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 章 迷靈心眼功
"..."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은 한 때 동일한 뜻을 품고 굳게 맹세하던 눈이었다.
형제애로서... 송조의 마지막 황족의 피를 이은 황가로서...
그러나 지금 두 쌍의 눈은 각기 색(色)을 달리하고 있었다.
"왜...?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조문백은 한참후에야 그렇게 입을 열었다.
마침내 그는 황백을 찾은 것이었다.
조황백은 그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너는 짐의 어느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조문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있을 텐데..."
"..."
조황백은 한숨을 쉬었다.
그로서는 최대한으로 인내를 감수하고 있는 중이다.
"잘 들어라. 너는 나의 동생이기 전에 짐의 신하다. 그리고 대송제국(大宋帝國)의 군사(軍師)이기도 하다. 너는 그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문백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형님의 동생임이 더욱 소중합니다. 대송제국이던 무엇이던... 그 사실이 제게는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음성이 되어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미 황백과 자신의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천백의 죽음.
그것이 모든 것을 균열지게 한 것이다.
이때 황백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동생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백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패웅다왔다.
"너에게... 시간을 주마. 그러나 많이 줄순 없다. 언제건... 내가 부르는
시간에... 즉각 달려오도록 해라. 그리고... 그 이전에 네가 예전의 너로... 즉, 대송제국의 군사로 돌아올 것을 명한다!"
황백의 말이 끝났다.
조문백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는 아주 많은 말을 한 것이다.
(형님... 대체 본래의 나란 무엇입니까? 나조차 나를 모르겠소이다...)
그는 가볍게 예를 취하고 물러나왔다.
그가 나갈 때 다소곳이 서있던 설화는 고개를 떨구며 길을 비켜 주었다.
그가 나간 후,
"설화. 이리 오너라."
"네..."
설화는 말 잘 듣는 인형과 같은 여인이다.
그녀는 황백에게 다가갔다.
"네가 해 주어야 할 일이 있다."
황백의 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설화는 고개를 들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는 이미 황백의 눈과 표정에서 그 무엇인가를 느낀 듯 했다.
과연...?
궁단향은 패를 짚고 있었다.
딸그락, 딸그락...
그녀는 쉴 새 없이 패를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패는 매번 틀린 답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느끼는 것은 하나였다.
패가 불확실 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운(運)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것도 천운(天運)이 있어야 한다.
그녀는 삼패천의 사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보원들이 침투해 있기도 했으려니와, 방의경의 하오문 수하들의
공이었다.
하오문은 천하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그들의 무공은 비록 보잘 것이 없으나 그들의 다양한 직업과 방대한 인원이 가지는 조직력이나 소식탐지에 관한 능력은 개방을 능가하고 있었다.
방의경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뛰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온 힘을, 조직을 다하여 삼패천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기 위함 이었다.
최근 들어 궁단향은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조문백과 황백의 불화(不和)가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옥의 문이 열렸다.
들어서는 것은 화안봉이었다.
화안봉은 탁자 위의 수북한 보고서를 보고 콧등을 찡긋했다.
"어때? 향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어?"
궁단향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언니, 물론 기다리면 때는 오지요. 그러나 이제는 감이 잡혀요."
화안봉의 두 눈이 반짝 신비한 광채를 발했다.
"그 때가 언제지?"
"아직... 패가 자꾸 바뀌고 있어요. 아무래도 이상한 것은..."
궁단향은 미간을 살짝 찡그린다.
"패에 나타났다가 자꾸 사라지곤 하는 것이... 미령심안을 지닌 여인이 황백과 문백의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것이에요."
"...!"
화안봉의 안색이 변했다.
"그... 그렇다면 진짜 사성녀 중의 하나가 이미 삼패천에..."
"속단은 일러요. 그리고 제가 확신하는 것은 언니야말로 이제는 진짜는 다름 없다는 거에요. 설사 진짜 미령심안이 따로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빛을 잃은 상태랍니다. 더욱이 삼패 속에 있었다면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설명될 수 있어요. 그녀는 삼패의 기운에 가려져 정기를 잃고 있는 거예요."
"...?"
화안봉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궁단향은 계속 어려운 말만 하고 있었다.
"만일 제 판단이 틀림없다면... 더욱 잘된 일이죠. 비록 그동안 삼패에 눌렸다지만 그녀는 알게 모르게 삼패의 기운을 깎아먹고 있었을 테니까요."
"..."
"만일 언니와 그녀가 안팎으로 삼패를 잠식한다면 의외로 문백의 죽음은 빨리 올 수 있어요."
화안봉은 활짝 안색을 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하면 되지?"
"호호호... 준비하면 되요. 조만간에 변화가 올 거에요. 그 변화는 아마도 문백의 내부의 균열로 부터 시작될 거에요. 그때 언니가 나타나서 그의 심기를 흔들어 놓으면 되요."
"호호... 알겠어. 그런데 어떤 모습으로 할까?"
밤이다.
밤은 어디에도 온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가옥으로... 가옥에서 사람의 마음
속으로...
조문백은 어둠 속에 있었다.
그의 몸도 어둠이었고, 마음도 어둠이었다.
그는 영원히 햇볕이 들지 않는 곳이 있다면 바로 그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수정관은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수정관을 어루만지며 지금의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후후... 나 조문백이 이런 모습이 될 줄이야.)
그는 수정관의 싸늘한 감촉이 좋았다.
수정관 안에 누워있는 천백이 부러웠다.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는 자신은 죽은 듯 하고, 도리어 죽어 숨을 쉬지 않고 있는 조천백이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게 왠 일인가?
바로 그때다.
완벽한 어둠의 정적을 깨고 들려오는 소리는 그의 눈을 뜨게 했다.
"왕야..."
언제 들어왔을까?
방안에는 흰 옷을 입은 가냘픈 인영이 서있지 않은가?
"설화...!"
조문백은 부르르 떨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무... 무슨 일이냐?"
설화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리 완벽한 어둠의 신이라도 그녀를 잠식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도 설화는 눈이 부신 흰빛을 보이고 있었다.
옷도 희고... 피부도 희고... 그녀의 영혼도 희었다.
문득... 착각이었을까?
조문백은 눈을 크게 떴다.
설화가 옷을 벗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설화..."
그러나 설화는 말없이 옷을 벗고 있었다.
마치 운명인 듯 감내하면서 소리 없이 옷을 벗고 있었다.
방안은 어두웠으나 그녀의 백설같은 피부가 드러남에 따라 보석인 양 환하 게 어둠이 밀려가는 듯 했다.
조문백은 헛것을 본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분명 옷감이 흘러내리는 소리...
그리고 따스하면서도 은은한 여체의 육향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윽고 부드러운 여체의 선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무... 무슨 짓이냐?"
조문백은 부르르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설화는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조문백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졌다.
그의 등이 벽에 닿았을 때 설화의 나신도 그의 가슴에 안기고 있었다.
조문백은 현기증이 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안았다.
손에 닿는 감촉은 그를 황홀경으로 이끌었다.
얼마나 원하는 일이었나?
그는 밤이면 밤마다 설화를 그리며 잠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화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던 것은 그녀가 바로 황백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네가 나에게로 오다니...
그것도 네 발로...
조문백은 온몸이 활활 타는 것을 느꼈다.
혈관속을 맹렬히 치달리는 것은 바로 욕망! 그것이었다.
그는 황백이나 천백처럼 여인을 탐하지 않았다.
오직 그가 원하는 여인은 지상에서 단 한 명, 설화 뿐이었기에. 그동안 그는 다른 여인을 일체 품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남자였다.
수시로 타오르는 욕망을 발산하지 못하는 그의 가슴에는 한이 쌓이고 쌓여 있었다.
그런데 이제야... 그는 기적적인 듯 다가온 설화의 육체에 입술을 대었다.
만질 때마다 손이건 입술이건 미끄러질 정도로 부드럽고 향기로운 육신이었다.
"설화... 설화... 설화...!"
그는 미친 듯이 중얼거리며 설화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설화는 가만히 선 채 그의 애무를 받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뜨겁지가 않았다. 다만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런데 그의 입술이 설화의 소담스런 유방에 닿았을 때, 조문백은 그녀의 육체가 딱딱하게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부르르 떨었다. 스스로 원해서 안기는 여체라면 이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조문백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피는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있었다.
"설화... 묻겠다. 네게 원한 것이냐?"
"..."
설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순간 문백은 그녀의 대답을 들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했다.
"치워! 치우란 말이다! 크하하하하핫...!"
쾅!
조문백은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리더니 문을 부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안 것이다.
설화를 보낸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설화를 보낸 것은 바로 황백이었다!
황백은 그의 화를 설화로 하여금 풀게 할 생각으로 보낸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안 순간 조문백의 가슴은 엉망으로 상처를 입고 말았으며, 더이상 그의 냉정함도, 이성도 유지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으핫핫... 으핫핫핫핫...!"
조문백은 미친듯한 광소를 터뜨리며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삼패천의 본거지는 넓다.
황하 36채의 수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채에서 생활하는 인원은 가히 수천 명에 달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명령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워낙 방대한 인원과 조직이었기에 때로는 서로의 얼굴을 모르는 경 우도 허다하다.
소녀는 온통 흰 꽃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머리에도, 가냘픈 손에도 한 아름의 꽃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녀를 태운 가마도 온통 꽃으로 가꾸어져 있었다.
소녀는 가마에 탄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싫어..."
소녀가 고개를 저으며 애소하는 듯한 울음섞인 말을 흘렸을 때, 가마를 맨
여인들은 모두 고개를 돌리며 옷깃으로 눈시울을 닦고 있었다.
이때였다.
"으하하... 허허허..."
저쪽으로 부터 허탈한 웃음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는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조문백이었다.
조문백은 자신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가마를 보았다.
처음에는 무심코 눈길을 돌리려 했다.
그런데...
"...!"
가마를 타고 있는 소녀를 보았을 때 그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 설화!
하고, 그러나 그는 억지로 그 말을 삼킬 수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소녀의 모습은 설화와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느낌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의 가슴을 후려치고 있었다.
모습은 달라도 애처로운 분위기가 이상하게 남자의 마음을 흔드는 묘한 정서를 소녀가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마는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서라! 어디로 가는 것이냐?"
조문백이 가로 막자 여인들은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가마에 탄 소녀는 계속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조문백은 가마로 접근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고개를 들어 보아라."
"...?"
소녀는 고개를 들었다.
순간, 소녀의 온통 눈물젖은 눈망울이 그의 가슴에 화살처럼 와 박혔다.
(오오... 하늘이여!)
그는 부르짖고 싶었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설화처럼 그의 마음을 휘어잡은 여인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똑같은 분위기를 가진 소녀를 만난 것이다.
소녀의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문백은 부르르 떨었다.
"넌... 어디로 가는 것이냐?"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인중 하나가 말했다.
"폐하의 첩으로 가는 중이랍니다."
폐하의 첩으로... 폐하의... 폐하의... 폐하의...
윙윙 거린다.
조문백의 머리는 마구 헝클어지고 있었다.
이때,
"싫어... 싫어요... 난... 가고 싶지 않아요..."
소녀의 애소하는 듯한 음성에 조문백은 소리쳤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그러나, 가마는 그의 외침과 무관하게 나가고 있었다.
한 여인이 그를 지나치면서 말했다.
"이 지상에서 폐하의 명을 거역할 사람은 없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폐하의 명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죽음 밖에 없답니다."
폐하의... 폐하의...
조문백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저만치 소녀의 가마가 사라지고 있었다.
소녀의 애소하는 눈동자와 그 절박한 음성이 그를 얽어매고 있었다.
"안 돼!"
그는 모퉁이로 가마가 사라지는 순간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그가 급히 따라갔을 때는 어찌된 셈인지 가마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환영인가?
그러나 환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의 뇌리에 남아있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으후후... 후후후후... 으핫핫핫핫...!"
문득, 조문백은 실성한 사람인 양 광소를 터뜨리며 어디론가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한편, 그가 사라진 직후, 숲으로 부터 가마가 나왔다.
여인들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한 여인이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그가 눈치를 채지 못했으니..."
그렇게 말하는 여인은 바로 방의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마를 메고 있는 다섯 명의 여인들은 모두 방의경의 하오문
수하들이었다.
이때,
"악..."
돌연 가마에 타고 있던 소녀가 한 모금의 울혈을 토하더니 쓰러졌다.
"아니...?"
여인들이 놀라 소리 지르자 방의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두어라. 봉매는 짧은 순간에 평생의 공력이 담긴 미령심안공(迷靈心眼功)을 전개했기 때문에 기력이 소진되었을 뿐이야..."
아아... 그랬던가?
그렇다면 소녀야 말로 바로 화안봉이었단 말인가?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어딘가 불길한 느낌을 주는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