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두라 대논쟁(Panadur Vadaya)
The Panadura Controversy
F.Katukolihe; Panadura Vaday, 1948,
Lankaputhra 출판사, Colombo
편역자 석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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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두라 대논쟁 - 두 번째 논쟁
데이비드 드 실바 목사에 의한 대론
(1873년 8월 26일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저의 대론자인 불교도가 저의 저서인 <그란타세카라>를 비판한 것은 적절하지 않았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에 인용된 파알리어 문장은 제가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문장은 버마(미얀마) 글자로 출판되어 있는 신약성서의 버마어역인 것입니다. 제가 버마 책에서 인용한 것은 <그란타세카라> 책 제명이 있는 첫 장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을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비판한 것은 좋지 못한 것입니다.
저의 대론자인 승려는 영혼을 쇠그릇 속에 집어 넣으면 영혼이 그곳에 정주(定住)한다고 말했습니다만 번갯불은 바람보다 빠른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어떠한 용기에 집어넣는다고 해도 그것을 그곳에 움직이지 못하게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혼도 번개와 같이 빠르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 영혼을 정주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의 대론자는 또 인도의 기독교가 여호와를 "이슈와라"라고 부른다고 말하고 그것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만, 이슈와라라고 하는 것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라는 의미로서 우리들의 여호와를 이슈와라라고 부르는 것은 극히 당연하며 바람직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전지전능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친구인 승려는 좀 더 깊은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 지적했으리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또한 승려는 우일들이 데비요(스리랑카어로 神을 의미함)라고 하는 말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했습니다만 전혀 당치도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신앙하는 여호와에 대해서 "데비요"라고 하는 말 이외에 존경을 나타내는 칭호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빛나는 여호와(shining God; Jwalita Deviyo)"라는 말의 사용도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올바른 비판이 아닙니다. 어떠한 단어의 의미가 단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의 단어는 그 쓰임에 따라 여러 가지의 해석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컨데 파알리어 성전 율장(Vinaya pitaka)dml <마하밧가(Mahavagga, 대품)>에서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는(중성) 사람이 만약 비구승으로서 생활을 하고 있다면 비구승의 자격이 없어지는 것이므로 그를 승단에서 파문시켜야 한다(Pandako bhikkave nasetabho)"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나세탓보(nase tabbo)라고 하는 것은 "죽여버려야만 한다"라고도 번역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살생을 절대 금하고 있는 불타로서는 그 의미를 살생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 양성 다시 말해서 남녀가 동시에 가능한 사람이 만약 구족계를 받고 비구승으로서 생활하고 있다면 그의 가사를 벗기고 승복을 벗겨야만 한다는 즉 이는 속인으로 만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파알리어도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단어및 문장을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레위기 제17장 제3절 7의 문장도 위험성을 막기 위해서 다른 곳에 옮겨져 있습니다.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의 잘못된 것을 지적해 낼 만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곳을 지워 버렸다고 승려가 말한 곳은 성경의 다른 곳에 틀림없이 옮겨져 있습니다. 성경의 번역은 두 번째의 번역이 첫 번째 번역보다 훨씬 훌륭한 것입니다. 때문에 승려가 성경긔 번역자에게 잘못을 지적하는 비판은 적당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제6장 6절의 후회(repentance)라고 하는 의미는 히브리어의 "참회(nogama)"라고 하는 의미로서 여러 가지의 해석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의 의미는 무신앙의 의미입니다. <수다르마 프라카라나야(Sudarma prakaranaya)>라는 책에 참회에 대한 해석이 있습니다.(그는 책의 그 부분을 읽었다)
출애굽기의 제12장 23절(싱할라본 영어본 모두 12장 23절로 되어 있으나, 성경을 대조한 결과 12장 22절이 옳음)에 "문 안방과 좌우 문설주에 피로써"표시한다고 적혀 있는 것에 관한 승려의 의견도 전혀 무의미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가 명령한 것을 실천해야만 한다고 하고, 이집트인이 벌을 받게 될 것을 명령에 따라 실천한 사람들을 구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사람들은 전멸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명령은 기독교의 죽음의 상징이기도 한 것입니다.
기독교에 반대해서 질문한 승려의 의문에 대한 저의 대답을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이것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음에 불교에 반대해서 대론을 시작했다.
불교가 어느 정도 부정한 종교인가를 입증해 주는 대단히 중요한 교리가 있습니다. 잘 들어 주십시오.
불교에서 연기설(Paticca samuppada)은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인 줄 압니다. 그 가르침은 대단히 복잡하고 아기 어렵습니다. <상윳타 니까야>라는 경에 나오는 연기설에 대한 부분을 지금 여기에서 인용하겠습니다. "무지에 의해서 의식작용을 일으키는 동작이 생기며, 그 동작에서 식, 다시 말해서 의식작용이 일어나며, 그 의식작용인 식에서 명색 즉 이름만 있고 형상이 없는 마음과 형체가 있는 물질이 생겨난다"라는 것입니다.
형체가 있는 물질과 마음이라는 것은 오온인 것입니다. 식은 또는 오온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이 얼마나 복잡한지 아시겠습니까? 한편으로느느 의식적인 동작에 의해서 식 혹은 마음이 일어난다고 말하며, 또 다른 곳에서는 이 식에 의해서 마음과 물질이 생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식은 또 마음과 물질이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식은 또 마음과 물질 가운데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아버지에 의해서 아들이 생기고 아들에 의해서 아버지가 생긴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불타의 가르침이 훌륭합니까? 어느 누구도 이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이치에도 맞지 않는 이 가르침을 이성이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옳다고 인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마음과 물질에 의해서 6식(안의비설신의)이 생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표현이 올바르다고 하면 모든 유정들이라고 하는 것은 눈.귀.코.혀등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각 기관, 눈, 귀, 코가 없이 마음과 몸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 문장보다 어렵고 복잡한 표현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여섯 개의 감각 기관(6근)에 의해서 촉(觸)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윳타 니까야>에 의하면 촉이라는 것은 몸과 마음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만약에 이 논리가 맞는다고 하면 앞에서 말한 그 표현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양쪽 그 어느 쪽도 맞지 않는다는 결론인 것입니다. 불타 이외의 누군가가 그처럼 곤란에 처해 있었을까 당신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 가르침을 심원(深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가르침을 곧바로 알 수 없는 난해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 뿐입니다. 또한 이러한 가르침을 심원한 것이라는 소문만을 듣고 그것을 믿고 신봉하는 불교도로서는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이겠지요.
또 "파사 팟차야 베다나(Phassapaccaya Vedana)"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접촉에 의해서 감각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 또한 복잡하기가 이를데 없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마음과 육체라고 할 때는 형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각은 의식에 의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은 의식에 의해서 생겨나고,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하면서 여기서는 감각에 의해서 접촉이 생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표현 중에서 어느 하나가 올바른 표현이라면 반드시 그 하는 옳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의 이야기를 끝맺기 전에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연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수(受)에 의해서 애욕(tanha)이 생기며, 애욕에 의해서 집착(updana)이 생기며, 집착에 의해서 태어남(jati)이 생기며, 태어남 혹은 생(生)에 의해서 다시 태어남(재생. rebirth)이 생긴다 합니다. "태어남이라 함은 물질(khandha)과 감각 기관에 의해서 성립된다"라는 의미로서 불타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에 의해서 선과 악의 행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식에 의해서 육체와 마음이 생긴다고 말하며, 그 식과 육체와 마음이란 것은 오온 가운데에 포함된다고 합니다. 또 선과 악의 행위는 필연적으로 "식"이라는 것을 피할 수가 없으며, "식"에 의해서 몸과 마음도 생기며 다음에 또 업에 의해서 온과 육신과 마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의 표현 가운데 하나가 맞는 것이라면 또 하나는 잘못된 표현인 것입니다. 만역에 저의 대론자가 우리들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난해한 곳을 해명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있으시다면 사양하지 마시고 말씀해 보십시오.
(그가 청중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