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양반문화 금 창 영 1. 의미를 찾는 끊임없는 시도. 원래는 경상북도의 지역문화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습니다. 안동지역의 양반문화의 특수성은 경상북도의 문화와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것입니다. 능력이 있다면 성리학이나 서원에 관한 글이나 경상북도의 지역문화에 관한 글을 멋진 제목과 함께 써야겠지만 아직 그러기엔 자신도 없고, 시일도 촉박하네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변명같지만 잘읽히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생각에 여기저기 글을 짜깁기 해서 순서대로 나열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말하듯이 글을 써 나가는 것이 읽는 여러분들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동이라는 특정한 지역을 찬찬히 살피는 것도 경상북도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도 알 듯이 여러 지역의 답사 중에서 경북에 대해 느낌을 물어보면 다들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음식이 맛이 없다는 것에서부터 혹자는 ���제발 된장찌개 좀 그만 먹었으면 좋겠다���라고. 그렇다고 전남에서처럼 아늑한 산사를 만날 수 있는 곳도 아니고, 강원도처럼 자연을 느낄수도 없습니다. 경주가 있긴 합니다만 그곳은 워낙 넓어 따로 답사를 하니 경북은 이래저래 매력적인 답사코스일수 없는 듯 합니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 경북을 간다고 하면 지금도 웃음 짓곤 납니다. 제가 나서 자란곳이 소백산 근방이었고, 생각나면 배낭하나 들고 혼자서 오르던 산이 소백산입니다. 군대를 제대하고는 사진기 하나에 멘타룹트 삼발이를 배낭밖으로 길게 늘어뜨리고는 혼자 배경좋은 곳에 있다가 어디 혼자 산행온 여자분이 있으면 사진한장 찍어주고 커피도 얻어먹곤 했던 일부터 아직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이곳에 있으니 그 추억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요. 예전 권정생선생의 ?한팃재 하늘?이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걸 보고 그렇게 감동을 많이 받았으며 주변사람들을 다시 보게되고 결혼이란 것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설의 시대 배경이 이 지역의 1894년 농민전쟁과 의병이 일어났던 때라는 이야기를 듣고 사서 보았지요. 그런데 사실 전 그렇게 큰 감동을 받지는 못했지요. 왜냐하면 전 그 소설을 보면서 당시 역사적 사건들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무슨 만나는 남녀는 거의 모두 결혼을 하고 식구는 어찌 그리 많으며 사람 이름은 또한 어찌 그리 많은지, 또 사는건 왜 그리 찢어지게 가난한지. 이런 것들이 이해가 안되었답니다. 그후 그런 시도는 또 한번 있었습니다. 김원일선생이 쓴 ?사랑아 길을 묻는다?였습니다. 이 내용은 순흥의 한 양반이 사랑하는 여인네와 같이 도망하여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결국엔 고향에 돌아와 숨을 거두고, 그 여인은 눈이 멀고 만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물론 전 순흥과 소백산, 단양, 영월등의 지역과 조선시대의 시대상을 보기 위해 그 책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감동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참 아직은 제 생각이 어리다는 걸 느낍니다. 문학은 그저 영혼을 울리는 작품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해야 하는것을. 사실 사람들에게 제가 자란 영주를 이야기하면 상대편이 잠깐 당황해하는 눈빛을 자주 봅니다. 그러면 전 안동이나 풍기, 소백산, 부석사를 예로 들지요. 그러면 그제서야 저쪽에서 웃음을 짓는답니다. 사실 이러한 예들을 통해 그려지는 모습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영주가 가진 정체성이겠지요. 봉화, 안동, 영주, 순흥등지는 모두 안동문화권에 속합니다. 그것에 대한 이해는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잘 다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자란 저로서는 그 책의 내용이 썩 잘 표현되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영국의 여왕이 우리나라의 전통을 느끼기 위해 다녀간 곳이고 아직도 갓쓴 어른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니 전통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을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안동입니다. 그러나 저는 안동의 양반문화라는 것이 오히려 안동이란 지역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질곡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의도된 것이고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글을 통해 안동이 무엇 때문에 전통과 양반문화를 강조하는 곳이 되었는지를 확인해보고 그와 더불어 안동이 전통의 고장이라는 것이 이 지역사람들이 의도하였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오히려 지역의 정체성을 찾아가는데 걸림돌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2. 전통이란 무엇인가? 전통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가고 전통도 인간이 만듭니다. 우리는 흔히 ���현대 사회에서 창조적으로 계승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습과 달리……���라는 말로 전통이란 말에 대해 설명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습과 전통의 구분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그 근거는 언제나 정당한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한정적 의미로 본다면 전통이란 창조적 계승이 가능한 긍정적이고 역동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것만을 우리가 전통이라 할 것인가? 우리가 지금 전통이라고 하는 것들은 과연 언제부터 그렇게 취급하였을까?��� 라는 질문에 이르면 우리는 좀더 넓은 의미의 전통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됩니다. 요즘들어서는 이렇게 넓은 의미의 전통이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가족제도, 사회인식, 풍수, 음양오행, 추석, 설, 불교문화등등. 그렇다면 변화에서 발전을 가져오고 발전을 진보라고 하듯이 과거는 모두 전통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요?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언젠가 주간지에 난 기사인데 안동대에는 임세권 교수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 안동사람은 아니었는데 서른을 전후해서 이곳에 발령을 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나름데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안동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했지요. 그렇게 20년이 넘었지만 그는 아직 주변사람들로부터 안동사람이라는 평가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안동사람이 되려면 300년은 걸린다는 이야기를 말도 함께 합니다. 전통에 관한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조금 어려워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테두리안에 다른 부분이 개입해 들어오는 것을 본능적으로 막는 것이 전통을 지키는 가장 올바른 방법일까요? 이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지만 저는 아직 ���우리에게 전통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시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우리의 틀거리로 전통과 인습을 구분하는 행위는 올라르지 못하다는 생각과 함께 잊혀져가고 있는 유?무형의 문화들을 찾아내고 오늘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들이 바로 전통을 올바로 계승하는 행위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배질서의 안정적 유지에 유용했던 유교의 전통만이 우리전통의 모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약자의 편에서, 이 세상 모든 이가 하늘처럼 고귀하고 평등하다는 엄청난 이야기를 설파하고 이를 실현하려 했던 동학 같은 것도 전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철저한 지배자 중심, 성인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약자인 어린아이와 여자, 농민들도 대등한 인간임을 깨우쳐준 놀라운 사상입니다. 여러분은 삼천리 방방곡곡. 이 문화유산 천지라는 나라에서 전통을 느껴본 적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리고 이 어려운 시기 우리에게 전통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지금 주변에서는 우리가 이루어야 할 과제를 근대화, 세계화, 세계 일류가 되어 각자가 신지식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빨리 IMF를 극복하고 예전의 영화(?)를 다시 찾자는 것입니다. 경쟁사회. 정복할 것인가 정복 당할것인가로 이야기되는 현대사회. 하지만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모든 것의 우선일까요? 하지만 여기에 나타나는 폐해는 정말 수도 없이 많습니다. 6?70년대 근대화란 명제 속에 묻혀버린 민주주의. 개발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의 폐해들. 이곳 안동만 하더라도 안동댐. 임하댐. 중앙고속도로의 건설로 파괴된 우리의 전통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신도시 일산에는 5년만에 30만이라는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고 우리는 느끼지 못하지만 전세계적으로도 대단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신도시 개발과정에서 12명이 자살한 사실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안동의 양반문화를 통해서 우리의 전통문화의 구체적인 모습을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3. 전통의 고장 안동 1) 영남답사 일번지 안동문화권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흔히 안동, 예천, 영주, 봉화, 영양, 청송 일대를 안동문화권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양반들은 15~16세기 처향을 따라 이주한 가문의 후손이며, 정치?사상사적으로는 퇴계학맥을 잇는 남인으로 분류됩니다. 안동 문화권의 세력권은 17세기 이후 하회의 풍산유씨를 중심으로 하는 병론과 천전의 의성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호론으로 양분됩니다. 근대로의 이행에서 양반이 일정정도 역할을 한 대표적인 지역이기도 합니다. 만주항일투쟁, 사회주의 운동, 일제시기 교육사업을 양반들이 주도하였습니다. 안동문화권을 통해 연상되는 것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반촌, 퇴색한 고가와 재실, 운치 있는 누정, 늠름한 서원, 조선시대 한 정경을 연상케하는 양반문화의 보고, 전탑을 비롯한 불교문화, 最古를 자랑하는 목조건물들, 하회탈춤, 차전놀이, 놋다리 밟기등의 민속놀이. 때맞추어 지내는 향사(享祀)와 내력 있는 종갓집에서 치러지는 불천위(不遷位)제사.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지속적인 엄숙성, 전통의 저력, 공동체적인 삶의 힘이라고 표현합니다. ○ 1000원짜리 지폐의 이황을 한번 봅시다. 어떤 이들은 이 지폐를 이상하게 접어서 이황이 웃다가 다시 우는 모습으로 만들어 재미있어 하곤 합니다만 세필로 그려진 이황의 모습을 보면 쉽사리 범접하지 못하는 묘한 기운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황의 생활이 비쳐지고 있습니다. 이황은 건강을 위해 아침에 변소에 가 있을 적에 이를 마주치는 일을 하였답니다. 아래윗니를 힘껏 부딪쳐서 턱에 힘을 주는 일을 적어도 50번 이상씩 반복했던 것입니다. 예전에는 틀니도 없었고 치과전문의도 없었으니 노인에겐 치아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또 하나는 투호를 하는 것입니다. 그 자신이 투호를 하기도 했지만 이를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시켰다 합니다. 토호는 온몸의 균형을 잡고 정신을 집중하여 거리를 측정해야 그 적중률이 높은 것입니다. 그러니 투호는 그저 놀이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 유성룡, 유운룡형제의 맹자에 관한 이야기는 필요로 하는 곳에 쓰일 수 있도록 준비하는 양반의 모습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유성룡은 기억합니다만 유운룡은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회 유씨들에게 있어서 유운룡은 목민관으로 선정을 많이 행한 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성룡이 관직에 나가기전 청량산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의 형 유운룡이 어느날 유성룡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너가 관직에 나가 올바른 정치를 하려면 ?맹자?를 삼천번을 읽어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너의 갓끈을 타고 식은땀이 흐를 일이 있을 것이다.��� 요즘은 형제끼리 많이 싸우고 나쁜 짓도 형제가 같이 합니다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유성룡은 형의 말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맹자?를 열심히 읽었지요. 그런데 삼천번이 아니라 천번이 넘으니 이제 어느정도 ?맹자?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신이 생겼지요. 그래서 ?맹자?는 그 정도 하고 이제 다른 공부를 하였답니다. 그후 유성룡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임진왜란 당시에는 정승의 벼슬로 중요한 역할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성룡이 명나라에 청병을 하러 갔을때의 일입니다. 그가 명나라 황제 앞에서 청병을 하는 과정에서 정말 갓끈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유성룡은 그의 형 유운룡의 말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여부를 떠나 당시 양반들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이외에도 유성룡은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을 불가하다고 했으면서도 정읍현감의 낮은 벼슬아치인 이순신을 일약 전라좌수사로 삼아 바다를 맡게 했고, 형조정랑인 권율을 의주목사로 삼아 유지의 방비를 맡게 했으며, 이순신이 어명을 어기고 출병하지 않았다고 조정에서 죄를 논란할 적에는 동료인 정탁을 통해 변명을 하게 하였습니다. 2) 안동양반은 누구인가? 그러한 안동의 양반은 어떤 이들일까요? 1. 입향조는 대개 세조찬탈 또는 무오갑자사화때 수절(守節)하여 낙향한 이들. 2. 문중의 중흥조는 본인이나 그 자제가 문과에 올라 가문을 빛낸 이들. 3. 문중에 퇴계의 문하생으로 석학이 된 이들. 4. 임진?병자 양란때 의병을 일으킨 이가 있는 점 등 네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안동의 양반들은 벼슬보다는 학문과 인격의 완성이 더 중요하다는 학자적 긍지. 선비의 곧은 도덕률로 양반의 체통을 지켜왔습니다. 이것이 개화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안동양반들이 세상에 대고 큰소리 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일제시대에 항일의병과 애국계몽운동, 독립운동을 적극 벌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이 양반문화의 자랑이자 자부심인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몸바쳐 나라를 도운 삶에게 물질적 보상보다 더 크게 돌아가는 것이 자긍(自肯)이며, 그런 긍지에서 안동양반들은 지금도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양반의 삶을 흔히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으로 그 특징을 요약하기도 합니다. 제사를 받드는 그 정성이 거대한 종택을 유지케하고 손님을 기꺼이 맞는 전통이 집안을 항상 개방하는 너그러움을 발전했던 것입니다. 3) 안동의 근?현대사 ○ 1894년 농민전쟁 1862년 삼정의 문란으로 일어난 농민항쟁에서 경상도 지역은 선산, 성주, 군위, 상주, 경주, 비안, 인동, 개령등지에서 봉기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러한 항쟁은 이후 동학 운동과 결합하여 이필제난에서는 영해, 영양, 영주, 예천, 문경지방까지 번져 봉기의 기세를 높였습니다. 원래 경상도 북서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동학조직은 크게 5개포가 있었습니다. 상주?함창 일대에서 큰 세력을 가졌던 忠慶包와 尙功包, 관동지역과 예천?안동?풍기?충주?평창 일대에서 활동하던 關東包, 김산과 지례?영동?옥천등지에서 활동하던 永同包, 선산 일대를 관할하던 善山包가 그것입니다. 예천의 동학조직은 1860년에서 1880년에 걸쳐 사교로서 탄압을 받으면서도 단단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1894년 봄 농민군의 급격한 세력팽창은 이러한 기반위에서 이루어 질 수 있었습니다. 이 기간동안 예천에서 동학교세를 은밀히 확대해 온 근거지는 소백산줄기와 인접한 서북외지 동로면 소야리였습니다. 소야에는 예천 일대의 농민군 지도자로 활약하게 되는 최맹순이 수년동안 옹기상으로 가장하여 각지의 동학교도들과 연결망을 형성해 놓고 있었습니다. 최맹순은 1894년 3월 소야에서 접조직을 설치하고 농민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해 여름이 되면 그 숫자가 7만에 48접소를 설치하게 됩니다. 이러한 조직은 예천 뿐만 아니라 경상도 서북부지역 거의 모든 곳의 농민군세력이 관과 보수지배층을 압도할 정도였습니다. 이 지역의 농민군 세력은 읍내 중심의 보수 지배층을 압도하고 있었지만, 호남과는 달리 왕조정부의 지방통치질서를 부정하는 읍내점거는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지역에서 농민군을 결집한 동학조직이 북접교단에 속하였기 때문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도원칙은 말단접에 소속된 농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습니다. 동학에 자발적으로 들어온 신입 농민군은 班常의 차별을 부정하는 동학에 가담해온 것이며 폐정개혁의 기치아래 결집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작당한 농민들이 지주?향리들에게 사적인 보복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적인 보복은 이내 농민군이 싸움의 방향을 대일항전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잠잠해지지만 문제는 각 지방의 관아가 농민군에 대항할 무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농민군은 6월말 일본군의 경복궁쿠데타 직후 본격적인 무장을 하게 되고 각 지방 보수지배층도 보수집강소를 만들어 이에 대응하게 됩니다. 안동에서는 민보군이 조직되어 이웃 예천의 농민군을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천과 상주, 김산(지금의 김천)지역을 비롯하여 1894년 당시 경상도 각 지역에서는 수차례의 농민봉기가 진행되었으나 유독 안동지역에서는 큰 봉기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원인으로 다음 4가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一. 1871년 이필제난 실패(영해난) 一. 정치적 학문적으로 굳게 결속되어 있는 사회. 一. 경제적 조건(소규모의 척박한 밭농사 위주) 一. 봉건지배층의 수탈과 일본 상인의 횡포가 상대적으로 미약. ○ 의병전쟁 1894년 농민전쟁 당시에는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던 안동지역에서 을미년을 거친 의병전쟁에서는 활발한 활동을 보입니다. 안동에서 권세연과 김도화가, 선성(안동 예안)에서 이만도가, 영양에서 조승기가, 진보(청송 진보)에서 허훈이, 영천(영주시)에서 김하림이, 문경에서 이강년이 의병을 모아 일어났는데, 이 고을들은 모두 안동문화권에 드는 곳입니다. 또 김도현과 유시연은 유격부대로서 항전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안동 관찰사 김석중과 친일 관리들을 처단하면서 을미의병의 군대로서는 가장 큰 부대였던 제천의 유인석 진영과 연합하여 일본군이 주둔했던 상주 함창 태봉을 공격했고, 김도현은 강릉의 민용호 진영과 합세하여 동해안에서 큰 싸움을 벌입니다. 허위와 이기찬도 김천과 선산지역에서 항전을 벌였고, 김하락도 의성, 청송, 영천, 경주, 영일, 영덕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이 을미의병의 군사조직은 농민이 맡았습니다. 그들은 농민전쟁이 봉쇄당한 뒤에 때마침 일어난 의병전쟁에 합세한 농민이었습니다. 이러한 농민은 그 뒤로 을사조약에 저항하며 일어난 을사의병때에 이르러서는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형성하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신돌석부대입니다. 또한,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이상룡이 자금지원과 차성충, 류시연, 권재중 등의 활약이 있었습니다. 이후 정미년부터는 의병 전쟁이 유격전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청송, 영덕, 영양, 봉화, 영주, 문경, 상주, 김천 같은 산악 지대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이후 의병부대는 남만주를 중심으로 큰 활동을 하였습니다. ○ 교육운동 구한말에 대구에서는 신교육기관이 많이 있었습니다. 안동지방에도 대구의 민간 사학처럼 혁신 유림이 신교육을 실시합니다. 이 지방의 혁신 유림은 노?일전쟁을 전후하여 일어났는데, 지금의 천전리에 협동학교를 세웁니다. ○ 안동지역의 독립운동 임청각 - 고성이씨 종택. 안동지역 양반 동족부락 가운데 읍치에 가장 가까이 위치하고 있으며, 일제시기 대표적인 항일 운동가인 석주 이상룡의 생가입니다. 우리는 임청각 앞으로 중앙선이 지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 안동역을 지난 중앙선이 안동시내를 왼편에 두고 임청각쪽으로 한바퀴 돈 다음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와 영주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지역 사람들은 일제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923년의 풍산소작인회. 오미동의 풍산김씨 - 1925년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던 김재봉이 태어난 마을이고 일본천황의 궁성인 비류바시에 폭탄을 던지고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옥사한 김지섭의 마을입니다. 가일마을 안동권씨 - 조선공산당의 핵심멤버의 한사람이며, 6?10만세운동을 지도한 권오설, 권오직, 권오상의 마을입니다. 이육사 - 퇴계의 14대손, 둘째 이원일(최고인민위원회의대의원), 셋째 이원조(조공) 막내가 이원창 40평생 17번의 구금투옥, 의열단 국내조직 설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1944년 1월 북경감옥에서 순국. 주곡리 - 한양조씨 세거지로 근대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양반부락.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당시 좌?우익 대립이 극렬했음. 일월산이 빨치산의 이동루트로 사용되었습니다. 조지훈의 어버지 조헌영, 한방의 권위자로 활동. ○ 8?15전후 경상도 북부지역 건준과 인민위원회. 8월 15일 일제가 패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의 과제인 통일된 근대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작업을 일차적으로 맡은 곳은 건국준비위원회였습니다. 건준은 단기간에 전국적인 하부조직인 건준지부를 두게 됩니다. 당시 8월말까지 약 145개의 건준지부가 건설됩니다. 대구지역에서도 일제시대 활동을 했던 인물들과 유지들이 해방이 되자 곧 움직임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때 건설된 건국준비위원회경북지부는 이후 10월 말 미군정에 의해 해체될때까지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당시 경찰중에서 조선인에게 반감을 샀던 인물들이 각 지역 건준지부에 억류되기도 하였습니다. 영주, 봉화, 문경, 영덕, 영천, 경주, 김천 지역들에서는 경찰들이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경찰서가 민중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건준경북지부는 각 학교를 돌며 한글보급에 나섰으며, 구황민과 이재민들을 구호하였으며 대구의 신사를 파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영어, 노어, 중국어 어학강좌를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교육, 문화 차원에서 대시민활동이 적극적이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한편 하지 휘하의 24군단은 9월초 조선에 들어온 후 각 지방에 전술군을 파견하여 그 지역의 권력을 장악해 갑니다. 경상남북도 지역을 담당한 것은 40사단이었습니다. 45년 10월 7일 108보병대 도착에 앞서 기계화 부대가 안동, 상주, 김천, 왜관, 경산 지역들을 먼저 점령하였으며, 10월 15일에는 선산, 예천 등지를 점령하였습니다. 10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경상남북도에 대한 충분한 통제를 가할수 있었으며 11월 1일에는 대구지역에 미군정이 설치되었습니다. 당시 경북지역 건준의 인민위원회로의 전화는 중앙지역에 비하여 약 두달정도 늦어집니다. 그러나 인민위원회는 각 군마다 건설되어 있었습니다. 부르스커밍스의 분석에 의하면 경북은 1944년과 1946년 사이에 가장 높은 인구증가율을 보이는 지역입니다. 당시 인민위원회가 통치기능을 수행한 지역은 봉화, 영양, 영덕, 경주, 칠곡, 선산, 상주, 문경등지였습니다. 안동에서는 서병로 지도하의 인민위원회가 비록 군청을 지배하지는 못한 것이 분명하지만 군 정치에서 세력있는 존재였습니다.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은 촌락들을 지배했으며 안동읍에서의 시위에 5천명이나 동원시킬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동에는 한독당과 독촉 지부도 있었으며 우파가 1946년초에 이르러 군청의 지배권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우파의 지배 덕택으로 안동은 쌀 수집 배당량을 달성한 몇 안되는 군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동의 경찰은 계속적으로 인민위원회 및 좌익들의 행동을 억압하는데 이용할 수 있을 만큼 믿음직했으므로 예천 및 영주 같은 인접군에서도 이용되었습니다. 그들은 3?1절의 시위가 있은 안동 서쪽의 구담동에서 63명이나 체포하였습니다. 그리고 3월 말에는 저명한 좌파 희극배우 신불출의 공연이 있은 후에 소요가 일어났을 때 영주까지 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영주와 예천에서는 그 몇 달 사이에 우익의 비교적 강력한 시위가 자주 있었다는 보고가 있으며, 예천에서는 우파와 좌파가 자주 축구 경기를 개최하였는데 그때마다 틀림없이 난투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 한국전쟁을 전후한 경상북도 지역에서의 민간인학살 전국의 모든 군단위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다는 말처럼 경상북도 지역에서도 광범위한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시기별로 살펴보면 49년 음력 7월 경북 월성군 지역의 학살과 함께 대구 상원동에서 1949년 3월 18일부터 1950년 7월 중순까지 호림부대 및 소속불명의 무장병에 의하여 240명이 학살되었고, 파동에서는 1950년 7월 중순에 100여 명이, 파동 가창댐 부근에서는 같은 시기에 100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신고되었는데 학살 시점으로 보아 이들 중 다수는 보도연맹원이었을 것입니다. 영천군 자양면 속칭 가지골에서는 1950년 음력 6월 24일 적에게 양식 등을 제공한 혐의로 43명이 학살되었습니다. 이들의 시신 부근에는 외지인 50여 명이 학살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또 영천군 임고면의 주민 50여 명이 동면과 서남쪽 영천군 화북면의 경계에 있는 심사골에서 호림부대 빛 백골단에 의하여 집단학살되었습니다. 접골에서는 외지인으로 보이는 200여 명의 학살된 유골이 뒹굴었고, 화북면 골짜기에서도 150여 명이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외지인과 화북면 골짜기에서 학살된 사람은 보도연맹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주군에서는 10개 면에서 각각 20~30명씩 희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장 큰 학살은 초전면 용봉동 너리골에서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150~160명이, 변진면 달창골에서도 수복 전에 100여 명이 학살되었습니다. 봉화군 9개 면 각 마을에서도 학살이 있었는데, 산호?백골?럭키부대에 소속된 군인들과 특공대 의용경찰관들에 의하여 물야면 오록동과 봉화면 도촌동, 유곡동에서 많은 동민이 학살되었습니다. 영덕군 영덕읍 담석동 협동미곡창고에 수용되어 있던 보도연맹원 70여 명은 8월 21일 적은 멧골이라는 골짜기에서 집단학살되었으며, 그밖에 3개 마을에서도 약 170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영덕군 주둔 3사단 22연대를 이끌었던 김종원에 의하여 1950년 음력 3월 14일 학살이 있었으며, 구미에서는 1950년 8월 16일 미군 폭격기 7대가 형곡동에 폭탄을 투하하여 주민 100여 명이 죽거나 크게 다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천에서는 순흥 안씨 집성촌인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에서는 1951년 미군 전투기 6대가 날아와 폭탄을 투하하고 기름까지 뿌려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고, 노인, 부녀자, 어린이 등 50여 명이 숨지고 90명이 부상당했으며, 성주군에서는 수복 후인 음력 9월 중순경 부역하였다는 이유로 선남면 선원리 화목정 나루터에서 하류로 1km쯤 떨어진 강가에서 60여 명이 학살되었습니다. 1950년 8월 10일 오후 3시 칠곡에서는 헌병들이 2,3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였으며, 한국전쟁 직후 경산지역 보도연맹원 및 대구형무소 수감자(대부분 미결수)등 약 3500명을 경산시 평산동 산40-12번지. 보국코발트광산 폐갱도에서 학살하였습니다. 대구?경북지역에서는 이미 1949년부터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저질러졌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대구교도소에서는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300명을 제외한 1,400여 명의 수감자들을 모조리 처형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대전에서와 마찬가지로 국민보도연맹 관련자들을 예비검속하여 처형하였습니다. 미결수 300명은 헌병의 호위 아래 삼천포 앞바다에 모두 수장되었습니다. 경북 경주?포항?영덕 등지에서도 좌익활동의 혐의가 있는 주민 200여 명을 군과 경찰이 총살한 뒤 수장하으며, 1949년 12월 24일 문경군 신봉면 석봉리 석달마을에 중무장한 군인 80여 명이 마을 주민 127명 가운데 86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한, 1950년 7월 12일경 문경군 호계면 별암리?견탄리?태봉리 지역의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에서는 주평 앞산에서 약 2백명, 문경군 영순면 포내마을 야산에서 3백명이 총살당하였습니다. 경북의 경우 유족들은 학살의 수효를 최소한 3만여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학살사건은 단순한 좌익- ���빨갱이���에 대한 학살에 그치지만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후 억울하고 불법적인 피해자에게는 그 학살보다 더 무서운 연좌제라는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저의 외가쪽 먼 친척중에 한분이 당시 인민군에 나간 사실이 있습니다. 물론 저희야 어릴때 그러한 것을 잘모르고 살았지요. 외가쪽에 저와 비슷한 연배의 친척들이 많아 허물없이 지냈지요. 그리고 한동안 고향을 떠나 있다가 모두들 오랜만에 만났는데 한 녀석이 구석에서 조용히 있는겁니다. 저는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 이유를 집안의 어른을 통해 알게되었지요. 그 아이의 할아버지가 인민군에 나갔다는 사실과 그 때문에 그 아이의 아버지는 가전제품 수리와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고, 지금 그 연좌제의 피해가 본인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빨갱이���는 자기만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집안 전체를 파탄내는 것입니다. ���빨갱이���라고 낙인 찍히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므로 그는 반듯이 죽여야 하며 그 어떤 만행을 저질러도 죄가 되지 않은 사회였던 것입니다. 특히 경상북도에서도 안동을 비롯한 북부지역은 한국전쟁 초기 인민군에 의한 점령을 겪은 곳입니다. 이러한 지역은 이후 수복이 된 후에 부역자 처벌과정에서 가혹한 형벌이 내려졌으며 이후 중국군이 참전한 다음에는 또다른 우익에 의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이렇게 되면 일반 민중은 대부분 입을 닫고 살게 됩니다. 언젠가 제가 아버지가 자란 봉화지역에서 있었던 학살에 대해 물었을때 아버지는 그저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라고만 말씀하셨지요. 그때 제가 ���그때 죽은 사람들이 모두 빨갱이예요?���라고 물었을때는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빨갱이겠냐?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겠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곤 더 이상 말씀을 않으셨지요. 그리고 그러한 ���피해대중���의 정치적 의사 표현은 극도로 보수적이 됩니다. 그것은 4?3을 겪은 후 제주도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안동을 비롯한 지역의 일반민중들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사건을 겪은 후 누구도 그 사건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으며 정치적 행위에 있어서는 극도의 보수성을 띄게 되었으며 그나마 남아 있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양반문화에 집착하게 된 것입니다. ○ 안동 카톨릭 농민회 이러한 안동에 70년대 말 농민회 사건이 한번 일어나게 됩니다. 이를 오원춘 납치사건이라고 하지요. 당시 33세였던 오씨는 경상북도 영양군청기면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는 농부였습니다. 그는 카톨릭 안동교구 농민연합회 이사로 청기농민분회를 조직, 회장을 맡고 있기도 했습니다. 청기농민들은 78년 가을 군청에서 권장한 감자씨를 심었다가 이듬해 봄 싹이 나지 않자 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결성, 피해보상 요구집회를 잇따라 열었습니다. 79년 5월 피해보상운동을 주도하던 오씨가 행방불명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2주일 만에 나타난 오씨는 중앙정보부원 2명에게 납치되어 울릉도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카톨릭농민회 활동을 그만두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영양성당 사제에게 고백했습니다. 이에 안동교구 신부들은 즉각 대책위원회를 구성, 성명서를 내고 당국에 공식 항의했습니다. 경찰은 79년 7월 27일 안동교구협에 난입해 은신중인 오씨와 정호경노동사목지도신부를 강제연행한 후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했습니다. 오씨는 재판에서 납치되었다는 양심선언을 번복, 검찰의 공소사실을 시인하고 징역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제 안동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강고한 틀위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앞의 임세권교수의 예에서와 같이 외부의 개입에 쉽게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안동의 전통을 어떻게 현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러한 고민 자체도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어쩌면 지금 나타나는 안동의 부정적인 모습의 근본인지도 모릅니다. 4) 안동의 부정적인 모습 ○ 병호논쟁 안동의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부정적인 모습을 병호논쟁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이 조금 장황하고 긴 면이 있습니다만 차근차근 읽어보면 측은한 감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병호논쟁이 아직도 안동지방의 양반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읽는 과정에 지루한 분은 다음으로 넘어가셔도 좋습니다. 호계서원. 400여년전쯤 건립. 퇴계가 죽고 얼마되지 않았던 때, 학덕을 기리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움. 건립당시엔 여강서원(廬江書院)이라 했으나, 1676년 호계서원(虎溪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곳에 서애와 학봉을 종사(從祀)함으로 문제가 생겨났다. 김씨들은 학봉이 서애보다 네 살 위이니 장유유서로 보아 학봉을 상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유씨측은 관위(官位)에서 서애가 영의정에 오른데 비해 학봉은 경상도 관찰사에 지나지 않았으니 서애를 상위에 모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해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양자는 당시 상주(尙州)에서 은거 중이던 정경세에게 석차(席次)의 재장(裁定)을 앙청(仰請)했다. 정경세(1563~1633)는 고명한 성리학자로 호를 우복(愚伏)이라 하며, 서애 문하에서 수학했고,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을 역임, 왕자의 사부(師傅)까지 지낸 국가의 원로였으며, 또한 영남학파의 최장로로서 널리 존경을 받고 있던 사람이었다. 정경세는 이 재정에서 ���두 선생의 연치(年齒)의 차는 견수(肩隨: 연장자와 함께 갈 때는 조금 뒤에 떨어져서 따라간다는 뜻)에 미치지 않고, 작위(爵位)의 차는 절석(絶席)에 있다.���라고 말하고 서애를 좌(상위)로 김성일을 우(하위)로 모시라고 했다. 김씨측은 이 재정이 매우 불만스러웠으나 원로의 재정에 거역할 명분도 없어서, 일단 승복하여 첫판 시비는 끝났다. 병호시비 2차전이 벌어진 것은 그로부터 약 200년 후의 일이었다. 1805년 영남 유림에서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한강(寒岡) 정구(1543~1620), 여헌(旅軒) 장현광(1554~1637)의 4명을 서울 문묘에 종사시키기 위해 청원(請願)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4명의 자손들이 문묘종사(文廟從祀)의 청원을 하기 위해 서울에 회동하여 소장(疏狀)의 기초를 하는 단계에서 또 다시 서열의 문제가 일어났다. 학봉파는 종사할 때의 순서는 연령순으로 할 것을 주장하고, 서애파는 여강서원에 모실 때 이미 위패의 서열은 정해져 있으니까 문묘에 모실 때도 선례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여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한강, 여헌측 사람들은 학봉파의 주장에 찬동하여 연령순으로 모시기로 결정하고, 억지춘향격으로 소장을 작성해서 국왕에게 제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구와 장현광도 명유(名儒)이기는 했으나 다같이 벼슬을 싫어하여 초야에 묻혀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한 사람이었으니, 벼슬을 가볍게 보는 학봉파에 동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유씨측은 노발대발했다. 그들로서는 그 결정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자기들이 의성김씨보다 격이 낮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독자적으로 상소하여 서열이 전도(顚倒)되었음을 논하고 그 부당성을 호소했다. 양쪽의 소장을 접수한 정부는 4명의 승무-학덕있는 선비를 문묘에 합사하는것-를 모조리 각하해버렸다. 한강과 여헌자손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서애, 학봉 싸움에 말려들어서는 백년하청일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자기들만으로 승부를 상소키로 획책했다. 그래서 다음 해 11월 한강?여헌파 사람들은 대구의 이강서원에 회동하여 독자적으로 상소할 것을 결정, 이를 도내의 유림에 통고했다. 이 통문을 접수한 안동의 각 서원은, 이러한 행동에 격분하여 급거 호계서원에 모여서 그 부당함을 규탄함과 동시에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 문제는 꼬이게 되었다. 서애와 학봉의 양파는 그때까지의 싸움을 중지하고 급거 호계서원에서 회동, 한강 여헌 양파를 규탄하는 통문을 도내의 유림에 띄우게 되었다. 그러나 통문을 작성하는 단계에서 일시 중단하기로 되어 있었던 싸움이 또다시 분출되고 말았다. 통문을 작성한 것은 학봉파의 유생으로 전주유씨인 유회문이었다. 전주유씨는 풍산유씨와는 본관을 달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성김씨의 총본산인 내앞마을과는 그야말고 지호지간이었다. 그런 관계여서 그런지 작성된 통문의 서술은 학봉, 서애, 한강, 여헌의 순으로 되어 있었다. 이 경우에 관해선 유씨와 김씨간의 주장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유씨들은, 통문이 처음에는 서애-학봉의 순으로 되어 있던 것을 학봉파가 밤중에 살짝 학봉-서애로 고쳐 썼다고 주장하고 이것을 찢어버렸다. 그러나 학봉파에 의하면 처음엔 다만 4선생이라고만 쓰고 서열을 나타내지 않았는데, 모임에서의 중론이 아무래도 서열을 명기하는 것이 옳다고 해서 협의한 결과, 학봉-서애의 순서로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쪽 주장이 진실인가는 어차피 알 도리가 없는 이야기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유씨측이 이 완성된 통문을 찢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이에 격분한 학봉파는 통문을 찢어버린 유형춘등에게 문벌을 가했다. 그래서 유씨들은 호계서원에 대해서 절연을 선언하였다. 하회유씨들이 호계서원과 결별하자, 서애-학봉의 서열을 지지하는 사림들도 모두 이에따라 절연을 선언하여, 그 후로부터 그들은 서애를 모시는 병산서원에서 모여 만사를 의논하곤 했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서 세력의 균형이 깨어져 호유측에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관계에 있어서는 병유가 우위에 있었고, 학계에서는 호유가 우위에 있었다고들 한다. 더구나 관계에서 세력을 떨치던 병유도,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중앙정계에서는 노론정권이 계속되었으므로, 남인파였던 유씨들의 위세도 수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큰 시비로는 이상정의 호계서원합사문제가 있다. 이상정은 고려말의 명유 이색의 후예이다. 벼슬은 참의에 그쳤으나 학문에 뛰어나서 근세에 드문 대학자로 알려져 있다. 학봉학파의 전통을 계승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학봉학파는 그를 대단히 존경해온 터라 호계서원에 합사시키자는 논의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 논의가 처음 일어난 것은 1812년이었다. 호유측 주도로 예안항교에서 도회가 열려 국왕의 추인을 얻기 위한 상소를 하자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병유측의 반대로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4년후 1816년 호유측이 또 다시 이를 주장했으나 역시 병유측의 강력한 반발로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병유측의 주장은 모내가 좁아서 이 이상 신위를 모실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호계서원의 모내는 후광전착(後廣前窄)의 구조로 되어 있다. 즉 후광이 넓고 전방이 좁게 되어 있어서, 다시 1위를 모시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중당에 있던 3위의 위판을 후방 벽쪽을 옮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수백 년간 모시고 있던 위치를 지금에 와서 움직인다는 것은 성현에 대해서 죄송하기 짝이 없는 것이며 자손된 도리에도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것은 진작부터 호유측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만일 대산을 모시게 되면, 그것을 계기로 해서 서애와 학봉의 위패를 연치순으로 바꿔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겁을 먹었던 것이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이씨집안과 유씨집안 사이에는 대산 이상정의 유고인 ?퇴계서절요?의 출판을 싸고 격렬한 공방전이 있었다. ?퇴계서절요?는 퇴계 이황의 언행록이라 할 수 있는데, 문제가 된 것은 본고중에 언급된 서애의 각주에 풍원부원군을 풍산부원군으로 오기(誤記)한 점, 서애의 형인 겸암 유운룡에는 각주도 세우지 않고 이름만 기재된 점에 있다. 대산추향의 논의가 최초로 좌절된 2년 후인 1814년, 대산의 자손들이 이를 출판코자했을 때, 하회의 유씨들은 이를 지적하고 정정하여 출판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씨측은 설사 오기가 있다 치더라도 이것은 대산선생의 수필본인데 후손이 마음대로 손을 댈수는 없다고 거부했다. 그후 대산합사가 논의될 때마다 유씨들은 끝까지 반대했던 것이다. 두 번째의 대산추향의 논의가 있던 다음날, 1816년 12월에 병유측에 한 통의 투서가 날아들었다. 투서를 한 사람은 이겸순이라는 사람으로 그에 의하면 호계서원의 묘우 안의 위치가 어느 사이에 바뀌었다는 것이다. 10여년 전 하회의 유생 유형춘이 호유측으로부터 문벌을 받은 이래 오랫동안 발길을 끊고 있던 병유측은 즉시 호계서원으로 달려가 묘내를 조사했다. 그리하여 중당에 있어야 할 위패가 북벽에 옮겨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격노한 병유들은 즉각 병산서원에 회동하여 옮겨진 위패를 원위치를 돌리라고 결의하였다. 위패란 원래 신성하고 범접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에 손을 댄다든가 옮긴다든지 할 때는 제물을 차려 향을 피우고 고축문을 올리는 어마어마한 제사를 치룬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었다. 게다가 병유로서는 이참에 괘씸한 호유놈들을 공론에 부쳐 철저히 혼내주려는 속셈이었다. 이에 대해서 호유측은 반격했다. ���묘내의 위패는 원래 북벽에 안치되어 있던 것을, 수백년간 한번도 움직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병유측이 움직였다고 우겨대는 것은, 대산의 추향을 방해하기 위한 트집이다.���고 역습했다. 어쨌든 양쪽의 대표가 묘내에 들어가서 실지 검증을 했지만, 이미 냉정을 잃은 당사자 사이에 객관적인 검증이 이루어질 턱이 없었다. 한쪽은 옮겼다고 하고, 한쪽은 옮기지 않았다고 하는 논쟁으로 일관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젠 공적인 기관에 제소를 해서 문제를 풀 수밖에 없다. 경상도 관찰사에게 고소를 한 것은 병유측이었다. 소장에서 그들은, 우선 호유가 부당하게도 묘위를 멋대로 이동한 것을 논하고 서원을 관리하는 하인을 잡아 족쳐서 범인을 찾아내어 엄벌에 처할 것, 그리고 위패를 원위치에 돌릴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당시의 관찰서는 김경로였다. 김정희의 부친으로 후에 이조판서에 오른 사람이다. 소장은 받은 그는 ���묘위를 멋대로 옮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즉각 원위치로 돌릴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판결을 내렸다. 병유측은 기뻐하며 이 판결문을 갖고 가서 즉시 위판을 원위치에 돌리려고 했다. 놀란 것은 호유측이었다. 그들은 다수의 인원을 동원하여 서원의 주위를 지키는 한편, 병유들의 주장이 얼마나 근거없는 엉터리인가를 논한 소장을 관찰사에게 제출했다. 관찰사 김경로는 호유측의 소장을 보고서야 비로소 사안의 중대함을 깨닫고, 병유측에 내린 재정을 급거 취소하고 ���사림간의 분쟁에 관은 개입하는 법이 아니다���라고 판결을 번복했다. 이 기간에도 대산추향의 움직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다수파 공작의 성과가 있었는지, 도내뿐만 아니라 도외에서도 대산을 추향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호유측은 도회를 열어 일거에 매듭짓고자 했다. 이 움직임을 탐지한 병유측은 아직 묘위문제가 결말이 나지 않았는데 또다시 대산추향을 운운하는 것은 당치도 않는 말이라고 분격했다. 그들은 왕에게 상소하여 묘위의 복원을 꾀하고 아울러 대산추향의 논의도 분쇄하기로 의결했다. 이에 병유 김병규는 1817년 9월 왕의 선왕의 성묘차 행차하는 기회를 틈타서 가전상소를 했다. 이윽고 예조를 통하여 재정이 내렸다. 그것은 ���경상도 관찰사 김경로를 파견하여 쌍방의 유생들을 회유시켜 원판을 원상태로 돌려라���라는 것이다. 병유측은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재정이 내려지자, 의기양양하게 호계서원에 몰려가서 위판을 당장 원위치로 돌리도록 일갈했다. 그러나 호유측은 예조가 왕에게 상계할 때 단지 ���이와 같은 불상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쌍방을 설유(說諭)할 것���이라고만 되어 있었는데, 위패의 문제까지 언급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급히 예조에 문의했다. 예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회답이 왔다. ���위판에 관해서는 왕에게 말씀드린 사실이 없었는데, 그와 같은 조항이 있다는 것은 전달자의 오전일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 도중 누군가의 농간임이 틀림없다.��� 즉 ���위판을 원상태로 돌려라���라는 조항은 후에 가필되었다는 것이다. 그 경위는 예조의 실무를 담당했던 배광옥이라는 관리가 병유의 뜻을 받아 가필한 듯하다. 즉 공문서가 위조되었던 것이다. 이상은 대략적인 병유논쟁이다. ○ 우리는 논쟁의 어디를 볼 것인가? 우리는 진행과정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어떤 결정이 이루어지나 보다는 무엇이 그러한 논쟁이 계속되게 하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4. 우리는 안동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지금까지 이야기의 전개가 비록 자의적이긴 하였습니다만 이제 그만 이 글의 결론을 내려야겠습니다. ○ 양반문화에 대한 비판 지금 우리는 양반을 흔히 수탈자의 모습으로, 민중을 위하지 않고 호위호식하던 이의 대명사로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세사회 구조는 타파되어야할 올바르지 않은 것이지만 사람자체를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는 없을 것입니다.(양반은 무조건 나쁘고 농민은 무조건 올바르다?, 성리학에 대한 우리들의 평가와 결합해서 살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지금 안동의 현실 지금 안동은 양반이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사는 결국 허례허식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형식이 아니라 사상, 생각에 중점을 둔다면 근대로의 승화가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조상을 공경하고 받드는 행위지만 이 제사라는 형식은 공동체 의식, 혈연친족적 유대의식을 강화하는 최상의 제도이며, 조상을 공경함으로써 자신을 항시 반성하고 조상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다짐의 계기도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의병→ 독립운동→ 해방공간에서 안동의 전통을 이어나갈 대부분의 여론형성층이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결국 그들의 노력에 현실적으로는 몰락만이 있었고 어떠한 외부로부터의 보상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엔 극도의 정치적 보수화와 권력을 쫓는 현상이 나타난 것일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개발의 낙후, 고여있는 물로 비치지고 있습니다. 지금 안동의 양반문화는 어쩌면 형식과 틀에만 머물러 있는지도 모릅니다. ○ 안동? 안동! 이상의 글을 정리하며 아래 여섯가지의 생각해볼 문제를 제시하여 봅니다. 一. 안동의 이러한 현실에 과연 우리의 책임은 없는가? 一. 전통의 영광과 수모를 정확히 파악해내는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一. 지금 현실을 타개해 나갈 올바른 철학체계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존재론인가? 상대론인가?) 一. 양반문화를 지금과 별개의 문화로 생각하지 말자. 一. 새로운 사회에 어떠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갈 것인가? 一. 우리가 역사속에서 찾아가야 할 그림은 ?오래된 미래?가 아닐까?
5. 참고문헌 윤병석. ?의병과 독립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7. 임재해편. ?안동문화의 수수께끼??, 지식산업사, 1997.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 창작과 비평사, 1997. 이이화. ??이야기 인물 한국사?? 1, 3, 한길사, 1993. 허 은. ?8?15직후 경상북도지역 지방인민위원회연구?, 고려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92. ― ?경상북도지역 인민위원회의 역사적 배경과 활동? ?역사연구? 3, 거름, 1994. 미야지마히로시. ??양반??, 강, 1996. 김기빈. ??한국의 지명유래?? 1, 2, 4, 지식산업사, 1989. 강진호. ??한국문학, 그 현장을 찾아서??, 계몽사, 1997. 윤학준. ??나의 양반문화 탐방기?? 1, 2, 길안사, 1994. 한국고문서학회편. ??조선시대생활사??, 역사비평사, 1996. 심지연. ??산정에 배를 매고??, 개마고원, 1998. 김형찬. ?전통의 현대적 의미?, ?21세기 길목에서 본 동양의 지혜? 방송대 공개교양강좌, 1998. 부르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0. 김삼웅. ?해방후 양민학살사? 가람기획, 1996. 망원학국사연구실. ?1862년 농민항쟁?, 동녘, 1988. 정희상.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소?, 돌베개, 1990.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하, 역사비평사, 1999.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 ?전쟁과 인권?, 2001 민간인학살 심포지움 발표문, 2001. 김희곤. ?신돌석;백년만의 귀향?, 푸른역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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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 염치'의 원조도성'을 출향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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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좋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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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사랑 합니다!
▶️나물먹고 물마시고'를
아리랑 아리랑' 민요를
한자리 못하셔도
정든고향을 떠나 이주 하실때에도'
하던일을 그만둘때에도'
약주한잔 드시고'
섬섬옥수 부여잡고
이별가를 부를때에도'
자의반?
타의반?
그 자리리를 잠시 떠나실때에도
민족의 정서'
민족의 한맺힌
울분' 을 토하시고,
애국' 애족' 애향' 염치'를 노래하시는 시조한수 입니다!
🏠청와대 무궁화 동산에 건립된 청음 선생님 시조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