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본국가의 상징 - 사직 과 선농, 선잠단(1)
사직단 정문의 현판 - 신성함을 일깨우려는 듯 필적이 힘차보인다.
종묘가 나라의 사당이자, 나라의 상징이라면, 사직과 선농, 선잠단은 나라가 백성들과 함께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던 또 다른 나라의 상징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농업을 주된 산업으로 여겼던 시대의 또 다른 국가적 상징으로 농업을 장려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나라의 발전을 꾀하려 했던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장소 이기도 하다.
이러한 옛 사람들의 정성과 노력을 생각해 보며 사직과 선농, 선잠단을 둘러보기로 하자.
(1) 국가의 성스러운 상징 - 사직단 (社稷檀)
사직단 - 농본국가의 상징성을 잘 말해 주는 제단이다 (서울 종로구 사직동 소재)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 경복궁 광화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쭉 올라가다 보면 흔히 사직공원이라 일컫는 이곳은 사직단이라고 하는 제단이 있는 곳이다.
과거 일제시대를 전후로 하여 공원화가 되면서 대대적으로 훼손되어서 옛날 나라의 상징이라는 엄숙한 이미지와는 다소 동 떨어진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15-6년전인 1988년 대대적인 복원을 하면서 옛 모습은 어느 정도 회복된 모습이지만, 그 때의 이미지나 모습과는 여전히 차이를 보이고 있어 다소 애매하다.
흔히 사직은 종묘와 더불어 나라를 상징하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보통 종묘와 사직의 줄임말인 종사, 혹은 종묘와 사직을 나라의 상징으로 인식하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종묘를 제외한 사직만으로도 나라의 상징이 되었으니 나라의 편하고 위태로움을 말할 때 흔히들 “사직이 편하다”, 혹은“사직이 위태롭다”라고 하였고 조정의 중신을 일러 `사직지신'(社稷之臣)' 이라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종묘보다 더 중요한 나라의 상징이 바로 사직이 아니었나 싶다.
또 대간들의 탄핵을 받은 중신이 흔히 자기의 청렴결백을 주장할 때 쓰는 말이 “종묘사직을 두고 맹서하옵건데…”이었던 것으로 보면 종묘사직은 그 이상 그 무엇이 없는 `무소불위'의 최고로 높은 장소였던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사직이 상징하는 뜻은 무언인가?
우리 옛 선조는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이라는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하늘의 상징인 나랏님, 즉 임금님이 계신 곳, 궁(宮)의 기둥은 둥글었다. 그리고 땅의 상징인 백성의 집 기둥은 모가 난 방형이었다. 백성의 집기둥이 방형이었는가 하면 하늘인 집의 서까래는 둥글게함으로서 천원지방의 절묘한 조화를 건축술에 적용하였다.
어디 그 뿐인가? 또 있다.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하늘나라로 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조상의 무덤이 둥글고 땅의 상징인 자식의 제사터 자리는 방형으로 하므로써 천원지방의 원리를 적용해왔다.
정궁인 경복궁(景福宮)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종묘(宗廟), 서쪽엔 사직단(社稷檀)을 두었으니 이를 두고 `우직좌묘'(右稷左廟) 혹은 좌측의 종묘, 우측의 사직이라는 뜻의 '좌묘우사(左廟右社)' 라고 표현 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땅의 신인 네모난(方型) 사직단은 조선조 태조 3년(1394)에 건립한 것으로 국사단(國社檀)과 국직단(國稷檀)의 흔적이 남아있다.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점하면서 본래의 모습이 많이 훼손되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요 근래에 다시 복원되어 오늘날 그 모습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상징이라는 중요시되고 신성시되어 왔다던 장소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이곳 사직단은 쉼터가 되는 공원이라는 인식이 단단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사직에서의 국사와 국직 가운데 국사단은 나라의 땅을 관장한다는 국토의 신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이고 국직단은 다섯가지 곡식으로 대변되는 오곡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다. 또한 사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나라에서는 사직서(社稷署)라는 관리 관청을 두어 중요시해 왔다.
이렇게 중요시 된 사직에 한 때 이곳의 신주를 훔쳐 빼돌리려던 사람에게 반역죄로 다스려 처형한 적도 있었다. 또한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온 고종이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할 때에는 이곳을 태사(太社), 태직(太稷)이라 하여 더 크게 높여 부른 적도 있었다. 그만큼 사직이 나라의 중요한 상징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사직이 나라의 중요한 상징임을 보여주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1394년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한양천도를 준비하면서 지관을 보내 제일 먼저 잡은 터도 종묘와 사직의 자리였으며, 임진왜란 이나 병자호란 등 전란이 일어났을 때 왕이 피란하면서 제일 먼저 챙겼던 것도 종묘와 사직의 신주였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왕은 종묘신주를, 세자는 사직신주를 나누어 지니고 다녔다. 그만큼 사직이 나라의 상징으로 매우 중요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사직은 종묘와 함께 조선시대의 다섯 가지 기본 예절인 오례(五禮) 가운데, 길례에 속했으며, 특히 종묘와 함께 길례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는 대사, 즉 큰 제사에 속했다. 종묘가 인륜적인 도리를 다하는 공간이었기에 1년에 다섯차례 제례를 올리지만 사직은 그보다 줄어든 춘, 추의 상무일과 납일등 3차례 제례를 올린다. 이렇게 지내던 사직제례도 역시 일제 시대때 폐지되었던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하여 매년 9월 첫 일요일에 봉행되고 있다.
사직은 농업을 중시 여겼던 전통 사회의 농경문화를 엿 볼 수 있는 좋은 문화 유적이다. 농업은 곧 한 나라의 경제를 좌우하는 막중한 것이었기에 근본 생산인 농업이 잘 되어야 나라가 잘 된다고 그 당시 사람들은 믿어 왔던 것이고 그만큼 사직에 대한 당시 지배층들의 정성과 관심은 대단히 높았다.
이렇게 농업이 중시된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농사와 관계된 강수량에 관심이 컸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祇雨祭), 비가 계속 내리면 기청제(祇晴祭), 겨울에 눈이 적게 내리면 기설제(祇雪祭)를 지내곤 했다. 3-4년에 한번씩 한재(旱災)를 당했으므로 삼국시대 이래 조정과 지방 관청, 그리고 민간인을 막론하고 기우제가 성했다.
또한 나라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도 종묘와 함께 이곳에 중요한 일이 있음을 고하기도 하고, 풍년에 대한 감사와 추수를 기원하기도 했다. 아울러 나라의 정치가 잘못되어 천벌(天罰)이라는 생각을 가진 왕이 스스로 사직단에 나아가 자숙하기도 했고, 5월 모내기 때 비가 오지 않으면 왕 스스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내방(內房)을 피하며 반찬의 수를 줄이는 한편 기우제를 직접 지내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주로 이용되어 온 곳이 바로 이곳 사직단이었다.
지방 소재 사직단의 예 - 전북 남원에 있는 사직단 (엔사이버 대백과 인용)
한편 사직단은 중앙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도 하나씩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각 지방마다 왕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지방 고을의 수령들도 농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고을 사람들과 더불어 농업의 번성함을 기원하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하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사직단은 그만큼 농업을 중시 여겼던 당시 농본국가의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던 장소였다. 비록 오늘날 사람들이 오가며 쉬면서 즐기는 공원으로 인식될 만큼 이미지가 크게 깎인 것도 사실이지만, 농업을 중요하게 여겼던 우리 선현들의 숨결이 담긴 역사 깊은 장소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