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순호(靑潭淳浩,1902~1971)】 "자비심으로 생명을 아끼면 평화가 온다"
자비심으로 생명을 아끼면 평화가 온다
평생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한 청담순호(靑潭淳浩,1902~1971)스님. 늘 가사를 수하고 육환장을 들고 대중을 맞이한 청담스님은 ‘수행자의 표상’이었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던 스님의 모습을 <아아 청담조사>와 비문 등의 자료를 참고하여 정리했다.
“자비심으로 생명을 아끼면 평화가 온다”
신구학문.내외전.선교 두루 ‘섭렵’
빈부귀천 없이 누구에게나 근기설법
○…출가 전의 일이다. 삼동(三冬)의 추위가 살을 파고들던 어느 날 옷을 훌훌 벗은 채 진주 남강에 들어갔다. 얼굴만 내밀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젊은 사람이 추운 날씨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있는가”라고 물었다. 답변은 이러했다.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는 겁니다. 나라를 구하는 일꾼이 되든지, 아니면 인류를 구원하는 고승이 되려면 무엇보다 인내심이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저의 인내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아보려고 이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진했던 청담스님. 육환장을 짚고 삼각산 도선사 석불전에 선 스님의 모습이다.
○…덕숭산 정혜사로 만공스님을 찾아간 청담스님. 그날은 섣달그믐이었다. 살을 에는 추위와 방문 두드리는 바람만 두 스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이날의 일에 대해 청담스님은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밤을 지새우며 한국불교의 장래를 염려했다. 불교 정화의 선두에 줄곧 서 있었던 까닭은 바로 이날 만공스님과 나눈 대화에 근거하고 있다. 나는 이날 밤의 ‘결의’를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이때는 1937년 만공스님이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에게 “데라우치(寺內) 총독은 죽은 뒤에 어디에 갔느냐”며 일침을 가한 후였다.
○…젊은 수좌시절.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기상과 열정, 그리고 간절함이 있었다. 설악산 봉정암에서 정진했을 때의 일이다. 공부하고 쉬는 시간을 따로 두지 않고 수행에 몰두했다. 너무 열심히 공부하는 스님을 남겨놓고 도반들이 모두 떠나고 말았다. 그 같은 일도 모른 채 스님은 화두를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선정(禪定)에서 나온 스님은 도반들이 모두 백담사로 떠난 것을 알았다. 하지만 밤도 깊었고, 폭설(暴雪)이 내려 움직일 수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일. 스님은 “오히려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잘 됐다”면서 용맹스럽게 정진했다. 식량도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보름이란 시간이 지났다. 당시 홍천군수와 경찰서장 꿈에 설악산 산신이 나타나 “지금 봉정암에 도인이 공부하고 있으니, 빨리 가서 공양을 하라”고 했다. 꿈이 일치하는 것이 신기하여 부하 직원을 대거 동원해 봉정암에 갔더니 피골이 상접한 청담스님이 정진하고 있었다고 한다.
○…스님은 현대사회에서 불법을 널리 알리려면 언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1960년 1월 불교신문(당시 제호는 대한불교)을 창간한 것도 스님의 원력에서 비롯됐다. 불교신문 초대 발행인겸 사장 소임을 맡은 청담스님은 창간사에서 “우리 불교는 앞으로 더욱 많은 중생에게 포교하여 모든 국민에게 영적구원(靈的救援)을 주고 건전한 사회건설에 공헌할 사명을 띠고 있다”면서 “사부대중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기를 바라며 아울러 끊임없는 정진(精進) 수도(修道)를 빈다”고 당부했다.
○…스님은 역대 조사의 게송을 자주 들려주었는데, 바로 여기에 스님이 지녔던 ‘생명사상’의 핵심이 들어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汝欲廷生須放生(여욕정생수방생) 此是循環眞道理(차시순환진도리)
他若死時爾救他(타약사시이구타) 爾若死時他救爾(이약사시타구이)
廷生生子無別方(정생생자무별방) 戒殺放生而己矣(계살방생이기의)”
“당신이 만일 살고자 한다면 생명을 살려주어라 /
이것이 순화하는 참다운 이치이며 도리이다 /
어떤 생명이 목숨을 잃을 때 당신이 구해준다면 /
당신이 생명을 잃을 때에 그가 구해줄 것이다 /
오래 살고 아들 낳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다 /
생명을 해치지 말고 방생을 하면 그 뿐이다.”
○…“내가 1시간만 김일성을 만나면 통일은 가능하다.” 1960년대 말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에서 열린 통일 주제 대화모임에 참석한 청담스님의 발언이다. 모두 깜짝 놀랐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당시는 남북문제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고, 더구나 김일성을 만나겠다는 발상은 상상조차 못하던 시기였다.
당황한 사회자가 “문제는 김일성이 청담스님을 만나주지 않는데 있다”며 서둘러 폐회를 선언했다고 한다. 조선일보 논설고문을 역임했던 선우휘 씨는 “청담스님이 사회자의 청을 받아들여 그 같은 말씀을 했을 때 일순 멍해졌고, 다음 순간 아연실색, 열렸던 입을 다물 수 없었다”고 회고한바 있다.
○…총무원장 재직 시절 청담스님은 조계사에 주석했다. 당시 스님은 매일 대중공양 때마다 자자법회(自恣法會)를 거행했다. 스스로 반성하고 참회하는 전통의식인 자자를 통해 수행자의 자세를 흩트리지 말라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이때 스님은 “자자에 의해 마음의 편안을 되찾게 되고, 마음의 편안을 되찾으려면 잘못을 참회하고, 참회하려면 허물을 고백하고, 고백함으로서 마음이 청정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진>삼각산 도선사 가는 길에서 잠시 쉬고 있는 청담스님. 출처=‘아아 청담조사’
○…청담스님은 정화불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또한 출가수행자의 길에 대한 뚜렷한 신념도 있었다. “성불을 한생 늦추더라도 중생을 건지겠다. 다시 생(生)을 받아도 이 길을 다시 걷겠다. 육신은 죽어도 법신은 살아있다.” 효봉.동산.금오스님 등과 함께 참여한 청담스님은 ‘정화불사의 야전사령관’ 역할을 담당했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오직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교단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스님은 “난잡한 요정으로 변해버린 사찰이 부처님의 청정도량으로 정화될 때까지 목숨을 다받쳐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정화 과정에서 스님은 젊은 수좌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저쪽에서 때리면 맞아라. 그리고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온화한 성품과 자비로운 마음으로 맞서라.” 그러나 물리적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양쪽 모두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유혈사태까지 벌어졌다. 그같은 일이 발생하면 스님은 홀로 불전(佛前)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도선사가 자리한 삼각산 오솔길을 걸으며 청담스님은 어떤 생각을 지녔을까. 스님의 <수상록>에는 ‘길’에 대한 소회가 들어있다.
“길은 사람이 존재하는 한 언제나 있고, 그러므로 그 길은 영원하다. 인간의 깨달음 역시 마찬가지다. 완성이란 언제나 없다. 완성은 죽음뿐이다. 그리고 그 죽음도 다만 탈바꿈에 지나지 않는다. 뜬 구름과 같은 우리들의 삶은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 길에 어느 때는 저토록 붉은 놀이 내리고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인간의 외로운 발자국이 남겨지리라. 그 길은 나에게서 젊음을 빼앗아 갔다. 사랑을 빼앗아 갔다. 이름과 성까지도 빼앗아 갔다. 그러나 그 길은 더 많은 것을 나에게 주었고, 그 길은 더 많은 것을 나에게 바라고 또 주겠노라 약속하고 있다.”
■ 행장 ■
청담스님은 1902년 11월19일 (음 10월20일)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이화식(李化植)선생. 모친은 제주 고씨 였다. 스님의 속명은 찬호(贊浩)이다.
어린 시절 한문사숙에서 한학을 익히고, 진주제일보통학교와 진주농업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영.만공스님 제자
한국불교 재건 ‘선봉’
진주 호국사에서 금강산 유점사 출신의 선사(禪師) 포명(圃明)스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의 뜻을 품은 스님은 1926년 고성 옥천사로 입산한 후 이듬해 5월 박한영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30년 5월 서울 개운사 대원불교전문강원 졸업후 예산 정혜사 만공스님 회상에서 정진했다. 1934년 견성한 후 만공스님에게 받은 불명(佛名)이 올연(兀然)이다.
<사진>진주농업학교에 다닐 무렵의 청담스님.
1941년 유교법회(遺敎法會)에 참여했으며, 1947년에는 성철스님 등과 함께 문경 봉암사 결사를 단행했다. 1954년 전국비구승대회를 주도하고 불교정화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후 종정, 도총섭 및 총무원장, 중앙종회 의장, 룸비니 한국협회 총재, 동국학원 이사장 등의 소임을 맡아 한국불교 재건에 총력을 기울였다. 1968년 서울 도선사에 호국참회원을 창립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던 청담스님은 1971년 11월15일 갑자기 입적했다. 세수 70세, 법랍 45세.
스님은 입적 전날 이화여대에서 열린 특별강연회에 참석했다. ‘마지막 법문’이 되고 말았다. 이날 스님은 “이 세계는 인간의 마음으로 인간이 지은 것이므로 아름다운 마음은 아름다운 세계를 짓는다”면서 “자비스런 마음으로 생명을 아끼고 존중하면 평화로운 세계가 된다”고 강조했다.
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