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이사야(67)/자랑/교만
제목 : 전수하지 못한 은혜
성경 : 사 39:1~8
찬송 : 435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0524 낙양교회 수요예배
사 39:1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사 39:2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
사 39:3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이르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하니라
사 39:4 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 하니라
사 39:5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사 39:6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39:7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사 39:8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이사야 39장은 히스기야 기사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장이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시각에서든지 비평적인 시각에서든지 이사야서 안에서 큰 단원을 마감하는 중요한 장입니다. 히스기야를 역사적으로 다루는 36~37장에서 히스기야는 믿음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서 히스기야는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차라리 이 내용이 역사적인 순서로 36~37장이 뒤에 있었더라면, 히스기야는 믿음의 영웅으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9장이 이 단원을 마무리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앗수르의 위기는 넘어가지만, 앞으로 다가올 바벨론의 위기가 있음을 예고합니다.
이것은 아주 역설적(irony)입니다. 선대왕 아하스는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나중에 그 나라에 짓밟히게 되었는데, 히스기야 역시 바벨론과 유대 관계를 형성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그 나라에 의해서 유다 나라가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가 신뢰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앗수르를 심판하시고 유다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바벨론의 손에서도 그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둘째, 히스기야에게도 한계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전쟁과 죽을병이라는 엄청난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함으로 기적을 이끌어낸 믿음의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련이 끝나고 평안한 시기에 이르자 그는 아첨과 허영의 유혹에 넘어졌습니다. 그는 믿음을 보였지만, 궁극적인 메시아는 아닙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가 넘어짐을 보이면서, 우리의 시각을 진정한 메시아에게로 돌립니다. 메시아는 자신의 안위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시려고 고난을 감당하신 하나님의 종이십니다.
히스기야는 받은 은혜를 후대에 전수하지 못한 전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은혜를 입은 ‘그때에’
사 39:1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낳았다는 소식은 그 당시 전 세계에 빅뉴스였을 것입니다. 그 소식이 멀리 떨어진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대규모 축하 사절단을 파견한 것입니다.
므로닥발라단은 바벨론에서 두 차례 집권했던 사람입니다(BC722-710, 704-703). 앗수르 왕 사르곤 2세가 앗수르의 왕이 되었을 때 므로닥발라단은 반란을 일으켜 바벨론을 독립시키고, 왕이 되어 BC 710년까지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주변의 동맹국들을 모아 앗수르에 저항했습니다. 그러다 사르곤 2세에게 체포되어 바벨론에 구금되었다가 사르곤 2세가 죽은 후에 다시 바벨론을 독립시켜 왕이 되었으나 1년이 채 못 되어 사르곤의 후계자 산헤립에게 밀려났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므로닥발라단은 히스기야 시대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면서 반 앗수르 운동의 선봉에 섰던 인물입니다. 아마도 므로닥발라단은 이번 기회에 히스기야와 손을 잡고 반 앗수르 동맹을 맺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요즘 정세와 같이 ‘한미일’, ‘북중러’가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고 동맹을 맺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다의 이해할 수 없는 그 능력이 너무나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소문으로는 히스기야가 중병에 걸려 곧 죽을 것이라고 했는데 놀랍게도 그 죽을병에서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고, 게다가 아하스의 해 시계 그림자가 10도나 뒤로 물러간 사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하던 앗수르의 18만 5천의 군대가 영문도 모르게 몰살된 사건 등 이상한 소문까지 들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벨론 왕에게 유다는 신비의 나라였습니다. 틀림없이 죽는다던 히스기야를 살려 낸 그 큰 능력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을 것입니다. 이 신비를 풀지 못하면 세계적인 강국이 되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천문학에 조예가 아주 깊었습니다. 어느 날 태양일지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보았든지, 아니면 바벨론 천문학자들이 해시계가가 10도 물러났을 때 그 변화를 알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 정체를 너무나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가 병이 나았다는 소문을 듣고 그 능력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한 것은 당연합니다. 세상에는 그렇게 충격적인 사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바벨론 왕에게 특별하게 보였던 것은 그 나라의 규모 때문도 아니고 돈이 많거나 군사력이 강해서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실제로는 겉으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그 안에 감추어진 능력은 측량할 수조차 없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므로닥발라단이 글과 예물을 보낸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 사도는 ‘섰다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은혜 받고 축복받을 때 우리는 자고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히스기야의 자랑
우리는 좋은 일이 있으면 신이 나고, 신이 나면 기분이 좋아지면서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잘해 주거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지난 월요일에 친구들 모임이 있었는데 한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아파트인데 평수도 넓고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놓아 모든 친구들이 부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거기다가 그릇도 유럽 도자기에 차와 간식을 내어 놓았는데 은근히 자랑합디다. 히스기야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사 39:2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요즘 보면 대통령이 미국과 일본을 연이어 방문하고 환대를 받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환대를 받는 것은 좋은 일인데 경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한미일 외교에 신경 쓰는 사이 반도체와 2차 전지가 희생양이 되었다는 외국인의 평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외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경제가 아닐까요?
히스기야는 먼 나라 바벨론에서 축하사절단이 도착하니까 기뻐해서 자랑 질을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죽을병에 걸렸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고 살아났습니다. 그렇다면 사절단을 어디로 초대해야 했을까요? 솔로몬의 성전에 데리고 가서 받은 은혜를 간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히스기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다가 결코 가난한 나라가 아니며 돈도 많고 군자금도 넉넉하며 무기도 많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하나님의 백성과 종들도 세상에 열등의식을 갖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교회에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찾아오면 너무 기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세상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 필요하지도 않은 박사학위를 몇 개씩이나 받으려고 합니다.
바벨론 사신이 온 것은 히스기야에게 하나의 시험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분이 몹시 좋아졌으리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고, 국제 사회에서도 그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위상이 높아진 것입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며 물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간증했어야 했습니다. 더 나아가 바벨론 사신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만나게 했어야 했습니다. 사신들은 이사야의 입에서 나오는 불꽃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왜 예루살렘이 망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히스기야를 돕는 이사야를 보았더라면 절대로 그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꿈을 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왜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자랑했을까요? 이 세상에 열등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위치가 얼마나 존귀한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얻어먹으려는 생각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를 거부하면 우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리면 끝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써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 그분만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의 책망
이사야의 첫 질문 : 사절단의 정체와 목적
사 39:3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이르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하니라
히스기야가 모든 보물을 보여 준 다음에 이사야 선지자가 히스기야를 찾아왔습니다. 37장에서는 히스기야가 사람을 이사야에게 보내 상황을 설명하고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히스기야는 므로닥발라단의 글을 두고 하나님께 묻거나 이사야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거꾸로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그들이 무슨 말을 하였고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물론 이사야에게 벌써 히스기야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던 것을 보면(5~7절), 그는 선지자로서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히스기야에게 질문함으로써 스스로 문제를 돌아보게 한 것입니다.
이사야의 질문에 히스기야는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들의 방문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단의 일에 대해서 자기의 계획을 감추고 있는 듯 합니다(참조, 29:15~16). 이사야는 그 나라가 애굽을 의지하고 그들을 동맹을 맺는 것에 대해서 신랄하게 질책했었습니다(31:1~3). 계교를 베푸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 맹약을 맺지만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에 대해서 화가 있을 것을 선언했었습니다(30:1~2). 이때의 문제는 단지 애굽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인간의 세력을 의지하고, 또 하나님께 묻지 않고 스스로 계략을 세우며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의 두 번째 질문 : 사절단의 행동
사 39:4 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 하니라
이사야는 또 그 사절단이 무엇을 보았는지 묻고 있습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번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뭘 보았습니까? 평택에 있는 삼성 반도체 공장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삼성이 미국에 엄청나게 투자할 것을 약속받았습니다. 평택 삼성 캠퍼스와 같은 대규모 공장을 미국에 세울 꿈을 가진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사절단의 방문 목적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병 나은 것은 축하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근본 목적은 유다 나라의 국력이 어떠한지 염탐하는 목적이 더 컸던 것입니다. 방문 목적을 은밀하게 감추었기에 그들에게 궁전과 나라의 모든 보물과 무기를 보여 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사의 하나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문제가 무엇인지 지적하기 위해 왕이 스스로 답하게 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들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고,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히스시야가 의식했든지 안 했든지 그 정도로 바벨론을 신뢰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낸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사 39:5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사 39:6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39:7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이사야가 하는 말은 선지자 자신의 정치적 견해나 비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하면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5절)라 하고, 또 선언한 다음에 “여호와의 말이니라”(6절)라고 분명하게 못 박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로 선포되는 말씀으로서 반드시 성취 될 것입니다. 그 말씀은 히스기야가 보여 준 모든 소유와 심지어 그 조상들 때부터 쌓아 둔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바벨론이 우호의 손길을 내밀지만 장차 그 손은 그들을 압제하고 약탈하는 손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이사야는 왕의 자손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7절). 이것은 왕권이 박탈되어 다윗 왕조가 붕괴되며, 결국 그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히스기야의 실책이 결정적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방을 의지하려다 결국 그 나라에 의해 망한다는 예고를 듣는 것은 후대에 뼈아픈 교훈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때 히스기야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사 39:8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히스기야는 좋은 말씀이라고 반응합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본인이 엉뚱한 것을 자랑해서 앞으로 유다의 모든 소유가 바벨론으로 옮긴바 된다고 하는데도 일단 자기 생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좋아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기주의자의 모습입니다. 그 다음 세대의 문제는 그때의 왕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유다의 우상숭배 같은 죄의 뿌리는 너무 깊어서 히스기야의 힘으로는 다 뽑을 수 없기도 합니다. 그러니 모든 죄를 다 뿌리 뽑는 것보다는 일단 봉합해 놓고 다음 세대에 가서 해결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경건했던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 바알 우상을 섬기기까지 최악의 왕이 될 수 있었는지가 바로 여기에서 설명됩니다. 히스기야는 분명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자였지만, 긴 안목이 부족했고, 하나님의 나라와 구속의 역사라는 큰 틀에서 자기 위치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신앙은 개인의 범주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후대에 전수되고, 주위에 전파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도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수하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장례식장에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녀들 중에 하나라도 믿는 자녀가 있다면 신앙이 전수된 것이지만 여러 자녀들이 있어도 믿는 자가 하나도 없다면 신앙을 전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 당시로 보면 신앙을 전수하지 못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단지 내 개인의 형통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세상의 복으로 부름을 받은 이후로(창 12:2),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흘려보내는 자로서 부름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매일 우리 성도님들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부모의 신앙이 자녀들에게 전수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능력을 체험하기까지 했던 히스기야도 신앙을 전수하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전수하고 전파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목사님..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