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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진짜로 “명상”이 뭔지 알까요?
크리슈나무르티 : 꺼지지 않는 불꽃,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위하여
-- “聖人”의 시대를 살면서, “내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And if you say you must meditate, you must follow a certain path, a certain system, obviously you are conditioning yourself according to that system or method. And what that method promises perhaps you will get, but it will be nothing but ashes. Again in the motive there is achievement, success and at the root of it is fear, and fear is pleasure.
스스로 말하기를 반드시 명상을 해야만 하고, 그래서 어떤 방식이나 체계를 따라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분명히 자기 자신을 어떤 체계나 이론에 꿰맞추는 짓입니다. 그리고는 그 체계가 보장해주는 상태에 다다르거나 하겠지만, 그런저런 따위들은 그저 잿더미에 지나지 않아요. 그렇게 동기가 있다면 성취나 성공이 따르기도 하겠지만, 그때 그 뿌리는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바로 쾌락이지요.
-- J. Krishnamurti, Talk 4, Amsterdam, 19 May 1968.
[김기호님이 사진을 공유했습니다. 2016년 12월 25일 오후 4:3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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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해석 2021] 정말로 “자유”롭고 싶으신지요?
“명상”이란 어떤 이론, 체계, 법칙 따위에 자신을 꿰맞추는 행위가 아닙니다. ‘마음을 비워야겠다’는 결심마저도 하나의 ‘의지’고 그게 ‘욕망’이지요?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거대한 욕망”이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한 예로, ‘승복’이라는 게, 그 ‘거대한 욕망의 상징’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이래저래 그저 순간순간 드러나는 ‘자신의 실제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알아채는 수밖에, 달리 무슨 ‘명상법’ 따위가 있을 수 없는 거지요.
따라서 세상의 모든 “명상법”에 전혀 얽매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설령, 모종의 명상법이 주는 무슨 ‘효과’가 있다고 해도 그게 정작 “자유”겠습니까? 절간이나 교회 가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무슨 명상법으로 마음이 좀 ‘조용’해졌다고 해도, 역시 무슨 설교·설법 듣고는 ‘그렇구나!’ 한다고 해도, 막상 ‘돈 내고’ 나오면 여전히 “인생은 고해” 아닙니까?
똑같이 이런저런고런 ‘명상’ 좀 했다고 “인생이 고해” 아니게 되겠습니까? 바로 저 “알아채기”만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효과 있는 “명상”이라고 하셨지요(This choiceless awareness is the only effective meditation). 부디, 다양하고 잡다한 ‘명상법’ 따위에 휘둘리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이하, 아래 글들은 몇 년에 걸친 ‘사족’인데요, 그저 내다버리지 못 하는 ‘집착’ 때문에 달아놓은 것뿐입니다. ‘이딴 걸 왜 못 버리냐?’ 하시겠지만, 그게 바로 ‘집착’이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관심 있으신 분, 흘낏, 얼핏이라도 읽어보시라고 그대로 달아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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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간 해석 개요]
[20161225] 독백
[20181225] “명상”이란 ‘의지작용’이 아닙니다
‘지각’ : 인간이 영위할 수 있는 영역
‘지각’ : “저~기, ‘누군가?’ 했더니 ‘내 친구’네.”
“우주”는 가지런히 돌아가고 있거늘..
해괴한 현상, 세계8대 불가사의
“종교인”: ‘가다보니 거름지고 남 따라 장에 가더라.’
“이게 나라냐?”에서 그럼 “이건 나라냐?”로
먼동도 안 튼 성탄일 새벽에..
세상의 “평화”를 바란답시며.. 웅성웅성
[20191225] ‘기억’에서 사라져야, 그게 “용서”겠지요?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각각의 ‘종교’로 갈가리 분열되어 있으면서 “평화”는 무슨..
‘저러니까 안 되겠더라..’
기껏 이런 끄적거림 몇 줄 뿐이니..
대한민국 ‘사면초가’
[20211225] 촛불혁명으로 이루었다는 게.. 고작,
전의 넋두리들을 읽어보니..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
작은 돌멩이 두어 개
‘오래 된 미래’로서 “홍익인간”
세상, 걱정근심 무한정
세상, 가장 어렵고도 쉬운 일. ‘나’ 비우기
이게 저 “우주적인 슬픔” 때문인지
잠시 한눈팔면 그냥 또 엇길로 빠지는 머리
삼천리금수강산 사대부들 지꺼 챙기기
사치스러운 생각..들 뒤로, 대한민국에서 ‘추방’ 안 당하기
세상을 선도하는 나라! 대한민국
강산이 네 번 바뀌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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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5] 독백
아래 글은, 2016년 성탄일에 “독백”으로 끄적여 놓은 글입니다. 그것을 작년에 공개해놨군요.
[“'명상'에는 무슨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명상'법'은 '나'의 욕망이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어서, 그 시작에서부터 '나'를 강화시키게 된다. 혹시 그 '방법'이 제시해주는 결과가 나온다 해도, 그건 단지 잿더미에 지나지 않아서 '나'를 지우는 게 아니다. 그러니 어찌 '자아'가 비워지겠는가! '나'가 비워져야만 인생의 불행이 떨쳐질 게 아닌가! 이게 해결이 잘 안 되니까, 다들 그냥 “인생은 고해다” 하고 살다 죽는 거다. 이미 지고 있는 짐도 엄청난 무게이면서, 자꾸만 뭘 더 가지겠다고 아등바등.. 그 때문에 인생이 죽을 맛이거늘. '고해'뿐인 인생이라면, 100 살까지 산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겨우 잠시잠시 스쳐가는 '쾌락'들에 허우적거리다가 빠져죽는 꼴일 뿐. 이다지도 뻔한 사실을 무시하고 마구 달려가고만 있는 우리들의 일상!! 이러니저러니 해도, 인생을 고해로 사는 한, 전부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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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5] “명상”이란 ‘의지작용’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이기도 하고 쾌락이기도 한 저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명상”이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동기’라는 것이 ‘생각’이고 ‘의지’요 ‘욕망’ 아니겠습니까? 세상 모든 것들이 그렇게 자신의 ‘의지작용’이니 “명상”마저 꼭 그런 욕망 차원에서 접근하겠다는 심보라서, 바로 그 오류를 지적하시는 말씀이지요. 딱 잘라서 말하자면, “명상”은 ‘의지작용이 아니다’는 말씀입니다. “명상”이란 자신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 등등,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고 살아오던 ‘자신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여서 “알아채는 것”인데, 그 “알아채기”는 ‘의지작용’이 아니라는 거지요. 미처 ‘의지’가 작동되기 이전의 인간 “존재상태”로서 “주의”와 “지각”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런 말씀이겠습니다. 더 자세히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 “관심”은 ‘욕망’과 다른 어떤 차원이겠습니다. 역시 “마음공부” 하시는 여러분 각자 스스로 체득해야 할 영역이겠습니다.
그리고 항상 하는 말이기도 하고 덧붙이는 말씀이지만, 이것은 ‘인식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 각자가 스스로 “지각”해낼 수밖에 없겠습니다. 인간에게는 분명히 그런 상태가 있으니까, 그걸 스스로 발견해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더 말씀드리자면, 우리 인간들의 일상적인 상태가 바로 ‘인식의 영역’인데, “지각의 영역”은 그러한 ‘인식’으로 접어들기 전의 순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저기 ‘누군가가 오고 있’는데, 보니까 ‘내 친구’더라 하는 상황에서, ‘저기 누군가가 오고 있’는 상태가 “지각의 상태”요, ‘내 친구’더라 하고 ‘아는’ 상태가 이제 ‘인식’이지요. 더 말씀드리자면, 인생이 고해로 되는 것은 다들 저 ‘인식의 영역’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쾌락과 고통은 전부 다 그 ‘인식의 영역’이거든요. 그래서 저기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하는 거지요. 그렇게 ‘인식의 영역’이기 때문에 ‘두려움’이나 ‘쾌락’이나 그게 그거다, 그 말씀이지요? 제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부디, 오로지 여러분 스스로 체득하시기만 간절히 바랍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려서, “지각 영역의 삶”과 “알아채기,” 딱 그것만 제대로 된다면 한세상 살면서 “인생은 고해가 아니다.”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을 좀 더 함부로 해보자면, 인생을 그렇게 저 현지우현, ‘가믈고 또 가믄’ 무한무궁한 “우주적 흐름”에 맞추어 살다 가면 되는 것이지요. 바로 그것이 이른바 “지성”일 터입니다. 그런데 이 알량한 ‘나’ 때문에, 그게 안 되는 것이거든요. 세상 모든 만물은 저 우주적인 “지성”에 맞추어 가지런히 돌아가게 되어 있는 건데, 유독 오로지 딱 하나 ‘인간’만이, ‘나’만이 저 “지성”에서 삐쭉 삐져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주머니 속 송곳’ 꼴이라도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지성”에서 삐져나와서는 역시 세상 다른 모든 만물과 부대끼는 것이지요. 그러니 거기서 어찌 ‘열’이 안 나겠습니까? ‘마찰’에 ‘갈등’에 ‘발열’에 ‘쌈박질’로까지 이어지기 일쑤겠지요. 그게 흔히 말하는. 그 대단하다는 ‘인생’이고 그게 ‘도토리 키재기’라는 것 아닙니까?
그 전에도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3년 전 이 게시물로부터 페이스북에 크리슈나무르티 말씀 토달기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원문은 따로 적지도 않고 그냥 사진의 본문으로 대체되어 있으며, ‘번역’도 없이 그냥 ‘해석’이라 할 반말투 토달기 몇 마디가 전부네요. 그게 재작년 크리스마스, 그 날부터.. 그때가 저 “촛불혁명” 한창 타오를 때입니다. ‘유모차’까지 끌고 광화문에 한꺼번에 100만도 훨씬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촛불 들고 고함을 질러대는 가운데서도, ‘단 한 사람’ 살짝 다친 사람도 없었다지요? 여전히 콧날이 시큰하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가히 “세계8대 불가사의”에 들어가겠습니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다.”고 했으니 힐난 없으시길.. 무슨 ‘종교 행사 축제’ 이름으로도 사람들 좀 모이면, 치여 죽고 깔려 죽고 밟혀 죽고 난리들 아닙니까? 역시 말이 좀 삐져나왔습니다만, 저런 “마음”들이었는데, 도대체 왜 그 덕 본 사람들이 ‘해이’해진단 말일까요? 그들에게.. 그냥 큰 사고 안 쳐주기만 바래야 한단 말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무래도 저 “지각의 영역”을 이해하고 체득하지 못하면, 역시 ‘인생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래서 다들 ‘가다 보니 거름 지고 남 따라 장에 가더라.’고 하는 거지요? 물론 저 “지각의 영역”이라는 것이 마냥 쉽기만 하겠습니까마는, 어쨌거나 그거 아니면 달리 무슨 ‘길’이 없어서 말씀입니다. 거기서 누구보다도 소위 ‘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더 제대로 살아야 말이지요. 그런데 하늘이 무너져도 “종교”는 ‘직업’이 아닙니다. 그러니 “종교는 조직화할 수 없다.”고도 하신 거겠지요? 오로지 개인적인 것이지요. 하물며 ‘서비스업’이겠습니까! 그 종교 누구의 생일마저 수천 년 내려와서 이렇게 한갓 ‘장삿속’에 놀아나고 있고 말씀입니다. 제 아무리 거대한 조직으로 떵떵거리며 세상을 호령한다고 해도, 그리고 그 등쌀에 무서워서 수그리고 있다 해도,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망하게 되어 있다고 했던가요? 다만 ‘안 망한 척’ 하고 있을 따름일 것입니다. 그게 오늘날 세상 꼬라지 아닙니까?
인류사 · 종교사 · 지성사에 다시 “성인”께서 오신 시대입니다. 이미 가셨지요. 이제 남은 사람들이 그 “말씀”만이라도 제대로 전해줄 일이며, 더구나 타락시키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해’를 위한다면서 “번역”과 ‘토달기’를 하더라도, 반드시 “원문”을 먼저 제시해야겠습니다. 출처까지 밝혀놔야겠지요. 하여튼 그 가르침의 흐름은 세상 각 나라마다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는데, 왜 유독 대한민국에서만은 딱 요모냥요꼴밖에 안 될까요? 식민지와 한국전쟁으로 다 망했던 나라가, 이만큼이나 ‘잘 살게’ 되었다고 고래고래 ‘자랑질’이면서 말씀입니다. 하다 못 해 한때 활발하던 크리슈나무르티 “번역”마저 누군가의, 어떤 조직의 농간에 의해서 엉망진창으로 방치되어 있는 꼬락서니입니다. 사람들 관심이 없으니 저들은 날로 더 탱자탱자 비아냥거리고 있겠고 말씀입니다. 세계적인 흐름이 현저한데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이 페이스북에까지 노골적으로 압력을 넣고 있는 모양이지요? “촛불혁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심성이 구한말이나 식민지 시절보다 나아진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때는 독립운동이라도 했는데 말씀이지요. “이게 나라냐?” 그게 완전히 해결되었습니까? ‘이건 나라냐?’ 꼴인 듯합니다.
갈수록 “촛불혁명으로 딱 정권 바꾸는 것밖에 못 했다.”는 평가가 더욱 더 새록새록 다가오지 않으시는지요? 글쎄요, 경제는 악착같이 한다고 해도, 정치는 안 그런 것일까요? 크리스마스 새벽에 주저리주저리 어째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인지······. 이게 늙어가는 징표인지.. 너무 빨리 일어나서 아직 먼동도 안 텄네요. ‘즐거운 크리스마스,’ 참으로 뜻 깊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2019, 역시 사족입나다만]
그러나 그게 저렇게 ‘인식의 영역’도 아닌 차원이라야 명함이라도 한 번 꺼내 볼똥말똥 한 일인데, 오로지 ‘나’의 영역일 뿐인, 그 세상 사람들 모아놓고 떠들썩, 머리로 지어놓은 온갖 것들 다 끄집어내놓고는 웅성거리다고 해서 무슨 “평화”가 온단 말입니까? 저런 웅성거림들 다 합쳐봐야, 요새 텔레비전 자주 나오는, 저 아프리카 굶주리는 그 애 후원금 10,000 원 내는 것이, 훨씬 ‘평화’롭게 사는 행동일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딱 그런 것밖에 없어서 말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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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5] ‘기억’에서 사라져야, 그게 “용서”겠지요?
다시 성탄절이 돌아왔습니다. 온 세상에 사랑과 자비가 흘러넘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 입맛 헛다시게 씁쓰리한 것이, 이런 말씀 자체가 이미 모순 가득한 언사라서 말씀입니다. 하나하나, 너 하나 나 하나, 우리들 각자 되어 있는 모습, 그 실상으로는 ‘온 세상에 자비와 사랑이 못 흘러넘치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런 사람들 모아놓고 “사랑·자비” 운운한다고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겠습니까? 앉아 있는 사람이나 서 있는 사람이나 뭐 그리 다른 것도 아닙니다.
도대체 ‘무슨절’ ‘무슨일’ 해가면서 날짜·기간 정해놓고, 갈가리 다 쪼개진 인간들이 웅성웅성 모아놓는다고 그게 화합이고 단결이고 대동이고 평화고 뭐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게 되는 일이 아닌데, 어찌 “땅 위에 평화” 운운할 수가 있단 말일까요? 도대체 입에 발린 소리고, 딱 ‘말로만’입니다. 이런 “사실”의 지적도 별로 안 ‘좋아’하겠지요? 그만큼 우리 인간들 각자가 “삶”의 ‘즐거움’보다는 ‘쾌락’에 빠져 있는 것이라서 말씀입니다. 정작 각각 ‘종교’로써 갈가리 찢겨진 세상인데요. ‘종교’랍시고 그게 과연 ‘쾌락’에서 얼마나 멀찌기 떨어져 있기나 하단 말입니까?
그런데 거기서 또 더 많은 ‘쾌락’을 바라서야 쓰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쾌락’은 아니라도 해도, 저기에 몇 마디 더 보탠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참으로 “종교적”이고 “지성적”인 이 세계사·인류사적인 흐름을 보면서도, 끝내 이대로 마냥 세월만 보내다가 사라져갈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일상이 그냥 이대로 아주 평화로운 것도 아니지만 말씀입니다. 제 스스로의 ‘공부삼아’서라도, 다른 것들은 못 해도, 이런 끄적거림만은 이어가야 할 듯합니다. 하다못해 뒷사람들에게 ‘저래서는 안 되겠네.’ 하는 교훈이라도 될 수 있겠지요.
어찌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백범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전부가 힘을 다 합쳐도 어려운 일은 이룰 수 없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이 땅에 전래된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이런 끄적거림 몇 줄이 전부인 것만 같습니다. 그나마 기껏 이따위에도 날아오는 돌이 있다면, 눈치껏 재주껏 잘 피할 일입니다. 하다하다 못 피하면.. ‘딱!’ 얻어맞는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설령 거기가 끝이라 해도 뭘 어쩌겠습니까. 철저하고도 교묘하게 숨어서 던지는 돌은 피할 수도 없습니다.
‘사면초가,’ 그 말이 참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초나라 노래’가 어땠는지는 잘 모릅니다만. 구절구절 가락가락 ‘섬찟’했을까요? 본래는, 그 자리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리면 안 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도 사방에 ‘초나라 노래’ 뿐인 겁니다. 그런 처지 거기에 누구 무슨 ‘사람’이 있었겠습니까마는, 그게 무슨 ‘외로움’ 따위, 그런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파렴치’한 일도 다 당하고 하니까, 오히려 사람 안 만나는 게 남는 겁니다. 친구들 창피해서 누구한테 말도 못 하겠고 말씀이지요. 아무리 ‘아들 셋이면 도둑놈 욕 못 한다.’고 했지만..
‘송구영신,’ 성탄절 끼인 연말연시 즈음에, 왜 이런 소리가 나올까요? 하기사, 저게 올 한 해 겪은 최대의 ‘낭패’이고, 아마도 인생 최대의 ‘허망함’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래도 앞으로는 절대로 사람 함부로 만나지 않게 될는지 그것도 모르겠습니다만. 가만히 보나마나, 사람 함부로 만나서 좋을 게 없지요? ‘동네 친구’니 ‘학교 친구’니, 이래저래 어설피 접근하던 인간들, 다 사라지고 하나도 안 남았습니다. 그래도 또 누군가 접근해 오겠지요. 페북 스펨 오듯 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튼 여러분 모두, 묵은 것 다 날려버리고 이제는 ‘새 것’만, ‘맑은 것’만 남아 있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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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5] “촛불혁명”으로 이루었다는 게..
“명상” 말씀이셨는데요, 어디서 말이 어떻게 빠졌는지.. 역시.. 이쯤에서는 “‘촛불혁명’으로 딱 정권 바꾸는 것밖에 못 했다.” 가면 갈수록 그 소리가 더 아프게 들립니다. 정확한 진단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잘못 큰 게 저 ‘X86’ 세대들의 오만함 때문이라는 소리도 들리고요. 한때 ‘진보’라고, ‘좋은 세상’을 들먹이던 무리들이.. 왜 저런 비판까지 듣지 않으면 안 되는 건지.. 그나마 누군가가 겨우 썼다는 “반성문” 하나도 금방 지워버려야만 하는 세태..
여기서 무슨 말을 더 보탠다면 보탤수록, 저들에게서도 역시 ‘니나, 잘 해라!’ 그딴 소리나 듣겠지요? 우째, 그런 두려움만 스멀스멀 기어댕기는 시절에 말씀입니다. 한때 말로서나마 있던, “좋은 세상” 또는 “보다 나은 세상”은 이제 인간들 관심에서 완전히 물 건너간 건지.. 다들 꼭 그 꼴밖에 안 되기 때문에, 인류사 “새로운 성인”께서 안 오고는 안 되었던 것인지.. 그럼에도 오히려 ‘무관심’으로 일관할 뿐이란 말인지..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던, 그 사춘기 시절 들었던 말이나 생각나쌌고 말씀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조금이나마 “더 나은 세상”이 되려면, 지금 내 모습 이대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거기서 내 모습이나 ‘니 모습’이나 똑 같은 거라고.. 그래서 “내가 바로 세상이요, 세상이 바로 나다(I am the world, the world is me)!” 그러신 건데 말씀입니다. 바로 그게 종교적인 심성의 바탕이고, 그러기에 이 세상의 ‘조직’ 종교들은 수천 년 심지어 수만 년 쌓여왔을지도 모르는 “적폐”라는 거 아닙니까? 오늘날 대한민국의 최대 과제.. 그 “적폐청산”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작은 돌멩이 두어 개 던져볼 생각도 못 하는 어마어마한 ‘골리앗’ “적폐”!!! 정작 “인생은 고해”가 아니니까요.
오늘날 대한민국 저 “촛불마음씨”로도 안 되는 일이라면.. 애들이라도 그런 마음씨들로 키울 수 있어야만, “오래 된 미래..”로서, “홍익인간” 쯤 돼야, 그나마 좀 나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 책 제목.. 저자에게는 좀 미안한 발언입니다만. 어쩌면 “오래된 미래”라는 한 사상가의 주장보다는, 그야말로 지구촌 거대한 지역, 어떤 나라의 ‘오래 된’ “건국이념” “홍익인간”이 훨씬 더 묵직할 거 아닐는지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저” 하는 마음씨가 훨씬 더 포괄적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바로 그게 가히 “종교”적인 자세를 포함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거기서도 이 세상 어느 조직 종교가 진짜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저” 한단 말입니까? 다들 ‘지꺼 챙기기’만 하고 있는 거지, 이게..
본문 말씀에 달아본다는 해석이랍시고.. 우째, 얘기가 샛길로 빠지는 통에 수습을 못 해서 그야말로 “인생은 고해,” 걱정근심 엄청이었는데요.. 비로소 이제사 “종교적 마음씨” “명상”의 말씀으로 돌아갈 수 있을 듯하네요. “명상” 말씀이 바로 “종교”의 근본 말씀이기도 하니까요. ‘마음 비우기’가 안 되면, 아예 그 첫단추부터 잘못 끼우는 거 아닙니까. 그런 걸 서구 세계에는 “그런 ‘나 비우기’ 개념”도 없다는 거 아닙니까! 오늘날에 와서 좀 달라졌다고 한들, 그게 과연 그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막상, 대한민국이라고 해도, 그 최상위 문화에서나 겨우 명맥을 유지해왔을 뿐이었다는 내력이겠고요. 여튼 “명상”이라는 건 무슨 ‘법’‘칙’이 있을 것도 아니고, 더구나 그 어떤 ‘조직’ 종교의 전유물은 더 아닐 터입니다.
모름지기 “내가 바로 세상(I am the world)”이니까, ‘나’ 이것부터 싸그리 지워나갈 일이지요? 그게 “명상”이니까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 슬로건을, “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게 붙여놓은 까닭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진짜로 ‘내’가 바뀌지 않으면, 무슨무슨 명상, 이런저런고런조런 명상, 이 세상 모든 명상을 다 갖다 붙인다 해도, 아무짝에 몹쓸 ‘짓거리’밖에 더 되겠습니까? 더구나 그게 고작 ‘돈벌이’ 수단으로 되어 있는 것도 수두룩하지요? “명상”이란 ‘알아채기’ 상태에서 일어나는, 오로지 개인적인 존재 상태요 행동일 뿐이겠습니다. ‘나’가 사라져야 말이지요.
부디, ‘너는 어떠냐?’ ‘니가 뭔데?’ 그런 소릴랑 안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순전히 사기꾼 비슷하다면, 여러분께서도 그 짓을 따라 하실 건 아니잖습니까? 여러분 각자의 인생이지, 제 인생이 아니지요. 저야, “인생은 고해” 아니게, 제 나름대로 살다 갈 겁니다. 앞으로는 어찌 될지 모른다 해도, 여태까지 환갑진갑 너머 살아온 세월, 그리 삐딱하게 살아오지 않았고요. 꼴사납게 살아오지도 않았고, 내꺼 챙기기만으로 살아오지도 않았지요. 설마, 갈 때가 되어서도 안 가는 재주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그런 게 저 “우주적인 슬픔(Universal Sorrow)”쯤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잠시, 또 엇길로 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거나, 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무려 ‘나라’를 맡아서 다스려보겠다는 사람들이.. 저 “고급스러운 문화” “진짜 문화”에는 그야말로 일말의 느낌도 못 가지고, 추호의 의식도 없으며, 그야말로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이 오로지 ‘파당’에 ‘지꺼챙기기’만 일삼는 무리와 하나도 다를 거 없는 꼬라지들.. 과연, ‘뭘’ 가지고 “이게 나라냐?” 했으며, 또 ‘뭘’ 가지고 그럼 “이건 나라냐?” 하는 건지.. ‘나라’보다는, ‘백성’보다는, ‘사람’보다는 오로지 ‘조직’이 우선이라는 거지요?
조선후기, 구한말까지, 구태여 ‘왕권’ ‘역린’ 건드릴 필요 없이, 자기네들 세력과 이익에만 전념했다는 그 영남사대부라나 호남사대부래나 충청사대부라나 기호사대부래나 강원사대부라나 하는.., 아예 삼천리금수강산 사대부 노릇해먹은 인간들 다 합쳐서.. 결국 ‘나라’까지 말아먹은 거라고 봐야겠고요. 그때나 지금이나 오로지 다들 딱 그뿐인 인간들의 얄팍한 심뽀들뿐이니.. 오늘날 역시 그들이 저 저잣거리 무지랭이들과는 얼마나 다를 것인지..
부디, ‘막말’한다고 ‘열외’시키신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천대나 홀대는 오히려 감지덕지고요. 그런 건 일단 ‘만나야’ 되는 짓이라고 봅니다. 제발.. ‘제외’나 ‘배제’나 ‘추방’만이 무지막지 두려울 뿐입니다. 아예, 상판대기도 안 보겠다시면.. 그 일을 어찌 하겠습니까! 과연, 인생이 얼마나 남았을까, 궁금하기도 한데요. 명색이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평생이 혼자냐?’는 생각은 사치겠지요?
코로나19 방역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도, 그 ‘선도’, ‘선도국’ 되는 길에서, 이 자비의 흐름, 사랑의 흐름 평화와 창조의 지성의 흐름도 선도할 수 있으면 훨씬 더 좋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대한민국은 이래저래 그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할 것이니.. 비록, 이게.. 길도 없는 길이지마는.. 게다가 끝도 없는 길이기도 하고요. 그 길, 여전히 홀로요 아마도 끝까지 홀로일까 또 두려우니..
대학시절, 안정효 선생 번역, 크리슈나무르티 책,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를 처음 읽은 이래로.. 어언 강산이 네 번 바뀐 세월, 40 년이 흘렀군요. 얼마나 남았을는지.. ‘오래 된 미래’ “홍익인간.” 부디, 여러분, 다시 돌아온 ‘세모’지절, 묵은해 잘 보내시고 새해 진짜로 좀 올곧고 평화로운 세상을 맞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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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5] ‘암울한 시대’의 크리스마스
“성탄절..” 달리 더 주절거릴 말도 없고, 그럴 심사도 아닙니다만.. 그야말로 습관적으로다가.. 해대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물심양면, 두루, 이 위기의 시대에 “선도국 대한민국”에서도 별로 관심 없는 일인 모양이지요? “인류사 새로운 성인”께서 오셨거나 말거나일 뿐인 듯한 데다가, 심지어 기후 위기에 “6차 대멸종”을 맞이했다고, 이미 시작된 거라고 해도, 그런들 어쩌리 저런들 어쩌리 그 모양이란 말인지.
더구나 여기는 “예수님” 태어나기 훨씬 전, 더 오래, 아주 옛날부터 “나 없음”의 그런 흐름이 안 끊기고 도도하게 흘러온 땅이라고 했는데도 말씀이지요. 보다 확실하게 그런 “삶”을 살아보자고, 그토록 저토록 ‘열심히’ 달려온 거 아니었단 말인지. 분명히 겨우 그런 심보들은 아닐 텐데 말씀입니다.
누군가가 ‘다, 때가 있는 모양이다.’ 그랬습니다만, 그저 그 말만 믿고 ‘터벅터벅’ 걷기만 하면 되는 일일까요?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말씀이지요. 조만간, 쉽게 안 되는 일이라면, ‘안달’해댄다고 되겠습니까. 이제는 오로지 ‘말없이’ ‘나만 보고’ 가야 할 일입니다. “인간” 좀 되게스리.
어쨌거나 절대로 ‘메리’ 크리스마스가 아니지요? 서구 저들 해온 꼴을 본다면, 시종 입에 발린 소리일 뿐입니다. 아무리 ‘니나 잘 하세요!’라 해도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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