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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19
2월28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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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바리사이들처럼 의무적이고 형식적인 단식 행위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 사회를 주름잡던 몇몇 부류가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식민 지배를 거부하며, 무장 투쟁까지 불사하던 혁명 당원들이 있었습니다.
사해 부근에 공동체를 건설했던 엣세네파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종교 행위를 인정하지 않고 유다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로마 제국의 압박에도 끝까지 율법을 준수하다가 몰락했습니다.
제사장이나 영주, 법률가, 거상 등 상류층 인사들로 구성된 귀족 그룹인 사두가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외의 것은 무조건 배척했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 영혼의 불멸,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거부했습니다.
중류 계층 사람들이 주요 구성원이었으며, ‘구별되다’는 의미를 지닌 바리사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지도 따르지도 않는 무식한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별하였고,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으며, 자칭 거룩한 자신들끼리만 상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에 낳은 계란을 먹어도 되는가? 안되는가?’ 같은 일생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일에 목숨을 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전까지 전국민적,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나름 하나의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들 각자의 신념 안에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해왔던 사람들이었는데, 단식과 관련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리사이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하루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단식과 관련된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오 복음 9장 14절)
예수님 시대 단식과 관련해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참으로 놀랍고도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율법의 규정에 따르면 일 년에 단 한 번 속죄의 날에만 단식이 의무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름 엄청 열심한 사람들이었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의 날 단식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틈만 나면 단식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여러 날들을 기억하고 애통해하며 단식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매주 두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명쾌하기 그지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로 세상 사람들 사이에 현존하시는 이 구원의 시기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면서, ‘단식을 무슨 얼어죽을 단식이냐?’며 반대로 기뻐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이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오 복음 9장 15절)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혼인 잔치에 손님으로 온 사람이 잔뜩 차려진 산해진미와 고급 포도주 앞에서 침통한 얼굴 하고 있으면 분위기 완전 망칩니다. 혼인 잔치 손님으로서 취할 가장 적절한 태도는? 혼인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과 함께 잔치를 즐기는 것입니다. 세상 가장 행복한 얼굴로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는 것입니다. 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하객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 즉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돌아가실 날, 그들은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분의 죽음에 참여하며, 그분이 재림하시는 날을 기다린다는 의미에서 단식을 실천합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의무적이고 형식적인 단식 행위로는 부족합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기꺼이 참여하고, 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과 함께 기쁘게 죽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이루어지는 단식이야말로 주님께서 기뻐하실 단식이며, 이번 사순 시기에 필요한 단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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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웃이 신랑처럼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으면 단식해야 할 때이다>
미국의 존 머레이는 한 푼의 돈도 헛되게 쓰지 않는 검소한 생활로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어느 날 머레이가 밤늦도록 독서를 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켜놓은 촛불 2개 중 하나를 끄고 정중히 할머니를 맞았습니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할머니는 겸연쩍게 말했습니다.
“선생님께 기부금을 부탁하려고 왔어요. 거리에 세워진 학교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조금만 도와주세요.”라며 간곡히 말했습니다. 그러자 머레이는 돕겠다는 대답과 함께 5만 달러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선뜻 거액을 기부하겠다는 말에 할머니는 깜짝 놀라며 “조금 전에 촛불 하나를 끄는 것을 보고 모금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거액을 기부하겠다니 기쁘고 놀라울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머레이가 대답했습니다.
“독서를 할 땐 촛불 2개가 필요하지만 대화할 때는 촛불 하나면 충분하지요. 이처럼 절약해왔기 때문에 돈을 기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절제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 절제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하느님은 절제하고 단식하는 것 자체로만은 칭찬을 해주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은 잘못된 단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단식은 나를 작게 만들이 이웃을 크게 보려는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웃을 판단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단식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을 작게 보고 자신을 찾아와주는 사람들을 감사하게 맞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기 위해 단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주 단식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단식은 자신을 작게 만들어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인데 이들은 단식하는 것으로 이웃을 판단하니 잘못된 단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커지는 단식은 거짓 단식입니다.
성녀 글라라 수녀는 부잣집 딸이었지만 수도원에 들어가서부터는 일부러 딱딱한 나무 침대 위에 잤으며, 목과 손목에는 꽤 묵직한 쇠 목걸이와 손목거리를 달고 잤다고 합니다. 한번은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에 대하여 그만 성이 나서 자기도 상대를 비판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 다음 순간에 클라라는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바늘로 혀를 두세 번 찔러 사흘 동안 말을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참다운 단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단식은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우리의 신랑이 아니실 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랑이신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신랑이시라면 나는 그분의 뜻을 따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행복할 것입니다. 누가 신랑이 함께 있는데 신랑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단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랑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웃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이웃을 심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신랑을 빼앗긴 상태입니다. 그러니 이웃 모두가 나의 신랑처럼 여겨질 때까지 어쩌면 우리는 꾸준히 단식해야 하는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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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14-15: 신랑을 빼앗길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한다고 거창한 말로 떠들어 대거나 창백한 얼굴로 뽐내며 지나치게 소문내고, 하느님의 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단식한다면, 그런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5절)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은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은, 그분이 함께 계실 때의 기쁨과, 그분께서 계시는 동안, 즉 마음의 빛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동안에는 누구나 거룩한 양식을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고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생명의 양식에 굶주리며 버려질 것이라는 말이다. 신랑을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을 책망하셨던 것은 그들이 하는 단식행위 자체만으로도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자신들 또한 ‘하느님께 이보다 더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하면서 자위하는 교만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들의 이러한 행위를 오늘 독서에서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이사 58,5)
이 말씀은 오늘의 모든 위선자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말씀은 하나의 경고이며, 그 당신의 그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두에게,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다운 단식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성경필사를 하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무수히 들어온 말씀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무심히 지나쳤고 법조문만 지키는 율법주의자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 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것이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적어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남에게 보이려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성서의 말씀과 같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는 단식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주님의 은총을 받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적어도 우리의 단식과 금육재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의 은혜를 청하며 기도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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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단식해야 하는 때가 언제인지를 다음과 같이 알려 주십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 때문에 체포당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신랑을 빼앗길 날’은 언제일까요? 혼인 잔치가 예수님과 우리의 참된 일치를 상징한다면, 신랑을 빼앗기는 순간은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현존이 사라진 순간이 아닐는지요?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정이나 신앙 공동체 안에서 사랑이 사라진 순간이 바로 신랑을 빼앗긴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이 세상에 당신의 삶 전체로 알려 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혼인 잔치”와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표현을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다면, “단식”에 대해서도 폭넓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저 음식을 먹지 않는 것만이 단식이 아니라,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단식이 있습니다. 자존심을 지나치게 내세우기보다 먼저 용서와 화해를 청할 수도 있고, 시간을 들여 다른 이들을 위하여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경솔한 충고나 자기주장을 말하기보다는 다른 이의 소리를 기꺼이 들을 수도 있고, 우리가 소유한 것들을 내놓아 자선을 베풀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단식들은 세상에서 사랑의 불씨를 다시 일으킬 것이며, 더 많은 이들을 예수님께서 초대하시는 참된 일치의 잔치로 불러 모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체중 관리나 건강을 위하여 단식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단식을 보여 줍니다.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우리는 그러한 단식을 실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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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랑을 빼앗길 날>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이 말씀에서,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시는 말씀인데,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은, 또는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은 메시아 예수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것과 같고, 따라서 ‘참회, 슬픔’ 등을 나타내는 ‘구약시대의 단식’을 할 이유가 없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손님들’이라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제자들은(신앙인들은) ‘손님’이 아니라 ‘주인공’입니다. 예수님의 혼인 잔치에서 ‘신랑’은 예수님이고, ‘신부’는 신앙인들이기 때문입니다.(2코린 11,2)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신앙인들은 ‘손님’으로서 남의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이 아니고, 잔치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잔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신랑으로, 자신을 신랑 친구로 표현한 적이 있는데(요한 3,29), ‘손님’이라는 표현은 세례자 요한이 한 말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생긴 표현일 뿐이고, 크게 중요한 뜻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라고 초대하시는 말씀으로, 또 기쁨을 함께 나누자고 초대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신부가 되어라. 나와 함께 기뻐하자.”라고 우리 각자를 부르시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부르심에(초대에) 응답하는 생활이고, 예수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생활이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죄를 지을 때’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말씀은, 원래는 제자들 입장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인데,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죄를 짓고 예수님을 떠나 있는 때”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예수님을 떠나 있는 것은, 죄라는 것에게 예수님을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단식’은, ‘기쁨’을 되찾기 위한 ‘회개’의 단식을 뜻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마주친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루카 23,28)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회개와 단식은,
“내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슬픔”을 나타내고, “내가 기쁨을 잃어버린 것은 내 탓이다.”라고 고백하는 일이고, 그 기쁨을 다시 주시기를 주님께 청하는 일입니다. 이 말에서 다음 시편이 연상됩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제게 온종일 ‘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느냐?’ 빈정거리니 낮에도 밤에도 제 눈물이 저의 음식이 됩니다. (시편 42,2-4)
이 시편의 표현 그대로 주님을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일, 그것이 ‘회개’입니다. 여기서 “제 눈물이 저의 음식이 됩니다.”라는 말은, 주님께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간절함’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도 없는 상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단식을 해야 하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지도 못할 정도로 슬프고 간절한 상태라서 자연스럽게 단식이 되는 것입니다. (슬픔이 너무 크면, 첫 번째로 나타나는 슬픔의 표시는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모상을 당했다든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픔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자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죄를 짓고 주님을 떠나 있는 일”은, 주님께서 우리를 쫓아내셨기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주님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내가 얼마나 멀리 갔든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간에 나를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이신 분입니다.(마태 18,12) 그리고 나를 찾기 전까지는 나 때문에 크게 슬퍼하시는 분이고, 나를 찾았을 때에는 크게 기뻐하시는 분입니다.(마태 18,13) (나의 슬픔보다 주님의 슬픔이 훨씬 더 클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는데, “주님과 함께 사는 기쁨”을 체험한 적이 없는 사람은, 또는 ‘신앙생활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은, 주님을 떠나 있는 슬픔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뻐했던 적이 없는 사람은 그 기쁨을 잃었을 때의 슬픔을 모를 수밖에 없고, 그리고 그 슬픔을 모르면, 주님과 함께하는 생활로 복귀했을 때의 기쁨도 모르게 됩니다. ‘기쁨 없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냉담자가 되고, 그랬다가 냉담 상태를 풀고 다시 신앙생활을 하고, 아무것도 바뀐 것 없이 또다시 기쁨 없는 생활을 하고, 그런 식의 반복은, 주님을 찾는 간절함이 없어서, 회개와 단식이 형식적인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회개’를 제대로 실천하려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무엇을 바라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는가? 그 첫 마음은 어떠했는가? 미신을 믿는 사람처럼 현세적인 복이나 빌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그냥 그런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신을 믿듯이 현세적인 소원만 비는 경우에도 소원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고, 그럴 때에도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는데, 그 기쁨은 신앙인이 누리는 영원하고 참된 기쁨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은 상태, 즉 속된 즐거움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속된 즐거움은 그 순간이 지나면 곧 허무하게 사라집니다. <많은 이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대단히 강렬한 ‘주님의 현존 체험’을 하는데, 그때 느끼는 기쁨과 평화는 세속의 속된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른, 인간의 언어로는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참되고 순수하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기쁨과 평화입니다. 그것을 체험한 사람은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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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 요한 신부님]
<참된 단식>
유다인들은 단식을 속죄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시하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이나 네페쉬’(영혼을 괴롭게 하다)라고 부르는 이것을 율법으로 정해 놓고 엄하게 명했습니다.
이외에도 국가적 재난이나 병들었을 때, 상을 당했을 때, 회개할 때, 위험에 임박할 때, 재앙을 기념할 때, 기근이 들었을 때 단식을 했습니다. 이러한 단식이 유다인들에게 강화된 것은 바빌론 포로생활 당시 희생제사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회개의 의미와 하느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의미에서 단식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에 앞서서 40일 동안이나 단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단식을 조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종교적 계율에 철저했던 그들의 단식은 회개하는 마음과 이웃사랑의 마음은 없고 오로지 자신들의 거룩함을 드러내려는 종교적 의무감에 따른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굶주린 이웃에게 줄 먹을 것을 마련하느라 2-3일 동안 단식했다고 합니다. 신앙인의 단식에는 참된 회개와 이웃사랑의 실천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나 타인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단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자신의 단식을 숨기라고 명하신 주님의 말씀을 새기며, 병자들과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끼니조차 거르신 채 밤늦도록 그들을 가르치고 고쳐 주신 주님처럼 단식해야 합니다.
이렇게 단식이 은총의 시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항상 기도가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않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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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군종사제로 임관하기 위해서 9주 동안 훈련받을 때의 일이다. 30도에 가까운 무더운 날씨에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었던 각개전투훈련이 끝나고 야외훈련장으로 배식된 밥과 뜨거운 된장국 앞에서 나는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흙먼지로 뒤범벅이 되어 있던 나는 밥보다는 시원한 냉수가 그리워 눈치를 보고 있자니 “밥맛이 없으면 입맛으로 먹고 입맛이 없으면 밥맛으로 먹어라!”며 훈육대장이 소리치며 나를 노려보았다.
먹는 즐거움과 배고픔의 괴로움도 이처럼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은혜로운 때’인 이 사순절엔 먹는 괴로움과 배고픔의 즐거움이 주어졌으니 이것이 바로 ‘단식’이다.
단식은 절제를 말하며, 절제는 겸손을 가져온다. 하느님의 백성, 곧 교회 공동체의 단식에 관한 전통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는 하느님께 자신을 열어 보이기 위해 40일 동안 단식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느님 앞에 겸손과 자기 포기라는 신심을 보일 수 있었다.
신약에 와서 예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40일간 광야에서 단식을 하셨다.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으로부터 공적 직무에 힘을 얻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이 단식은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단식의 내용도 중요하다. 단식의 시기는 혼인잔치에서 신랑을 빼앗기는 순간부터임을 복음에서 언급하고 있고, 단식의 내용은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고 있다(이사 58,6-7).
결국 우리는 단식에 대하여 다음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 예수께서 마련하신 혼인잔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음식이 차려졌는가를 보기보다는 신랑의 얼굴을 보고 신랑의 마음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단식은 자신에 대한 절제와 극기의 상징이고, 기도는 내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 알게 한다는 것이다.
단식과 기도의 결과가 자선으로 이어지기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단식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의 단식, 욕망의 단식, 날카로운 혀, 타인에 대한 비방과 비난의 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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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나바호 원주민 할아버지와 대화하였습니다. “할아버지의 꿈, 희망은 무엇입니까? 할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50년 전에 물어보았다면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할아버지의 삶을 이야기 해 주세요? 할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사는 땅에 많은 사람이 왔다. 영국, 폴란드, 슬로바키아, 스페인 사람들이 왔다. 그들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우리와 친교를 맺으러 오지 않았다. 그들은 땅과 재산을 빼앗으러 왔다. 우리는 그들에 의해서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다. 마치 유대인의 홀로코스트처럼, 일본에 의해서 끌려갔던 사람들처럼 우리는 가는 도중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 미국 정부는 우리에게 살던 땅으로 돌아오게 했다. 의료와 교육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우리는 더 이상의 항의나 투쟁을 하지 않기로 했다.” 미국의 동부에서 서부로 철도를 연결하면서 많은 사람이 왔습니다. 그들에게 원주민은 어떤 대상이었을까요? 원주민들에게서 땅을 빼앗아도 되고, 원주민들이 가진 것을 빼앗아도 되고, 마음에 안 들면 원주민들을 쫓아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주민들의 문화, 원주민들의 철학, 원주민들의 삶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먼 이국땅으로 여행 왔던 사람이 고향에서 보던 나무와 비슷한 나무를 보고 향기를 맡아보았지만 향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돌아와서 원주민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흠, 저 나무는 고향의 나무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향기가 없네!’ 그러자 원주민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갑자기 다가와 묻지도 않고 냄새를 맡으면서 실망한 표정으로 저 나무는 향기가 없다.’라고 말하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이 땅에 머무는 모든 것은 다 나름대로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겁니다. 향기를 맡으려고 했으면 먼저 나무에게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기계를 만들고 무기를 만들어 땅을 빼앗고, 재산을 빼앗고, 원주민들을 사막으로 쫓아낸 사람들은 종교가 있었고, 풍요로운 삶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문화와 종교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었을까요? 자연과 함께 소박하게 살면서 땅, 구름, 공기, 꽃, 새, 사슴과 대화하며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의 문화와 전통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었을까요?
원주민 할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프란치스칸 수도자들이 왔고, 그들은 원주민들의 삶을 이해하였고, 학교를 세웠다. 원주민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려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원주민들에게 자신들의 문화와 삶을 소개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해 한 걸음씩 나갔다. 이해하니 마음이 열렸고, 마음이 열리니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하니 희망이 보였다.” 오늘 독서는 참된 단식의 의미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참된 단식은 흡수와 통합이 아닙니다. 찬된 단식은 이해와 사랑입니다. 배려와 존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단식에 ‘무엇을 채우는가!’입니다. 나의 몸을 채우는 것이 ‘사랑, 자비, 희생, 나눔’이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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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친구로부터 지난 설날 아침에 좋은 글을 받았습니다.
“새해에는 꽃처럼 웃고 새처럼 노래하고 구름처럼 자유롭고 하늘처럼 평화로웠으면 좋겠습니다.”
꽃은 어두운 땅 속에서 양분을 끌어 올리는 뿌리가 있기 때문에 웃을 수 있습니다. 새는 둥지 하나에 만족하기 때문에 노래할 수 있습니다. 구름은 자신의 틀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늘은 모든 것을 품어 주기 때문에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신앙과 신심행위는 비슷한 듯 다름 점이 있습니다. 사목국에 있을 때입니다. 사목국 신부님들은 양평의 한화콘도로 연수를 가기로 했습니다. 신부님 한 분이 일이 있어서 나중에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은 착각하였습니다. 우리가 용인에 있는 한화콘도로 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운전 중에 성가를 듣고, 묵주기도를 하였지만 결국 도착한 곳은 용인에 있는 한화콘도였습니다. 용인에 있는 한화콘도에서는 다른 신부님들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늦은 밤에 양평의 한화콘도로 와야 했습니다.
우리가 요즘 많이 이용하는 내비게이션도 정확한 목적지를 입력해야 합니다. 아무리 기능이 좋은 내비게이션도 목적지를 정확하게 입력하지 않으면 결국은 다른 곳으로 안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스페인에서 운전할 때입니다. 대충 비슷한 주소를 입력했더니, 제가 원하는 호텔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주소를 정확하게 입력하지 않았던 저의 실수 때문에 친구와 저는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설 연휴에 가족들이 모여서 음식을 하고, 차례를 지내고, 세배 돈을 드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가족들이 모여서 남을 험담하고, 지난 일로 서로 다툰다면 신심행위는 하지만 신앙심은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신앙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우리들 또한 증거하는 것입니다. 신심은 그런 신앙생활을 잘 하기위한 우리들의 마음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순시기에 하는 ‘십자가의 길 기도’는 신심행위입니다. 묵주기도, 성체조배, 9일기도와 같은 것들도 신심행위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본래 추구해야할 신앙생활과는 멀어지는 신심행위가 있습니다. 신심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신심행위를 통해서 나와 나의 가족들이 모두 건강하기를, 모두 성공하기를 바라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스카풀라와 기적의 패’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들의 본래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겠다는 다짐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치 일종의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만 있어도 건강해지고, 성공한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분명 신앙을 위한 신심행위는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생각할 수 없듯이 신앙은 분명 우리들의 희생과 나눔 위에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바로 그런 우리들의 신앙과 신심을 바로 잡아주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그릇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그릇에 무엇을 채우는 가입니다. 나의 몸을 채우는 것이 ‘사랑, 자비, 희생, 나눔’이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신심 행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배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노를 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신심행위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향해서 나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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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단식>
마태오 9,14-15 (단식 논쟁-새것과 헌것)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
먹은 것보다
조금 더
먹히는 것
받은 것보다
조금 더
내어주는 것
누리는 것보다
조금 더
베푸는 것
조금 더
먹히고
조금 더
내어주고
조금 더
베풀어
네가 있도록
내가 없어지는 것
내가 살도록
그분이 죽으셨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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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 예수님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미사가 중단된 지 어느덧 3일째입니다. 바로 그 시점에 이와 관련된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베스트 댓글이 다음과 같았습니다.
“흥선대원군도 못해낸 걸 신천지가 해내네”.
흥선대원군은 1866년부터 1871년까지 조선 최대이자 최후의 박해인 병인박해를 주도한 인물입니다. 이로 인해 약 8,000명의 순교자가 탄생하던 힘든 시기에도 숨어있는 사제들과 신자들에 의해 미사는 계속되었는데, 이 미사가 멈추었다고 하니 농담조로 누군가가 댓글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측면에서 이 댓글은 사실 잘못된 댓글입니다. 비록 신자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미사는 멈추었지만 모든 사제들이 각각 홀로 계속해서 미사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성당에는 세 명의 사제가 있는데 미사가 중단되던 날 가장 먼저 한 것이 각각의 방에서 드릴 미사 도구와 제병을 챙기는 것이었습니다.
이 미사는 비록 사제 혼자 거행하지만 개인을 위한 미사가 아닙니다. 현재 혼란에 빠져있는 이 세상을 위한 미사이며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미사입니다.
그러므로 미사를 드릴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각자 홀로 심연에 잠겨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제들에 의해 미사는 계속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한편, 매일 혹은 매주 드리던 미사를 드리지 못함에 허전하고 안타까운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신자분들과 아이들과 함께 드리던 미사가 중단되었음에 참으로 마음이 허전합니다.
실제로 저는 혼자서 하는 미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유학 기간에 혼자 미사를 드리는 것이 허용되지만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미사가 좋아서 되도록 공동 집전자가 많은 미사, 신자들이 많은 미사에 어떻게든 참여하러 애쓰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는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이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한국에 온 뒤 평범한 일상이라 생각했던 신자분들과 함께 드리던 미사, 마당에서 뛰어 놀던 아이들의 목소리, 사제관 밖에서 들리던 청소년들의 웃음 소리와 교사들을 비롯한 여러 단체들과의 회합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껏 지내온 날들이 두려움과 걱정이 별로 없었던 평온한 일상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좋은 것을 갖고 있을 때 미처 모르고 있다가 지나치고 나서야 그것이 소중하고 특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잘 터지던 핸드폰이 작동이 안 되면 그것의 유용함을 깨닫게 되고 평소에 신던 신발이 망가져야 그것의 편안함을 알게 됩니다. 조금만 더 소중히 생각할 걸 후회해 보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 경험을 한 번 쯤 해보셨을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들은 단식을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이 비유 안에서 혼인 잔치의 손님들은 제자들을 의미하며 신랑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살아있는 동안에 단식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구원을 전달하는 메시아가 왔으니 기뻐하고 환호하며 그의 이야기를 향유할 때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언젠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즉 세상의 죄와 악에 그 신랑이 죽임을 당하게되면 그때에는 단식하며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 예언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임을 당한 뒤, 그전까지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예수님의 자애로운 음성, 때로는 엄중했던 가르침, 빵을 나누어 주시던 따뜻한 손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음에 탄식하고 후회하며 단식을 행할 것입니다. 물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금 생기를 되찾을 것이지만 말입니다.
공교롭게도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첫 날, 우리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바이러스로 인하여 모든 미사를 멈추게 되었습니다.
죄 많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진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함께 슬퍼하는 시기인만큼 우리는 이 시기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을 안타까워 합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을 빼앗긴 제자들의 마음으로 우리가 평범하게 드렸던 미사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영했던 성체의 기쁨을 되새기며 어서 예전의 평범한 날들이 다시 다가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순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 많은 인간으로 인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여기서 죄 많은 인간이란 다른 누구도, 혹은 어떤 단체도 아닙니다. 지금 강론을 읽고 있는 바로 각각의 ‘나 자신’, ‘나 하나’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살았고 그분의 사랑을 당연한 것이라 여겼으며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했고 싫어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슬픔과 고통으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고 좌절하지도 마십시오.
오늘 독서에서 나오듯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다시금 부르는 이들에게 ‘나 여기 있다’라고 속삭여 주시는 성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족하게나마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을 알아보고 기억해 주시는 의롭고 정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순간순간,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돌보시며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가도록 도와주십니다. 특정한 종교 단체들의 어리석음, 이기적인 인간의 행동들 걷잡을 수 없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두려움과 증오로 신음하고 아파하시면서도 가련한 우리들을 덮어주고 맞아주시는 사랑의 신랑이십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신랑으로 오시어 사랑을 선사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그분의 모범을 기꺼이 따를 수 있는 은총을 청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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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저 두레박 사제는 큰 소리로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고운님들)과 함께….”
“고통과 어려움 속에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
자애로우신 주님께서 코로나 19로 고통과 어려움 속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의 마음에 성령의 깃발을 꽂으시어 뜨거운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고통을 묵상하며 단식과 금육을 지키는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입니다.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이제 그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지금 코로나 19로 고통받고 있는 분들에게 바싹 다가와 계십니다.
“그 신랑을 통해, 코로나 19로 고생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공무원들과 의료진들이 너무 힘들어도 조금만 더 견딜 수 있는 주님의 위로를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신랑을 통해, 코로나 19로 봉사하고 희생하는 분들, 그리고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이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구약의 “코헬렛” 3장 1-15절에 보면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으면 기뻐 뛸 때가 있다.”
코헬렛의 저자는 신랑을 통해 받게 되는 위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너는 기뻐하며 빵을 먹고 기분 좋게 술을 마셔라. 하느님께서는 이미 네가 하는 일을 좋아하신다. 네 옷은 항상 깨끗하고 네 머리에는 향유가 모자라지 않게 하리라.”
성경에서 특히 바오로 사도가 강조하는 기쁨은 “고통 속에서도 미소 짓는 기쁨” 입니다.
시편 30장 12-13절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당신께서는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고 저의 자루 옷 푸시어 저를 기쁨으로 띠 두르셨습니다. 이에 제 영혼이 당신을 노래하며 잠잠하지 않으오리다. 주 저의 하느님, 제가 당신을 영원히 찬송하오리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은 똑같으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똑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느님께 불평하고 모독하며, 또한 다른 사람을 욕하고 비방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똑같은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찾으며 그분께 기도하며 찬양합니다. 사람에게는 무슨 고통을 당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당하는지가 문제입니다. 똑같은 바람에도 쓰레기는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꽃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깁니다.”
그래서 고운님들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일 때는 조금 더 기다리는 여유로운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십자가를 통해 큰 공로를 쌓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는 “함께 하기 위해 조금 더 참고 기다려주는 여유”입니다. 주님께서 코로나 19로 어렵고 힘들게 지내는 분들에게 은혜로운 말씀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누구보다도 너희를 사랑한다. 도와준다. 지켜준다. 그리고 치유해 줄게.”
저 두레박 사제는 언제나 그랬듯이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과 간호하는 분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주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고운님들)과 함께….”
“고통과 어려움 속에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
코로나 19로 인해 겪는 저희의 슬픔이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기쁨으로 바뀌는 기도를 하면서, 이제 조금 더 참고 기다리면서 고운님들의 몸과 마음에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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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21)
♧♧ 시편 75편 6절…
"너희 뿔을 높이 쳐들지 마라. 고개를 치켜들고 무례하게 말하지 마라."
‘고개를 치켜들고 무례하게 말하지 마라.’ 라는 구절은 5절의 ‘뿔을 쳐들지 마라.’와 대구를 이루는 같은 뜻을 이룬 말씀입니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거나 치켜드는 것은 사람 앞에서는 물론 근본적으로 하느님 앞에서 거만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욥기 15장 25-26절. 참조) 이들은 대개 ‘하느님이 없다.’라고 말하며(시편 10편 4절. 참조), ‘하느님이 어찌 알랴’ 하며(시편 73편 11절. 참조), 주님께 충실한 이들을 핍박하며 괴롭히기 일쑤입니다.(탈출기 32장 9절, 33장 3절, 34장 9절. 신명기 9장 6절과 13절, 10장 16절, 31장 27절. 참조) 그러나 저들이 치켜든 고개가 부러지듯이 멸망하고 말 것이니, 이는 정의의 하느님께서 그 모든 행위를 살펴보시고 계시어 결코 악을 알고도 모르는 체하고 그대로 넘기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 시편 75편 7절…
"해 뜨는 데서도 해 지는 데서도 아니요. 산속 광야에서도 오는 게 아니니."
해 뜨는 데서는 동쪽이고, 해 지는 데는 서쪽이요. 그리고 산속 광야는 남쪽으로 온 세상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북쪽에 관한 언급이 없음은 북쪽에 위치한 아시리아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기 위함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아삽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아시리아는 물론 이 세상 그 누구도 스스로를 높이거나 구원할 수 있는 권세를 지니지 못하며, 오직 그 같은 권세는 하느님만이 지니고 계신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8절. 참조) 이는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거만하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높여 주심은 단순히 존귀하게 여김을 받거나 권세를 얻게 되는 것 뿐 아니라(시편 99편 2절, 104편 8절. 참조)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 시편 75편 8절…
"오직 하느님만이 심판자. 어떤 이는 낮추시고 어떤 이는 높이신다."
* 오직 하느님만이 심판자...
하느님이 이 세상 모든 이들을 살펴보시어 그 행위를 지켜보시고, 결국 그 행위대로 보응해 주시는 분이심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는 의인이 비록 고난을 당하나 기뻐할 수 있고, 악인이 일시적으로 평안하나 부러워할 것이 못 되는 이유를 말해 줍니다. 하느님의 정의로(창세기 18장 21절. 시편 20편 7절. 베드로 1서 2장 23절. 요한 묵시록 16장 7절. 참조)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시어(코헬렛 3장 17절. 참조) 의인에게는 영생의 축복을 주시며, 악인은 영원한 벌을 받을 것이니 그 같은 사실을 믿는 주님께 충실한 이들은 희망 중에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2장 48절. 참조) 결국, 아삽은 여기서 악인은 스스로 거만하게 행동하거나 하느님을 대적하지 말고 속히 돌이켜야 할 것임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시편 50편 6절, 89편 6절, 97편 6절. 요한 묵시록 16장 5-7절, 19장 2절. 참조)
* 어떤 이는 낮추시고 어떤 이는 높이신다.
이 구절은...사람이 높여지거나 낮추어지게 되는 것, 흥하거나 망하게 되는 것 등이 모두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죽고 사는 근본 문제가 절대적으로 하느님께 달려 있으니, 인간이 그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사랑하고 경외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루카 복음 12장 16-21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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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좋은 대학에 들어간 친구가 있다면 기억해 보십시오. 그 친구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마 대부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공부 잘하는 애?”
제 학창 시절 친구 중에도 우리나라 최고 대학이라 할 수 있는 서울대에 들어간 친구가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만나 이 친구를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다들 “아~~ 공부 잘하는 애?”라고 기억합니다.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우연히 이 친구를 만나 술 한 잔했던 적이 있습니다. 술을 전혀 못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노는 것을 전혀 못 하고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엄청나게 잘 놀았습니다.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개그맨처럼 웃긴 말도 많이 했습니다. 단순히 ‘공부 잘하는 애’가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 생각에는 한 모습만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한 모습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이럴진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어떻겠습니까? 단 하나의 모습만 있을까요? 우리의 작은 머리에 하느님을 담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자기 생각이 전부인 것처럼 판단하고 이러쿵저러쿵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말합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이를 혼인 잔치에 비유해서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 와서 단식하고 슬퍼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혼인 잔치의 주인이 이 땅에 와서 혼인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의 주인이십니다. 따라서 이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제자들은 왜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일까요?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자신들의 스승인 세례자 요한의 경쟁자 정도로 봤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이 땅에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인간과 똑같은 육체를 취해서 오신 것은 물론이고, 화려한 궁전이 아닌 초라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이신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모습을 직접 보여주신 것은 우리 역시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다양한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내 생각을 뛰어넘는 주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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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부터 시작되는 세상>
심리학자 밀그램은 전혀 모르는 사이인 미국 사람이 여섯 단계 정도라는 짧은 인간관계의 사슬로 연결될 수 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수억 명의 많은 사람이 살고있는 미국에서 생면 부지의 두 사람이 기껏 몇 단계면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학자 던비의 연구 결과와도 연결됩니다. 한 사람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의 수는 대략 150명 정도인데, 편의상 100명으로 잡아서 한 사람이 100명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중간에 한 사람을 넣어서 두 단계에 소식을 전달한다면 100 X 100이 되어 1만 명이 됩니다. 같은 방법으로 세 단계면 100만 명, 네 단계면 1억 명, 다섯 단계면 100억 명이 됩니다. 전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은 원칙적으로 나로부터 다섯 단계면 모두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라 너무나 가까운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모두가 중요합니다. 기쁨이 전달되는 세상이 되길 원한다면 나로부터 그 시작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이 가득한 세상이 되길 원한다면 나부터가 사랑해야 합니다. 남부터 시작되는 세상이 아닌 나부터 시작되는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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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수행자의 삶>
-'생명을 보살피는 사랑'이 답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참으로 오랜 만에, 아니 생전 고요한 분위기에서 지냈습니다만 마음은 내내 편치 않았습니다. 죽음과 같은 침묵의 분위기 같다고 할까요, 흡사 전쟁중인 느낌도 들었습니다. 사실 경북-대구 지역은 코로나 19 전염병과 치열한 격전激戰중입니다.
보이는 적보다 더 무서운, 참으로 대책이 힘든 자연의 역습의 보복과도 같은 이런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입니다. 이제 우리의 회개는 우리 인간은 물론, 자연도 함께 사는 생태적 회개에 까지 이르는 전방위적 회개이어야함을 깨닫습니다. 어제 읽은 기사도 나눕니다.
“2018년 한 해동안 노동현장의 사고 사망자 수는 971명, 산재로 죽은 노동자는 2142명, 자살로 숨진 사람은1만367명이었다. 비정규직 하청노동자의 노동현장은 바이러스 감염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작년 한 해 동안 도축된 돼지는 1800만 마리, 닭은 무려 10억 마리에 이른다.
이 세계가 켜켜이 쌓이는 죽음 위에서 만들어지는 풍요로운 세계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누적된 불안이 임계점에 다다르면 미칠 듯이 터져나와 때릴 곳을 찾기 마련이다. 광기는 언제나 약한 곳을 향해 터져나간다. 그 마지막에 파시즘과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재난이 일상을 중단시키면 우리가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 존재인지 생각하게 된다. 이 재난은 함께 살자는 물음을 가지고 돌아오는 추방자들의 귀환이자, 일상을 중단 시키는 ‘자연의 파업’인지도 모른다. 그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면 자연은 더욱 강력한 경고를 보낼 것이다.
과잉생산, 과잉소비, 거대한 낭비위에 굴러가는 성장의 경제를 멈추지 않으면 재난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너무 오래 감염되어 있다.”
참으로 전방위적 회개를 촉구하는 온세계가 직면한 절박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코로나 19의 사태를 통해 ‘원헬스(One Health;전 세계 사람-동물-환경의 건강이 밀접히 연결돼 있다는 개념) 시대에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햇빛, 공기, 물, 땅이 오염되어 있는 환경에서 사람도, 동물도 건강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오염과 재앙의 중심에 사람이 있습니다.
새삼 작금의 위기 현실을 통해 참된 회개와 더불어 참된 수행, 참된 단식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침 제1독서 이사야서의 소주제 역시 참된 단식입니다. 참된 단식에 앞서 참된 수행에 대해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수행 자체가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는 자각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 주일 미사는 물론 모든 활동의 중단을 단행한 한국 가톨릭 교회의 현명한 결단을 통해 새삼 모두가 ‘생명을 보살피는 사랑’의 절대적 가치 앞에 상대화되는 대상들임을 깨닫습니다. 구체적 수행으로, 즉 전례, 기도, 침묵, 자선, 주일준수, 규칙준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 실천으로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말많은 직업의 사람들에게 침묵은 필요하지만 말없이 외롭게 지내는 독거 노인들은 침묵이 아닌 말을 해야 합니다. 잘 먹어 영양과잉의 사람들에겐 단식은 정말 필요하니, 그래야 배고픈 이들과 연민과 유대감을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고픈 이들이나 육체 노동자들은 단식이 아니라 살기 위해, 일하기 위해, 잘 쉬고 잘 먹어야 합니다. 참으로 힘들게 쉴사이 없이 일하는 이들은 기도가 아닌 심신의 휴식이 필요합니다. 자선도 있는 자들은 반드시 해야 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수행이, 계명이나 율법, 규정, 법규 모두가 다분히 상대적임을 깨닫습니다. 절대적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있다면 단 하나 ‘생명을 보살피는 사랑’뿐입니다. 사랑이 절대적 분별의 잣대입니다. 사실 참된 수행은 모두가 사랑의 표현이요, 참된 수행은 사랑의 실천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모든 계명이나 율법 역시 사랑의 정신이 그 중심에 자리합니다.
예수님이나 예언자들은 단식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무분별한 생각이 없는 획일적 단식을 거부했습니다. 단식을 한다하면서 구체적 이웃사랑의 실천에 소홀한 이들을 꾸짖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은 얼마나 통쾌한지요!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며 숨는 것이 아니겠느냐?”
얼마나 통쾌한 직격탄 같은 말씀인지요! 아마 오늘날 같으면 예언자의 관심의 범위는 더욱 확장되어 사람은 물론 자연과 동물, 식물등 모든 피조물들에게까지 미칠 참된 단식의 정신이겠습니다. 널리 깊이보면 수도원 경내에서 함께 살아가는 개들과 고양이들, 다양한 종류의 무수한 새들 역시 사랑으로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생명들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말씀은 참된 단식뿐 아니라 참된 회개와 참된 수행에 따른 축복의 약속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 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이사야 예언자의 참된 단식의 정신을 고스란히 이어 받은 예수님이심이 분명합니다.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에서 보다시피 예수님은 모두로부터 참으로 자유로웠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 유일한 판단의 잣대는 생명을 보살피는 사랑, 하나뿐이었습니다. 참된 단식이나 참된 수행의 거부가 아닌 사랑이 없는 무분별한 단식이요 수행들에 대한 가차없는 질책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요한의 제자들의 영적 시야가 얼마나 협소한지 깨닫습니다. 고작 제기한 물음이 자기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단식 자체의 수행이 절대가 된 자기도취의 단식의 수행, 예수님 보시기엔 참으로 답답했을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습관화된 단식의 프레임에 고착되어 굳어진 이들, 오늘말로 하면 꼰대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참으로 유연하고 지혜롭습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축제인생 맘껏 누리고, 단식의 때가 되면 바로 그때 지체없이 단식하라는, 단식에도 분별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참된 단식의 정신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단식, 감쪽같이 숨겨진 겸손한 단식이 절실한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영양결핍이 아니라 영양과잉 시대에 병도 많고, 마트에 가도 온통 먹을 것뿐이요, 배달되는 택배도 대부분 식품들이고, 도처에 널려 있는 참 많은 식당들입니다.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는 얼마나 많은지요!
참된 회개, 참된 수행, 참된 단식을 실천해야 하는 사순시기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사순시기 깨어 절제, 자제, 극기중에 참된 사랑의 수행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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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단식은 왜 하나요?>
저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아침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늘 단식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재의 수요일이나 성 금요일에 지켜야 하는 단식재를 별도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절제와 희생,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보속의 마음으로 매일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찮아서, 건강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먹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인의 단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어떤 분은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가보니 금요일이고 고기국이 준비가 되어서 곤란했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심지어 마음에 걸려서 고기는 먹지 않고 국물만 마셨다고 하시며 고해성사를 보시는 분이 계시고, 모처럼 귀한 손님이 와서 음식점에 가서 불고기를 맛있게 먹고 보니 금요일이기에 성사 보러 왔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럴 때 고해성사를 봐야 하나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그것에 죄책감을 갖지 않고 다른 날을 정해서 금육재를 지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행으로 몰라서 궐했으니 죄를 모면 했다고 좋아하고 넘어가는 신자라면 미성숙한 신자입니다.(정하권) 진정 깨어 있는 사람은 그 법의 의미를 생각하고 내용, 알맹이를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법이나 규정 안에 녹아있는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마태9,14).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슬퍼할 수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혼인 잔치에 온 친구들이고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즐겁고 기쁘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직면하게 될 때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질을 흐리는 모든 벽을 허물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법의 내용을 지킬 수 있는 성숙함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적인 단식을 통하여 내면의 성숙을 가져와야 합니다.
마리아 사제운동에서는 “마음의 단식은 너희 자신과 재물과 피조물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에 대해 마음을 닫아걸고 경계함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빵과 물만 먹고 단식하기보다 혀를 억제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고 영적인 단식을 강조하셨습니다. 단식과 희생은 영혼을 단련하는 것입니다. “욕망의 군살을 빼고 선한 의지의 근육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단식을 통하여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단식의 생명은 자비로움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단식은 우리를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단식하는 이들은 그리스도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부터 배고픈 이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기울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따라서 단식을 통하여 모아진 정성은 반드시 이웃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 맺는 단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많이 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있을 때 잘해!”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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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말씀은 단식 이야기입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마태 9,14)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단식은 굶는 행위입니다. 먹는 행위를 통해 인간은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식욕과 쾌락을 충족합니다. 이를 일시적으로 끊음으로써 자기 욕구를 다스리는 고행을 통해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가 곧 단식의 일차적 의미입니다.
"많이"
그들은 단식을 수량으로 매겨서 표현합니다.
좀 더 자주 굶는다는 뜻도 되겠고 그만큼 욕구에 초연한 의인임을 은근히 드러내는 자기 과시도 되겠지요.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의미로 단식에 접근할 때 가능한 표현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우문현답입니다. 예수님 답변에 등장하는 "단식"은 문자적으로는 앞의 질문의 "단식"과 같은 형태이나, 그 속뜻은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 제게는 이 "단식"이란 말씀이 "사랑"이라고 들렸습니다.
그 이유는 제1독서에 드러납니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이사 58,5)
주님은 "눈 가리고 아옹"하는 형식적 단식을 혐오하십니다. 마음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자비와 정의, 사랑 없이 굶으며 고행한들 주님께는 역겨운 쇼에 불과합니다. 사람 눈에는 그럴듯해 보일지 몰라도 주님 눈에는 어림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
주님은 해방과 자유, 나눔과 환대, 연민과 자선이 당신이 좋아하는 진정한 단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식이 곧 "사랑"일 때 주님 눈에 드는 참 단식인 것입니다.
단식은 일차적이고 문자적인 의미로 위장을 비우고 혀의 탐욕을 제어하는 굶는 행위이나, 그 영적 의미는 신랑을 빼앗긴 이들이 가난한 이들 안으로 사라지신, 그들 속에 숨으신 신랑 예수님을 찾아 그분께 사랑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전자의 비뚤어진 결과가 과시와 타인 단죄라면, 후자의 결과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그 자체로 참 단식의 보상입니다.
"나를 더 사랑해다오."
예수님께서 이 단식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청하십니다. (저는 감히 청하신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너 자신만 사랑하지 말고, 자아에 대한 애욕을 줄이고, 나를 빙자해서 자기 만족에 빠지지 말고, 나를 더 사랑해다오!"
예수님은 이 사순 시기가 가난한 이웃을 특별히 사랑하는 단식의 기회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온 나라가 두려움과 불신으로 동요하는 이때, 곤경에 빠진 이웃 안에 숨어 계신 신랑께 눈길을 돌리라고 하십니다.
본의 아니게 미사를 단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주님 향한 상실감과 그리움을 함께 키워가고 있을 여러분을 떠올리며 기도합니다. 이 시국에서 성직자 수도자가 누리는 미사의 은혜가 얼마나 큰 특혜인지 두렵게 절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의 사랑과 절원을 담아 더 소중히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 향한 사랑과 갈망으로 이미 우리의 미사 안에 함께 하고 계시니, 우리는 하나입니다. 힘 내십시오! 더 사랑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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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교부들의 말씀 묵상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단식에 관한 물음>
요한의 제지들이 와서 ... 의사처럼 세리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4절) 똑같은 시샘이, 같은 부류의 인간들을 자극하고 부추겨 그들이 질투라는 잔인한 자극물로 날 선 것이 보입니까? 시샘은 교사임을 자랑하는 바리사이들이 스승을 미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라사이들이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19,11) 하고 말하게 했습니다. 시샘은 또 요한의 제지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미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안티오키아의 세베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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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무엇이 진정한 나의 얼굴인가?
고대 철학자 에픽투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최고의 작품이요 하느님의 파편으로, 그대 자신 안에 하느님의 일부분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의 고귀한 형통을 알아채지 못한단 말인가?” 그는 이 말 속에서 성서에 나타나는 주제 하나를 되뇌고 있는 셈이다. 일례로 창세기에는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1,31)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리고 후에 신약에서 예수는 우리가 당신의
‘가족’이요. ‘벗’이라는 점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없이 이야기하면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부단히 일깨워주고 계신다. 언젠가 그분은 이런 극적인 말씀까지 하신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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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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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참된 단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단식’이란 레위기 16장 29-31절에 따르면, 잘못을 속죄하고 정결해지기 위해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깨끗한 새로운 삶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단식을 배척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배척하셨습니다. 동시에 이제는 새로운 단식, 곧 구약의 ‘속죄의 단식’이 아닌 ‘사랑의 단식’을 제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시면서, 사실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해주십니다.
<첫째> 이유는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동시에 당신이 신랑이심을 계시하십니다. 곧 당신이 바로 종말에 오실 신랑(묵시 19,6-9)이자 메시아이심을 계시해주십니다.
사실, 구약성경 곳곳에서도 하느님을 신랑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이사 54,5-6;62,4-5;호세 2,16-20). 그리고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불렀습니다(요한 3,29). 예수님께서도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셨고(마태 22,2),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과 교회 혹은 신자들과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셨습니다.(2고린 11,2;에페 5,23-32)
그러니, 이제 신랑과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는 달리 단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여전히 단식이 필요합니다. 단지 그 의미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둘째> 이유에서 그것을 밝혀주십니다.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이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해주시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곧 수난 받는 ‘야훼의 종’인 메시아를 계시해주십니다. 동시에 우리가 단식을 해야 할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이 수난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신랑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드리는 단식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의미의 단식입니다.
결국, 단식은 감사와 사랑입니다. 그것은 의로움을 행하는 것이고 사람을 살리는 참된 단식입니다.
이를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끄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입니다.”(이사 58,6-7 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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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으십니까?”(마태 9,14)
주님!
몸으로는 단식하면서도 마음은 다투고 주먹질하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 속 부자유의 멍에를 풀고 불의의 결박을 부수소서.
당신의 선물인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식하지 않게 하소서.
생명을 내어놓음으로 생명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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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꼴 물견>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자주 단식을 하는데ᆢ."
뭐 좀 한다고 난체하는
사람의 꼴 물견을 보여주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단식과 고행이 과연?
다른 사람 잘하나 못하나 체크하고
내가 너보다 낫다는 오만의 굴레?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은
옭아 매놓은 사람 풀어주고 부드러운 흐름으로 향기나는 자신의 덕행생활입니다.
"날 위한 단식을 하고 합리화하지 않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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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마태 9, 15)
단식보다
축제가 더 좋은
우리들 삶입니다.
삶이란 결코
우리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마침내
오고야 말
이별의
시간입니다.
이별 또한 인생의
아주 커다란
부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품어주는 것이
단식의 본질입니다.
비워내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고
녹지않고서는
풀릴 수 없습니다.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는 단식은
단식이 아닙니다.
신랑이신
주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단식의 핵심입니다.
차갑게 굳어버린
우리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단식의 실천입니다.
주님과
분리될 수 없는
단식의 정신입니다.
빼앗기는 아픔을
맛본 사람 만이
함께하는 이시간이
얼마나 큰 감사인지를
압니다.
단식을 통해
주님 아닌 것을
떠나보내는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단식은 주님과
함께하는 이 삶을
깨닫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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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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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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