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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인문학기행 답사기
-마이산 돌탑과 삼의당 김씨를 중심으로
김경식(시인.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
■ 진안인문학기행 의미
백제 때 진안의 옛 지명은 난진아(難珍阿)였다. 고원에 있는 고을이란 뜻을 담고 있다. 진안(鎭安)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 지어졌지만 백제출신 백성들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진안군은 호남이지만 주로 산악지역이다. 동쪽으로 무주군, 장수군, 남쪽으로 임실군, 서쪽으로 완주군, 북쪽으로 충남 금산군과 경계이다.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에 의해 이루어진 진안고원과 덕유산, 운장산 등의 높고 덩치 큰 산들이 진안을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안의 명소는 <마이산>이다. 마이산은 돌탑으로 유명하지만, 조선의 건국신화를 담고 있는 곳이다. 마이산은 조선의 개국과 관련이 있다.
이성계는 고려 말에 남원의 운봉에서 왜적을 크게 격퇴한 황산대첩을 이루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이산에서 숙박한다. 어느날 꿈에 신선이 나타나 금으로 제작한 자(금척)를 전달 받는다.
꿈이 신령스러웠던 이성계는 이곳에서 불공을 드리고 떠날 때에 기념으로 나무를 한 그루를 심었는데, 그 나무가 지금도 살아 있다고 한다. 마이산의 은수사 650년 된 돌배나무이다.
두개의 마이산 봉우리와 500여m 탑사의 그림자를 담기를 염원하는 탑영제는 봉두봉과 그 뒤 암마이봉의 전경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이곳에는 담락당 하립과 삼의당 김씨의 문학적인 업적을 담은 부부 시비가 서 있어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같은 마을에서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부부로 특히 삼의당 김씨는 260연 편의 시를 남긴 시인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조선의 역사에서 기축옥사(1589년)는 호남 선비들의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축옥사는 작은 사건을 크게 확대시켜 반대파의 선비들을 대량 학살했던 조선의 대표적인 조작 사건이다. 그러나 그 발단을 제공한 곳, 진원지가 진안군 죽도이다.
조선 건국 200년이 될 즈음 그 기운이 다 되었다고 믿었던 선비가 있었다.
정여립(1546~1589)이다. 역성혁명을 도모했던 정여립의 꿈은 진안 죽도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러나 실패로 그곳에서 자살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살벌한 피의 보복이 있었다. 기축옥사는 진안의 죽도에서 팔도의 피바람으로 휘몰아쳤다. 조선의 4대 사화(士禍)보다 많은 사람들이 역모 죄로 죽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에 무고한 선비들과 가족들이 죽어갔다. 평등세상을 실천하기 위해 대동계를 만들면서 민중세상을 꿈꾸었던 혁명 사상은 조선 왕조로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진안인문학기행에서는 그 혁명 바람의 진원지였던 용담호와 죽도 주변을 버스로 이동하면서 정여립의 삶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또한 동학혁명에 참가하여 비참하게 죽어갔던 민초들의 죽음에도 애도를 표하고 싶다
■진안의 역사와 지리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이 진안지역 여러 곳에 산재하고 있다. 용담댐 수몰지에서 석기 등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에 사람들이 살았음이 증명되었다. 삼한시대 때는 마한의 영토였으며, 부족 국가 수준이었다.
진안군은 백제시대에 난진아현, 마돌현(馬突縣), 물거현(勿居縣)이 있던 곳이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난진아현은 진안현으로 지명이 바뀌었고, 마돌현은 마령현(馬靈縣)이라 불렀다. 개물거현은 청거현(淸渠縣) 바꾸고 진례군(進禮郡)으로 부르게 했다.
고려시대가 시작되자 진안현과 마령현 전주의 속현으로 편입 이속(移屬)시켜버린다. 1412년(태종13)에 마령은 진안에 편입되고, 청거현은 1313년(충선왕5)에 용담현(龍潭縣)으로 개명되었다. 진안현의 옛이름은 월랑(越浪, 月浪)이라는 아름다운 지명이었으며, 용담은 옥천(玉川)이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 의병과 관군은 진안 웅치에서 왜적과 대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김제 군수 정담(?~1592)을 비롯한 관군과 의병 등 3000명이 끝까지 싸우다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 싸움으로 호남을 장악하려던 왜적을 막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사에 기록된 유명한 <웅치전투>이다.
1895년(고종32)에 전국이 23부(府)로 개편된다. 진안현은 진안군으로, 용담현은 용담군으로 현이 군으로 바뀌어 남원부에 예속된다. 1896년에 13도로 개편되어 전북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 구역의 개편으로 용담군이 진안군에 병합된다.
지리적으로 진안군은 78%가 산악지역이다.
동부는 백두대간의 덕유산 연봉 서쪽 사면과 연결되어 있다. 남동부는 금남 호남 정맥의 줄기인 성수산등 1000m 이상의 산들이 병풍처럼 서 있다. 그러므로 평지는 골짜기 사이의 충적지가 대부분이다. 전체 면적에서 농경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11.2% 정도로 적은 이유다. 진안읍은 금강의 지류인 진안천이 흐른다. 이 하천 주변은 침식 분지이다.
■ 삼의당 김씨(三宜堂 金氏)
진안 마이산의 탑사와 금당사 중간에 탑영제가 자리잡고 있다.
아름다운 호수 주변에는 조선시대에 금술 좋기로 소문났던 삼의당 김씨(三宜堂 金氏) 부부시비 시비와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 후기에 평민의 여성은 한문공부를 제대로 하기는 불가능했다. 문학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남원에서 태어나 진안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던 삼의당(1769~1823)은 어려운 조건하에서 문인의 길을 걸었던 여류작가이다.
본관은 김해이고 당호가 삼의당(三宜堂)이다. 그녀는 1769년 남원 서봉방에서 태어났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이며, 부친은 김인혁(金仁赫)이다.
삼의당은 일곱 살 무렵에 서당 주변을 기웃거리며 글공부에 매력을 느꼈다. 명심보감과 소학에 통달하면서 다양한 문장을 지어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같은 마을의 담락당 하립과 18세에 결혼하였는데 나이가 같고 태어난 날이 같았다. 하립은 진주하씨이며, 세종 때 영의정을 역임했던 하연(河演)의 12대손이다.
혼인한 두 사람은 1801년에 진안 마령면 방화리로 이주하여 시문을 쓰면서 살았다. 꽃을 가꾸고 집 벽에는 글씨와 그림을 붙이고 예술적인 취향을 느낄 수 있도록 했으며, 삼의당이라는 당호를 걸었다. 삼의당은 부군 하립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도록 권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가난했다. 한양에 갈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비녀를 팔고 머리털을 잘라 팔아야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립은 과거에 불합격되었다. 삼의당 김씨는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같은 명망 높던 사대부의 여성이 아니었다. 또한 황진이, 이매창 같은 기생도 아니었다. 가난한 살림을 살아야 했던 평민의 여성으로서 260여 편의 한시와 산문을 남겼다.
삼의당 김씨는 1823년(순조23)에 세상을 떠났으며, 담락당 하립은 7년을 더 살다가 1830년(순조30년)에 떠났다. 그들의 묘소는 진안군 백운면 덕현리에 있다.
진안의 아름다운 풍광과 사소한 일상의 행복한 삶을 표현한 문학작품은 1930년에야 삼의당고(三宜堂稿)로 출간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삼의당 김씨가 세상을 떠난지 200년이 지난 후였다.
몇 편의 시를 감상하다보면 당시 삼의당 김씨와 그의 부군 하립의 마음과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부부는 인륜비롯
만복의 바탕이라
도화시 이 한편을
마음속 새겨보오
온집안 화목해야
온갖일 이뤄지리
담락당 하립 詩 <초야 창화> 김해강 번역
부부는 백성비롯
군자의 기본이라
공경과 순종함은
오로지 아내의 길
님의 뜻 종신토록
어기지 않으리오
삼의당 김씨-화답의노래 김해강 번역
奉夫子夜至東園(봉부자야동원) 부군과 함께 동쪽에 있는 정원을 걸었네
月色好花影滿地(월색호화영만지) 달빛에 꽃그림자가 땅에 그득하여라
夫子吟詩一節 妾和之(부자음시일절 첩화지) 부군이 시를 한 수 낭송한 후에 내가 화답 하였네
滿天明月滿園花(만천명월만원화) 하늘에는 달빛이 가득하고, 정원엔 꽃이 가득하고
花影相添月影加(화영상첨월영가) 꽃 그림자 겹친 장소에 달 그림자를 추가하네
如月如花人對坐(여월여화인대좌) 달과 꽃을 보듯이 그대와 독대하네
世間榮辱屬誰家(세간영욕속수가) 세상의 영욕은 나와 상관 없다오
夜色迢迢近五更(야색초초근오경) 밤 잠 못자고 맞이한 신새벽에
滿庭秋月正分明(만정추월정분명) 정원 가득하게 가을 달빛이 밝네
凭衾强做相思夢(빙금강주상사몽) 이불 덮고 잠자리에 사랑하는 이의 꿈을 꾸었데
繼到郞邊却自驚(계도랑변각자경) 부군의 곁이기에 기쁜 마음에 놀라서 깨었네.
■ 진안 죽도와 정여립
진안읍에서 무주 방향으로 약 8km정도 북서쪽으로 가면 상전면 산정마을이다. 이곳에서 금강을 거슬러서 4km쯤 가면 높은 절벽 밑으로 맑은 물이 흐르며, 3면으로 물길이 휘돌아 돌아 흘러 마치 섬처럼 보이는 곳이 죽도이다.
죽도는 장수방면에서 흘러오는 장수천과 덕유산에서 발원한 구량천이, 파(巴)자 형으로 휘돌아 합류하는 중간에 우뚝하게 솟아 있는 산이다.
1589년 10월 2일 선조 임금은 황해감사 한준(1542~1601)이 은밀하게 조정에 보낸 서신을 받아들었다. 안악군수 이축(1538~1614)이 와서 역모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는 내용의 보고서인데 역모의 주동자는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이었다.
정여립은 전주의 명문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는 익산군수를 역임한 정희증(鄭希曾)이며, 어머니는 박찬(朴纘)의 따님이었다. 대호군을 지낸 양헌공(良獻公) 정인(鄭絪)의 8대손이지만 직계에 관한 기록은 기축옥사 이후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출생지가 살았던 곳이 명확하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율곡 이이(1536~1584)의 문하에서 공부할 당시에 정여립은 천재적인 머리와 세상을 보는 안목이 있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정여립은 이이와 성혼(1535~1598)의 제자로 1567년(명종22년)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0년(선조 2년)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했다.
1583년 예조좌랑에 임명되었는데 곧이어 이조전랑의 물망에 오른다. 이이는 당시 이조판서였다. 그런데 그의 이조정랑직 임명을 이이가 반대했다. 서인과 동인이 치열한 공방을 하던 조정에서 정여립은 이이와 선조의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가 가지고 있던 재주와 출세의식을 품고 있는 과격한 성격은 서인과 동인의 치열한 싸움을 부채질 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이가 세상을 떠난 두 달 후에 정여립은 홍문관수찬에 임명된다.
이이 생전에 그가 동인을 당을 바꾼 것은 정언신, 정언지 정유길 등 동래 정씨 첨사공파 자손들이 동인계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여립은 수찬에 오른 뒤 고인이 되었던 스승 율곡 이이를 비난한다.
결국 중앙정치 무대에서 이이가 싫어한 동인들과 가까이 했다는 비판을 받고, 선조의 미움도 함께 받는다. 선조는 유별나게 정여립을 기피했다. 이조판서가 천거를 해도 매번 낙점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선조가 정여립을 비판하면 눈을 치켜뜨기도 했다. 결국 이 이, 성 혼, 박 순(1523~1589)을 비판했기에 배신자로 지목되었으며, 조헌(1544~1598), 정철(1536~1593_ 등 서인의 영수들에게 비판과 탄핵의 표적이 되었다.
당을 바꾸고 임금에게 낙인이 찍히자 낙향하여 반역을 준비했던 것이다.
준비기간에 발각 된 것인데 당시 상황은 동인이 서인보다 매우 우세하여
선조가 겁을 먹고 있을 때다.
서인을 키우고 동인을 죽이려던 차에 걸려든 것이다.
아들과 함께 죽도로 도피했던 정여립은 그곳에서 아들을 자신의 칼로 죽이고
그 칼로 자신을 찔러 죽었다. 그가 자결하였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조정을 발칵 뒤집었다.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된 것이다.
송강 정철에 의해 주도되었던 기축옥사의 수사는 정여립과 관련인물을 대부분 죽이거나 유배 보냈다.
만약 정철이 이런 일을 도모하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 국문학사의 가장 큰 거봉이며 존경의 대상이 되었을 사람이다.
그러나 송강 정철은 기축옥사에 관한 조사 실무책임자를 맡아 자신의 문학적인 근거지였던 호남 선비들까지 정적으로 만들어 참살하고 유배 보내는 참사를 일으켰다.
■동학혁명과 진안
진안초등학교 뒷산과 성묘산은 동학혁명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죽어갔던 곳이다.
1894년 11월이 시작되자 동학군은 전주성에서 곰티재까지 후퇴를 해야 했다.
5 ~10일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지만 무기 부족으로 진안까지 후퇴한다.
관군에 패한 것이 아니라 동학혁명군을 진압군을 진압하기 위해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군(日軍)을 불러들였기 때문이었다.
세력이 약해진 동학군은 현재 진안 초등학교 뒷산과 성묘산에 포진한다.
12월 12일 시라끼 대위가 이끄는 일군지대(日軍支隊)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동학군 약 300여명이 체포되어 진안 초등학교 뒷산 기슭의 밤나무 아래에서 효수형을 당해야 했다.
진안 출신의 전은갑(全銀甲)은 이때 세상을 떠났는데 목을 찾을 수 없어 그의 가족들은 목없는 시체를 거두어 진안읍 군상리 산 113번지에 안장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옥이 있다면 이것이 지옥이었을 것이다. 관군과 일본군이 학살을 자행하였던 당시에 가택수색이 빈번했기 때문에 집집마다 뒷문이 생겼다.
■ 천주교 박해와 어은동 성당
진압읍 죽산리 어은동은 깊숙한 산골이었다.
천주교에서는 신유년(辛酉年) 1801년, 기해(己亥) 1839년, 병오(丙午) 1846년, 병인(丙寅) 1866년의 박해를 4대박해라고 부른다. 이중에서도 1866년 병인박해 때는약 2만명의 조선천주교인 중에서 1만명이 순교했다.
조선 전체가 천주교인을 색출하여 참살하던 1866년 12월 엄동설한에 진안읍 죽산리 어은동으로 신도들은 모여 든다. 이곳은 안전한 지역이었다.
캐비비 신부를 중심으로 천주교인들은 순교자들을 위해 기도했다.
하루 하루의 목숨의 연장에 감사하면서 150여명은 이곳에서 천국을 경험한다.
각자 농사를 지었지만 경쟁이 없었다. 장수 출신의 김마리아 신도가 12평짜리 교회당을 지었는데 이것이 <어은동공소>이다. 전북에서 2번째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천주교회다.
어은동공소가 있는 이 마을에서 한국전쟁 때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진안군에서 4명의 신부들이 북한군에 끌려가 순교했다.
■ 마이산과 돌탑
신라시대 마이산의 지명은 서다산(西多山)이었다. 이후 고려 때는 우뚝하게 솟아난 용맹정진한다는 의미의 용출산(湧出山)이라는 산 이름을 얻는다.
조선 초기에는 속금산(束金山)이라고 불렀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이 산속에서 잠을 자다가 꿈에서 본 금척(金尺)을 오행설로 해석한다. 성(李)에 목(木)이 포함되었는데 마이산은 금(金)이어서 목(木)이 포함된 이씨가 해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 속금산(束金山)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 구전이며, 금을 묶어두려고 하였다는 이름의 속금산이 불려졌던 것은 사실인듯 하다.
마이산이란 이름을 얻을 수 있던 것은 조선 태종 때다. 진안의 성묘산에서 제사를 지낼 때 바라본 모습이 말귀를 닮았기에 붙여졌던 이름이 오늘날까지 불러지고 있다. 마이산의 바위로 이우러진 산이다. 그러나 돌이라고 하지만 매우 강도가 약한 역암이다.
자갈이 혼합된 돌이란 뜻이다. 이런 암석산은 1억년 전에 호수가 융기해 형성되었다. 바위 표면은 구멍이 원형으로 숭숭 뚫린 타포니 지형이다. 벌집모양을 하고 있는 자연동굴을 타포니에서 유래했는데, 타포니는 코르시카의 방언이다.
탑사 입구에는 섬진강 발원지라고 주장하는 표지석이 서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일 것이다. 진안군 백운면 원신암 마을 서쪽 기슭에 있는 데미샘이 섬진강의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실학자 여암(旅菴) 신경준(1712~1781)이 작성한 산경표(山經表)를 근거로 장수 영취산, 장안산, 마이산. 주화산까지 63km의 산줄기는 남쪽은 섬진강, 북쪽은 금강의 분수령이다.
금강의 발원지는 장수읍 원수분 마을 신무산 북쪽 기슭인 뜬봉샘이다.
그러나 마이산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마이산 탑사> 때문이다. 크고 작은 많은 돌탑이 이갑용(1860~1927) 처사가 1885년부터 30여 년 간 쌓았던 작품들이다. 100여 년간 무너지지 않고 그 신비감을 더해가고 있다. 탑사 경내에는 시비들이 이곳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탑사의 행정구역은 전북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이다. 마이산의 남부주차장에서 약 1.9km 지점(도보30분 거리)에 마이산 탑사가 있다. 돌탑의 형태는 일자형과 원뿔형이 대부분이고 규모는 다양하다. 대웅전 뒤에 있는 천지탑 한 쌍이 가장 규모가 크다. 이갑용 처사가 왜 탑을 쌓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는 혼자 이 탑을 쌓았다. 낮에는 돌을 수집하고 밤에 주로 탑을 쌓았다.
이 탑사를 가기 전에 <마이산시비>가 서 있었다.
이 세상에 이런 산이
신비로운 세계 유일의 부부산
천상천하 영원한 사람의 하신이여
청정 수맥은 갈한 영혼을 목축이리
굽이굽이 금강, 섬진강을 거느렸다
마이산은 신이 창조한 조화이니
산중에 영산이라
하늘을 품은 기상은
인도 가는 길을 엄중히 묻는다
천지탑은 인간이 축조한 걸작이라
만인의 정성을 괴어올린
숭고한 모습, 한 개 두개 올려놓는
저들의 소망을 받드는가
한 계단 두 계단 헤아리며
어찌, 하늘 층계를 오르내리나
아! 무거움을 내려놓는 곳이
바로 여기인 것을
-허호석 시비 <마이산 시비> 전문
탑사의 크고 작은 탑 사이에 위치한 이왕선 시인의 ‘산사와 탑’시는 불교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다.
바위틈 계곡 따라 내려오면
옹기종기 탑들이 모여
세월의 풍상을 이야기하듯
도란히 속삭이는데
대웅전 좁은 뜰에서 내려다보면
천하를 호령하는 장군의 기백인양
의기도 양양하여라
계곡 따라 올라온 선바람들도
잠시 머물러 숨 고르는 법당에서 소망을 비는데
산사의 풍경소리는 스님의 독경 목탁소리에
화음이 되어 산사의 기쁜 진리로
세속을 넘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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