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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장 뒤편 언덕 숲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 도착한 한은 걸음을 멈췄다. 그의 뒤를 따라 걷던 이정민 등도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췄다. 한이 뒤에 붙어 있다시피 서 있던 김철웅을 보며 말했다.
"형님, 촬영 잘 하셔야합니다."
한이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살얼음판 같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이정민이 한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문석이하고 나는 뭐하냐?"
"형님들은 도망가려고 하는 자식들 있으면 한 대씩 쥐어 박으시면 됩니다."
한은 이정민에게 대답을 하며 속으로는 엠블런스도 불러야하는데 지금 부르면 나중에 작정하고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는 걸 들킬 염려가 있어서 부르지 못하는 겁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르는 장문석이 물었다.
"같이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들어가는 때부터 촬영 시작하시는 거 잊지 마시구요."
"알았다. 걱정마라!"
한이 김철웅을 쳐다보자 김철웅이 손에 들린 캠코더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한의 신형이 언덕을 돌아 사라지는가 싶더니 잠시 후 별장의 정문으로 오르는 길에 나타났다. 그가 나타난 곳은 CCTV가 촬영을 하고 있는 지점이어서 그에게 몸을 숨기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은 최대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사방으로 돌려 별장을 살폈다. 누가 봐도 이상한 행동이어서 이정민 등은 어떨떨하다는 얼굴로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장문석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정민에게 말했다.
"형님, 저 자식 왜 저래요? 완전히 나 형사요라고 광고하면서 가는데요?"
"뭔 생각인지 나도 모르겠다. 생각이 있으니까 저러고 있는 거겠지. 그냥 봐라!"
이정민은 자기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걸 물어보는 장문석이 밉살스럽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고는 입을 닫았다. 지금 그의 눈은 날카롭게 빛을 내며 한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가고 있었다.
언덕위에 있는 자신의 일행들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전혀 관심이 없는 한의 신형이 별장의
정문앞에 도착해 멈춰 섰다. 담장이 높으니 당연히 대문도 컸다.
양쪽을 열면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넓이였고, 황동으로 만들어 감청색의 도색을 한 듯 광택이 특이했다. 한은 대문의 기둥에 달려 있는 인터폰을 눌렀다. 곧 응답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경찰입니다. 이곳의 주인에게 볼 일이 있으니 잠깐 문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한은 인터폰에 달린 비디오촬영장치의 렌즈에 경찰신분증이 보이도록 펼쳐진 지갑을 들이대고는 말했다. 잠시 말이 없던 인터폰에서 같은 남자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 곳에서 마약 복용자들이 섹스파티를 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확인을 하려고 합니다."
"뭐, 뭐라구요? 어떤 미친놈이 그런 터무니없는 신고를 한단 말입니까?"
"신고가 들어오면 일단 확인을 해야하는 것이 경찰의 임무입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그런 말도 안되는 신고를 받고 온 거라면 문 열어 드릴 수 없습니다. 영장을 가져오십시오."
인터폰에서 나던 소리가 사라졌다. 사내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말만을 하고는 통화스위치를 내린 것이다. 한은 무심한 표정으로 잠시 인터폰을 보다가 대문쪽으로 신형을 돌렸다. 순순히 문을 열어주리라고는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니 실망할 이유도 없었다.
이 정도면 저들도 준비를 할 충분한 시간을 얻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마약에 취해 있는 놈들을 굴비두름 엮듯이 간단하게 데리고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저들을 곱게 모셔간다면 모든 혐의가 인정된다해도 일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받을 확률이 백프로였다.
그럼 길어야 한 달반에서 두 달이면 저 놈들은 사회로 복귀할 것이고, 그가 보았던 짓들을 반복할 것이 틀림없었다. 철창 구경했다고 개과천선할 놈들이 아니었다. 이정민의 말대로 개잡놈들인 것이다.
한의 몸이 대문에서 한걸음 물러섰다가 일보 전진했다. 그의 왼쪽 어깨가 맹렬한 기세로 잠겨있는 대문과 부딪쳤다.
"쾅!"
대문의 양쪽을 가로질러 놓았던 지렛대가 경첩에서 떨어져 나가며 벼락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대문이 양쪽으로 터져나가듯 열렸다. 정원에 있던 경호원 네 명이 뛰어와 한의 앞을 막고 별장의 현관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열린 현관으로 경호원들이 다 나오고 난 후 앳되어 보이는 젊은이들이 그 뒤를 따라 나왔
다. 한이 이층에서 그들을 보았을 때는 벌거벗고 있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한이 바라던 바였다.
그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기위해 지금까지 마음에도 없는 일을 했던 그였다.
그들의 눈은 아직도 초점이 흐렸지만 약간 멍청해 보이는 정도였다. 무슨 수를 썼는지 겉으로 보아서는 그들이 약에 취했다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니가 경찰이라고 해도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영장도 없이 무단으로 침입하다니. 네 놈 모가지가 아홉 개는 되는 모양이로구나!"
별장 안에서 나온 대장이라고 불렸던 자였다. 한이 그 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내 목이 몇 갠지 니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한의 음성은 중얼거리듯 나직했지만 정원 안에 있던 자들은 모두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평상시라면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일이었다. 한이 있는 곳과 현관의 거리는 10여미터가 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평상시의 정신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자들은 없었다.
별장안에 있는 이들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전명환은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려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상대는 혼자 몸이었지만 경찰인 것이다. 저자가 이곳에서 무슨 일이 행해지고 있었는지 알게 되는 경우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이다.
수습이야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이 약을 복용하는 것을 집에서 알게 된다면 매장당할 일이었다. 대화를 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 전명환의 입에서 나올 말은 뻔했고 그는 그 말을 뱉어냈다.
"저 자식을 죽여! 뒷산에 묻어버려라!"
전명환의 지시를 받은 경호원들의 눈이 살기로 가득 찼다. 마약에 취한 자는 이성을 유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본능에 충실해진다. 거기에 약기운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보통 사람의 몇 배에 달하는 힘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지금 이 별장안에 있는 자들 중 소량이라도 마약을 복용하지 않은 자는 없었다. 경호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뽕먹은 자식이 뚫린 입이라고 말을 막 하는구만!"
피식 웃은 한이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으며 고개를 비틀었다. 그의 앞에 서 있던 자의 주먹이 그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한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의 주먹이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퍽, 퍽, 퍽, 퍽"
안면이 함몰되는 소리가 연속으로 네 번 들렸다. 한의 앞을 장승처럼 막아섰던 경호원 네 명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사방으로 나뒹굴었다. 그의 주먹이 경호원들의 코뼈와 턱뼈를 한꺼번에 주저앉힌 것이다. 한의 주먹은 무쇠도 찌그러뜨린다. 그들이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잠깐 말 좀 하자!"
혼절한 채 바닥에 시체처럼 늘어진 네명을 둘러보던 한이 입을 열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에 대응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굳어져 있던 경호원들의 시선이 한에게 집중되었다.
"너희들이 마약을 복용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너희들은 현행범이야. 지금부터 체포과정을 시작하겠다. 묵비권과 변호사선임권이 있다. 단, 경호하는 니들은 열외다. 니들은 공무집행방해의 현행범이야. 나를 방해하면 안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물론 나를 방해할 것인지 아닌 지 판단은 너희들의 자유다."
한이 이를 드러내며 특유의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경호를 책임진 강우택은 그런 그를 보며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방금 보여준 상대의 솜씨가 심상치 않고 또 신분이 형사라해도 지금 그의 뒤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는 자들은 설사 저 형사를 병신으로 만든다해도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죽여도 좋다는 전명환의 허락이 이미 있었다.
"좆까구 있네. 큰 도련님이 죽여도 좋다구 허락하셨다. 저 새끼가 흙에 파묻히면서도 저럴 수 있나 한번 보자!
한의 말에 얼굴을 굳힌 강우택이 허리 뒤춤에서 재크 나이프를 꺼내어 펼치며 멀쩡히 서 있는 7명의 경호원들에게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남은 자들도 살기 띤 눈으로 한을 보며 각자의 무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날이 예리하고 강하기로 소문난 독일제 나이프였다. 새파란 칼날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개나 소나 칼을 갖고 있군."
앞에 늘어선 자들이 칼을 꺼내는 것을 본 한의 입에서 무심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의 눈은 가라앉은 채 경호원들을 보고는 있었지만 눈앞의 자들은 관심밖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