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 작가 목일신 / 김석수
지난 주말 고흥에 다녀왔다. 이순신 장군이 만호로 근무했던 발포 해안, 한센인의 한이 서린 오마도 간척지, 잘 보존된 읍성과 홍교, 화려한 분청문화 박물관, 고즈넉한 능가사를 돌아보는 일정이다. 도내 다른 군은 가 볼 기회가 많았지만 고흥은 내게 낯선 곳이다. 어릴 적에 말을 배우면서 신나게 불렀던 ’자전거‘, ’누가 누가 잠자나‘를 지은 분이 고흥 출신 동요 작가 목일신이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는 고흥읍 서문리에서 태어났다. 고흥 흥양보통학교 5학년 때 자전거 가사를 지었다. 1932년 기독교 어린이 잡지 ≪아이 생활≫에 발표했다. 전 국민 애창 동요 ’자전거‘는 훗날 우리 음악사에 길이 남았다.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목치숙 목사다. 그의 대표작에 나타난 순수한 감성은 자전거로 순회 목회에 나선 아버지를 인상 깊게 보고 느낀 것이다.
일본 간사이 대학을 졸업하고 매산중, 목포여중에서 근무하다가 서울 배화여고에서 1978년 정년퇴직했다. 그는 근대 어린이 음악과 문학의 선구자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동아일보에 동시 ’산시내‘를 발표하고 30여 년 동안 교사로 근무하면서 동요를 많이 지었다. 그의 작품 중 ’비눗방울‘이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 ’자장가‘, ’아롱다롱 나비야‘, ’산비둘기‘, ’참새‘, ’시냇물‘, ’물결은 출렁출렁‘이 음악 교과서에 실렸다.
옛 군청 자리 뒤 언덕에 하얀 벽돌로 지은 예배당이 있다. 해방 전에 일본 신사가 있던 곳이다. 아버지 목치숙 목사가 사역했던 읍교회다. 지붕 오른쪽 끝에 비둘기가 인상적이다. 어린아이 목일신이 부설 유치원에 다니면서 오르내렸던 언덕길 옆에 교회 정문이 있다. 그 문에서 내려다보면 고흥 읍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로 아래 동헌인 존심당, 그 맞은편에 고흥아문(高興衙門)이 있다. 동헌이란 조선 시대 각 행정 단위마다 중앙에서 수령이 파견되어 정무를 보던 곳이다. 지금까지 원형이 잘 보존된 곳은 우리나라에서 20여 곳인데 전남에서는 여기가 유일하다.
고흥군은 2009년 6월 종합문화회관 앞에 노래비를 세웠다. 자전거 형태 상징물이다. 아이들을 사랑했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다. 어른들은 그것을 보면서 동심으로 돌아간다. 아이들은 그가 지은 동요를 부르면서 꿈을 가꾼다. 비석에 약력과 함께 꽃과 나비를 새겨 동심을 표현했다. 받침대에 달과 별 무늬가 있다. 아마 나로도 우주선 발사대를 상징한 것 같다.
고흥 동초등학교에서 경찰서까지 목일신 문화예술 거리다. 고흥군이 전라남도 문화관광재단에서 주관하는 문화예술 특구 조성사업에 응모해서 만들었다. 찻길 옆 담벼락에 그의 동요를 쓰고 그림을 그려 놨다. 뭔가 조금 아쉽다. 1930년대 국민 동요 작가 거리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차분하게 작품을 감상하고 사진도 찍을 수 있는 곳에 만들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그 거리에서 자전거 동심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불현듯 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집에서 읍내 학교까지 시오리다. 처음에 걸어 다니다 중학교 2학년 올라가면서 자전거를 샀다. 비포장도로를 5년 동안 타고 다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전거는 내 친구다. 여학생들이 앞에 가면 길을 비켜 주라고 찌르릉찌르릉 소리를 내며 쌩쌩 달렸다. 언젠가 자전거 벨이 고장 나서 “따르릉따르릉 비켜나세요.”라고 했더니 애기라고 놀려 댔다. 그때 그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