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에 특정직업의 사람들이 등장할 때 하나의 '모티프'가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신부'같은 성직자들은 영화속에서 적대인물이나 조역으로 등장하여 때때로 구시대의 기득권층의 표상이 되기도 하지만 대개 신앙과 신념 을 소유한 온화한 인품의 상징이거나, 악의 도래를 막기 위해 투쟁하다 희생되는 양심의 상징이거나, 위기에 처한 주인공과 약자들을 남 몰래 돕는 동정과 피난처의 모습으로 나타나곤 한다. 이는 사회에서 특정 부류에 대한 사회 적 인식이 형성되었을 때 그것의 반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락 뮤지션들은 어떻게 그 려지고 있을까? 그 속에서 어느 정도 일관된 특징이 발견된다면, 그들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영화 속에 나타난 그들의 역할과 상징을 통하여 어떠한 문제들의 확인과 발견이 가능하게 될 지도 모른다.
영화 속의 대중음악인들
영화의 소재로, 그리고 배우로 음악인들이 등장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계급적 상징이었던 찰리채플린의 떠돌이 악사에서부터, 시장논리에 의해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스타들이 주연한 다소 얄팍한 청춘물의 양산에 이르기도 했 고, 까메오 출연, 또는 옴니버스 사운드트랙의 일반화와 함께 잠깐씩이라도 영화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종 종 있으며, 아예 음악인이 배우를 겸하여 뮤지션으로서가 아닌 작품속의 진짜 배우로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 다큐 멘터리 또한 적지 않았음은 새삼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블루스 뮤지션 로버트 존슨과 윌리 브라 운의 이야기 <랄프마치오의 십자로>, 비밥 재즈의 대가 찰리 파커의 이야기인 <버드>, 제니스 조플린의 생애를 그 린 <로즈>, 리치 발렌스의 짧은 이야기 <라밤바> 등처럼 전기영화들도 꾸준히 나오는 편이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같은 감동적인 다큐가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고, 근래엔 <커먼웰쓰>의 자국내 흥행으로 어느덧 인기감독으로 성장한 스페인의 알렉스 데 라 이글레시아(Alex de la Iglesia)의 컬트적 지지를 받아온 <야수의 날> 처럼 영화에 음습한 기운을 가하는 장치로 쓰이기도 했으며 <록키 호러 픽쳐 쇼>에선 미트로프가 등장하여 영화의 독특함을 더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영화들이 아닌 자연스러운 소재나 등장인물로서 그려진 영화들, 그로 인해 사회적 인식 이나 영화에서의 도구적 용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영화들을 몇편 살펴보는 편이 의도에 더 부합하리라 생각된다.
<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89)의 좌파적 표상 핀란드의 아끼 까우리스메끼 감독의 컬트적 명작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는, 후속편 <레닌그라드 카우 보이 모세를 만나다>로 다시 등장한 영화 속 실제밴드의 성공을 가져왔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핀란드 북부의 시대 에 뒤떨어진 음악과 과장된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는 괴이한 몰골의 밴드가, 매니저와 함께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미국에 갔으나 역시 그 가망없음에 떠밀리다시피 하여 멕시코까지 가게 되는 로드무비 형식의 이 코미디에서 이들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유머로 조롱하는 주인공으로, 매니저에게 착취당하고 때론 혁명도 일으키는 피착취계급 의 상징으로, 그리고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적 가치와 문화를 비판적 시각으로 조망하는 감독의 분신으로 그려진다
아끼 까우리스메끼 감독은 특유의 부조리극적인 상징과 유머를 갖고 있는데, 저변에는 사회주의적 의식이 깔려 있 다. 2002년 개봉한 거장들의 옴니버스 < Ten Minutes Older :the Trumpet >편에 참여한 단편 <개의 사전에 지옥이 란 없다 - Dogs have no hell?>에서 주인공은 유치장에서 나오자마자 엉뚱하게도 시베리아유전을 개발하겠다고 떠 난다. 재밌게도 이 <개의 사전에 지옥이란 없다>에도 우스꽝스럽지만 음악은 괜찮은 밴드가 잠시 등장하는데 유치 장에서 나와 몇 년만에 어느 웨이츄리스를 찾아간 주인공이 청혼을 하는 한낮의 레스토랑에서 윤수일 밴드를 연상 시키는 밴드가 주인공을 포함 단 두 명의 손님들을 두고 근사한 곡을 느끼하게 연주하는 장면도 백미였다. 어쨌든 여기에서 '시베리아'는 점점 불가능하게 되어가는 듯한 인류 최대의 꿈, 바로 사회주의로 대변되는 '희망'이었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의 '아메리카' 역시 모든 것이 가능한 희망으로 다가왔으나 레닌그라드 카우보 이가 찾아갔던 미국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희망'의 나라는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엽기적인 밴드는 앞서의 의미와 함께 순수한 희망과 열정을 품고 사회에 내던져진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지 않을까. * < Ten Minutes Older :the Trumpet >에는 앞서 말한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그리고 <파리, 텍사스>, <베를린 천사의 시>등으로 유명한 빔벤더스 감독도 참여했다.(텐 미니츠 트럼펫-Ten Minutes Older:the Trumpet에 대한 글)
< 엑설런트 어드벤쳐 >(`89)의 귀여운 반항아들
다소 무겁게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부담 없는 하이틴 코미디 한 편. 학창시절 친구 집에 둘러앉아 비디오 를 보던 일이 까마득해진 시점에서 되새겨보는 이 우스꽝스러운 영화에선 실제로 락 밴드 활동을 연기와 병행하는 키아누 리브스의 소시적 모습도 볼 수 있다. 빌과 테드라는 락커를 꿈꾸는 속칭 날라리들이 학교성적의 낙제와 부 모에 의해 원하지 않는 진로가 강요될 시점에, 미래에서 이들을 구하기 위해 타임머신과 함께 나타난 안내자를 만 나면서 스토리가 전개된다. 이 얼뜨기들의 음악이 훗날 인류를 구하고, 미래엔 가장 존경받는 음악이 되어있는 역 사가 바뀌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나.. 결국 공중전화부스같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여 역사상의 실존인 물들을 현재로 데려와 역사수업 발표를 성공리에 마쳐 낙제를 면한다는 이야기다. (쟌 다르크는 왜 데려왔는지..)
여기에서 그려지는 이들의 모습은 반항아에 낙오자 같은 모습이지만 미래에는 인류의 우상이 되는 친구들이다. 유 치한 하이틴 코미디이긴 하지만 당시 겉멋처럼 유행했던 이런 락 하이틴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이 깔려 있 음을 엿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과거로 돌아가 부모 세대의 파티에서 기타를 연주하다가 흥에 겨워 발광하던 마이클 J 폭스의 <백 투 더 퓨쳐>도 덩달아 떠오르는데, 미국에서 히피 문화와 포크 락이 사회의식을 갖춘 저항적 부모세대의 상징이었다면, 80년대 미국 청소년의 반항과 자유분방함은 경쾌한 L. A. Metal 과 함께 자주 등장하곤 했다. B급 호러 엽기작 <바탈리언>에서도 이 것은 묘지에서 난장파티를 벌이다 좀비들에게 골을 뜯어 먹힐 운명인 아이들의 반항과 자유분방함을 덧칠하는 도구로 쓰였다. -근래에 와서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힙합이겠고.
위 영화는 사실 락 뮤지션에 대한 영화는 아니었는데 실제 락 밴드 The Doors의 전기영화에 그려진 모습은 어떠할 까. 전기영화는 논외로 한다고 앞서 말하기는 했지만 다른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는 나름대로 객관적 사실들을 바 탕으로 하면서도 그들 특히 짐 모리슨에 대한 모종의 주관적 인상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는 경우라 할 수 있어서다
세상에 절규하는 영혼, < 도어스 >(`91)
턱뼈부터 닮아 예사롭지 않은 캐스팅이었던 발킬머 주연의 <도어스>는 정확히 말하면 짐모리슨에 대한 영화다. 최 근 짐 모리슨외의 다른 멤버들에 의해 재결성된 도어스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크지 못할 정도로 역시 그의 카리스 마가 지배적이었던 게 사실이지만 대중적인 인지의 핵이었다고 해서 음악적으로도 그가 전부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느슨하게 다룬 듯 하고, 세상의 비밀을 알아버린 천재는 평온하게 유유자적하게 되는 동양적 관점이 아 니라 광인이 되어 내부와 외부세계 모두에 몸을 짓이겨버리는 서양적 관점으로 짐 모리슨을 그리고 있다. 사실 서 양의 성인들이나 천재들이 동양의 그들-비록 현실에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을지라도-과는 달리 처참한 최후를 맞 거나 탄압을 받곤 했다는 것부터가 은연 중에 스며든 이러한 인식의 배경이 되는 듯 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젊은 예수의 죽음은 기독교 세계로 재편된 이후의 유럽에서 더 많은 순교자를 양산해냈고 역사의 단절성과 엄격한 기독 교 질서, 현실중시 사상이 맞물려지면서 현실을 초탈의 대상으로 봤던 동양과 달리 서구에선, 결국 부딪히고 마는 거대한 장벽이 되어 천재의 영혼을 짓누르는 것으로 자리잡은 것이었으며 이것이 세계의 서구적 재편 이후 동양에 파급된 측면도 없지 않다. -근대 이후 한국, 일본의 소설, 영화에서 천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감지된다.
자유로운 영혼의 분출구를 찾던 정열을 시와 음악으로 표현하며 서서히 사회적 관점에서 광인이 되어가는 락 뮤지 션 짐 모리슨은 젊은 나이에 그런 식으로 세상을 등진 몇몇 뮤지션들과 오버랩된다. 여기에서 처절하게 영혼의 자 유를 부르짖던 짐 모리슨을 통해 태어나는 것 자체가 사산(死産)이 되어버리는 이 사회속에서 인간 자유와 예술혼 을 외치는 고독한 예술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그러한 예술형식 중 어쩌면 가장 대중적일 수 있는, 한국에서는 그렇지 못하지만, 락음악과 그것을 행하는 락뮤지션에게 선험자로서의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 클럽 싱글즈 >(`92)의 자유로운 젊은 세대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라도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지 못한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카페에서부터 심지어 분식집에 이르기까지 유독 이 영화의 포스터가 이리도 흔해진 이유는, 내게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젊 은이들의 청년에서 장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의 일상사가 그려지는 이 영화의 배경이 시애틀인데 90년대 초반 이 도 시의 중요한 이야깃거리가 된 반가운 사람들도 등장한다. 영화 속에 조연으로 등장하는 밴드 Citizen Dick은 다름 아닌 Pearl Jam 이었다. 이렇게 Pearl Jam의 멤버들이 조연으로 출연하고 있을 뿐 아니라 클럽의 라이브 장면에선 Alice In Chains, Soundgarden도 만날 수 있는데, 한 마디로 시애틀 그런지의 당대 최고 뮤지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팀 버튼의 모습도 잠시 볼 수 있어 볼거리(?)가 풍부하기도 했다. 물론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간에는 잔잔 한 재미로 대단히 유명하다는 건 두말 하면 잔소리다. 당시 시애틀 젊은이들의 한 부분으로 등장하는 이들과 음악 엔지니어의 모습 역시 기존의 윤리와 질서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면서, 새로운 젊은 세대의 가치관 과 생활태도를 보여주는 장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들이 등장하니 정말 90년대 초 시애틀답지 않았던가
가볍지만 진지했던 < 댓 씽 유 두 >(`96)
톰행크스의 감독 데뷔작이었던 이 영화는 깔끔하고 밝은 분위기의 영화로 동명의 주제곡도 히트했다. 열심히 드럼 연습을 하던 가이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대단한 기회는 아니었고 경연대회에 나가려던 지미가 리드하는 동네 밴드 의 드러머가 사고를 당하게 되어 대타로 연주를 하게 된 것. 이때 지미의 곡이 "That Thing You Do"였는데 원곡분 위기를 전혀 다른 경쾌한 리듬으로 바꿔버린 가이의 드럼연주에 지미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 그리고 대회에서조차 환호를 받게 된다. 밴드명도 "완더"였던 걸 가이가 퉁명스럽게 "밴드니까 복수형이어야지"해서 완더스가 되어버리 고. 완더스는 점점 인기를 얻어가면서 더 큰 성공의 가능성도 보이게 되지만 자신만의 음악색에 대한 고집을 지키 려는 지미, 진지하지만 심각하진 않은 낙천적인 가이, 또 하룻밤의 사고로 깁스를 하고선 완더스의 성공을 쓸쓸히 지켜봐야 하는 원드러머와 평범한 다른 멤버들 간에 틈새가 나기 시작하고 결국 완더스는 와해되는 것이 줄거리다
전체적으로 어린 친구들의 성장 드라마같은 이야기, 그리고 밝은 분위기의 음악과 영상이긴 했지만 의외로 밴드내 의 음악적 주도권과 음악성의 차이, 인간적인 갈등이 잔잔하지만 제대로 그려지고 있는 영화다. 많은 다른 영화들 과는 달리 방탕하거나 지나치게 개성이 강한 음악인이 아닌 성실하게 삶과 음악을 대하는 가이에게 긍정적 시선을 던지고 있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맘에 들었다. 개인이 성장해가며 집단에서 자신의 개성과 사회적 조화간의 괴리를 겪게 되고 각자의 길을 찾거나 도태되는 모습을 축약해 보여줄 수 있는 모범으로 밴드를 선택해서 보여주고 있다.
< 에어헤드 >(`94)와 < 밴디트 >(`97)의 반항과 저항, 그리고 연대
무명밴드 에어헤드는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진전이 없는 와중에 자기들보다도 형편없는 놈들이라 생각하 던 밴드의 곡이 락 전문 방송의 전파를 타게 되자 이에 격분, 아예 방송국에 잠입해 자기들 음악을 틀어보려다 인 질극까지 벌이는 엎치락뒤치락 황당 코미디 영화가 <에어헤드>이다. 미국 독립영화의 대표적인 배우이자, <판타스 틱 소녀백서>(판타스틱 소녀 백서 - Gost World 에 대한 글)에선 편집증적이기까지 한 음반수집광으로도 나오 는 스티브 부세미가 밴드의 베이시스트로 등장하며 영화의 클럽씬에선 인더스트리얼과 메틀을 결합했던 랍 좀비의 밴드 White Zombie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어지간한 매니아가 아니고는 바로 웃을 수 없는 음악적 조크들도 수시로 등장하는 B급 코미디 영화다. 80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직설적인 저항의 표출이었던 스래쉬메틀과는 반대로, 반항 적이고 향략적인 문화의 표출이었던 L.A. Metal을 표방한 이 '에어헤드'라는 밴드의 음악처럼 그들이 느낀 부당함 에 대해 무모하기만 한 해프닝을 벌이는 모습 역시 당시 젊은이들의 반항의 반영이었으나, 영화 속 이야기는 어쩌 면 유치한 자위에 그치는 것 같다. 마지막은 이들이 감옥에 수감되어 식당에 죄수들을 모아 놓고 공연하는 장면인 데, 어차피 부담없는 코미디니까 심각하게 생각할 것까진 없겠으나, 보기에 따라선 의미심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바통을 이어받기라도 한 듯이 감옥에서 스토리가 시작되는 <밴디트>. 반항의 수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모 습을 그려 보이는 영화라 할 수 있는데, 독일의 여성 감독 가챠 본 가르니에(Katja Von Garnier)의 97년작, <밴디 트>는 각각의 사연을 안고 있는 네 여성이 감옥에서 밴드로 뭉치게 되고, <델마와 루이스>, 준포르노 < Baise-Moi >에서 저항의 결정적 계기가 되는 것이 남성의 폭력(특히 성적인 폭력)이듯 이 영화에서 이들의 분노와 연대의 결 정적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도 그것이었다. 그러나 감옥이라는 환경 자체, 그들의 탈주 여정이 남성중심사회 속에 내던져지고 갇혀버린 '인식하는' 여성의 상징임은 자명하다. 그들이 연주를 위한 호송중에 경찰의 성적 폭력에 격 분, 우발적 범죄를 저지르고 우발적 탈주자가 되는데 이후 이들의 기습공연과 앨범발매, 경찰의 추격 등으로 화제 의 중심에 서게 되지만 결국 예정된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내용으로, 감옥과 경찰로 상징되는 남성중심사회, 멤버 들간의 갈등과 우정의 형성과정, <델마와 루이스>에서처럼 항복하느니 죽음을 택하는 마지막 정지씬등을 보여준다
다소 엉뚱하지만 영화 속 이들이 클래식 현악 4중주단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싱거운 상상도 해보게 되는데, 락밴 드는 말 그대로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상호 연대감을 느끼게 되는 가장 적절한 매개체로도 사용된다. 음악이 그렇고 함께 연주를 하는 밴드 멤버의 관계가 그렇다. 무엇보다 여성 멤버들 간에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게 되는 '연대'가 특히 강조되는데 음악으로 영혼을 교류하는 밴드라는 시스템이 매우 적절한 도구가 되었다고 본다.
< 6현의 사무라이 >(`98)의 고독한 구도자 황량한 사막지대의 총잡이, 고독한 사무라이, 그리고 락 기타리스트.. 이 세 캐릭터가 하나로 합쳐진다면? 매니아 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엉뚱한 영화 <6현의 사무라이>의 주인공이다. 1957년 핵전쟁 이후 미국은 러시아에 정복 당하지만 마지막 자유의 도시 로스트 베가스만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왕이 되어 통치한다. 그리고 40년 후 왕이 죽 고 새로운 왕을 구한다는 설정부터 황당한 이 영화는 끝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기타와 검을 둘러맨 버디와 부모를 잃은 키드(이 아역의 대사는 오로지 "아~"뿐이다)의 로드무비 형식으로 가장 강력한 라이벌 데쓰 일당과의 결투로 마무리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영상과 비장미 넘치는 슬로우모션, 어처구니없는 설정으로 카타르 시스를 안겨준다. 마지막 결투는 화려한 무술이 아니라 기타연주 대결이어서 더 충격적인데, 이 때 헤비메틀의 상 징 데쓰가 락큰롤의 상징 버디에게 던지는 대사도 뒤로 넘어가기에 충분했다. "너무 약해. 이제 헤비메틀 앞에 무 릎을 꿇어라!" 더 충격적인 것은 버디가 결투에 지고 정말 무릎을 꿇어버린다는 것이고 여기까지로도 경의를 표하 기 아깝지 않지만 키드의 상상을 뛰어넘는, 허무하고 통쾌하며 어처구니 없는 활약이 아직 남아 기다리고 있었다.
<6현의 사무라이>는 오랜 기간 홍콩 액션영화계에서 활동해 온 제프리 팔콤(버디역)과 홍콩 느와르의 세례를 받은 랜스 먼지아 감독이 25세 때 만든 작품으로 당시 선댄스 영화제와 각국의 매니아성향의 영화팬들로부터 주목을 받 았다. 스턴트 없이 모든 액션을 수행한 무술 유단자 제프리 팔콤의 어벙한 표정과 엉성하고 황당하며 유치한 스토 리와 대조되는 아름다운 영상, 그리고 러시아와 미국뮤지션으로 구성된, 밴드명부터 묘하게 역설적인 Red Elvises 의 음악 등 여러가지 매력이 가득한 영화로, 여기에선 락 뮤지션을 마치 구도자와 같은 방랑자와 무도인의 모습에 오버랩시킨다. 시대의 저편으로 물러가는 듯한 락큰롤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는 해석에서부터, 허무함 자체의 미 학이라는 해석에까지 다양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황당하면서 아름답고 너무나 애정이 가는 영화에서 락 뮤지션은 목숨까지 건 진지하고 고독한 구도자와 다를 바 없이 그려진다는 점이다. 여러모로 독특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라 락뮤지션에 대한 깊은 존경이 담긴 영화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6현의 사무라이에 대한 일문일답)
< 벨벳 골드마인 >(`99)과 < 헤드윅 >(`02)의 소외자들 <6현의 사무라이>같은 영화가 비디오위주로 컬트매니아들을 통해 입소문이 더해간 영화라면 다음 작품들은 개봉과 동시에 많은 관심을 끌었던 영화들이다. 갈수록 대담해지고 진지해진 동성애 또는 성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화려한 영상, 근사한 글램록과 만남으로써 음악과 영화 애호가들 모두에게 관심을 끌 요소가 다분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영화간에는 여러가지 공통점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음악의 분위기가 그렇고 영상미가 그렇고, 성적 코드가 그렇다. 사실 성적인 문제로 넘어가면 두 영화간에는 분명한 관계의 차이가 있겠으나, 예술분야에서 기성질서에 대한 저항 과 자유의 갈구는 성적인 형태로 분출되곤 했다. -덧붙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교와 기독교 문화가 지배하기 이전 의 성문화는 현대 만큼이나 자유로웠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경우 유교가 지배적 윤리가 되기전인 고려조까지만 해도 개방적인 성문화와 동성애도 횡행했음은 기록으로 알 수 있으며 중국과 중세 이전의 유럽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스터리와 다큐적인 방식으로 전개되는 <벨벳 골드마인>과 뮤지컬을 영화화한 <헤드윅>이 모두 듣기 좋은 음악과 영상을 보여주면서도 상이한 문제를 담고 있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뮤지션들의 역할이 '소외된 자들의 해방과 자유에 대한 절규'라는 것은 동일하다. 유심히 봐야 할 것은 음악 자체가 아닌 그로써 표현되는 인 간과 영혼에 지향점에 있다는 점이다. 전위에 서서 더 격한 몸부림으로 갈망하는 캐릭터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 고 또 음악의 본질을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는 면을 엿볼 수가 있다. 또 <헤드윅> 의 경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정체성 확인이라는 좀 더 깊은 해석이 더해질 수도 있다. -<파리넬리>는 패배했지만 <헤드윅>은 승리했다.
한국에서도 여러 장르의 영화에서 종종 락 뮤지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무릎과 무릎사이> 같은 영화 에선 어느 뒷산 같은 썰렁한 숲에서 연주하던 밴드의 모습을 보여주더니, 플룻주자가 여주인공을 쫓아가 겁탈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장면에서 플룻이 묘한 용도로 쓰이는 것을 보곤 기가 찼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러저러 한 단편적인 예가 아니라 중요하게 등장했던 영화라면 <정글스토리>와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다들 떠올릴 것이다
<정글스토리>는 당시 언더그라운드씬의 여러 밴드들과 낙원상가, 락 월드 등 한국 언더 뮤지션들에게 너무나 친숙 한 장소들이 등장했고, 비교적 사실적으로 실상이 그려진 영화였다. 락 월드에서 윤도현이 이지라이더에서 보컬을 하는 모습을 본 김창완이 그의 매니저가 되어 밴드를 조직하는 순간부터 영화는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엇나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매니저에 의해 조직되고 키워지는 밴드, 일체의 지명도도 없는 밴드가 대관을 하고 장기공연을 감 행하여 예정된 실패를 맛보고 좌절,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야외무대에서의 마지막 공연으로 희미한 희망과 대안을 보여주는 식의 인식부족을 드러내기도 했고,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 신해철과 넥스트 공연의 뜬금없는 삽입에 황당 하기도 했으며 영화 속의 윤도현 밴드가 대중적으로 성공하는 계기가 되기도 해서인지 묘한 감정들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진지했던 <정글스토리>의 주인공들에 대한 시선은 충분한 자격과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 성 현실의 벽에 의해 좌절당하는 인간에 대한 것으로 계급적 인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사회 환경이 음 악인에게 떠 안기는 운명과도 같은 비극을 우린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글스토리>의 김홍 준 감독의 전작 <장미빛 인생>과, 임순례 감독의 전작들인 <세친구>와 <우중산책>에서 볼 수 있듯이, 두 감독들이 모두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에 시선을 두고 있었고, 김홍준 감독이 <정글스토리>에 대해 '전작의 연장선상에 있다' 라고 밝혔듯 이 두 영화에서 주연으로 등장하는 밴드 뮤지션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하층계급과 소시민의 상징에 다름 아니었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여상 출신 사회초년생들을 가져다 놓아도 일맥상통하는 역할이었다는 것이다
예술인보다는 사회구성원, 인간의 대변자로서의 락 뮤지션들
"그들은 있음직 하지 않은 어떤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결정한 다음 거기에서 추리를 한다. 그 리고 시인의 진술(예술가의 작품)이 자기들의 견해와 상반될 때는 그가 실제로 말하는 것은 자기들의 견해와 일치 하는 양 그를 비난한다." 2천 3백여년 전 '요즘 비평가들은 이런 식이다'는 글라우콘의 말이 인용된 아리스토텔레 스의 [시학]의 일부이다. 비평가들이 예술작품을 자기식대로 해석하다가 모순이 발견되면 되려 작가들을 공격하는 태도를 꼬집고 있는데 그동안 2천3백여년이나 지났다는 게 무색할 정도의 언급이다. 그래서 여기에 언급된 영화들 에 대해서도 자칫 아전인수격의 해석이 되지 않기 위해 깊게 파고들기 보단 일반적인 선에 그치면서 살펴보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를 통하여 반항과 저항의 코드로서의 '락뮤직'과 공동체안의 연대에 이상적인 형태인 '밴드', 그 러나 개인으로는 고독한 '음악인'이라는 삼자가 영화들을 통해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의 이야기를 담기도 하고 사회 의식을 전달하는 매개체로도 그려짐을 보았다. 몇 편만을 단편적으로 보았음에도 꽤 다양한 모습이었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건 지금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것들, 즉 자유, 반항, 저항, 연대, 고독처럼 달고도 쓴 선물들이었다. 어 쩌면 다소 상투적인 인식이랄 수도 있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뮤지션과 밴드라는 등장인물들에게 이런 옷들을 입히고 숙명을 지워 인간의 갈망을 대변하게 하면서 영화를 풀어가기에 적당한 소재들로 인식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타당한 것이 되기 위해선 다른 장르 특히 클래식 음악인들의 경우와 잠깐 대비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역시 개인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사회문제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다양하게 반영되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특기 할 것은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의 구도자적 예술혼을 담은 <바이올린 플레이어>같은 영화들이 락에 적용되는 경우 가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재즈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영화들 또한 많음에도 말이다. 반면에 락뮤지션 을 그린 영화에선 그들이 추구하는 음악 자체에 대한 존경보다는 전체적으로 반항과 자유의 상징처럼 등장하는 락 뮤지션에게 포커스가 맞춰진 경향이 있고, 그러한 인식을 통해 사회적 문제에 대한 고발의 매개체가 된 경향이 있 는 듯 하다. 이것은 두 개의 본질 중 일면이다. 긍정적인 동시에 조금은 섭섭한 느낌도 드는데 비록 단 두편의 영 화이지만 한국의 경우로 국한한다면 그 간극이 더욱 극명하게 벌어져 있다는 것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닌 듯 싶다
음악 자체에 대한 투신과 사회에 대한 저항 이전에 생존에 대한 문제부터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다양 한 시각을 살펴볼 여지조차 없음이 더 안타깝다. 조폭들보다도 관심밖의 대상이며 상업성이 없는 게 현실이다. 그 나마 인간의 꿈, 그리고 현실의 벽에 좌절하지만 다시 일어서려는 소외 계층의 의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훈장을 달 긴 했지만, 한 편 허전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 '허전함'은 "음악"인으로서의 그들에 대한 온당한 인식이 없 음에 대한 섭섭함과, 그렇게 그리고 있는 영화 자체가 자기를 그렇게 만들어놓은 상황에 중점을 두어 그들을 등장 시키고 있다는 아이러니로 꼬여 버린다. 이것은 이중의 의미이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다시 하나로 귀결되는 문제다. 이것을 논하려는 글이 아니므로 그에 대한 문제는 감히 떠넘기고자 한다. 한 마디 거든다면 한국에서의 대중 음악 과 락에 대한 저변과 인식, 그리고 환경의 문제는 영화에서도 그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음악처럼 추억이 되고 일기장이 된다. 기타 하나 둘러 맨 껄렁한 친구들이 나오는 영화 한 편 찾아보며 잊 혀져가는, 마치 옛 일기장을 넘겨보다 씨익 웃곤 하는 어린 꿈을 훔쳐보듯 바라보는 건 어떨까. 누구나 한번쯤 꿈 꿔봤을 모습으로 대신 노래하고 몸을 흔들고, 또 대신 울어주는 그들에게 잔이라도 들어주고 싶어지진 않을까. 어 쩌면 해가 갈수록 조용히 시들어가는 인생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에게 보내는 가벼운 키스가 되어줄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