이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합니다(18).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라”라는 표현은 환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본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 외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헛되이 과장합니다. 천사 숭배는 천사와 환상 같은 영적 체험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지,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집중시키는 것이 아닙니다(19). 머리는 몸이 움직일 수 있도록 온 몸과 연결되어있습니다.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20-23) 골로새 교회의 일부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으로 규(구)약의 규례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고 세례를 받으므로 초등학문은 옛 몸과 함께 죽었는데, 왜 세상 사람들처럼 초등학문에 순종하느냐며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20). 왜냐하면 유대주의자들이 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 어떤 음식을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며, 만지지도 말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21). 그리고 그런 음식은 먹고나면 사라져 버리고, 음식이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닌데 그런 규례를 따라가려 하느냐며 책망합니다(22). 또한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라 말하는데, 이는 스스로 만든 예배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만든 규례와 의식들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자기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다는 교만입니다. 참된 겸손은 우리의 노력과 행위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적용: 당신의 신앙은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습니까? 혹시 율법적 규례나 영적체험이 당신의 신앙의 머리가 되지는 않습니까? 마태복음 5장 17-18절을 찾아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 소망도 없던 죄인에게 큰 은혜가 주어졌는데 그것을 알지 못해서 오늘도 죄 가운데 허우적거리며 스스로를 정죄하며 살아가진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는 부족하고 나도 뭔가 의미 있는 행위를 해야 한전하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헛된 생각을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누리게 하시는 자유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 설 교 >
주일과 안식일
골 2:16-17 / 최응희 목사
오늘 설교는 좀 다른 각도에서 하려고 합니다. 조금 성경공부를 하듯이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주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일이라고 하지 않고 일요일이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의 날’이라는 뜻으로 주일이라고 부르고 이 날을 예배 드리는 날로 정하여 드리고 있습니다. 일요일이 거룩하기 때문에 주일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혹시 다른 날로 예배 드리는 날이 정해지는 경우가 생기면 그 날이 주일이 될 것이요, 그 날이 거룩한 날이 될 것입니다. 거룩한 날이어서 주일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날이어서 주일입니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안식일이라고도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잘못된 호칭입니다. 주일은 안식일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쉬는 것이 구약의 안식일 규정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과 주일을 혼돈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일을 안식일이라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무엇이고 주일을 무엇입니까? 안식일은 구약의 율법에 안식하는 날이고, 주일은 신약교회의 전통을 따라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약의 전통과 말씀을 따라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은 안식의 날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그것이 신약의 말씀이고, 초대교회의 전통입니다.
오늘 특별히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어떤 목사가 일간지에 교회가 십계명에 있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광고를 낸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6월1일자 조선일보 광고면에 대문짝만하게 어떤 성결교 목사라는 분이 일요일 예배, 성경에 있는가? 라는 제호의 광고를 냈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성경에도 있고 찬송가 뒷면에 한번 더 크게 강조된 그 분의 명령이시다. 마땅히 토요 안식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충절이고 믿음이다. 그런데 왜 모든 기성교회들이 하나같이 성경에도 없는 일요일 예배를 보면서 항명의 죄를 범하고 있는지.....”라고 말했습니다. 일요일 예배는 로마에 의해 태양신을 섬기던 로마인들을 따라 일요일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혼란에 빠질지도 모르는 우리 교우들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나누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옛날부터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문자주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글자가 있으니까 따라야 하고, 저런 문자가 없으니까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지 문자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주의는 말씀을 잃어버리고 문자 그 자체에만 매달립니다. 문자는 말씀을 표현하고 말씀을 담는 그릇이지 문자 자체가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 사람의 주장대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으니 문자 그대로 유대인처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면, 우리는 모두 할례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짐승을 잡아서 제단에 올려야 할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배를 그렇게 드리라고 써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그냥 쉬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끊임없이 부딛쳐야 했던 문제, 그것이 바로 이러한 율법주의자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문제인줄 알았는데, 지금도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니 참 놀랍습니다.
우선 기독교는 유대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약을 경전으로 받아들였지만 그것은 신약의 빛에서 읽을 때에만 경전으로 받는 것입니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 진것을 믿는 믿음이 신약의 믿음입니다. 같은 구약을 읽으면서도 유대인들은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유대교식으로 읽습니다. 그들은 신약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경전에는 신약이 없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메시야 예언을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예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스스로 메시야라고 했다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을 유대식으로 읽으면 안됩니다. 신약의 뿌리가 구약에 있고, 신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을 경전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유대교식으로 구약을 읽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의 눈으로 구약을 읽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요 메시야로 받는 관점에서 구약을 읽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항상 기독교 신앙을 흔든 두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외부적으로 오는 박해요, 또 하나는 내부적으로 율법주의와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계속해서 한 말씀-율법으로는 구원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으로 이 율법주의와 끊임없는 싸움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의 대표적인 지표가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요, 또 하나는 할례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안식일과 할례를 포함해서 모든 율법은 십자가 안에서 다 폐기 되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로서만 구원을 얻는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갈라디아서6:14-15
안식일을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미 사도행전에서 결정이 났습니다. 사도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안식 후 첫날 반드시 모였습니다. 그 모일 때마다 성만찬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사죄하심을 심령에 새기는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의식이었습니다. 왜 안식후 첫날 성만찬을 떼었을까요? 그것은 그 날이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었고, 그 날이 성령강림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교회가 시작된 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사도들의 전통 속에 주일예배 전통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아직은 유대인들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는 습관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인들은 안식일은 안식일대로 지키면서 따로 주일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나중에 유대교에서 완전히 분리되면서 안식일을 버리고 주일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개종한 그리스도인 가운데 율법주의를 버리지 못한 자들이 계속해서 안식일과 율법에 써있는 절기를 지킬 것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요새 그 신문에 대문짝 광고를 낸 어떤 목사처럼 그런 사상이 계속해서 주장되었던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미 바울 사도가 언급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로새서2:16-17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에베소서2:14-15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갈라디아서4:9-11
이와같이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시고 십자가 은혜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교회 때부터 안식후 첫날 모여 성만찬을 하면서 주일을 지킨 것입니다.
그 주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사도행전20:7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고린도전서16:2
이것은 이미 사도들에 의해서 율법의 안식일과 구별되게 주간 첫날, 곧 주일예배가 드려지고 있음을 알게 해 주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이 날을 ‘주의 날’이라고 아예 고유명사로 불린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요한계시록1:10
초대교회에서부터 주일을 지켜왔습니다. 그 어떤 목사의 주장처럼 로마에 의해 강압되거나 로마의 월력을 따라서 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 날이나 저 날이나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사도가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로마서14:5
어떤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어떤 날이라는 어떤 정해진 시간이 중요하다면 세상은 큰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지구는 둥글어서 어떤 한 날이나 어떤 한 시간을 동시에 지킬 수가 없습니다. 만약 안식일 그 자체가 거룩하고 중요하여 꼭 그 날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같은 시간에 전 세계가 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지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예루살렘이 오전 11시면, 우리나라는 같은 날 오후 5시입니다. 그리고 뉴욕은 밤 12시입니다. 밤 12시에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하는 걸까요? 어떤 날과 어떤 시간이 구별되어 드려져야 한다면 그런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날과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날이든지 그 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랜 역사가 지나간 후 예배 날자가 일요일이 아니고, 월요일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토요일이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그 날의 ‘주의 날’ 정하여 지키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일요일을 ‘주의 날’로 정하여 구별되게 예배드리는 날로 삼은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날’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이 문자에 얽매어 안식일을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에 대해서도 책망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마가복음2:27-28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누가복음6:9
말하자면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의 안식일 규정을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지는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성탄절이 12월 25일이 아니라 다른 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어떤 날일까요? 언제인지 주님이 태어나신 그 날이 있기는 있었겠지요? 그러면 어느 날일까요? 그 날을 찾아 연구하고 찾아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쓸데없는 짓입니다. 어느 날이면 어떻습니까? 그 날을 지키면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그 날을 찾으면 그날을 지키는 것이 더 좋기는 좋을 것입니다. 누가 그 날을 찾을 것입니까? 그것이 그렇게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 집 길 건너편 사람은 아주 돈이 많은 사람인 듯합니다. 7년 전인가 우리가 이사했을 그 때에 큰 공사를 해서 좋은 나무들을 사들이고 대단한 정원을 만들더니, 요즈음 다시 땅을 넓히고 새로 나무를 심고, 돌을 놓고 하면서 공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다보면서 제가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은 돈을 어디다 쓸 줄 모르는 사람인가 보다. 매일 열명씩 되는 사람들이 달라붙고 포그레인이 3대씩 왔다 갔다 하면서 공사를 하는데, 한 사람이 십만원씩만 주어도 인건비가 하루 백만원, 포크레인 하루 오십만원이면 백 오십만원, 나무값, 돌값 말고도 하루에 이백 오십만원씩 드는 공사를 저렇게 하면, 한 달이면 얼만가.... 좀 더 뜻있는 일에 쓸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매일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안식일 지키라고 신문에 그만한 광고를 내려면 아마 천만원을 들었지 않았을까 생각되는데... 그 돈이면 선교하는 일에 쓰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느 시대나 율법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이단도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문자주의에 빠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자를 붙잡지 말고,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글자를 보지 말고,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그럴 때에 우리는 진정 참 믿음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어떤 분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항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분분하면, 우리의 길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해야 할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일을 지킵니다. 우리는 어떤 날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예배하는 그 시간을 귀중히 여깁니다. 그 어떤 시간도, 그 어떤 날자도, 그 어떤 주장도, 예수님을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이지 문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봅니다.
이런 믿음으로 더욱 깊은 영성으로 예배하고, 더욱 주님의 뜻을 따르며, 더욱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유익이 조금도 없는 것
골로새서 2장 16-23절 / 석기현 목사
사람이 사상적으로 미혹당하기는 참 쉬운 일입니다.
역사에 나타난 최악의 사상 중에 하나인 공산주의도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그럴싸한 논리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저도 대학 시절에 그런 공산주의를 고무하는 사상서적 한 권을 우연히 읽게 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중공의 모택동을 찬양하는 책자였습니다.
그 책을 읽고 난 후에, 제가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최소한 모택동이라는 인물에 대한 저의 판단만큼은 잠시 동안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모택동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를 읽게 된 후에야 그런 착각에서 깨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수백만 자국민을 굶겨 죽이고 있는 북한의 소위 '주체사상'이라는 것이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의 머릿속에 아주 훌륭한 사상인 것처럼 주입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또한 제일 처음 공산주의가 선전되면서 소위 '잉여가치 착취'란 논리를 가지고 선동해 왔을 때, 노동자 계층에서 그 말에 쏙 빠져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공산주의란 것은 사람에게 실상은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 아니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논리만큼은 일견 지극히 그럴싸하고 지당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기독교회 안에도 그런 미혹적인 사상들이 있습니다.
바로 참된 신앙 진리를 떠난 이단들입니다.
이단 역시 언뜻 보기에는 너무나 당연하고 도저히 반발할 여지가 없어 보이는 사상들로 무장하고 있는 까닭에 그 선전에 단박 넘어가기가 참으로 쉬운 것이고, 또 한 번 빠져 들어가면 마치 공산주의자에 세뇌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좀처럼 다시 돌아오기도 힘든 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바로 그와 같은 이단의 미혹에 빠지지 말라고 소리 높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소리들은 지극히 합당해 보이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아무 유익이 조금도 없는" 것이며 오히려 자신의 영혼이 사망의 길로 빨려 들어가는 길이라고 골로새 교인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된 이단 사상들을 우리 성도들이 조심하고 끌려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세 가지를 우리에게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1. '의식적 율법주의 종교'가 대표적인 이단입니다.
본문 16절과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경고하기를 "16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사도 바울은 강력한 어조로 말했는데, 이것은 '이 문제에 대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Let no one sit in judgment on you.)는 뜻입니다.
'그 문제들이 언뜻 듣기에는 그럴싸하고 너희의 신앙생활을 다시 재고해 보아야 할 만한 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런 문제로 너희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너희들이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될 일이다.'라고 사도 바울은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문제와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성수"에 관한 문제라고 했는데, 초대교회 신자들은 바로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율법주의자들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먹고 마시는 것'이란 바로 구약의 율법에서 금지된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하는 것과 또한 당시 우상 신에게 먼저 바쳐졌다가 시장으로 나와서 팔리고 있던 음식을 신자가 먹어도 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우리 예수님께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막 7:19)고 명하셨으니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었고, 후자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8장에서 '음식 자체가 부정해지는 것은 아니니 관계없지만 연약한 자를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삼가는 것이 좋다.'고 가르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내에는 여전히 구약의 율법들을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자들이 그런 음식 문제를 가지고 따지고 들면서 신자들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절기 성수에 관한 문제도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당시 다른 민족들에게도 '절기나 월삭'은 있었지만 '안식일'은 없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은 구약에서 말하는 날들을 가리키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구약의 절기를 문자적으로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 아무도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못 박았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이미 안식일은 주일로 바뀌고 있었으며 다른 절기들 역시 구약의 제도를 따라 문자적으로 지키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절기와 월삭은 또 그렇다 하더라도 안식일 성수의 문제에까지 사도 바울이 이처럼 단호하게 선언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안식일 성수는 십계명 제4계명에 뚜렷하게 선포되어 있는 규례이며 다른 여러 율법 조목들 중에서도 가장 강조된 것 중에 하나인데,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조차 마치 일고의 가치도, 들을 필요도 없는 말처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이었습니까?
바로 17절이 그 대답입니다.
왜냐하면 그 율법주의자들이 그처럼 목숨을 내걸듯이 중요하게 여기는 그런 문제들은 단지 "장래 일의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며, 그 실체는 오직 "그리스도"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와 같은 구약의 의식들은 히브리서 10장 1절에서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는 대로 어디까지나 신약에 대한 '표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즉 구약의 의식은 장차 오실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 그 주님이 오실 때까지 예언적 가치를 가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본체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옛날의 그림자를 본체와 동등시한다든지 아니면 본체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착각해서는 결코 안 될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율법주의적 의식들을 가지고 신자의 신앙에 대해 따져 들고 비난하는 말은 아예 들을 필요조차 없는 것이라고 단언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의 가지고 있는 참된 신앙에 대하여 확신과 자신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때 골로새교회의 경우와 똑같이 율법주의, 의식주의를 가지고 우리를 사로잡으려 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안식교나 유대교가 그러합니다.
이들은 건전한 영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육신도 맑게 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음식을 잘 가려 먹는 것'이 신자의 필수 조건인 양 가르치고 있습니다.
토요일의 안식일 성수를 강조하면서, 신자가 십계명의 다른 아홉 계명들은 그대로 지키면서 왜 유독 제4계명만 어기는 것이냐고, 마치 우리에게는 궁색한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양 당당하게 기세를 올리는 것입니다.
일견 지당한 논조처럼 들리는 말이며, 무엇이 틀렸다고 대응할 길은 전혀 없어 보이는 듯한 논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빤한 율법주의적 논리와 사상 앞에 우리의 신앙을 미혹당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들은 모두가 다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들을 마치 실체인 양 오도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몸' 즉 실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아주 간단하게 다 해결되었던 문제를 공연히 어렵게 말하면서, 오늘날의 신약교회 신자들을 예수님 초림 이전의 구약 상태로 다시 되돌려 놓고자 하는 종교는 아무 재고의 가치조차 없는 이단일 뿐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외식적 신비주의 종교'도 실상은 아무 유익 없는 이단입니다.
18절과 19절에 기록하기를 "18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아까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 대신 "누구든지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상을 빼앗다"라고 번역된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부당한 판결을 주다'라는 뜻이며, 거기에서 파생된 의미로서 '경쟁에 나갈 자격을 박탈하다' 혹은 '상을 빼앗다' 혹은 '정죄하다'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여기서는 문맥상으로 볼 때 오히려 '자격을 박탈하다'(disqualify)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가장 나을 것 같습니다.
즉 '이러이러한 점에서 당신은 모자라니 상급 받을 자격도, 구원받을 자격도 없소.'라고 낙인을 찍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부당한 판단을 결코 당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그래 가지고서는 아직 중생 받은 사람이 아니오.'라고 함부로 정죄하는 말을 이미 참된 신자가 된 사람이 곧이곧대로 듣고 빠져 들어가 실족당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미혹에 빠지게 되면 그야말로 모든 구원의 은혜와 상급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까?
여기서 "일부러 겸손함"이란 말은 외식적인 경건생활을 하면서 그것을 남에게 과시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자기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어떤 고차원의 경건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랑하면서, 그런 수준에 따라올 수 없다고 여겨지는 다른 신자를 은근히 내리깔고 보는 자들이었습니다.
또 한 부류는 "천사 숭배자"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들이 하나님 대신에 천사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은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없으므로 '천사의 중보'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면서 천사숭배 사상을 고조시켰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바로 그런 천사를 만났을 뿐 아니라 그 천사와 항상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주후 363년경에 모였던 라오디게아 회의의 기록에도 보면 "신자들이 천사들에게 찬미를 올리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와 같은 일이 실제로 많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남달리 높은 수준의 경건생활을 유지한다고 하는 자, 천사의 중재를 거쳐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 범인(凡人)들은 알 수 없는 어떤 고차원의 영역에 속한 척하는 자 - 초대교회 교인들 중에도 이런 자들에게 쉽게 그 심령을 미혹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자들에 대하여 무어라 말했습니까?
그들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무슨 신비한 것을 보게 될 때 바로 그것을 의지하는 자 즉 바꾸어 말하자면 '자기 눈으로 본 환상에 도취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육체의 마음"이 된다고 했는데, 이 뜻은 '육신적 생각'이란 말입니다.
즉 그렇게 스스로 본 환상에 도취되면 그 심령 역시 맑은 기운을 잃어버리고 영에 속한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육신에 마음이 끌려가는 상태가 됨을 뜻합니다.
그 결과는 자연히 그 본 것을 과장하게 되고 교만하게 될 뿐인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의 실체를 그 얼마나 정곡을 꼭 찔러 드러내는 말씀입니까? 그처럼 무슨 신비한 현상에 의지하게 되는 자나 자기 자신의 경건생활에 자만하게 되는 자는 곧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리'가 아닌 다른 것을 대신 붙들고 있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그런 자들은 자신의 경건 생활을 자기 신앙생활의 머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천사를 그리스도 대신 머리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머리가 바로 붙어 있어야 다른 온 몸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고 자라날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신자가 그 어떤 경우에서든지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면 끝장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외식적인 경건주의나 신비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심령을 혼란케 해 왔습니다.
중세 때부터 오늘날까지도 일부 교파에 있는 수도승들의 모습은 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야, 이 사람은 정말 무언가 거룩한 사람 같구나.'하는 홀림에 빠지게 만듭니다.
천사숭배 같은 신비주의는 천주교 내에서는 지금까지도 아주 흔한 일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언젠가 어떤 천주교 신부가 자기가 평생 모았다는 무슨 신비한 장면의 사진들을 텔레비전 인터뷰를 통해 보여 주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꽃 화원을 찍은 사진인데 그 배경이 묘하게도 한 여인의 모습처럼 보이는 것이라든지, 혹은 해변의 산책길을 멀리서 찍었는데 그 끝에 있는 난간이 머리에 두건을 쓴 여인처럼 보인 것을 두고 소위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진은 한 아기가 성당에서 허공을 계속 응시하고 있는 장면이었는데, 그 신부의 부언 설명에 의하면 그 아기의 눈에 무언가 신비한 것이 보이지 않고서는 그처럼 나이 어린 아기가 한 곳을 그렇게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 볼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는" 말들이 아니겠습니까?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신앙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고 그 대신에 개인적인 체험이 더 강조되는 종교는 결국 자만이며 교만일 뿐입니다.
'당신은 나처럼 기적적인 경건의 능력이나 신비로운 체험이 없으니 아직 참된 신자가 아니오.'라고 참된 신자를 부당하게 정죄하는 이단의 소리에 결코 현혹당하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세속적 금욕주의 종교' 역시 참으로 미혹되기 쉬운 이단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20절 이하 23절에 말하기를 "20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23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우리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점을 우선 먼저 강조하고 있습니다.
함께 죽는다는 의미는 종이 목숨을 바쳐 그 상전을 섬기는 것과 같은 강력한 결속관계를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결속됨으로써 자연히 세상의 초등학문 같은 유치한 원리에서는 이미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합이 그처럼 확고부동하지 않은 자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직도 마치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같이" 여전히 "사람의 명과 가르침"에 따라 사는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처럼 "의문(규정)에 순종하는 자"들이 흔히 사로잡히게 되는 말들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라는 따위의 규정입니다.
이것은 바로 금욕주의자들의 표어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들은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경건한 신앙생활과 직결되는 것인 양 착각하고 있는 무리들입니다.
자기네들만 그렇게 한다면 별 일 아니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항상 다른 신자들에게도 그런 생활을 강요하면서 은근히 억압하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하지 마라, 저것을 하지 마라.'고만 가르치는 것은 어린아이들이 자랄 때나 잠시 써먹을 수 있는 교육 방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유치한 교육을 성숙한 기독신자에게까지 강요하는 것이 바로 이단의 또 하나의 특징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식의 교훈을 가리켜서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런 말들은 잠시 한 때 쓰일 뿐 곧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어린아이에게, 그것도 아주 철없는 단계에서 잠시만 쓸 수 있는 말일 뿐이지 조금만 자라도 쓸모없는 교육방식인 것입니다.
그런 만사 부정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금욕주의는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꾸며낸 종교 생활과 겸손, 그리고 자기 몸을 학대하는 일에 대해서는 일가견 있는 말이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실로 금욕주의의 정체가 정확하게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금욕주의 이단의 결정적인 약점은 바로 제일 끝에 있는 말씀대로 "오직 육체를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을 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이 금욕주의이지만, 정작 정말 금해야 할 것 즉 사람의 죄악된 육체의 욕망을 근본적으로 억제하도록 만드는 점에 있어서는 사실 하등의 효력이 없는 것이 바로 금욕주의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욕심 때문에 모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그 욕심만 없애면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라는 것이 소위 석가모니가 오랜 수도 끝에 깨우쳤다고 하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그런 금욕주의가 사람으로 하여금 근본적으로 자신의 욕심을 떨쳐 버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기에만 거룩한 종교생활처럼 보이는 것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몸을 학대하는 고행주의와 잘 연결되는 것일 뿐, 결코 실제적인 유익은 전혀 없는 이단 사상인 것입니다.
진정한 성별이란 '무엇을 하면 안 된다'라고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결합됨'으로써 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난 자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갈 5:24)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확실히 내 구세주로 믿어지게 될 때 우리는 이전에 좋아했던 세상 낙들을 자연히 멀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확실히 나의 왕이심을 고백하게 될 때 우리는 이전에 의지했던 세상의 우상들을 절로 버리게 됩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영원한 친구 되심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절로 세상의 술친구들과 한자리에 앉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신자는 세속적인 금욕주의자들이 '기독교인은 이것 하면 안 되고 저것 하면 안 된다.'라고 겁을 주는 소리에 말려들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종교생활이며 자기 몸을 학대하는 데에나 효과가 있을 것이며 열심히 행하면 행할수록 오히려 '부패'에 돌아가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일견 경건하기 짝이 없게 보이는 금욕주의는 사실상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가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직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결합하게 되면 신자로서 당연히 멀리해야 할 것들을 자연히 금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실상에 있어서는 우리 신앙생활에 아무 유익할 것이 없는 말들이, 헛된 사고방식들이, 잘못된 이단 교리들이 오늘도 실로 그럴 듯하게, 아주 권위 있는 것처럼, 마치 거룩한 것인 양 우리를 꾀며 위협하며 미혹하려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 말씀을 더 잘 순종하는 신앙처럼 유혹하고, 신비주의는 무슨 특별히 선택받은 엘리트 신앙인 것처럼 우리를 꾀고, 금욕주의는 가장 유치한 것을 가장 거룩한 것처럼 가장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라는 어처구니없는 사상이 이처럼 많은 사람을 쉽게 미혹하며 결국에는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마는 것처럼, 이단 사상 역시 많은 교인들을 미혹하여 결국에는 단체로 지옥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보기에는 너무나도 그럴싸하고 멋있어 보이기까지 하는 이런 교묘하고도 무서운 미혹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끌려가지 않고 바른 신앙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본체만을 더욱 굳게 붙잡는 데에 있습니다.
'몸'이신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게 될 때 우리는 '그림자'를 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아야 우리는 '거짓말'에 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사는, 이 강력한 영적 결속을 체험해야만 우리는 진정 모든 이단적인 '의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결국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을 똑바로 잘 믿는' 여기에 모든 것이 다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단'은 '타종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이단은 신앙처럼 보이면서 실상은 참된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며 기독교처럼 보이면서 실제로는 기독교 내부에 침투해 있는 가장 무서운 적인 것입니다.
알고 보면 아무 유익도 없는 것들에 어처구니없게 폄론당하거나 자신의 상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오직 참된 신앙의 본체와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실로 '함께 죽고 함께 살' 정도로 더욱 가까이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이단에서 나타나는 현상들
골로새서 2장 16-23절 / 이상웅 목사
열심, 열정이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좋은 것입니다. 열심이 없으면 성장도 없고, 열매도 없을 때가 많습니다. 마중물 성도님들께서 모두 좀 더 열심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한 본성을 가졌기에 이 열심이 남들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쓰일 위험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별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들보다 더 경건하고, 더 영적으로 보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쉽게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미혹 당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유래 없이 많은 이단이 나오고, 이런 이단에 미혹당하는 것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대로 열심이 쓰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지는 이유는 남들보다 더 영적이고, 더 훌륭한 신앙을 가진 것을 보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신 은혜가 너무 크기에 감사함에서 나오는 반응입니다.
지난 두 주는 가정의 달을 맞아 자녀와의 관계, 부부의 관계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다시 골로새서의 말씀으로 돌아왔습니다. 골로새서는 이단에 대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2장의 오늘 본문 앞부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든 영적인 비밀을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두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로 충분하고, 그리스도로 우리의 속죄는 완전하며, 그렇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로 승리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을 말씀하신 이유는 이단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그리스도로 부족하고, 불완전하기에 무엇인가를 더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α’를 가르치는데, 골로새서 2장의 앞부분은 ‘그리스도’로 충분하고 완전함을 말한 것이고, 오늘 말씀은 ‘α’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는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초대교회 당시에만 나타났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단은 시대가 달라져서, 겉모양은 달라졌지만 그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같은 경향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단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통해 분별력을 키워야 합니다.
1. 율법주의적 경향
이단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첫 번째 경향은 율법주의입니다.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먹고 마시는 것은 유대인들의 정결의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신을 정결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먹어서는 안되는 음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절기는 매 해마다, 초하루는 매 달마다, 안식일은 매 주마다 찾아오는 거룩한 날이기에 이 날을 거룩히 지켜야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도 가려 먹고, 날들도 구별하여 살면 영적으로 더 높은 경지에 올라간 듯 보일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이 힘을 얻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은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을 배경으로 쓰였기에 구약을 이해하지 못하면 올바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구약은 계시가 완전히 열린 상태가 아닙니다. 계시를 온전히 드러내는 예비과정이기에 신약의 성취를 통해 구약은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17절입니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음식을 가려먹고, 날들을 지키는 것은 장래 일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장래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부정한 모든 죄가 정결케 되는 것과 우리의 시간들이 구속함을 받아 온전한 안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성취가 이루어지기 전에 미리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알려주기 위한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입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성취가 이루어졌으면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본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맛보기로 보여주는 예고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 그림자에 불과한 구약의 율법의 제도를 가지고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어리석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시하고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이 그렇게 해야만 구원을 얻는다거나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멀리하고 떠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통해 주신 자유를 더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이지 그것이 조건이나 자격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순간 은혜는 설 자리를 잃는 것입니다. 일천번제를 드린 것이나 40일 금식기도를 한 것이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참 영성입니다.
2. 신비주의적 경향
이단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두 번째 경향은 신비주의입니다. 18절입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어떤 이유로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까?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입니다.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가 어떻게 연결이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자신을 지나치게 하찮은 존재로 여겨서 천사의 도움이 있어야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입니다. 천사가 하나님의 메신저이기에 천사를 잘 숭배하면 하나님의 세계를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에 빠지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세계를 보았다고 말하고, 그것에 육신적인 생각을 가미하여 과장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줄 알고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요상한 해석을 하는 이단들의 특징입니다.
바른 신앙 안에도 신비한 체험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주시는 현상입니다. 요즘 같은 라마단 금식기간에 이슬람 지역에서는 얼굴에 광채가 나는 백인의 모습을 꿈에서 보고 선교사를 찾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이슬람 지역은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가 없기에 이런 방법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깊은 절망과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이 신비한 방법으로 찾아오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을 경험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첫째 하늘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하늘이고, 둘째 하늘은 해달별이 있는 우주이고, 셋째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신비한 것을 보았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라 했습니까? 고린도후서 12:6입니다.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바울은 자신의 자랑이 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어서 그가 본 것과 들은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오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이상의 것을 알려하거나 보았다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기에 한계를 그어놓으신 것을 자꾸 침범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다칩니다.
그런데 신비주의는 그 본 것을 말함으로 영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는 것입니다. 신비주의는 그 출발점이 꾸며낸 겸손에서 시작되었기에 반드시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참 겸손은 자기중심성을 버리는 것인데 신비주의는 자신이 본 것을 통해 자신이 중심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것은 거짓 영이 보여줄 수도 있고, 자신이 본 것을 자기 욕심을 따라 헛되이 과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에 속으면 안됩니다. 최근에 한 학교 선생님을 통해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학교 학년부장 선생님이 그리스도인인데 평소 성경도 읽고, 설교도 듣고 하신답니다. 하루는 선생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최근에 나쁜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갑자기 눈에서 번쩍하는 것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경고를 하신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런 이야기를 몇 번 반복했었는데 그 선생님이 요즘 녹내장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무엇인가를 보았다고 하는 이런 신비주의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19절입니다.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는 것이고, 곧 몸이 교회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붙잡혀 있어야 하고, 몸의 다른 지체들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머리로부터 나오는 모든 은혜가 뼈마디와 힘줄을 따라 전달되어야 성장이 있게 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아닌 다른 길로 가면 성장도 없고, 열매도 없습니다. 아무리 신통방통하고, 황홀경이나 무아지경에 빠질 만한 체험을 한다 해도 속으면 안됩니다. 5-6년 전에 한 전도사가 천국을 경험하고, 지옥을 경험했다고 해서 문제가 되어 결국은 교회에서 치리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 그 집단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결국은 다 깨지고, 후회하고, 생계를 위하여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신령함은 신비한 체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3. 금욕주의적 경향
이단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세 번째 경향은 금욕주의입니다. 20-22절입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이 구절에서 세상의 초등학문, 규례,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은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인데 그것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규례, 명령,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괄호 속에 있는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한때 쓰이고 없어지는 것인데 그런 것에 마음쓰지 말고 영적인 것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금욕주의적 가르침입니다.
‘붙잡지 말라’는 것은 돈,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돈을 붙잡지 말라, 쌓아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때 돈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다 채워주시는데 무슨 걱정이냐 하면서 무소유를 지향하는 목사가 있다면 벌써 어떤 마음이 듭니까? ‘참 훌륭하신 목사님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물질을 하나님이 맡기신 것으로 알고 흘려보내고 좋은 것에 써야 합니다. 그렇다고 노후를 위하여 저축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맛보지 말라’는 것은 음식에 대한 것입니다. 먹는 것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음식만 먹으면 되지 맛있는 것을 좋아하면 육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 교회 홈페이지에 저의 굴욕적인 사진이 올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진을 계기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해서 체중을 좀 줄였는데, 그것을 유지하기 참 힘듭니다. 다시 체중이 늘다가 작년 교회를 이전하고 새벽에 와서 계속 교회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간헐적 단식을 하면서 다시 체중을 좀 줄였습니다. 그랬더니 몇몇 분이 농담으로 더 영적으로 보인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좀 적게 먹기 시작했더니 왜 이리 음식이 맛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육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코 안 먹거나, 지나치게 궁핍하게 사는 것이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절제해야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먹는 것이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만지지 말라’는 것은 성에 대한 것입니다. 이성에 대하여 생각도 하지 말고, 손도 대지 말고 결혼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녀가 성장하여 부모를 떠나 결혼을 하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결혼의 관계 안에서 성적으로 서로를 즐거워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금욕주의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23절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먼저는, ‘자의적 숭배와 겸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스스로 겸손하다 생각하는 자기만족입니다. 소유욕이나 식욕이나 성욕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쓰이면 안되기에 하나님이 정하신 범위 내에서 쓰이도록 하신 것입니다. 금욕주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기본적 욕구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 역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금욕주의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금욕적 삶이 몸을 괴롭게 하는 방법으로는 최고이지만, 육체, 즉 죄를 벗어나게 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돈과 음식과 이성에 대한 금욕적 태도는 자기 몸만 괴롭히지 결코 죄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합니다. 죄를 벗어나 거룩하게 살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를 힘입어 사는 삶입니다.
그럼에도 금욕주의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사람들을 진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도구로 쓰였습니다. 금욕이 더 종교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가난이 미덕이라고 하지도 않고, 부가 축복이거나 죄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자족할 줄을 알고, 주님의 나라와 지체들의 필요를 공급하는데 사용하라고 권면합니다. 성경은 금욕이 아니라 절제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은혜로 주신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인가 고민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이단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율법주의, 신비주의, 금욕주의의 경향을 띠고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외적인 것에 집착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꾸 껍데기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7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은 자꾸 외모를 보게 되어 있기에 쉽게 이런 이단의 가르침에 빠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지체들을 자꾸 판단하려고 하지도 말고, 내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에 너무 신경 쓰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바로 서게 되면 외적인 행동은 그 마음을 따라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열매를 보고 안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혈을 통해 은혜로 주신 자유함이 이런 왜곡된 외적인 시각에 의해 잃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말고, 성경적 시각을 통해 참 자유함을 누리시는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주일성수 잘 하고 계십니까?
골 2:16~ / 윤영택 목사
금년 1월에는 신앙의 기본에 대하여 자주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를 본 받는 교회’라는 목표를 영구적인 목표로 삼는다고 할 때 2008년도에 그리스도를 닮는 구체적인 실천 목표는 ‘말씀과 기도로 주께 더 가까이’ 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의 가르침과 삶을 본 받아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그분을 본받을 수 있을까요?
지난 해에는 ‘한 영혼을 귀하게’라는 목표였습니다. 예수께서 우리 한 사람의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오셨으며 세상에서 소망 없이 사는 죄인들의 참 소망이 되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아 한 사람,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고 함께 구원의 기쁨을 나누며 살자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본 받아 그분의 길을 따르는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발견하며 그 길을 따라 사는 우리는 영혼의 호흡이라 할 수 있는 기도를 통해 주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삽니다. ‘말씀과 기도의 삶’ 이것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그분을 본 받아 사는 실천목표가 됩니다. 그래서 2008년을 시작하는 첫 주 일부터 신앙의 기본에 대하여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으며 ‘말씀과 기도로 주께 더 가까이’를 금년도 우리교회의 목표로 삼고자 합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안식일의 주인’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제7일에는 모든 일을 멈추고 그날을 구별하여 거룩한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명하신 그 날은 하나님의 안식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의 창조사역을 완성하시고 제칠 일에 쉬신 것처럼 사람들도 하나님의 안식일을 존중히 여겨 육일 동안 열심히 살다가 그날에 일손을 멈추고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몸과 마음의 쉼을 가지며 우리를 지으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구별된 날로 삼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유대인들이 지키던 구약의 안식일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연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종살이 하던 삶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종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손으로 해방이 되어 자유인이 되었음을 기억하고 그 집의 주인이나 종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안식일에는 일손을 멈추고 안식하라 하셨습니다. 제 칠일 안식을 통해 새 힘을 충전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아보게 하셨고, 매 7년마다 안식년을 지키게 하셨으며, 그 일곱 번의 안식년 다음에 오는 50년을 희년으로 선포하여 그 해에는 땅과 종들과 빚진 자들에게 생명과 회복과 자유를 베푸는 더 큰 안식을 실천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안식일 계명은 창조사역의 완성 그리고 억눌림과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이 큰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 행하심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그날을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안식일로 지킬 책임과 안식의 특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날을 귀히 여기고 순종하여 살면 하나님의 복이 그들과 함께 하였지만 이 날을 소홀히 여기고 사람의 사사로운 욕심과 무지함으로 함부로 범할 때 하나님께서는 엄한 벌로 다스리셨습니다.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것은 곧 계명을 주신 하나님을 멸시하며 거역하는 범죄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안식일 전통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계속하여 지켜지면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실 즈음에 이스라엘의 종교법은 대단히 세분화 되고 형식화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 규칙을 지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히 율법학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제4계명 안식일 규칙을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하고 또 거기에 세부적인 지침을 달아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무려 234개 조항이나 만들어 놓기도 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일은 하나님 앞에서 편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학자들과 종교인들이 만들어 놓은 엄한 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는 부담스런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와 안식을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 자유를 어렵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율법에 정통하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형식과 습관에 굳어져서 안식일의 정신과 본질을 다 잊어버리고 오직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한 율법의 틀에 집착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려고 안식일에 일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시기와 미움으로 가득하여 이웃을 고발할 증거를 찾았으며 안식일에 선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감시하고 질책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의 정신을 상실해 버린 율법의 빡빡한 틀보다는 그 본래의 정신을 생각하여 안식일에 배고픈 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도우셨고, 한 손이 말라 비틀어진 사람을 고쳐주셨으며, 중풍병자가 걷고 소경이 눈을 뜨도록 해주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며 ‘나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하신 주님의 말씀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오늘 골로새서 2장16절, 17절을 읽었습니다. 바울은 구약의 율법의 정신과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해 준 사도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껍데기만 붙들고 그 속 중심은 깨닫지 못했던 외식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살던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모두 완성하시고 우리에게 참 자유와 안식을 주신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율법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심지어 유대교에서 개종한 기독교인들 중에도 아직 구약의 법에 매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반쪽만 받아들이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선택 받은 유대인이라는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무시하는가 하면 자기들은 율법이 정한 깨끗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사는데 이방인들은 먹고 마시는 음식에도 부정하고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다고 정죄하였습니다. 이런 판단과 정죄하는 일이 한 공동체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된 그리스도인들끼리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방인에게는 없는 육체적 전통을 내세우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누구든지 먹고 마시는 일과 절기나 초승달이 뜨는 날의 축제인 월삭이나 안식일 때문에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지 마십시오. 이것들은 단지 앞으로 올 일의 그림자일 뿐이며 그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구약에 명한 안식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이 되고 우리에게는 자유함이 은혜의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거룩한 성도가 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제정자이며 동시에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로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그 부활의 날, 승리의 날을 ‘주의 날’이라 부르며 매 주일마다 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사랑의 떡을 떼며 그 날을 기념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년에 한 번 기념하는 부활주일만이 주님의 날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지키고 있는 주일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념하고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어떤 이들은 로마시대에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면서 로마 사람들이 섬기던 태양신 축제일 Sunday를 기독교의 예배일로 바꾸었을 뿐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Sunday에 모이는 기독교의 예배일은 성경적이지 않고 이교도적인 풍습이라 여기고 자신들은 여전히 구약의 제 칠일 안식일을 거룩한 날로 지키며, 예수님의 재림도 제칠일 안식일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소위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또는 ‘안식교’라는 종파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Sunday에 모이는 주일예배는 로마시대 교회가 주일로 공포하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과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날을 기념하던 것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날은 율법이 말하는 제칠일 안식일의 참 정신과 뜻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의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날을 일요일이라 부르지 않고 ‘주일’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구원만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여겨 아직도 구약의 율법이 말하는 것을 추가해야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늘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여전히 율법에 매인 유대주의 기독교인들과 같은 맥락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이 완전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결정적인 문제점이 어디 있는지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이심을 확신하지 못하는 셈이 되고 맙니다.
로마서 14장5절-10절을 함께 찾아봅시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갈라디아서 4:9-11을 봅시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
갈 5:1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종의 멍에로부터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는데 또 다시 그 종의 멍에를 메려고 힘쓰는 것은 그것을 통해 스스로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와 의식에 의존하는 모순된 믿음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하셨으니 이제 우리가 주 안에서 누릴 안식은 나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인가 아닌가 여기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면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나에게 기쁨과 감사가 된다면 내 삶에 진정한 평안과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제목인 ‘주일성수 잘하고 계십니까?’라는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이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어느 정도 감이 잡히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주일성수입니다. 물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 중 우선적인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그랬고 신약의 성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안식일이든 주일이든 이 날의 생명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찬양입니다. 주일에 해야 할 일이 예배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우선되고 급한 것이 또 있겠습니까?
금년에 신앙의 기본, 기초에 대해 강조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의 기본이 잘되는 성도로 힘쓰시기 바랍니다. 기초가 부실하고 기본이 없이는 모래 위에 세우는 누각과 같아서 큰 바람이나 비가 닥치면 언젠가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주일에 여러분은 어떤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시겠습니까? 예배는 꼭 주일에만 드려야 하는 의식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신 육일은 마지막 날 칠일에 비해 거룩하지 않은 속된 날이라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날들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으니 칠일에만 거룩하게 살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부활의 날 주일만 거룩한 날, 승리의 날 또는 복된 날이 아니고 나머지 날들도 동일한 주님의 날입니다. 다만 일주일 동안 하던 일을 멈추고 하루를 구별하여 그 날에 모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이 사랑으로 교제하며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날이 오늘의 주일입니다. 주일 외에 나머지 날에는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터이니 맘대로 살다가 주일에만 교회 와서 예배 드리고 다른 날보다 경건하게 지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무를 다했다고 허락하신 것도 아닙니다. 주일이 거룩하고 복된 날이면 다른 날들도 역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날들입니다.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성도로서 사는 것이 주일성수의 기본 자세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안식일을 지키지 않지만 안식일의 정신은 이어받아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생명을 나누는 풍성한 교제와 그리스도를 세워가는 축제의 주일을 지킵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킨다고 하여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신 제4계명이 폐기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으로 안식이 완성되었으니 곧 주의 날로 계승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일의 내용과 정신을 잊어버린 채 지킨다면 일년 52주 성수주일을 잘 할지라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주님을 고발하고 비난했지만 주님은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고 약한 자들을 돌아보시고 불쌍히 여기며 사랑을 나누셨습니다. 여러분은 주일을 이런 날로 삼아 지키고 있습니까? 형제와 자매를 긍휼히 여기고 위로를 나누며 곤란에 처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삶입니까? 아니면 미움과 분노로 형제를 심판하고 정죄하는데 이 귀한 날을 사용하십니까? 만일 주일에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고 있다면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주일 하루 동안 내가 하는 행동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하다는 양심의 울림이 있으면 거기서 더 나가지 말고 멈추시기 바랍니다. 양심을 어기면서까지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한다면 그것은 주일을 성수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시다. 나의 양심에 꺼려 주일에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것은 평일에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6일 동안은 어떻게 살아도 무슨 일을 해도 좋지만 주일만은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주일은 물론 평일에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참된 성수주일의 정신입니다. 주일만 거룩한 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년 52주일 한 번도 결석하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참 귀한 일이지만 그것이 주일 성수의 전부가 아닙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 받을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여 이른 아침 예배시간을 만들어 참석하여 오늘 주일 성수했다고 스스로 위안을 받고 예배가 끝난 후에는 나머지 시간은 어떤 일을 해도 괜찮다고 여기며 내 욕심과 쾌락에 끌려 산다면 주일의 정신을 망각한 형식주의가 되어 주님께 칭찬받기보다는 외식주의자라는 책망을 들을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형식만 남고 속 알맹이는 없는 율법주의자일 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주일성수를 힘쓰려 했던 저희 가정의 분위기는 보수신앙의 장로교 목사 가정으로서 상당히 엄격했습니다. 주일에는 빨래도 하지 않았고 학교 공부도 하지 않고 돈을 사용하지도 않고 사사로운 오락도 금했습니다. 대신 하루 종일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집에 오면 성경을 읽거나 휴식을 했습니다. 집안 어른들이 예고 없이 주일에 저희 집을 방문하시면 어머니가 주일에 시장을 볼 수 없으니 특별한 반찬이 없이 그날 있는 반찬으로 대접해 드렸습니다. 믿지 않는 어른들은 목사 집에서 너무 한다고 섭섭해 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주일 성수를 잘 하는 길은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배웠으며 그렇게 살려고 힘썼습니다. 이것이 모두 옳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습관에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너무 엄격하다 보니 제대로 지키지 못할 때 죄책감에 빠지고 자유가 없이 형식에 치우치고 피곤한 주일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어른 세대가 그 만큼 주일을 구별된 날로 여겨 경건하게 지키려고 힘썼던 주일성수 전통이 한국 교회에 끼친 귀한 영향도 참 많습니다. 이것을 무조건 율법주의나 형식주의로 쉽게 비판해버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주일에 예배 드리는 일 외에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일에는 몸도 마음도 휴식을 가져야 합니다. 한 주간의 일로부터의 자유가 필요합니다.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담소하고 산보를 하며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나누며 즐길 수 있습니다. 이웃과 교제를 할 수도 있습니다. 급한 환자는 병원을 찾으며 휴식을 가져야 합니다. 몸이 너무 아파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걸린 위급한 일을 만나면 교회로 오다가도 먼저 위급한 일을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주일이 포함된 여행이나 출장을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 아침이 되면 먼저 무엇을 마음에 두십니까? 오늘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합니까? 가까운 교회를 찾아 예배 드리는 그런 마음 자세가 되어 있습니까? 여행은 이 다음에 다시 할 기회가 있지만 오늘의 예배는 나의 일생에 마지막 예배일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주일을 맞이한다면 주일에 무엇을 해야 할지 우리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습니다. 주일성수라는 엄한 규칙에 매여 우리에게 이런 자유조차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자유함이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거나 형제의 자유와 양심을 침해하는 방종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갈5:13-15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 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주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은혜의 선물로 주셨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나의 쾌락과 방종을 위해 허비하라고 주신 자유는 아닙니다. 믿음이 약한 형제의 양심과 신앙을 해치면서 나의 자유를 누리라고 주신 것도 아닙니다. 주일을 잘 지키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 받아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부활하신 주님을 마음껏 찬양합시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 하루를 구별하여 모이기를 힘쓰며, 주께서 나에게 주신 귀한 생명을 이웃과 나누는 풍성한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일에 함께 모여 피차 위로를 나누며 새 힘을 공급받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세워가는 기쁨의 날 복된 주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골로새서 2:20~3:11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보다 앞선 2:8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좇지 않고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으며 교인들을 노략질하는 거짓교사들을 주의하라고 강하게 경고한 바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초등학문을 좇지 않고 그리스도를 좇는 것을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의 초등학문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죽었다"는 것은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듯이 이 세상의 초등학문과 더 이상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초등학문과 완전히 결별한 것입니다. 즉 무엇을 "붙잡지 말라", "맛보지 말라", "만지지 말라" 하는 등 세상의 초등학문의 이런 저런 규례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어찌하여 세상에 속한 자들 같이 여전히 세상의 초등학문의 규례에 순종하느냐고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신자들을 힐문하고 있습니다. 본문 20-22절입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사도 바울은 그런 규례들이 지혜 있는 듯이 보일지 몰라도 육체를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단호히 비판합니다. 본문 23절을 봅니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거짓 교사들 가운데는 하나님은 아주 멀리 떨어져 계셔서 여러 단계의 천사들을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고 주장하며,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기 위해서는 천사들을 숭배해야 한다는 가르친 것입니다. "자의적 숭배"라고 한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 위에 있는 세계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고 말하고, 그런 환상을 더 잘 보기 위해서는 금욕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금욕의 한 방법으로 금식을 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보이기 위하여 하는 금식이 바로 꾸며낸 "겸손"입니다.
겸손해 보이기 위하여 금식하는 것은 몸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또 유대파 거짓 교사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몸을 괴롭게 한다"는 말은 이 할례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규례들은 육체를 따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사도 바울은 주의를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 교사들과 그들이 지키라고 가르치는 규례들을 비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도리가 무엇인지를 권면합니다. 본문 3:1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합니다.
우리가 위의 것을 찾으며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살게 되었고 그와 함께 영원히 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나라를 살도록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위의 것이 아닌 땅의 것들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3:1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위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편"이란 말은 특권과 권능을 의미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임재가 온 우주에 미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즉 우주와 역사 전체에 대한 전권통치라는 의미가 더 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우편은 최고로 높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자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자리에 앉은 이의 권리과 힘이 점점 더 넓게 미치는 법입니다. 계장보다 과장, 과장보다 부장, 부장보다 그 윗자리에 앉은 사람의 책임과 권한과 영향력이 더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고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하는 주된 구절의 하나로 사용한 것입니다. 과거 왕정시절에 왕이 옥좌 바로 옆에 세자를 앉히고 그로 하여금 왕을 대신해서 정사를 돌보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직 왕이 되지 않았지만 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통치권을 행사하고 필요할 때는 부왕의 뜻을 묻고 의논해가며 나라를 다스리는 세자는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런 최고주권자이시고 통치자이시기 때문에 오직 그에게만 관심과 순종과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이 편지의 앞부분인 1:15-19에서 만유 위에 계신 존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한 것입니다.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계된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시고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그의 관심이 우리를 지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종이 주인의 일에는 관심 갖지 않고 자기 관심사만 좇아 다니고 주인이 좋아하지 않는 일만 행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거나 쫓겨나거나 들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는 있지만 우리가 진정 속한 곳은 하나님나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들을 남는 것입니다. 나중에 주님의 심판대에 서서 일생의 삶을 결산할 때 지나가는 세상의 일들에 관해서 행한 수고나 업적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들에 관계해서 행한 것들만 주님께서 보실 것입니다. 온통 세상의 관심사에 몰입되어 사느라 하나님께서 명하시며 기뻐하실 일은 도외시하고 심지어는 세상 즐거움에 빠져 주일성수조차 하지 않고 놀러 다니거나 돈 벌기에 바빴던 사람들은 어두운 데 쫓겨나 이를 갈고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님 자신을 위해서 맡기신 달란트로 열심히 일해서 주님께 받은 바 달란트만큼의 또 다른 달란트를 남겨서 주님께 돌려드리지 않고 그 달란트는 땅에 파묻어놓고 실컷 자기 멋대로 세월을 즐기다가 주님 앞에 돌려드릴 것이 없게 된 종의 결말이 어떻게 되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까?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는 심판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각 하나님께로부터 시간, 건강, 재능, 물질 등과 같은 삶의 에너지와 자산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우리 각자의 달란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그 달란트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 맘대로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을 펼치는 일과,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대한 활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나를 위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일이니까 슬슬 하자, 죽자 하고 할 필요가 어디 있냐, 최소한도로 하면 되지 하는 사람은 딱 예수님의 비유말씀 속에서 한 달란트 받아가지고 땅에 파묻었다가 주인이 오자 다시 꺼내 고대로 돌려준 종과 같은 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을 것도 꼭 같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크든 작든, 많든 적든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교육과 학문과 꾸준한 훈련을 통해 갈고 닦고 최대한 키워 더 널리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주고, 더 크게 하나님나라 일을 하여 더 많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그저 교회 자주 들락거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은 우리가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뜻과 그의 일에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이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경건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일에 얼마나 최선을 다해 바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위의 것을 찾는 데 온전히 바치기 위해 땅의 것들에다 쏟는 낭비를 없애거나 최대한으로 줄이는 것이 그리스도에게 속하고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이들이 추구해야 할 경건한 삶입니다.
우리가 위의 것을 찾으며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할 셋째 이유는,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3:3에서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참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일차적 의미를 갖습니다. 또한 우리의 삶의 의미와 목적과 기쁨과 방식을 세상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만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그 생명과 참된 삶을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우리의 삶을 이해할 수도 없지만 그 삶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참 생명이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넷째 이유는, 미래의 영광 때문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본문 3:4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때 우리가 어두운 데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지 않고 그와 함께 영광 가운데 서기 위해서 땅의 것들을 찾지 말고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위의 것을 찾는 경건한 삶은 그저 아무 때나 우리가 원하면 쉽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평소에 지속적인 경건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훈련이겠습니까? 우리에게서 죽여야 할 것을 죽이고 벗어버려야 할 것을 벗어버리는 훈련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본문 3:5 이하에서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하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는 우리의 육과 그것을 통하여 작용하는 악한 덕목들을 말합니다. 즉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같은 것들입니다. 특히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우상이란 사람들이 하나님만큼이나 아니면 그 이상으로 좋아하며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준엄한 심판을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며 벗어버려야 할 것을 사도 바울은 또 말합니다.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입의 부끄러운 말과 상호 거짓말과 옛 사람과 그 모든 행위입니다. 이런 것들은 위의 것을 찾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있어서는 안 될 일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그런 것들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본문 10절을 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돌지 않고서는 새 옷을 입고 그 위에 다시 낡은 옷, 더러운 옷, 해질 대로 해진 옷을 껴입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어 참되고 영원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다시 세상의 헛되고 거짓된 가르침을 따르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은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구원의 원리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 그 안에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여기서 야만인이란 주로 헬라인들이 헬라어를 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스구디아인"은 흑해 주변의 족속들 중 무지한 노예계층으로 널리 알려진 자들입니다. 구원의 원리가 모든 민족,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적용되는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이시고 만민의 왕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고 새 사람이 되어 위의 것을 찾으며 사는 참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새로움, 그 안의 단졀과 계승
골 2:20-23 / 김경호 목사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주교 대표단은 아돌프 히틀러를 찾아가 유대인들에 대한 처우에 대하여 항의하였습니다. 히틀러는 이러한 그들의 간섭에 대하여, '단지 교회들이 수세기 동안 설교해왔던 것들을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는 말로 빈정대며 대답했다고 합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이후에 교회는 그동안 적대관계에 있던 유대교를 다시 이해해야 했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역사 안에 자리잡고 있는 반(反)유대주의 역사가 어떻게 역사의 악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예수연구의 결과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유대교 학자인 존 파브리코브스키(John T. Pawlikowski)가 쓴 기독론, 반 유대주의, 그리고 기독교-유대적 결속(CHRISTOLOGY, ANTI-SEMITISM, AND CHRISTIAN-JEWISH BONDING)이라는 주목받는 논문을 근거로 말씀드립니다. 이글은 그동안 기독교의 출현을 위해 악역을 담당해 왔던 유대교의 배경 속에서 새롭게 예수를 연구하고 예수님이 유대교의 어떤 점을 이어가셨고 어떤 점을 뛰어넘으셨는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연구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크리스천이셨습니까? 지금 몇몇 분이 당연히 그렇다고 하셨으나 사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기독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안디옥에서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란 말을 썼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유대인으로 사셨고, 유대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는 그동안 이런 사실을 방관하고 있다가 나찌의 터무니없는 일을 당하고 난 다음에야 20세기 후반부에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적대자로만 여깁니다만 사실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유대교를 혁파하는 놀라운 혁명가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에 의해 하나님은 더 이상 단지 족장들의 어버이로 이해되지 않았으며, 또한 단지 이스라엘의 제사장, 예언자 그리고 왕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신 분으로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제는 남녀 구분, 사회적인 신분을 불문하고 각자에게 모든 개별적인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친밀하게 관계되게 되었습니다. 신과의 친밀성을 나타내는 수준에 있어서 계급적 등급이 영원히 폐지된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은 이제 동등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외쳤으며, 순전한 개혁을 이스라엘의 사회적인 삶의 거의 모든 면에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적인 접근은 대략 6 가지의 기본적인 현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1) 원래의 성서본문을 계속해서 재해석하게끔 하는 "구전된 율법"을 사용합니다. 예수님도 이 구전된 율법에 똑 같은 성서의 권위를 부여합니다.
2) 랍비들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제사장적인 지도력 보다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랍비라는 것은 제사장과 대조되는 평신도 지도자를 말하는데 예수님도 랍비로 불렸습니다.
3) 바리새인들은 우선적으로 회당을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희생제사가 드려지지만 회당은 "하나님의 백성의 집"으로 그곳에서 기도와 공부, 그리고 구제가 연결되어 이루어짐으로 성전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숙청을 하시며 “내 아버지의 집이 기도하는 집이다”고 하신 것은 바로 이 바리새인들의 회당관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4) 예배를 위한 일상적인 장소에서 공동 식사를 했습니다. 그만 큼 평민적이고 예배이고 이 전통은 성만찬 의식으로 그대로 교회에 전수됩니다.
5) 부활을 중점적으로 강조합니다. 본래 구약에는 부활사상이 없으나 중간기 박해의 시대에 생긴 부활사상은 바리새인들이 철저히 신봉했고 예수님도 그를 따랐습니다.
6) 유대주의 신앙의 중요한 차원을 대중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쉬운 생활용어로 된 비유에 의존합니다. 예수님도 주로 비유로 말씀 하셨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교회는 이 비유를 유대인을 배척하고 영광이 교회로 이전되었다는 증거로 사용했습니다(예, 사악한 청지기의 비유, 잔치의 비유).
반면에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넘어서는 것들이 있습니다.
1. 예수는 아버지와 인격적인 결속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을 독특하게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2. 예수는 개개인의 인격적 존엄성에 관해서는 비타협적인 행위를 하셨고 이로 인해 헬라화시대에 로마와 타협적으로 국면으로 나가는 바리새인들에게는 유대인 공동체의 존립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3. 소외된 그룹 암하레츠(땅의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은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그 차이가 과장되어서는 안되지만, 마찬가지의 동정심을 가지고 있던 바리새인들도 갈등과 문제를 삼을 만큼의 애정이었습니다.
4. 예수는 원수를 사랑과 존경의 단계로까지 옹호하였습니다. 유대주의도 확실히 원수는 미움과 경멸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 가르침은 예수가 한 것처럼 직접적이면서 무조건적으로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약성경에서 예수 자신의 독특한 가르침이었습니다.
5. 예수는 자신의 행위들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적으로 현존한다고 설교하였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메시야적인 화해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이러한 화해는 완전히 미래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에 대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과거의 많은 반 유대주의를 야기하는 메시야 성취 기독론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6. 죄의 용서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고집스럽게도 고전적인 유대주의의 하나님 한 분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들에서 우리는 예수가 자신에게 이러한 힘이 있다는 것을 주장 할 뿐 아니라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 능력을 전이시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유대 정황에서는 매우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성육신에 의해 인간과 신의 친밀성이 이제는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선언이었습니다.
7. 토라에 대한 예수의 입장입니다. 샌더스는 말하기를 "우리는 예수가 율법을 비판하는 것은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율법을 반대하거나 거부했다고 말할 수 없다." 고 합니다. 바리새파가 가졌던 모세의 율법이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결론"이라는 신념입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율법은 하나님 최후 통치의 초기적 모습이지, 최종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샌더스는 "예수는 시대의 전환기라는 삶의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모세의 율법이 마지막이거나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의 전통은 교부시대부터 교회 안에서 뿌리깊은 전통으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한다. 유대인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랄한 비판은 그의 아버지이신 창조주에 의하여 표현된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반대"했고, 새롭고 더 나은 관계를 위해 "옛" 언약을 제거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레니우스도 인간의 죄 때문에 유대인의 법은 한시적으로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유대인의 때(the time)와 그들의 법이 지나갔음을 상징한다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처형에 깊이 관련되었기에, 그들의 머리위로 영원한 저주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통한 새로운 계시에 대해 "눈이 멀었다고" 일컬어집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한 은혜의 경험에 그들의 믿음의 근거를 두고 있는 반면에, 유대인들은 율법에 뿌리를 둔 열등한 종교의 형태를 실천한다고 했으며, 유대인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을 거부했고, 그 결과 하나님과의 계약적인 관계가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대체되어졌다고 묘사되어져 왔습니다. 이러한 기독론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발전되어 왔으며 기독교 사상에서 하나님과 성령보다 높은 위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반유대주의 신학은 유대인 핍박의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1세기에 유대인들의 핍박은 혹독했습니다. 그들은 유대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학살을 당하고 아예 예루살렘에서 한사람도 살수 없게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편견은 유럽의 역사에 유대인 공동체들에 대한 격렬한 공격들로 빈번하게 나타났습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의 어린아이들을 죽이고, 그들의 의식을 위해 피를 사용했다고 말해지는 전설들이 기독교인 사이에 흔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지금도 미국내에 있는 극렬한 인종주의자인 KKK단은 백인 우월 주의자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은 물론, 흑인, 동양인등 유색인종에 대해 극렬한 테러를 일삼는 과격한 인종주의자인데 이들이 바로 기독교 신앙에 바탕한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종차별주의는 비록 KKK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양역사 전반에 깔려있습니다. 백인들이 갖는 백인 우월주의는 아시아, 아프리카 문화는 미신적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미개인을 계몽시킨다는 사명으로 이들에 대한 식민지 확장 정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복음의 신념에 불타는 사명감이었습니다. 이러한 백인-서구문명 우월주의의 피해자는 비단 유대인들만이 아니고 아시아, 아프리카로 확대되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의 발단은 반 유대주의와 배타적 기독론 속에 잉태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나찌의 유대인 학살도 돌출되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도로트 죌레(Dorothee Soelle)는 기독론 안에 "감추어진-인종주의"가 있다고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세상의 유치한 원리에서 떠났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이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과 같이 규정에 얽매여 있습니까? ”붙잡지도 말아라. 맛보지도 말아라. 만지지도 말아라“하니, 왠말입니까? 이런 것들은 다 한 때에 쓰다가 없어지는 것으로서, 사람의 규정과 교훈을 따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꾸며낸 경건과 겸손과 몸을 학대하는 데 지혜를 나타내 보이지만,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는 데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고 합니다.
여기서 세상의 유치한 원리, 이세상의 규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예수님도 대체로 법을 지키셨지만 어느 때는 단호하게 법을 초월하기도 하셨습니다. 사실 법을 초월했건 그 당시의 현행질서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본래의 법 정신을 더 철저하게 했건 간에 그 당시 최고의 권위를 정면 도전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이러한 도전은 무모한 것들이었습니다. 정통의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요, 나이가 많아 권위가 있는 것도 아니요, 출신이 좋은 가문인 것도 아닌 한낮 변방 시골에서 올라온 새파란 젊은이가 도대체 무엇이 길래 그들의 최고의 권위인 성서를, 일점일획을 신봉하는 토라를 “옛 성인은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하고 선언 할 수 있었을까? 그 어마어마한 권위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인간사랑”의 엄청난 권위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권위였습니다. 예수의 혁명성은 그의 시대와 유대교, 특히 바리새주의에 의해 소수가 점유하던 하나님을 평신도에게,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문을 열어 그들 모두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렀다면, 예수는 바리새주의가 갖는 사회 계급적 한계성과 종교적인 한계성을 훨씬 뛰어넘어 그들이 죄인이라고 불렀던 민중에게, 그리고 이방인에게 그 자녀됨을 확장시켰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의 혁명의 업적을 더욱 근본적으로 철저화 시킨 것으로 모든 인간의 차별에 대한 전투였고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배재할 수 없다는 근본적 인간의 권리에 대한 엄격한 선포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라고 하셨고, 죄인들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였지만 그들을 종교적 계율로 얽어매어 죄인으로 규정하는 바리새인에 대해서는, 그들이 갖는 계급적인 차별성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저항하셨습니다. 도대체 누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까? 물론 우리 크리스천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칭송받는 일이 되기에 그렇게 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죄인인데”하고, 주눅들어서 “나는 정말 나쁜 놈이야!”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 나름대로 자기 변명이 있고 자기 자존심이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자존심을 상실한 사람은 정말 위험한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자기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야 이웃을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하고,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때로는 위대한 헌신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사랑은 모든 위대한 행위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 사랑을 포기한 사람은 어떤 것도 불가능한 사람이고, 막 가는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에게는 관대하고 그들의 친구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죄인으로 옭아매고 죄인으로 규정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아주 심하게 적대적으로 대하셨습니다. 또 때로는 엄청난 성서의 권위에 도전하시면서 까지 저항하신 근거는 바로 “자기 사랑의 신념과 자존심을 버리도록 강요하는 것들에 대해서 저항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법이나 제도가 자기 양심을 괴롭힐 때, 자신이 그 틀에 맞출 수 있다면 모르겠거니와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태이면 그것으로 인해 자기를 포기하고 잃어버리는 상황이 올 수 밖에 없다면 그 법을 뚫고 나와라, 초월해라 그것이 가장 큰 인권의 기본이고 인간 사랑의 큰 권위라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오늘 예수님을 새롭게 강조하기 위해 가졌던 반 유대주의의 역사를 통해서 얻는 부수적인 교훈은 우리가 새로움을 나타낼 때 주의 할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움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또 다른 왜곡을 가져오기 쉽습니다. 모든 새로운 것은 사실 지나간 역사 안에 다 씨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없던 것이다. 새로운 것이다”라고 단절 선언을 하기보다는 “과거에 어느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보다 겸손하고 정직한 그리고 새로운 차별을 야기하지 않는 표현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