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악 2008년 1월 정기산행 : 장산 산행기
참가자 : 이영덕(회장), 김정곤(총무), 이근범(대장), 김태규, 김태년, 박성규, 배한수, 서경호, 이상원, 하성봉 <10명>
09:45 시립미술관역 출발(산행시작) - 촛대바위 - 12:00 중식 - 12:40 오후 산행 시작 - 중봉 - 유격장 - 간비오산 봉수대 안부 - 14:45 해운대여중(산행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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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5에 전철2호선 시립미술관역 출구를 나서니 단촐한 차림의 회원들이 모여 있는데, 총 10명이 오늘 하루를 함께 할 산 식구들이다.
정월 첫 산행치곤 산꾼들의 머리수가 너무 적은 건지 모를 일이지만 해가 바뀐 첫 산행 만남이니 반갑게 악수로 인사를 나눈다.
집결지가 해운대 관내이니 대강 금번 산행지를 짐작할 만 할 것이니, 해운대 주민과 부산 시민들의 발길이 잦은 장산이다.
매년 한 번 이상 찾았던 산행지이고, 몇 년 새 가을 억새가 널리 알려지면서 주말엔 제법 인파로 복잡한 산이다.
장산은 부산에서는 세 번 째로 높은 산으로 해운대의 진산이라 할 수 있다.
일설에 장산은 '거칠다'란 의미에서 유래됐거나 혹은 돌복숭아가 생산되는 나무가 많은 데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장산은 조선시대 소나무의 경제적 가치를 고려한 목재자원의 공급지인 '봉산'으로 지정돼 있었고, 소나무의 사사로운 채벌이 금지돼 있었을 뿐 아니라 큰 소나무 10 그루 이상을 벌채했을 경우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취급할 정도로 그 규율이 엄격했다고 하며, 솔밭에 산불을 내는 자는 당연히 사형에 처해졌다네.
그래서인지 장산의 수목은 제법 울창한 편인데, 이는 아마도 현재까지 군부대 주둔지인 탓이 더 클 것이다.
전해 오는 이바구로 장산의 억새밭 일대 분지에는 삼한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장산국이란 부족국가를 이루고 살았단다.
지금의 장산마을이 형성돼 있는 자리라고 하는데, 최근에 청사포와 해운대 일대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들이 발굴되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리라.
이 구석기 유적 발굴로 그 동안 이 부산에서 공백 상태였던 구석기시대가 엄연히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옛 문헌 기록과 전해 오는 이바구를 정리해 간략하지만 이참에 역사 공부도 좀 해 보자.
<삼국유사 권3 탑상4 영취사> 란에 '재상 충원공이 장산국(동래현, 내산국이라고도 함)에서 온천 목욕을 했다'는 기록이 있단다.
옛날 여기 장산과 동래 일대에 초기 형태의 국가 또는 부족국가가 있지 않았나 생각되는 기록으로 볼 수 있겠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래현> 편에는 건치연혁에 '옛 장산국 혹은 내산국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이 땅을 취하여 거칠산국이라 했고, 경덕왕(신라 35대, 재위 742~765) 때 지금의 동래현으로 고쳤다'는 기록도 있단다.
<산천> 란에는 장산을 상산(上山)으로 기록하고 '현의 동쪽 15리에 있으며 대마도를 바라보기에 가장 가깝다'고 써있단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장산이나 내산에 관한 기록은 없고 거칠산국이란 기록만 있다는데, 신라는 탈해왕 때 거칠산국을 치고 신라의 영토로 만들어버린 모양이다.
이 거칠산은 부산시 남구의 황령산(428m)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단다.
결국 옛 부산 지역은 장산국, 내산국, 거칠산국이라 불렀으며, 신라 경덕왕 때 동래라는 이름으로 고친 것이란다.
본격적인 산행은 아파트와 재개발 계획이 되어 있다는 낮으막한 주택들이 밀집된 동네를 지나서야 비로소 흙을 밟으며 시작되었다.
그리 굵지 않은 송림들의 환영을 받으며 산길로 접어드니 재작년 이 코스로 올랐던 기억이 새롭다.
초반전은 워밍업 정도의 완만한 경사를 즐기며 이런저런 이바구를 나누어가며 걷는데, 해바꿈을 하는 과정에 옳게 건사하지 못한 몽뚱아리는 마치 기름을 덜 친 기계마냥 삐걱거리니, 모두들 년말 년초에 너무 방심했음을 자탄하는구나.
근범 대장의 사전 교육대로 곧 된오름을 만나니 그렇잖아도 괴로워하는 하반신을 마구 학대 하는 셈이라, 곧 이 구간을 통과하면 무난하다는 대장의 위로가 귓가에 닿을 턱이 있겠는가.
그래도 반시간 정도 몸을 푼 탓인지 한결 몸놀림이 나아지고, 두어 차례 휴식을 가지면서 오른 산행길에 우뚝 뾰쪽 바위가 어서 오라며 맞아준다.
예전엔 별 생각 없이 칼바위라고 했었는데, 장산 산행 개념도를 보니 촛대바위란다.
이 바위를 지나면 장산 정상권에 들어선 셈이니 당연히 조망도 빼어날 수밖에.
정상 일대는 주위에 철책으로 둘러쳐져 있는 통제구역이라 왼쪽으로 우회하여 뒤로 돌아가는 산길이 열려 있다.
얼었다가 녹은 산길엔 진창과 결빙 구간이 반복되고, 자칫 원치 않는 미끄럼을 탈 우려가 있는 탓에 조심 또 조심해서 더듬어 통과하니, 양 발밑엔 1kg 상당의 흙덩이가 붙어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촛대바위를 넘어서면서 뿌리던 가는 비도 어느새 멈추고 우리 발길도 관목숲을 지나 억새밭에 닿으니 슬슬 점심을 즐길 장소 물색하느라 두리번 두리번.
정상 일대에서 조망은 바다와 그 배후를 즐감 할 수 있으니, 해운대쪽 바다와 시가지, 금련산 주위의 시가지와 광안대교, 서면쪽 도심과 백양산, 그리고 동래쪽 시가지와 금정산을 휘둘러 볼 수 있다.
금정산 기슭의 우거에서도 이 장산을 한눈에 볼 수 있으니, 위에서 보는 장산은 둥그스럼한 형상이나 동래에서 보는 장산은 기장쪽으로 뻗어 남북으로 길게 보인다.
장산을 오르면서 발아래 보이는 암석을 살펴보면 크고 작은 암편들이 암석 속에 끼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격렬한 화산 분출로 암석들이 파편으로 터져 비산되었다가 화산재와 같이 엉켜 굳은 응회암이다.
특히 화산 분출 때 터져 나온 다량의 화산재들이 뜨거운 화산개스와 섞여 마치 유체처럼 화산체의 사면을 따라 흘러내려 굳은 회류응회암(灰流凝灰岩)이다.
좀 더 쉽게 비교해 설명하면, AD 78년 폼페이를 매몰시킨 베수비오 화산의 분화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이런 화산 분화는 화산재와 뜨거운 수증기 같은 것이 혼합되어 매우 고온 상태에다 빠른 속도로 사면 아래로 이동하기 때문에 용암 분출보다 더 무서운 재난을 가져온다.
이 화산 분화 당시의 굉음과 개스 그리고 뜨거운 火山灰流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니, 베수비오 화산으로 공포에 떨었던 폼페이 시민들의 아비규환이 그려지겠는가?
20세기 들어서서 서인도제도 서쪽의 프랑스령 마르티니끄섬의 뻴레 화산도 이런 유형이었는데, 시속 120km 이상의 속력으로 내달리던 회류 때문에 바다에 정박해 있던 선박에 불이 났고, 사면을 따라 흘러내린 이 뜨거운 회류에 의해 모든 주민들이 사망했으며, 지하 감옥에 갇혔던 죄수 2명만 화상을 입은 채 생존한 기록이 있다.
장산의 경우는 공룡들이 노닐던 조용한 호수나 범람원 같은 환경에서 격렬한 화산이 분화를 했으니, 천지를 진동시키는 엄청난 폭발과 함께 뜨거운 화산재들이 쏟아져 내렸을 터라 공룡들이 혼비백산하여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도망갔을 것이다.
화산활동으로 지상에는 화산재가 수㎞나 쌓여 큰 산을 이루지만, 지하의 마그마 방은 빈공간이 된다.
어느 순간 땅거죽이 화산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마그마 방으로 푹 꺼지면 칼데라가 된다.
칼데라가 만들어진 뒤, 마그마가 활동을 다시 시작하면 칼데라 주변의 벌어진 틈(단층이나 열극)을 뚫고 올라와 산을 중심으로 둥근 반지 모양의 암맥을 생성시킨다.
장산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칼데라 잔존구조(콜드론)인데, 직경이 약 5㎞로 추정된다.
부산과 경남에는 의외로 칼데라 구조가 많이 남아있으니, 마산, 창원, 진해 세 도시도 거대한 하나의 칼데라 지역이고 직경이 18㎞에 이른다.
이 동쪽에 있는 진례분지, 울산 대운산, 운문사~천황산 지역, 원동 남동쪽 화제분지 등도 칼데라 구조이다.
자, 이제 장산에 오를 때면 화산 분화 직전의 地震動과 뜨거운 기운이 발바닥에 느껴질 만 하겠는가?
산행대장의 인도로 군사도로 옆 아늑한 억새밭에 엉덩이를 깔고 점심보따리를 풀고 즐거운 오찬을 즐기는 순서.
헌데 통상 앉자마자 제일 먼저 열리는 게 쇠주병 뚜껑인데, 쇠주는 물론이고 감기 환자가 더러 있는데 감기약조차 나타나질 않네.
의사 선생이 동참하지 못했으니 감기약 처방이사 당연히 없다고 하겠으나, 쇠주 하나는 꼭 챙겨오던 춘발이 춘섭 대원조차 부재중이니, 에고 오늘 감기는 곱으로 도로 달고 가야겠네그랴.
그래서 그런지 오찬장이 다소 조용하고 입맛들이 시원찮은 표정이 역력하다.
그럭저럭 속을 채워도 싸늘한 밥이 속을 데워줄 리가 만무하니 더욱 시원이가 그립고나.
따뜻한 차와 커피로 대신 위를 위로하고 주섬주섬 오찬장을 정리하는데, 일군의 산아지매들이 오찬장을 물색 중이라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니, 한마디 수작부릴 궁리를 하는 눈치들이 몇몇의 얼굴에 그려져 있다.
아지매들 역시 만만찮아 되려 같이 먹자고 꼬실레이션을 날리는데, 아마도 쇠주라도 보였으면 넙죽 한잔 받고 주저앉을 폼새들이여.
모 대원은 아지매들의 도시락 규모를 보고 입이 쩍 벌어지는데, 돌아서면서 ‘웬 여자들이 저리도 밥을 많이 먹나 그래’ 하며 궁지렁궁시렁.
‘아따 숫자가 1:2랑께 1:2여!’ 날래 우리 길이나 갑세다.
40여분 즐긴 오찬장을 뒤로 하고 억새밭 사이로 하산길을 나선다.
넓게 새로 구축한 억새밭 사잇길은 방화선을 염두에 둔 것인지 제법 널찍하고, 등산객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굵은 동앗줄로 울타리를 쳐 두었다.
지금이사 누렇게 말라 키만 큰 억새지만 가을이면 머리를 희게 풀어젖힌 섧디 섧은 하얀 억새들이 넓게 펼쳐지는 곳이다.
볼품없이 군데군데 탐승객들 때문에 누워버린 억새밭을 떠나 본격적인 하산길에 들어서니 다시 빗방울이 어깨와 머리 위로 떨어진다.
거의 평지와 다름없는 8부등산길을 들어서니 늦게 산을 오른 탐승객들이 제법 열을 지어 억새밭 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슬비에 옷 젖는다더니 등산로가 제법 젖어 있는데다 바위조차 물기로 미끄러우니 잔뜩 발아래에 신경을 집중한다.
아차 하는 순간 뒤에서 누가 미끄럼을 타는 모양.
호리낭창 핸섬보이 성봉의 몸이 중심을 잃으면서 광주에서 장산으로 원정 온 한 아줌씨와 충돌 할 뻔 했는데, 다행히 이 아줌씨 덕분에 중심을 유지해 포옹 직전에 정지.
이런 상황에 무슨 이바구가 분명 오고 갔을 터인데, 경상도와 전라도 억양의 앙상블까지 인식했는데 내용은 나는 몰러.
정상밑 갈림길에서 휴식과 함께 벌금을 각오한 대원들은 담배 한모금을 시원하게 빨아들인 후 중봉을 향해 내림길 시작.
곧 사면 경사가 센 내림길을 통과하고 능선길과 우회길을 타고 한참을 내려오니 유격장에 당도.
좌측엔 군부대 철책, 우측엔 유격훈련장의 다앙한 코스.
제법 지루한 능선 하산길에 가느다란 겨울비는 오락가락하니 대장 말대로 기막히게 좋은 이 길도 피로가 누적되는 탓에 ‘아이고’다.
간비오산 봉수대를 내려다보는 자그마한 봉우리에서 마지막 휴식을 취하며 봉수대를 오를지 말지 논의한 결과 통과로 결론.
마지막 물 한 방울까지 소진시킨 뒤 봉수대 안부를 지나 일로 내리막길을 타고 사람 사는 동네까지 내려서니 “와따, 그 눔 길 길기도 길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제 남은 건 제일 큰 목간탕이라는 해운대온천 목욕탕에 몸을 담그는 일과 해운대 백사장이 내려다보이는 모 주점을 방문하는 일.
그런데 이 목욕탕까지의 길이 또 지루하게 길어 다리도 풀리고 기진맥진이라.
비누가 잘 풀리지 않는 물에 후딱 몸을 잠그다가 나오니 제법 빗줄기도 굵어져 우산을 받쳐야 할 정도네.
해운대 시장을 관통하여 해변길로 나서니 누군가 ‘그냥 시장통에서 꼼장어에 소주 한잔이 어떠냐’는 소리에 만장일치로 꼼장어+쇠주로 낙착.
저녁 요기까지 걸친 회식 후 세 명의 산꾼은 택시에 얹혀 빗속을 뚫고 동래 온천장 펌킨으로 떴으니, 서울에 볼 일 보고 때마침 당도한 장고문과 랑데부하여 흘러간 노래와 생맥주로 심신을 늦게까지 적셔 놓았더라.
그것도 뼈속까지 적시지 못했던지 급기야 구서동의 랜슬럿경을 방문하고서야 물먹은 솜처럼 푹 사그라졌던 것이었다.
첫댓글 죄송스럽게도 달이 바뀐 뒤에사 산행 후기를 올리게 됐습니다. 산행일 다음날 출장을 떠났던지라 다녀온 뒤 올리려고 간략하게 정리해 뒀었는데 미처 챙기지 못하고 차일피일 바쁜 일정 핑계로 미루다 그 기록까지 잃어버려 산행후기를 포기했었는데, 기다리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 음력으로 해 넘기지 않으려고 밤을 도와 끄적거려 봤습니다. 제 때 후기를 게시하지 못한 점 대단히 죄송합니다.
일부러 늦춘 것도 아닌데,,,더구나 설날 아침에 새벽잠 마다 않고 올려 주셨구려.. 귀하게 잘 읽었습니다.멀잖아 함께 다닙시다.
1월 20일 자 였던가요? 나같으면 포기...德亭을 뵐 날이 가까워 오는 모양1
269 땡땡이 친 맴버가 10명 산행중 4명이라.... 다음 269 때는 꼭 오이소.
蘇齊선상님!! 지는 약쟁이들과 가는 타임이라 가덕도 갔심니다. 그러니 땡떙이 아이지예^^
산행후기가 아니라 출장보고서와 같이 방대한 내용이구려..... 해를 넘기면서 작성하시느라 고생이 정말 많았겠소 덕분에 읽는 이는 감흥과 함께 많이 배우는구려 ㅎㅎㅎㅎ
2차 뒤풀이에만 모습을 보이던 서경호가 오랫만에 산행에 나섰구나...군수(S4)담당이 확실치 않아 정상주가 없어 아쉬웠겠다...덕분에 시장통의 시원 링겔에 꼼장어만 더 죽어나고. 4인방이 구서동에서 양인의 술을 빌어 비로소 뼛속까지 마무리 하였구나.
269 모임 빠지고 장산으로 산행떠난 폼이 학교때 수업 땡땡이 치고 당구장 출근한 격이로고...장산! 군대생활 3년을 X빼이 쳤던 곳.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귀대 눈물 얼마나 흘렸던고. 제대때는 뒤도 안돌아보고 내려왔던 곳. 정상주 없어서 아쉬웠다니 이 것 또한 아군의 기쁨일세. 날 버리고 떠난 님 십리도 안가서 발병 난 꼴이여.^^ 이 사실 미리 알았으면 경성대 야구장에서 그들 없어서 그리 아쉬워 하지는 않았을 것을. 한겨울에 시원한 바람이 분다. 꼬신 바람이다..하하핫!
ㅎㅎㅎ, 이교수가 몸을 둘로 나누든지 아님 산행과 야구가 겹치지 않도록 두 소모임 집행부에서 해결을 봐야겠구먼...구서동의 랜스럿경이라..장박이 자주 찾는?ㅎㅎㅎ
아예 야구장엔 얼씬도 하지 말라는 이바군가? 하필이면 밀릴 때마다 산행일에 꼭 끼어 맞추니 원...... 교주님 이럴 땐 어케해야 되남유?
ㅎㅎ,기어이 집행부에서 날짜를 조정 안해준다면?양쪽을 격월제로?뭐 그리 일정 조정이 힘든가?
일정이사 겹치지 않게 잘 정해져 있지요. 이륙구 둘째 일요일, 이륙악은 셋째 일요일. 게다가 둘째 일요일이 소인의 다른 일정과 정면 충돌하길래 금년부터 잘 조정해 놓았는데 금월엔 설 명절 때문에 셋째 일요일로 미루어지고...... 쩝
켁..공사다망한 교수님을 야구 하라꼬 조르는 소제가 이해 하것지 뭐.ㅎㅎ
해운대 뒷산을 장산으로 보면 대충 그림이 그려지며, 구석기 시대 칸데라구조 공룡등등의 이야기로 잠시 아름다운 그 때의 여유로운 세상을 상상해본다. 269와는 날짜가 조정이 된 것도 알겠고 두루두루 이런저런 이야기로 분위기를 파악하고 갑니다. 수고했소 이교수..서울오면 연락함하소 호(如山)받은 빚 갚게요..
여산보러 일부러 한양 구경 갈까보다. ㅎㅎ 빚이라니요, 말씀만 들어도 감사.
이교수 산행기는 그 자체가 백과사전이로다...그 속에 역사와 자연과학과 인생이 뒹구는구나...
허허...좋은 산행들 하셨구려. 해운대 장산이 그냥 산이 아니라 장산국 아지트 였네.덕분에 칼데라도 다시 배우고 예전에 가 본 폼페이도 다시 한 번 떠 올리고..지구과학 공부도 좀 했수다.
일찌기 지구과학도가 다녀와야 할 폼페이를 다녀오셨구먼요. 이 게으런 사람은 아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