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박종삼 중대였다!
서울 성북구 길음2동 / 한헌준
내가 그분의 소식을 알게 된 것은 지난 5월 23일이었다.
평상시에도 가끔 그분의 근황이 궁금하였지만 생각만하다가, 그날은 직접 인터넷검색을 하였다.
올 초에 위암수술을 받은 나는 심신이 조금 약해진 탓인지 자주 과거를 회상하게 되었고, 더 이상 옛 추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던 중대장님에 대한 궁금함을 미루지 않기로 한 것이다.
내가 전역한지 24년만의 일이다.
검색창에 ‘박종삼 장군’ ‘박종삼 사단장’ ‘장성 박종삼’ 을 검색하였다.
지금쯤이면 그분은 당연히 장성이 되셨으리라 믿고 검색하였지만, 검색 되지 않았고 ‘육사 박종삼’ 으로 검색하였을 때 ‘고 박종삼 중령’ 이란 글이 눈에 띄었다. 동명이인인가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읽어본 그 글 중에 오량초등학교 ‘박종삼 장학회’ 란 단서를 찾게 되고, ‘오량19기 친구들’이란 동창 까페에서 그분의 사진을 확인한 순간 내 마음은 철렁하였다.
우려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고, 내 젊은 날의 우상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즉시 까페에 가입하여 읽어본 그분의 죽음에 대한 지인들의 절절한 애통함과 그리워하는 사연에 가슴이 먹먹하여지고 눈물이 나왔다.
2010년 10월, 전역 2년여를 남기고 사고로 인해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너무 가슴이 아팠고, 육사시절의 모임으로 인해 진급의 길이 막힘으로 좌절하셨을 그분을 생각하며 많이 안타까웠다.
내가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86년 9월 자대배치 후 중대전입신고에서였다.
내가 사단훈련소를 퇴소하여 배치 받은 곳은 연천에 있는 26사단 75연대 2대대 7중대였다. 불무리부대 독수리연대 불도저 대대, ‘국표중대’라고도 불렸다.
대대본부에서 잠시 대기 중, 본부중대 취사병이 7중대로 배속 받은 우리3명의 신병을 보며, “너희도 참 군 생활 꼬였다.” 하며 건빵을 더 주던 기억이 난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다.
중대 전입신고 후 중대장이신 박종삼 대위님은 신병들에게 각자의 장기를 물어보셨고, 아무 특기가 없던 나의 “예! 이병 한헌준! 청소를 잘합니다!” 란 대답에 웃으시며 격려를 해주시던 기억이 난다.
박종삼 중대장님은 육사38기 출신이셨다. 군경험자들은 알 것이다.
육사출신 지휘관 밑에서 군 생활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그중 박종삼 중대장님은 더욱 특별하셨던 것 같다.
항상 강한 군기유지와 강한 군인정신을 요구하셨고, 또한 본인도 솔선수범하셨다. 조금의 요령과도 타협을 하지 않는 강직한 분이셨다.
우리 7중대에 2등은 없었다. 항상 대대 선봉이었으며 승리만이 있었고, 모든 것이 FM이어야했다. 그러기에 대대에서 가장 군기가 세기로 악명 높았고, 훈련강도 높기로 유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 생활 꼬였다’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박종삼중대장님이 항상 강조하신 말씀이 있다.
“일하고 욕먹는 행동을 하지마라!”
즉 한번 할 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또 확실히 해서 기껏 고생하고도 욕 먹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중대장님은 승부욕도 강하셨고 욕심도 많으셨다. 그 덕분에 우리중대는 사단과 또한 간혹 군단 급에서 하는 교육 및 훈련의 많은 시범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충정훈련시범(폭동진압훈련), 분대, 소대 전투시범, 군무(단체무용)시범, 진지보수작업 등.
그 밖의 크고 작은 여러 시범들을 보였고, 또 우리가 하는 것이 바로 교범이 되었다. 모든 것이 숙달되고 일사분란하게 될 때까지, 밤이 늦도록 차량라이트를 비춰가며 연습을 하였고 중대장님은 메가폰을 잡고 선두지휘를 하셨다.
시범을 보이시며 연병장을 울리던 그분의 군화소리와 피가 끓는 듯한 강하고 단호한 구령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대대체육대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에겐 2등은 용납되지 않았고 또 우리도 당연한 듯 항상 우승을 하였다.
부대전투력측정을 위한 사격연습 시 성적이 불량하자 중대원 전체에게 사격장에서 2km정도 떨어진 산 정상을 찍고 돌아오는 선착순을 시키신 적도 있다.
보병이었던 우리는 훈련 중 많이 걸었다. 그냥 걷기도 힘든 행군 중에도 중대장님은 우리에게 여러 상황들을 주어서 단순히 걷는 것에만 그치지 않게 하셨고, 화생방상황으로 방독면 구보도 여러 번 하였다.
중대장님은 우리에게 군인으로서의 강한 정신력과 체력을 요구하셨고, 그 순간순간들이 많이 힘들었지만 중대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강한군인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우리는 7중대보단 ‘박종삼중대’로 더 많이 불렸던 것 같다.
우리는 박종삼중대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있었다.
대대에서 우리중대는 가장 강한 중대였고, 우리는 박종삼 중대로써 두려울 것이 없었다.
박종삼 중대장님은 행군 시 중대의 앞과 뒤를 뛰어다니며 강인한 모습으로 부하들을 독려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발바닥은 물집으로 엉망이 되어 훈련 후 피범벅이 된 양말을 벗으며 많이 힘들어하셨다 한다. 물론 부하들에겐 전혀 비밀로 하여 나중에 전령(통신병)에게 듣기 전까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중대원들을 위해서는 타 중대장들과의 다툼도 마다하지 않으셨고 대대장실까지도 올라가 단판을 지으시는 믿음직한 지휘관이셨다.
또한 군인으로서의 자세를 벋어난 병사에게는 일벌백계의 징계를 내리는 엄한 지휘관이었지만, 중대장 재량으로 병사들을 푹 쉬게도 하실 줄 아는 자상한 지휘관이시기도 했다.
내가 병장 달고 분대장교육대를 갔다 오니, 중대장님은 소령으로 진급하셔서
연대 작전장교로 가셨다.
새로 오신 중대장님은 박종삼 중대장님과 성향이 많이 다른 분으로 중대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중대원들이 많이 편해지기는 했는데, 그 이후 각종 시합이나 경쟁에서 우승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대의 선봉이었던 박종삼 중대에서 그냥 그런 7중대가 된 것이다.
그 후 반년정도 후인가 대대체육대회를 하는데, 박종삼 당시 소령님이 참관 차 오셨다가 우리를 격려하기위해 우리 쪽으로 오셨다.
게임성적이 좋지 않아 풀이 죽어있던 중대원들은 박소령님 주위로 모였고,
누군가가 시작한 “박종삼!” 이란 외침에 모두가 “박종삼!” “박종삼!” 을 목청껏 외쳤다. 한동안 우리는 주먹을 흔들며 “박종삼!”을 연호하고, 중대가를 부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그분도 눈물을 보이셨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는데, 그때 그 감정은 참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항상 선봉이었고 항상 최고였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의 눈물이었고, 지금 그러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과 서러움의 눈물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의아해하던 박종삼 중대장님을 경험하지 못했던 신병들의 모습도 기억난다. ‘박종삼 중대’가 전설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때 카리스마란 무엇인지 확실히 느꼈고, 지휘관의 명령에, 죽음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에 뛰어들 수 있는 자신감도 얻었다.
박종삼 중대장님은 진정한 군인이셨고 모범이셨다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가 박종삼대위님과 함께 보낸 시기는 86년 9월부터 88년 2월까지로 2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었다. 사실 그분의 30여년 군 생활 중의 수많은 부대원 중 한명이었던 나, 그다지 존재감 없는 사병 중 하나였던 나를, 중대장님은 기억치는 못하셨을 것이다.
내가 어느덧 자식들을 군에 보내는 나이가 되고, 다른 지휘관들의 이름은 물론 동기들 이름마저 가물가물 하면서도 중대장님을 선명히 기억하는 것은, 그만큼 강도 높은 훈련과 정신적, 육체적 힘든 것을 겪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 추억이 되고 자부심이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박종삼님을 상관으로 모셨던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인터넷에서 고인의 자료를 검색하며 고인과 함께 근무했던 다른 부하들의 글들도 보게 되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몸을 아끼지 않는 솔선수범과 강인한 군인으로서의 박종삼님을 기억하고 있었고, 부하들을 따뜻하게 아끼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존경하는 고인을 떠나보냄에 대한 절절한 가슴 아픔을 말하고 있었다.
생전에 고인께서 모교후배들을 위해 꾸준히 장학금을 기부한 것을 기리기 위해 현재 고인의 초등학교동기들을 중심으로 ‘박종삼 장학회’가 만들어지고 운영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고인께서 생전에 어떠한 삶을 사셨는지를 증명해주는 것들이라 생각된다.
과거 나에게 군인이 되는 법을 가르쳐주셨던 중대장님께서 24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가르쳐주고 계신다.
아직도 나에겐 인생의 중대장님으로 남아 계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인께 인사드린다!
“제가 박종삼 중대의 중대원이었던 것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하늘에서도 이 조국 이 땅을 든든히 지켜주시옵소서!
중대장님! 당신은 저의 영원한 중대장이십니다!
공격!(26사단 경례구호)”
*현재 박종삼중령님께선 국립 대전 현충원 제3장교묘역에 잠들어계십니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저도 26사단 75연대 2대대 7중대 3소대에 1987년 11월~1990년 3월 까지 근무했습니다.
저도 전입하니 박 종삼 중대장님이 계시다가 다른분으로 바뀌었는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저는 75연대 2대대 작전서기병 으로 87년 말에 전역한 오헌권 입니다.
7중대장님... 그모습이 생생 한데 안타까운 소식에 숙연 해질 뿐입니다.
대대상황실에 오시면 항상 내 어깨를 쓰다듬어 주시고 가끔은 PX 에서 빵도 사주시곤 헸는데...
당직사령을 하신날엔 라면도 함께 나누어 주시던 그런 분이셨는데...
이제야 7중대장님을 찾은 제가 부끄럽기만 합니다. 죄송 합니다... 박종삼 님.
이곳에서 못다이루신 꿈 저 하늘에선 가장 빛나는 별이 되셨을거라 믿습니다.
운영자님 이런 기회를 제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당시 7중대 작전병 황영근 소식도 궁금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