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법시행기념비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 140-1)
1651년(효종 2)에 영의정 김육이 호서지방에 대동법이 시행되도록 상소하여 1659년(효종 10) 이를 시향하게 된 것을 기념한 비로, 김육이 죽자 충청도 백성들은 부모를 보낸 것처럼 슬퍼하며 상가에서는 부의금을 받지 않고 백성들은 고인의 공덕을 기릴 추모비를 세워줄 것을 청원하여 삼남지방으로 통한 길목이며 충청도에서 서울로 향하던 첫 번째 역원인 소사원에 이 비를 세웠다
(본래 이름은 조선국영의정김공육대동균역만세 불망비朝鮮國領議政金公堉大同均役萬世不忘碑 또는 호서선혜비湖西宣惠碑였으나 지금의 공식 명칭은 ‘대동법시행기념비’로 대동법과 균역으로 백성을 사랑해준 은공을 오래 오래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본래 위치는 현재보다 마을 쪽으로 1백여 미터 아래 옛 소사원 터에 있었으나 1970년 현재 위치로 옮겼다
높이는 300cm, 너비 85cm, 두께 24cm이다
1980년 10월 문화재위원회에서 만들어 설치한 대동균역법 시행 공적비와
수령(군수)들의 선정비(불망비)도 있다
전북 익산에도 선정비 ‘김육 불망기’ 두 기가 있다
♤ 조해영가옥 (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477) 안에 있는 비와
♤ 용안 동헌 (전북 익산시 용안면 교동리 299) 뜰에 있는 비가 그것이다
그리고 충남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310-1에도 그의 송덕비가 있다
♤ 대동법
조선 전기 조세 수취의 원칙인 조용조(租庸調)로 삼분화되어 있던 수취 기준을 전세와 군역으로 나누어 작미(쌀로 거둠)와 작포(포로 거둠)로 거두는 형태로 정리하고, 조선 전기에 고려되지 않아 자체적으로 해결해야만 했던 지방 관아의 운영비를 포함한 각종 잡세에 대해 조세 정책 안에 포함시켜 일원화한 조선 중후기의 조세 개혁으로 지방 특산물이 아닌 쌀로만 세금을 내도록 하는 제도이다
조(租)는 전세의 형태로 토지에 부과하여 곡물을 징수하고, 용(庸)은 다시 이분화되어 요역과 군역으로 나뉘어 군역은 성인 장정에게, 요역은 호(戶)에 부과하였으며, 조(調)는 지역 토산물을 공납의 형태로 호(戶)에 부과하여 징수하였다
효종 때에는 김육의 주도로 1651년에는 충청도에 서, 1658년에는 전라도 연해에 실시되었지만 대동법의 현실성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기에 김집을 필두로 하는 산당과 송시열이 반대하였다
(선조 41인 1608년에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이 처음으로 대동법을 창설하여 경기도에서 실시하여 경기도민이 혜택을 입었다)
조선 후기 사회의 특성 상 양반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책을 펼치기란 쉽지 않았기에 대동법은 조선 내내 동안 가장 개혁적인 법이라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정기적으로 부담하는 상공만이 대체 되었을 뿐, 비정기적으로 부담하는 별공과 진상은 없어지지 않아 공납의 폐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일부 산간 지방에서는 쌀 대신 베(대동목)나 동전(대동전)으로 걷기도 하였는데, 그 후 화폐의 보급에 따라 대동미는 점차 대동전으로 대치되었다
1894년(고종31) 모든 세납(稅納)을 병합, 결가(結價)를 결정하였을 때 대동미도 지세(地稅)에 병합 되었다
♤ 김육(金堉)
조선 후기의 재상으로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 (潛谷), 회정당(晦靜堂) 시호는 문정공(文貞)이다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의 할아버지이며 숙종은 김육의 외증손자이다)
인조 초부터 효종 후반까지 활동한 고위 관리로서 대동법을 추진해 공납의 폐단을 시정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했다
대동법의 아버지이다보니 조선 후기 인물 중에서도 손꼽힐 수준의 연구가 진행된 인물이다
인쇄 사업을 차려 재물 면에서도 부족함이 없었고 청풍 김씨를 일으켰으며 영의정에 올랐고 서인소속이다
손자 김석주는 우의정에 올라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노론의 창립 멤버가 됐다
대동법의 시행에 덕을 본 충청도 백성들은 충청도에 통문을 돌리고, 부의하려고 했던 돈으로 비석을 세웠는데 그것이 현재 평택에 있는'대동법 시행 기념비'다
♤ 김육 묘 (경기도 남양주시 경강로399번길 81-3, 삼패동 산 41-1)
부인 파평 윤씨와의 합장묘로 묘역에는 묘표, 상석, 향로석, 혼유석 각 1기, 문인석 및 망주석 각 2기가 있다
향로석은 6각의 향탁을 형상화하였고 현종 5년 (1664)에 세운 신도비의 머리돌에는 두 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다투고 있는 형상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소사원길 두 번째(경기도 삼남길 마지막) 스탬프를 찍고 근처에 있는 소사원 터로 간다
소사원 터 (경기도 평택시 소사2길 190-7, 소사동 70-1)
소사원은 삼남대로 경기도 구간의 마지막 원으로 충청도에서 넘어오는 관문關門 역할을 했고, 제8대로(충청수영로)의 분 기점이기도 해서 원이 설치됐다
조선 후기에는 소사장이 개장됐고, 호서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의 공적을 기려 ‘대동법시행 기념비’가 세워졌다
소사원은 갑오 개혁(1894) 때까지 존속됐다가 폐원된 것으로 보이고 폐원된 뒤에는 소사점이 운영됐으며, 소사장도 1920년대 초까지 유지됐지 만 현재 소사원 터는 민가로 변했고
옆에는 소사동 미륵이 있다
예전에는 마을에서 주기적으로 당제를 올렸는데 지금은 정기적 당제는 없지만 그래도 몇 몇 사람이 정성으로 치성을 드린다
소사1교를 지나
소사벌을 걷는다
♤ 소사벌
소사동 남쪽 소사천에서 안성천 사이의 벌판으로 평택평야의 곡창지대이면서 들판 가운데로 삼남 대로가 지나갔다
아파트 구조물이 아직은 여기까지 침범하지 않은 청정지역이지만
이 너른 벌판(소사벌)은 아픔의 역사를 품고 있다
♤ 소사벌대첩(1597년)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침략을 받은 조선은 속수무책이었다
일본군은 예상외의 규모, 잘 훈련된 병사들, 우수한 무기로 조선군을 몰아붙였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과 의병들의 활동, 그리고 명나라의 도움으로 전세는 뒤집혔고 곧 강화회담이 열렸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지속되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일본군은 다시 침략했다
(이것이 1587년 정유재란이다)
일본군의 재침으로 호남의 관문이었던 진주성이 함락되었으며 남원성과 전주성도 점령당하고 조선수군까지 칠천량에서 대패하면서 일본 육군은 거침없이 북진하게 된다
일본군의 북상 소식을 들은 명나라의 경리조선군무 (經理朝鮮軍務) 양호는 급히 기병과 보병 4천명을 평택 소사벌로 파병하였다
좌우군으로 나눠 북상하던 일본군 6만여 명도 천안 부근에 집결한 뒤 6천여 명을 소사벌로 올려 보냈다
1597년 9월 5일, 6일 사이 명나라 군대와 일본군은 소사1동 앞 소사교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이날의 대회전에서 우백영과 해생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는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일본군을 맞아 6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한 소사벌 대첩의 승리로 왜군의 북상은 꺾이고 4일 뒤에는 이순신이 명량대첩에서 승리하면서 육군과 수군의 양동작전도 실패했다
북상을 포기하고 경상도 일대로 후퇴했던 일본군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으로 돌아 갔다
(소사벌대첩은 왜란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건이다)
유천1동 마을회관을 지나고
평택정수처리장을 지나면
바로 안성천 둑방에 오른고 멀리 안성천교가 보인다
안성천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일대에서 발원하여 평택시를 지나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길이 76㎞, 유역면적 1,722㎢이다
안성천의 본류와 지류가 합류하는 곳 근처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는데 안성평야라 한다
안성평야는 대부분 충적토로 이루어진 평야로 예로부터 토질이 비옥하여 김포평야와 함께 경기미의 주산지를 이루고 있다
안성천 하구에 방조제가 들어설 때까지는 일반적 으로는 하구로부터 16.5㎞ 떨어진 평택시 팽성읍 신호리까지, 만조와 장마가 겹칠 경우에는 무려 현재 평택 시가지인 합정동까지 조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 방조제를 아산만방조제라 하는데, 방조제가 완공된 뒤 현재 평택 남부와 아산 북부 일대의 넓은 간석지가 간척되어 농경지가 크게 확대되었다
지금도 인근 지역의 지명들(아산 둔포, 평택 배미와 합정동 등)에 방조제가 들어서기 이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안성천 상류인 안성시 금광면과 고삼면에는 1956 년에 금광저수지가, 1958년에 고삼저수지가 축조 되었다
이 저수지들은 본래 농업용으로 개발되었으나 현재 는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안성시 전부가 안성천 수계가 아니다
삼죽면의 북쪽 1/2(남쪽 1/2은 안성천 수계), 죽산면의 2/3, 일죽면의 전체는 한강 수계이다
심지어, 죽산면의 남쪽 1/3(3개리 : 두교리, 칠장리, 당목리)은 금강 수계이다
소사벌에서 다시 맞붙은 중국(청)과 일본
♤ 소사벌전투(1894년)
경복궁 쿠데타로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은 양력 7월25일 아산만 입구 풍도를 지나가던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였다
(청일전쟁의 전초전이었다)
풍도해전으로 청의 북양함대는 군함1척이 격침되고 병사들과 보급품을 수송하던 영군선박이 침몰하면 서 1200명의 병사들이 익사하였다
일본은 풍도해전이 청나라로부터 자주권을 되찾기 원하는 조선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
풍도해전으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일본은 작전계획에 따라 오오시마가 이끄는 일본여단 4000명을 삼남대로를 따라 평택(진위)과 성환으로 급파하였다
청나라도 인천항으로 상륙하였던 부대와, 아산의 백석포와 평택의 군물(문)포로 상륙하여 성환과 아산방면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를 합류시켜 일본과의 일전에 대비하였다
평택일대에 주둔한 청·일 양군은 진지구축에 들어갔다
척후를 유천3동 군두포에 두었던 청군은 망근다리 부근에 망루(망군대)를 세우고 적의 동태를 감시 하였다
삼남대로를 따라 남하하여 소사벌 일대에 진을 친 일본군도 적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은 오래가지 않았다
1894년 7월28일 저녁 청·일 양군은 소사벌과 성환부근의 홍경평에서 격돌하였다
싸움은 밤을 새워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되었으며 총성과 대포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야간에 전투가 전개되면서 당시만 해도 간석지와 황무지, 웅덩이가 대부분이었던 소사벌에서는 예기치 않았던 일들도 발생하였다
지척을 분간하지 못해 헤매던 일본군이 웅덩이에 빠져 죽었다고 하여 ‘왜몰보’라는 지명이 유래된 것도 이때였다
역사에는 '성환전투'라고 기록된 일련의 전투에서 청군은 500여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지만 일본군은 단 68명만 잃었을 뿐이다
청군과 일본군만 죽고 사는 전쟁이 아니었다
전쟁터가 한반도, 그것도 평택과 아산, 성환이다 보니 인근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군문포와 군두포, 소사동 일대의 마을은 포탄에 맞아 초토화 되었으며, 한참 벼가 자라고 있었던 소사벌과 홍경평은 쑥밭이 되었다
군수물자 운반과 보급을 위해 동원된 민중들, 참호 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동원된 백성들의 고통도 이에 못지않았다
열강의 침략과 행포가 극심해 어디 하소연 할 수 없는 답답함으로 하늘을 향해 탄식했던 말이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 였다
안성천교에 도착하여(다리 너머는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으로 충남삼남길 제1길 - 성환천길이 다시 시작된다)
삼남길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한 번 상기하며 경기도 삼남길 제10길 - 소사원길 걷기를 마무리 한다
도일로를 출발하여 여기 안성천교까지 경기도 삼남길 제10길 트레킹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아울러 2021년 3월 19일 제1길(한양관문길) 남태령을 시작으로 2021년 6월 24일 제10길 (소사원길) 안성천까지 경기삼남길 10개 구간 걷기를 모두 마쳐 1차 목표를 달성하였습니다
우리 님들 모두모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ㅁ^
첫댓글 경기도 삼남길을 완성하셨군요. 걷기보다 힘든 후기 작성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네요
후기 작성이 더 힘들지요 ㅎ
감사합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