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는 부처를 열심히 숭배하는 분이셨고 나의 아버지는 유교를 믿으셨다. 이런 부모님 에게서 태어난 나는 자연스레 제사와 불교 행사에 어머니를 따라 다녔었다.
나는 초등학교 다니기 전에 한글을 익혔는데, 어머니는 그런 나에게 밤에 주무시기전에 '천수경'이라고 하는 불교의 염불 같은것을 읽어 달라고 하셔서 내가 읽어 드리면 어머니는 매우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서문시장에서 음식을 만드셔서 파는 장사(노상식당)를 하셨다. 나의 집은 대구 대명동에 있었으며 나는 남산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봄의 어느 일요일 어머니에게서 다녀오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나는 곳으로가서 문을 조금 열고 겨우 얼굴만 들이밀고 안을 들여다 보는데 우리반 친구가 마침 나를 보더니 들어 오라고 손짓했다. 그래도 내가 그냥 서 있으니까 친구는 "들어와. 여기는 교회야. 노래도 가르쳐주고 무용도 가르쳐 주고 재미있어."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주춤하며 어물쩡 들어갔다. 그 곳은 서현 교회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교회란 곳을 를 처음 다니게 되었고. 주일 학교를 열심히 갔다. 성경암송도, 공과 공부도 열심히 하고 여름 하기 학교 때는 동화대회, 연극 등에도 출연하여 상도 받고 정말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우상숭배'는 죄라고 주일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고, 하나님이 미워하신다고 하셔서 어머니를 따라서 절에도 가지 않고, '천수경'읽어 드리는 일도 하지 않았다. 2000년이 되면 이 세상이 불바다가 된다는 말씀도 주일학교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는 어머니에게 교회가지 말라는 제재를 받았지만 살고 있던 집 뒷쪽은 담장이 낮아서 그곳으로 몰래 숨어서 담장을 타 넘고 다녔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나의 어머니는 글을 모르신다.
때문에 사월 초파일에 불교의 연등에 식구들 이름을 써서 붙여야 하는데, 그 이름을 써달라고 하셔서 써서 드릴때는 나의 이름은 빼 버렸다. 그 글을 받아드신 어머니는 이름 수를 세어보니 하나가 빠졌으니, "왜 한사람이 없어?" 하셨는데, 내가 대답한다는 말이 "난 어차피 출가 외인이라서 빼 버렸어." 하는 순간 "아니! 쪼그만게 예배당에 다니더니, 못된 짓만 배우고 . 예배당엔 이제 못간다!!." 하시며 금지령이 내려져서 교회에 다니기가 어렵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천주교회에도 조금 다니다가 성결교회도 조금 다니다가 최헌 이라고 하는 목사님 말씀이 좋아서 떠나기 싫었지만, 어머니의 간절히 오라고 하시는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고 왔다. 그때 어머니는 '심인당'이란 곳을 다니고 계시면서 나에게 결혼이란 팻말을 들고 계셨다. 나는 그냥 거절하면 안될것 같아서 마음에도 없는 맞선이란것을 봤다. 약 20대 초반때이다. 역시 상대는 호감을 느낄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맞선을 봤던 시간들이 지나고 나니까 나에게 심인당에 다니기를 원하셨다. 심인당 교주도 나에게 포교 활동을 하고자 권유했다. 난 말했다."예수 이름 외에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행 4:12" 라고 했더니, 교주 왈 "그런 믿음이면 심인당에서도 복 받을수 있습니다" 하셨다 그렇지만, "구원도 없는데 무슨 복을..." 하며 거절했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매일 아프다고 야단 이시더니, 점쟁이를 찿아 갔다. 점쟁이의 말이 어린 동자가 엄마를 찾는 다는 것이었다. 어린 동자란 4살때 저세상으로 가버린 어머니가 꿈에서도 그리워하는 단하나 뿐인 아들이다. 마음약한 우리 어머니는 점쟁이 말을 듣고 '신내림 굿'이란걸 한다고 팔공산으로 가셨다가 삼일만에 오셨다. 나는 그동안에 소지품들을 조금씩 챙겨서 교회 2층에 가져다 놓았다. 달서 제일교회 였지 싶다. 성함이 이인재 라는 목사님 이시고 연세가 많으셨다.
어머니는 신당에 절하라고 매일같이 강요를 하시더니, 7일째 되던날 급기야 참나무 빗자루 세례를 나에게 마구 퍼부으시고도, 분이 안 풀리시는지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흔드셨다. 그럴때 어머니는 얼마나 엄청난 고함소리를 내시는지 머리끝이 다 섰을 정도이다. 나의 온몸은 멍들었고 내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견디다 못한 나는 절 하겟다고 했지만 그 소리도 들리지 않는듯 어머니는여전하신데, 그때 건장한 청년 3명이 달려와서 나와 어머니를 떼어 놓앗다. 나는 머리카락만 겨우 뒤로 넘기고 밖으로 나와 "에잇! 마귀야 물러가라!!" 하고는 대문을 박차고 36계 줄행랑하여 교회로 달렸다. 마침 뛰어가니 교회문이 열려있었다. 문을 잠그고는 전도사님께 "아무도 문열어 주지 마세요" 라고 말씀드리고는 숨을 가쁘게 몰아 쉬었다. 조금 후 초인종 소리가 났다. 초인종은 한번만 울려댓다. 잠시뒤 전도사님께서 나가셔서 대문내다 보고 확인을 해보니 어떤 여인이 골목 밖으로 나가더라고 하셨다. 전도사님댁에서 밥을 얻어먹고 잠은 교회의 2층에서 자는데, 모기들도 때 맞춰 기승을 부렸다. 자고 일어나면 온통 모기에 물린 자국들.
그 와중이었지만, 집에 남겨진 동생들은 아직 어린지라, 몇일뒤 집으로 가보니 빨래는 그냥 모아져있고 동생들은 씻지도 못해 땟구정물 투성이었다. 집안 청소와 빨래를 하고 동생들도 깨끗이 씻겨 놓고, 저녁을 해서 모두다 먹는데, 나는 마당에서 어머니 눈치만 살폈다. 어머니는 막내동생을 재운다고 안고 누워 계셨는데 갑자기 "네이년!" 하는 호통과동시에 나는 또다시 줄행랑을 쳣고 역시 뒤를 어머니가 따라오셨지만 잡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젠 집으로는 다시 돌아갈수는 불가능이었고 해서, 동촌근처의 보육원이란곳에 취업을 했다 .이때도 20대 초반이었다. 교회는 동촌에 있는 제일 교회를 다녔다. 그러던중 크리스마스가 돌아왔고 성가대 대원이었던 나는 교회에서 새벽송 준비를 하는중에 있었는데 자정 12시가 넘은 시간에 성가대원들이 웅성거리며 어떤 방으로 들어들 가길래 따라 가 봤는데 온갖 유행가를 부르며 히히낙락 노는 것이었다. 난 그만 놀라서 그 자리를 나와 버렸다.
성가대도 이젠 싫어졌고, 교회도 싫어졌지만 그냥 무의미 하게 왔다갔다 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천주교회를 믿으면 '고해성사'라고 하는 의식을 해야하는데 이는 신부에게 나의죄를 고해야한다는것이다. 천주교리 공부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곧 영세를 받아야 할것인데,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봐도 사람에게 죄를 고한다는것이 마음에서 받아들여지지가않았다. 그래서 천주교리는 배우고만 끝내버렸다. 그당시 천주 교회의 미사드리는 의식은 경건해 보여서 보기에 좋아했는데도 말이다.
여고시절때는 수녀가 좋아보여서 수녀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한적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생각들을 접어버렸다. 죄라는 것이 적거나 크거나 마음속에 있었거나 행동으로 나타났거나, 어떠한 형태든지 부끄러움 그 자체인데 그것을 어떻게 사람앞에서 발표를 할수가 있을까? 도저히 할수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나에게서 또 다른 문제는 2000년대가 도래하면 이세상이 불바다가 된다는데, 그때에 내가 살아 있을까, 죽고 난 뒤일까, 하고 짚어보니 내가 약 48세 정도로 계산이 되었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어려운 시절 다 보내고 조금 살만 할 때에 타 죽겠구나.. 그러면 어떡하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묘책은 안 떠올랐다. 에잇!할수없지 너도나도 다- 죽을 텐데 어쩔수 없으니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사람죽는 모양을 보다가 나도 죽으면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은 했지만 개운치는 않았다.
나는 가을에 피는 들국화를 좋아했다. 아무도 들국화가 피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꽃이 핀것을 기뻐해 주는이도 없는데 저혼자 몰래 피었다가 소리없이 사라지는 모양새가 나의 운명과 너무나 닮아서이다. 내가 이세상에 왜 태어났을까? 하고싶은것도 참 많았고, 꿈도 많았지만, 꿈은 꿈일 뿐이었다. 내가 살기위해서 사나? 먹기 위해서 사나?... 하고 어느날 그래프를 만들어보니 나이가 들수록 내게는 짐만 지워졌다. 그리고 그 짐을 내려놓고 쉴 시간도 없이 "죽음"이라는 함정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다.
이때부터 이세상의 모든것이 재미가 없었다. 희망은 더더욱 없었다. 더이상의 고생을 하지 말고 자살을 해버릴까하는 생각으로까지 갔다. 그러나 내가 지금껏 들어온 성경말씀은 죽음뒤엔 분명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통신 대학" 학교도 공부했다. 그러나 아직 나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천국에 갈 자신은 없으니까 내가 죽으면 지옥에 갈 것 아닌가? 어쩔수없이 밤에 목사님을 찿아가서 "목사님!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까?" 질문을 했더니, 대답하시기를 "글세요..." 하시는게 아닌가!! 나는 너무나 실망을 해버렸다.
그때 나에게 성경 말씀을 들어 보라고 권유하는 여고생이 있었다 그때가 당시 22살 정도이다. 이때는 광주에서 오빠가 하시는 사업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그 사무실에 나오는 학생이엇다. 무슨 교회냐고 물어봤더니, 'FBS 극동 방송국 광주 선교회' 라고 했다 나는 망설였다. 잘못 발을 들여놧다가는 이상한 교회(이단)에 걸릴까봐 급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나의 부친께서는 돌아가셨다. 남의 옆에만 있었던 죽음이란것이 내 옆으로 와 버린 것이다...
그 여고생은 아직도 한번 성경말씀을 들어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나는 듣는데 세금내는것도 아닐것이니 한번 들어보기로 했다.
5월의 어느 비오는 날이었다 설교의 내용은 요한 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는데 매우 성경적이었고, 이단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이미 그당시엔 내가 다니고있었던 교회는 가고 싶지 않았으므로, 이곳에서 말씀을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의 설교자는 원고 없이 성경책만을 보시며 설교하셨다. 설교 내용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왜 세상을 창조하셨는가? 사람은 왜 창조하셨는가?... 사람은 왜 죄를 짓는가? 이미 흘러간 역사와 현재의 역사와 미래의 역사와 성경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을 왜 선택하셨으며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가? 예수님은 왜 이세상에 오셨으며 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셔야 했는가?.. 나는 왜 태어났으며 나의 죽음 이후에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나와는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나?.. 하는 내용들이었다...
어떤 분이 내게 "구원을 받아야 된다" 고 말했다. 구원이 무엇이냐고 여쭤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지고 돌아가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말을 듣고 나는 "그런 사실은 오래전부터 나는 믿고있다고,, 아! 그럼 나도 구원받았구나".. 하면서 함께 동행하듯, 이곳에서 나는 여러가지 행사에 함께 동참을 하기 시작했다. 그간 성경지식도 쌓였으므로 말씀으로 즐겁게 교제도 나누었다
그러다가 그해 9월말쯤에 대구로 이사를 오게 되어, 대구모임에 다니면서 역시 같은 생활을 해나갔다. 얼마후 구정이란 명절이 왔다. 앞서 밝혔듯이 나의 어머니는 '무당'이 되셨으니 집에는 갈수도 없고해서 교회에서 명절을 보내게 되었는데, 고흥에 계시는 어떤분도 대구교회에서 명절을 보내야 한다고 오셨었다.
밤중에 잠자리에서 그분은 자신의 간증을 들려 주시고는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볼수록 가슴이 저려오는거 같다고 하셨다. 나는 생각했다. '구원은 똑 같은 것인데 왜 내 마음속엔 예수님의 사랑이 그렇게 절절하게 느껴져 오지 않는 것인지.. 구원이 아닌가?' 하고 나 스스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당시에 윤소정 씨라는 분의 간증서가 성서 주간지에 발표되었었는데, 그분은 "우리가 그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하는 엡 1:6절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셨다.
나는 생각했다. 구속 곧 죄사함이니까 구원 받았다는 말은 죄를 깨끗이 용서 받았다는 말인데, 나는 그런 사실이 없음!을 알았다!! 나는 간절히 기도 했다. 나에게도 구원의 확신을 주시기를..
일할때나 밥을 먹을때나 마음속으로도 간절히 기도하고 조용할땐 엎드려서 눈물로 간구하기도 했다. 매일 기도하고 구원에 대한 말씀을 암송해보고 읽어보고 생각해 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여러날을 그렇게 보낸 나는 너무나 지쳐서 모든것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기도도,, 나의 노력도,, 나의 눈물도 모두가 소용이 없었고 나는 지옥을 갈수밖에 없구나.. 그렇게 생각해 보니 내모양이 왜그렇게도 한심한지 울고 또울었다.
'에잇! 이제 어차피 지옥을 갈테니 선하게 살것도 없고 교회도 다닐 필요도 없어.! 이왕에 지옥갈 인생이니 아무렇게나 살아야지. 재미있게 살아야지'.. 하고 맘을 포기 햇는데도 너무나 억울해서 성경을 집어서 던져 버리기도 하였다. 내가 이제껏 해온 일들 모든것들이 헛된 것 이었으니까. 밤에 혼자서 울다가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 날은 밝았어도 내 맘은 어두웠다. 아침식사를 한 숟갈 떠 넣었는데 모래알이 되어서 씹히지도 않는다. 점심식사때는 내가 좋아하는 감자튀김이 나왔었는데도 먹어보니 얼마나 딱딱한지 꼭 바윗덩이 같았다. 그만 수저를 놓아버리고는,
이불 홑총을 꿰매서 정리하려고 일하러 갔다. 이불의 네 깃을 맞추고 바늘에 실을 꿰어서 한뜸.. 두뜸쯤.. 꿰매었을때! 십자가 가 생각이 나면서 내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전혀 힘을쓰지못하고 사라져 버린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의 눈을 밝히시고 내 영혼에 예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신 것이었다.
이제는 나도 기쁘게 찬송부른다 기쁜날~ 기쁜날~ 주 나의 죄 다 씻은날~..209장. 머리털 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 눈보다 더 희어 졌네208장. 내 죄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뒤 나의 모든것다아 변했네 210장. 속죄함 속죄함 주예수 내죄를 속했네 189장.
그때 나의 나이 23세 1974년 1월 26일 오후 2시경 에 나는 이렇게 하나님께로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 1:13 |
첫댓글 너무나 구구절절 합니다.이런 글들을 쏟아낼수 있는 이 "참되고.."의 까페가 새삼 소중하게 생각이 듭니다. 대구모임 구역회에서 귀하게 알게된 자매인데요 지금은 하반신이 아주 불편하셔서 옆에서 같이 걸어가야할때는 "느림의 미학"이란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는 자매이십니다^^. 너무나 이야기가 많으실거 같으신 이 자매분한테 간증을 좀 적어달라고 부탁을 했었죠.길면 길수록에 좋다고 말입니다..일주일만에 적어서 교회에서 건네주시던 그 이쁘신 모습이 지금순간도 인상적이었습니다..어머니가 20년 동안 무당 이셨다는 소리에 저는 너무나 놀람을 금할수없어서 간증을 부탁드렸었고..
구구절절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네여
그 무당이시던 어머니도 구원을 받으셨다네요.. 얼마나 귀감이 되고 저를 채찍질 하는듯한 반성이 마음에서 흐르는 눈물로 각인을 시켜주시는듯 한없는 용기를 주시더군요.. 지금은 몸이 많이 불편하셔서 까페에 들어오셔서 직접 쓸 형편이 안돼시어서 제가 감히 대신 적어 올렸읍니다..안타깝게도 집에서도 아직 인터넷이 없으셔서 저의 이야기로 인터넷에 이런 까페가 있다는것도 새로이 아시더군요..그나마 상반신은 자유자재시니 기회만 된다면 이까페가 이 자매님의 시공간을 묶어주는 교제의 장이 될수있을텐데,, 하며 못내 아쉬움을 금할수 없었읍니다 ...
눈으로라도 읽게 해드려야겠어여 안타깝네여
있죠.. "천수경"이란것은.. 불교의 경전중의 하나라고 하는데요,수리수리 마수리..~ 가 염불의 시작이라고 하시더군요 ㅎㅎ 수리수리마수리..어릴적 만화에서나 들어본 말같았습니다..댓글좀 많이 달아 주십시요..자매님께 전해주기로 약속했거든요..너무 좋아하실거 같아서요 ^^
데스크 탑이라도 마련해드려야겠네여 정신으론 충분히 우리 카페를 즐기셔야하니까요 요새 탑은 싸던데
울 카페에서 모금 운동이라도 해야하는 지 자매님 사정좀 자세히 알려 주셔요 '개인 적인 생각이네여 무당 까지 되신 어머님 밑에서 얼마나 어려웠는지 정말 실감나네여
선배님! 너무나 고마우신 말씀을..말씀만으로라도 너무나 자매분이 고마워하실거 같아요.. 그리고 무당이셨던 어머니께서는 아직 살아있으시고 연세가 78세시고 대구 교회에 나오신답니다.. 추후..어머님의 간증도 부탁해 놓은 상태입니다..
흥미 진진 하게 읽고 갑니다. 하나님 감사 합니다. 오래토록 건강 하시길 빕니다.
흥미진진하단 말씀을 전해드리면 분명히 재미있어하시며 호호 웃으실거 같아요^^
정말 감동 했어요.저도 어렸을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죠 그후 죽음에 대해 생각 하다 복음과 연결 된후 구원 받았슴니다.
님의 간증을 언제함 꼭 듣고 싶네요..올리셨나 벌써..?^^ (찿아봐야지..)
그리고 김화목 자매님의 귀한 친필의 구원간증 원본은 제가 선물로 받았답니다 ^^* 너무나 귀하게 보관해야겟습니다..육신이 올라올때 힘을 받을수있는 채찍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안성에는 언제 오시는지....화목님 보듯 이 만날수 있을런지
우리 주님 감사 합니다 !. " 나를 간절히 찾는자 가 나를 만날것이라 "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 이귀한 간증 많은 사람들이 보고 우리 주님 간절히 찾아 구원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자매님의 간증을 읽노라면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정말 찾을려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든지 주시는군요.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눅11:9) 자매님의 남은 생애동안 영과 육이 모두 건강하시길 빌겠어요.
프리지아님도 긴 글을 두드리느라 수고하셨네요~
^___^:: 감사해요 아찌님~ 길면길수록 좋다곤 말씀드렸지만 ㅋ 생각보다 정말 길-어서 오후하루 내내 보내긴 했어요.귀한 시간이 되었었지요^^
김화목님 정말로 세상의 역경을 다 겪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화목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네요. 정말로 주님과 연결되는 그 길이 너무나 우연같으면서도 하나님의 인도의 손길이 지금 보면 정말로 보이는 듯 합니다. 나의 주 하나님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구원얻고 뒤 돌아보니..주께서 날 당신께 꼭오도록 해 놓으셨더군요..주님 감사합니다..김 자매님 간증 보고 전날의 제 모습보는것 같았어요..고맙습니다.
어머니께서도 구원을 받으셨다니...우리의 앞날은 지나고 돌아보면 모두 기적 입니다....주님 감사 합니다...
구원간증읽을 때마다 감동이에요 ㅠㅠ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
귀한 간증 감사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쭉 자라온 마음 상태 또 주님을 찾은 것이 결국엔 주님을 만나셨군요 구구절절한 사연 감동있게 잘봤읍니다 감사하구요 건강하세요.
추적~추적!.. 바깥에는 가을비가 추적거리고.. 회사에서 당직을 서며 이 글을 읽고 있는 순간.. 가을비의 빗방울처럼 제 눈에도 눈망울이 서립니다. 하나님을 찾아 가는 자매님의 인생역전이 제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어떤 과정으로 몸까지 불편하게 되셨는지 모르겠지만 교제속에서 주님만을 보며 힘내어 살아가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프리지아님께도 감사^^
소중한 간증입니다. ^^
남의일 같지 않아서 가슴을 한참 추스렸읍니다. 모친이 생존해 계신다니 반갑습니다.직접 대면 하여 간증을 들어보았으면하는 바램 간절 합니다.혹 비슷한 처지의 사람에게 전도가가능할수 있지 않을까요 서로 합심하면.... 화목씨,건강하세요 만나뵙길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