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5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마카베오 상 6,1-13 루카 20,27-40
진리가 부족하면 현세주의자가 되고 은총이 부족하면 인본주의자가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일본 돈 만 엔짜리 지폐에도 새겨져 있을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폐쇄적인 계급사회의 부조리함을 느끼고 그것이 일본을 망치고 있다고 믿어 어려서부터 견문을 넓히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고 그 곳에서 공부하며 받은 충격적인 사실을 ‘서양 사정’과 ‘학문의 권유’ 등의 책으로 출판해 엄청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평등, 개인의 권리와 자유,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독립과 책임, 관존민비의 타파, 민권의 신장, 국회 개설 등을 주장해 일본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그의 덕분으로 일본이 빠르게 서양과 같이 근대화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서양처럼 되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만이 아니라 조선과 중국도 그런 길을 가야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조선을 자신들보다 훨씬 미개한 상태로 여겨 침략을 해서라도 아시아를 유럽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서양보다 먼저 조선과 중국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선생이고 조선이 하인입니다.”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는 서양 제국주의를 일본으로 끌어들여 다른 나라를 침략하게 만드는 정신적 기틀을 세웁니다.
‘힘’만 좋아하고 ‘진리’를 모르면 ‘현세주의자’가 됩니다.
현세에서 잘살면 어떠한 비윤리적인 행위도 용납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일본인들은 아직도 후쿠자와의 생각을 따르며 자신들의 침략으로 한국이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사랑’입니다. 힘은 이 사랑을 위해 쓰여야 합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자유가 없다면 지옥입니다.
남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후쿠자와는 공부는 많이 했을지라도 참 진리에 대해서는 무식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두가이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극히 현세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로마 지배하에 있으면서도 독립보다는 그 힘에 결탁하여 잘 살고 있었던 이들입니다.
그러니 그들 안에 내세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이 있다면 현세를 즐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따집니다.
하지만 사랑을 진리로 믿는 이들에게는 부활이 필수적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에 부활이 없는 사랑은 허무한 죽음밖에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이 내세에서도 있어야합니다.
사랑을 참 진리로 여기는 이들은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사두가이들을 반박한 예수님을 두고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라며 칭찬해줍니다.
박해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두가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데는 서로 일치했지만 자신들끼리는 교리가 달랐기 때문에 항상 싸웠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진리는 알았을지라도 은총(힘)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 힘을 주러 오신 예수님도 필요 없게 여겼습니다.
사람은 ‘은총과 진리’로 태어납니다.
은총은 에너지이고 성령이시며, 진리는 말씀이며
성자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이 은총과 진리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아기가 두 발로 걷기 위해서는 부모로부터 은총과 진리를 다 받아야합니다.
은총은 부모님이 주시는 양식입니다. 그 양식의 힘으로 부모처럼 하려고 걸음마와 옹알이를 시작합니다.
부모에게서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음식을 주지 않는다던가, 부모가 어떻게 걷는지 안 보여준다면 아이는 온전한 인간으로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힘만 강조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현세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사두가이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십계명을 알고
내세도 믿었기 때문에 진리에는 민감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총의 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랑을 자신들의 힘으로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인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피인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기가 부모로부터 양식을 받지 못하면 부모를 보아도 부모처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일본이 후쿠자와의 제국주의 사상으로 침략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의병운동도 많았고 3월 1일 독립선언서에도 발표했습니다.
이때 독립선언서에 빠져있었던 종교가 있었는데 유교였습니다.
당시 유생들도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은 했지만 붓으로만 하였습니다.
이는 ‘마음이 곧 이치다’라는 사상으로 유교가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유교는 ‘기(氣)’보다는 ‘이(理)’에 치중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기는 힘이고 은총이며, 이는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이 은총과 진리는 항상 함께 가야 사람을 온전히 성장시킵니다.
성령님과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둘은 하나이면서도 둘입니다.
그 은총과 진리를 주시는 분과 함께 세 분이 사람의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힘만 좋아하는 현세주의자는 진리가 부족하여 절제할 줄 모르고 자신의 욕구와 싸울 줄도 모릅니다.
반면 진리만 좋아하는 인본주의자는 은총이 부족하여 알기는 하지만 그 아는 것을 이루기 위한 힘을 청하지 않습니다.
자신들 안에 그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은총도 진리도 다 하느님께서 아드님과 성령님을 통해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이 둘의 균형을 잘 잡고 성장해야합니다.
진리를 명확히 깨달아 현세주의에서 벗어나고 기도로 아는 것을 실천할 힘을 청해야합니다.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가 균형이 맞추어져야하는 것입니다.
말씀(진리)만 강조하면 성사에 소홀해질 수 있고, 성사(은총)만 강조하면 말씀에 소홀해 질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만 해서도 안 되고 기도만 해서도 안 됩니다.
둘 다 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5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루카 20,27-40
우리의 고통과 눈물, 한계와 좌절, 희망과 기쁨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
오랜 세월 아동 복지 분야 사목터에서 사목하시다가 정년을 마무리하신 수녀님께 들은 말씀입니다.
평생 사목 일선에서 고생하셨으니, 기도 안에서 편안한 노후 시간을 보내야 하나, 고민하시다가,
그게 아니다 싶어 장상께 청원 하나를 드렸답니다.
아동 보육 시설에서 많이도 말고 딱 한 명의 아기만 케어할 수 있기를. 장상께서 흔쾌히 수락하셔서 지금 그 일을 너무나 행복하게 하신다는 말씀, 그 아기를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저는 너무 존경스러워서 크게 박수를 쳐드린 적이 있습니다.
심각한 저출산과 초고령화 현상을 동시에 직면한 우리 사회입니다.
저출산도 큰 문제이지만 초고령도 큰 문제입니다.
정년에 도달했지만, 몸과 마음이 아직도 이팔청춘인 젊디젊은 은퇴자, 저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인물인데, 아직 셀 수도 없이 남은 날들은 대체 어떻게 감당할 것입니까?
이런 측면에서 딱 아기 한 명을 선택하신 수녀님의 선택은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기와 만용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연세가 90인데, 그래서 서 있기도 힘들고 팔에 힘도 없는데, 오직 용기로 충만해서 갓난아기 한 명 케어하다가, 바닥에 아기 떨어트리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입니까?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명확히 식별할 수 있는 기도와 식별력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지난 세기 탁월했던 대 영성가 헨리 나웬 신부님도 비슷한 체험을 하셨습니다.
그는 저명한 신학자요 심리학자로 평생 유명 인사로 살았습니다.
전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자신이 개척한 고유한 영성을 전파했습니다.
그의 강의실은 수백 수천 명의 청중으로 가득 찼고, 가는 곳마다 큰 박수와 환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헨리 나웬 신부님이 어느 날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탁월한 강사, 심리학의 대가, 명문 예일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평생 명예 교수직을 다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에 위치한 새벽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데이 브레이크 공동체의 공동체 일원이 되어 딱 한 명의 장애인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게 됩니다.
나중에 헨리 나웬 신부님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전 세계를 다니면서 명강의를 설파할 때 만나지 못했던 하느님을 거기서 만났습니다.
아담이라는 중복 장애인을 하루 온종일 케어하면서, 그 형제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고통과 눈물, 그의 한계와 좌절, 그의 희망과 기쁨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 한마디를 건네고 계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 38)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 만나는 나와 맞지 않는 이웃들, 그가 죽은 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라면, 그의 숨결, 그의 생명, 그의 인생 안에 하느님께서 반드시 살아계시고 현존해 계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아직 살아 숨쉬고 있는 결핍투성이, 상처투성이, 고통덩어리인 우리 각자의 인생 여정 안에도 하느님께서는 굳건히 살아 계시고 현존해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저 구름 너머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몸담고 있는 바로 여기, 이 공동체, 부족해 보이는 동료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 자리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죽지 않고 이렇듯 열심히 살아 숨 쉬고 있음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비록 고통과 상처 비참으로 얼룩진 오늘 하루지만, 바로 그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삶 너머 삶>
2023. 11. 25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루카 20,27-40 (부활 논쟁)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삶 너머 삶>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삶 너머 삶
삶과 삶
사이 죽음
삶 너머 삶
삶과 삶
잇는 죽음
삶 너머 삶
은총의 삶
은총의 죽음
삶 너머 삶
삶의 은총
죽음의 은총
삶 너머 삶
없는 듯
있는 삶
삶 너머 삶
있는 듯
없는 죽음
삶 너머 삶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