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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깊은 강 ▒ 옥천 금강 ▒ 얼어붙은 겨울 강, 갈 수 없는 강마을 |
가는 날이 ‘하필이면’ 장날이 아니라 ‘마침’ 장날이라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옥천(沃川) 읍내를 가로지르는 천변 소로를 중심으로 오일장이 서고 있었던 것이다. 지방 소읍의 오일장만큼 흥겨운 행사가 다시 있으랴. 매서운 한파가 기승을 떨어대는 중이었지만 시장통은 무척 왁자하고 부산스러웠으며 볼거리도 많았다. 개천은 꽝꽝 얼어붙어 멍든 듯 시퍼랬다. 연탄 화덕을 하나씩 다리에 끼고 앉아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상인들의 푸르딩딩한 얼굴도 안쓰러워 보였다. 어물전에 진열된 생선들은 잔뜩 오그라들어 딱딱한 박제처럼 참담해 보였는데, 그것은 한결 고생스런 겨우살이를 감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서민들의 내면 풍경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그나마 한낮의 햇살이 쨍하니 내리쳐 장터는 조명 받는 무대처럼 밝았다. 털모자를 눌러쓴 촌로들이 둘러앉아 정치의 가난과 경제의 알량함을 왝왝 규탄하는 허름한 대포집에서 국밥 한 그릇을 시켜먹은 뒤 금강(錦江)으로 향했다. 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산마루에서 발원한 금강은 무주와 금산, 영동을 거쳐 옥천땅에 발을 들이민다. 옥천군의 중앙부를 남에서 북으로 치받고 흐르는 이 강물은 미구에 대청호에 몸을 부리게 되는데, 그러기 직전 의외의 산 깊은 오지를 누비며 절묘한 풍색을 연출한다. 옥천군 동이면 조령리 벌말. 청성면을 관류한 보청천이 금강에 합솔되는 이곳에서부터 강변길은 비포장 흙길로 바뀐다. 제법 넓을싸한 차도지만 울퉁불퉁 구불구불 오지의 강길다웁게 툽상하고 까탈스럽다. 산그늘 으슴푸레한 음짓길에는 녹다가 얼다가 다시 얼어붙은 얼음장이 두텁다. 청마리의 대보름 탑신제 왼쪽 차창으로 들어오는 금강의 장중한 흐름이 통쾌한 맛을 안겨준다. 강물 속에 가만히 그림자를 드리운 채 명상처럼 겨울 한낮의 적요에 참하게 젖어들고 있는 칠칠한 산들과 가파른 단애들. 엊그제 무섭게 퍼부은 폭설의 여파가 그대로 남아 강변 일대는 온통 은빛이다.
푸른 강물과, 강둔덕에 즐비한 길찬 대나무들의 녹색 대숲이 그 일망무제한 설경의 백색 천지에 극명한 색채의 대비를 아로새긴다. 상금과 하금 마을로 이루어진 합금리(合金里)는 과거, 동네 앞 금강변에서 사금이 무척이나 푸짐하게 나왔다는 데에서 얻어진 지명이다. 상금을 웃쇠대로, 하금을 아랫쇠대라고 부르는 것은 강가에 소를 기르며 살아온 이들이 많았다는 사실에서 유래했다. 그러니까 옛날의 합금리 주민들은 소를 치는 한편 사금을 채취해서 생계를 도모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이제 마을들은 해체 위기에 직면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미 대처로 뿔뿔이 흩어져버렸으니까. 남은 이들은 그저 보잘 것 없는 농사를 지으며 어렵사리 벽촌의 삶을 영위한다. 버스조차 들어오지 않아 근 십리 길을 터덜터덜 걸어나가서야 차편을 만날 수 있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합금리와 이마받이를 하고 들어앉은 청마리(靑馬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청동(靑洞)과 마티리를 아울러 청마리라고 하는데 옛날에 봉화가 피어올랐던 깃대봉 자락의 ‘상서롭고 푸른 마을’이라는 해석이 있다. 지난 70년대까지만 해도 청마리 가구 수는 60여 호에 이르렀으나 이제는 주로 70대뿐인 열 가구 남짓으로 확 줄었다.
원근 둘레의 어여쁜 아이들이 혹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혹은 산을 넘고 들을 질러 우르르 모여들어 공부를 했던 청마초등학교도 일찌감치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청마리는 유서 깊은 민속 마을로서 외부의 관심과 응원을 받고 있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이 마을에서 한바탕의 향연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른바 ‘청마리 탑신제(塔神祭)’인데 1976년,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 1호로 지정되었다. 전통시대의 농촌에서는 음력 정월의 대보름달 아래에서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의를 펼쳤다. 정월 보름쯤이면 하마 한해 농사가 시작되는 때이기에 이날을 특별하게 여겼던 것이다. 까마득한 마한 때부터 세시 풍속으로 정착한 이같은 대보름 축제의 생생한 원형이 충북 안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이곳 청마리에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제사는 탑신제로부터 개시된다. 제주(祭主)는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한 사람을 선정하는 게 상례이나 최고령자나 이장이 맡기도 한다. 탑신제에 이어 솟대제와 장승제가 펼쳐진다. 이때부터 쿵덕쿵덕 풍물이 울리고 음복과 가무가 벌어진다. 솟대와 장승은 윤달이 든 해마다, 즉 4년마다 한번씩 새로 만들어 세운다. 뒷산에서 신목(神木)을 선정, 마을의 고로들이 직접 솟대를 만들고 장승을 깎는 것이다. 매년 정월 보름이면 청마리 동제를 보기 위해 많은 외지인들이 찾아든다고 한다. 강 건너 육지 속의 섬 엄동의 청마리는 고즈넉하고 적막하다. 협착한 산골짝을 따라 기다랗게 늘어선 마을 복판엔 을씨년스러운 폐교가 자리했고, 폐교 옆엔 제당인 지름 5미터, 높이 5미터 정도의 원추형 돌탑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솟대와 천하대장군 지하대장군 목상이 부근에 띄엄띄엄 늘어서 있는 게 보인다.
“조용허다못해 쓸쓸하기가 한정없지유. 옛날엔 학생들이 있어서 와글와글혔는디……”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다가 길손을 맞아준 이을순(68세) 할머니는 모처럼 외지인을 보게 되어 내심 반가웠던 모양으로 성의를 다해 마을 얘기를 들려주었다. 청마리로 시집온 이래 50여 년을 거의 줄곧 한자리에 박혀 살아왔다는 할머니는 “여게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거이 한 개도 없지유”라고 말했다. 교통은 여전히 불편하며, 장마철이면 여전히 다리가 물에 잠기고, 가파른 깃대봉 너머로 서산 해는 여전히 너무 빨리 저물어간다고 했다. 하지만 무사한 한평생이었다며, 조용한 한 세상이었다며 매우 흡족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한 개 한 마리가 마당에 앉아 눈을 끔벅이며 바라보는 가운데 툇마루에 얌전하게 걸터앉아 나직나직한 목소리를 내는 할머니와 정담을 나누는 중에 어언 훈훈한 온기가 마음으로 배어든다. 청마리를 나와 강을 건너 다시 하금리를 거쳐 강길을 따를 때 길가에 박힌 조그맣고 소탈한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비문을 살펴보니 마을 이장의 공적을 기린 기념물이다. 마을 진입로 공사를 위해 헌신했다는 내용이다.
군수니 면장이니를 추념하는 의례적인 송덕비와 달리 그것은 신선한 느낌을 자아냈다. 벼슬에 대한 허례적인 칭송이 아니라, 마을의 진정한 일꾼을 기억하고자 한 주민들의 자발적인 추모의 마음이 전해져왔으므로. 기념비 건립도 그 동기의 순수성이 살아있는 경우라면 필시 미풍 양속에 속할 테다. 쇠보두, 평촌, 옥박골을 지나 안남면 연주리의 독락정(獨樂亭)에 이르렀다. 독락정은 1607년(선조 40년)에 초창된 건물로 이후 수차례 복원을 거듭한 강변 정자다. 독락정 아래로는 세차게 몸을 뒤틀며 휘어지는 금강이 내려다보이고, 뒤로는 층암절벽 바위산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그 자리에 반드시 누각이 들어설 법한 그런 절경의 강가 언덕에 위치한 정자다.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좀체 끊이질 않았다는. 겨울 강은 스산하다. 강물 가장자리는 얼음장에 뒤덮여 있고, 그 위로는 눈이 켜켜이 쌓여있다. 유속이 빠른 강 중앙 쪽에서만 푸른 물줄기가 내닫고 있다. 독락정 건너편은 그야말로 육지 속의 섬이다. 배가 아니고서는 갈 수도, 올 수도 없게 생겨 있으니까. 거기에 갈마골이라는 사람의 마을이 있다. 달랑 두 가구가 살아간다는, 옥천군 최고의 오지 마을이다. 그곳 주민들은 이 혹독한 겨울을 어떻게 지내는 것일까. 갈마골을 둘러보기 위해 두어 시간을 나루터 근방에서 서성거렸으나 결국 실패했다. 배는 강 건너편 나루에 묶여 있었고 사공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아늑한 구국 충절의 묘역 중봉 조헌(趙憲, 1544∼1592)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우국 충절이다. 그는 옥천과 홍성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를 수복한 뒤, 의병 7백 명과 함께 금산싸움에서 끝까지 용전하다 전사했다. 이 중봉의 묘소가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되재마을에 있다.
금강으로 흘러드는 안남천 물길의 발원지인 되새마을은 눈에 뒤덮여 온통 은세계였다. 그곳의 포근하고 아늑한 산마루에 중봉의 묘소와 사당이 있다. 우암 송시열이 당대의 술사를 동원해 터를 잡은 뒤 중봉의 유해를 이장했다는 고사가 전해지는데 과연 문외한이 보기에도 탁발한 명당으로 여겨진다. 굳세고 짙푸른 노송들이 하늘을 가린 중에 세찬 바람이 쌩쌩 불어 눈보라를 회오리처럼 일으켜 세우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봄날의 뒷동산처럼 따사롭고 안온했다. 이름 없는 민초들과 한 몸이 되어 최후까지 분전하다 산화한 구국 영웅의 유택을 모시어 마땅한 더할 나위 없는 길지가 아닌가 싶다. 옥천의 금강을 순례하는 여정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강을 따르는 길들은 도처에서 끊겼고, 그나마 어렴풋이 남은 옛길들도 눈 속에 파묻히거나 진흙탕을 이루어 낭패를 겪었다. 장계리의 욱계와 주막마을을 훑어드는 길목에서는 차가 수렁 같은 진창에 빠져 곤욕을 치러야했다. 반드시 답사하리라 작정했던 안남면의 강변마을 오대리는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강이 완전히 꽁꽁 얼어붙어 나룻배는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고, 강 위를 걸어서 건너자니 1킬로미터쯤에 이르는 엄청난 강폭이 부담스러웠다. 강의 중앙부는 아무래도 살얼음이 얼어있을 것 같았으니까. 20여 호가 살아간다는 오대리에 별안간 중환자가 발생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생각하자 마음이 심란했다. 한파와 폭설의 훼방으로 말미암아, 아니 한겨울의 사나운 기상 조건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옥천의 금강 답사는 결국 미완의 행로에 그치고 말았다. <글·박원식 사진·서준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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