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 때 : 2022년 8월 21일(일)
○ 탐방구간
창의문 ➡ 윤동주문학관 ➡ 시인의언덕 ➡ 청운 문학도서관 ➡ 인왕산 숲길(이빨바위, 가온다리, 해맞이동산, 수성동계곡) 트레킹 ➡ 이중섭 살던 곳 ➡ 윤동주 하숙집 ➡ 박노수 미술관 ➡ 벽수산장 흔적 ➡ 통인시장 ➡ 이상범 가옥 ➡ 천경자 집터 ➡ 노천명 집터 ➡ 이상의 집 ➡ 김가진 집터 ➡ 한성 정부 유적지
○ 탐방소요시간
약 6시간 30분(09시 ~ 15시 30분, 점심시간 포함)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 북소문北小門)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118, 청운동 산 1-1)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현재의 문은 1741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2015년 12월 2일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풍수지리설에서 이 문을 열어놓으면 궁궐과 왕조에게 액을 불러온다는 미신으로 풍수학자 최양선이 건의하여 폐쇄하였다
때때로 임시 개방을 하기도 하였는데, 1422년(세종 4)에 도성을 정비하는 일을 원활히 하고자 창의문과 숙정문을 연 일이 있다
이후 한동안 열어 두던 창의문은 1446년(세종 28) 4월에 닫혔다
1469년(예종 1) 3월에도 문을 닫으라는 명이 있었다
1623년(광해군 14) 3월 12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과 창의문을 통과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영조 때에는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의 청으로 창의문을 개수하기로 하여 1714년(영조 17) 6월 16일 문루를 설치하였다
1623년(광해군 14) 3월 12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과 창의문을 통과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영조 때에는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의 청으로 창의문을 개수하기로 하여 1714년(영조 17) 6월 16일 문루를 설치하였다
① 축성(築城)
1395년(태조 4) 한양(지금의 서울)을 방위하기 위한 도성을 쌓으려고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의 조사 측정을 실시하였다
이듬해 음력 1월 9일 전국에서 징발한 장정 11만 8천 7백여 명을 동원하여 축성을 시작하였는데, 길이가 9970보(步 : 1보는 6자)이고 높이가 40자 2치인 도성을 97구간으로 나누어 각 구간마다 전자문에 따른 번호를 하늘 천(天) 자부터 조상할 조(弔) 자까지 붙였다
전후 98일 만에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따라 성벽의 축조를 완료하였다
1396년(태조 5) 9월 성문을 모두 완성하였다
정북(正北)쪽에는 숙청문(肅淸門 - 숙정문), 동북 (東北)쪽에는 홍화문(弘化門 - 혜화문), 정동(正東) 쪽에는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남(東南)쪽에는 남소문(南小門), 정남(正南)쪽에는 숭례문(崇禮門), 소북(小北)쪽에는 소덕문(昭德門 - 소의문), 정서 (正西)쪽에는 돈의뮨(敦義門), 서북(西北)쪽에는 창의문(彰義門)을 두었으며, 수문 1소(이간수문?) 를 두었다
② 보수(補修)
1422년(세종4)에 흙으로 쌓은 곳을 모두 돌로 다시 쌓는 등 봉족(奉足)과 잡색(雜色) 32만 2천 4백 명을 동원하여 38일 만에 대대적으로 성곽을 고쳤다
1451년(문종 1)에도 성을 고쳤지만 임진왜란 때 일부가 부서졌다
1616년(광해군 8)에 개수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다시 부서졌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맺은 약조 중에 성벽을 쌓지 않고 보수도 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부서진 채로 방치되다가, 1704년(숙종 30) 이조판서 이유(李儒)의 주장으로 5군문(五軍門)의 장정을 동원하여 1711년(숙종 37)까지 수축하였으며, 1743년(영조 19)에 다시 고쳤다
그밖에도 효종·현종·영조·순조 시대에 부분적인 개수를 행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서울의 성곽은 대체로 태조, 세종, 숙종, 순조 때의 것이다
태조 시기에 지어진 성은 자연석을 거칠게 갈아서 사용하였으며, 아래쪽은 큰 돌을 사용하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로 축성하였다
세종 시기에 지어진 성은 좀더 직사각형의 모습을 띄고 있으나, 돌과 돌을 갈아 자연스럽게 이으려 하였다
숙종 또는 순조 시기에는 직사각형으로 돌을 잘라서 축성하였다
③ 훼손(毁損)
1907년(고종 44) 6월에는 이완용 등의 주장에 의하여 도성을 철거하기로 정하였고, 이를 위하여 같은 해 7월 30일에 성벽처리위원회를 마련하였다
1907년 9월부터 숭례문의 북쪽 성벽을 철거하고 남지를 매립하였으며, 1908년 3월에는 흥인지문의 좌우 성벽을 헐었다 (이는 전차 선로의 부설과 관련 되어 있었다)
또 1908년 9월에는 소의문과 숭례문 좌우의 성벽 총 77간을 파괴하였다
일제강점기의 도시계획과 한국전쟁으로 성문과 성벽이 많이 파괴되었다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의 전차를 부설하면서 서대문 과 동대문의 일부를 헐어내었고, 광화문과 용산 사이의 전차를 부설하면서 숭례문 부근을 역시 헐어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산성을 제외한 평지에 있던 성곽은 모두 헐리어 현재의 모습과 같이 되었다
④ 복원(復元)
1974년 박정희대통령의 국방유적 보존 및 정비 지시에 따라 구자춘 서울시장이 본격적으로 복원 사업을 시작하였다
1975년 광희문 문루 복원을 시작으로 훼손된 체성과 여장 복원, 주변 가옥 매입 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75년부터 삼청지구(창의문~숙정문) 복원에 이어 2012년 9월까지 진행된 인왕산 정상 구간까지 총 길이 18,627m 중 69%인 12,771m의 복원작업이 완료되었다
2013년 5월 4일 숭례문 복구 기념식과 함께 숭례문 남동측 광장구간 성벽 복원까지 마무리 되었으며, 앞으로 남산 구간, 시장공관 구간이 추가로 복원될 예정이다
그리고
2012년 11월 23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신청자격이 부여되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으나, 2017년 3월 21일 다른 나라의 세계유산 도시 성벽과 비교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 등재 불가로 결정되면서 사실상 등재가 불가능해졌다
현재 세계유산 2022년 등재를 목표로 자료를 보강하여 재추진하는 중이다
윤동주문학관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119, 청운동 3-100)
고도가 높은 청운동 일대에 수압을 높여 물을 공급하기 위해 1974년에 세운 건물로, (윤동주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 2009년에 용도를 다하면서 수도가압장의 기계실이자 관리 사무실로 사용되던 건물을 ‘윤동주문학관’으로 사용하면서 윤동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설계를 마치고 거의 착공을 앞둔 시점에 엄청난 폭우로 산사태가 일어났다
걱정스럽게 산사태 현장을 살펴보던 건축가의 눈에 못 보던 벽이 들어왔다
산사태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벽이 발견된 것이다
처음에는 옹벽인 줄 알았는데 잘 살펴보니 수도가압 장 뒤쪽에 묻혀 있던 콘크리트 물탱크였다 (제2전시실, 제3전시실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 제1전시실(시인채)
시인의 순결한 시심(詩心)을 상징하는 순백의 공간으로 ‘인간 윤동주’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9개의 전시대에는 윤동주 시인의 일생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한 사진 자료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한 쪽 벽면에는 윤동주의 시집과 윤동주가 좋아했던 책들이 전시가 되어 있으며, 백석의 시집을 직접 필사한 책의 겉표지도 볼 수 있다
♤ 제2전시실(열린우물)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에서 모티브를 얻어 용도 폐기된 물탱크의 윗부분을 개방하여 중정(中庭)을 만들고 '열린 우물'이라 이름하였다
물탱크에 저장되었던 물의 흔적이 벽체에 그대로 남아있어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퇴적을 느끼도록 해주는 곳으로 하늘과 바람과 시를 사랑했던 윤동주 시인을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우물은 하늘에도 열려 있다
♤ 제3전시실(닫힌우물)
이곳이 원래의 계획대로 설계를 마친뒤 발견되어 건축가에게는 윤동주 시인을 표현하는데 날개를 달아줬다
실제 스토리디렉터는 후쿠오카감옥 독방으로 설정, 내면을 바라보고, 자아성찰을 하는 곳으로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두가지의 의견이 합해지게 되었다
윤동주는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으로 1943년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뒤,
1년 7개월 뒤인 1945년 2월 건강이 악화되어 불과 27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요절했다
(혈액대체 실험을 위한 실험 재료로 쓰여서 사실상 살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불과 해방 6개월 전의 일이었다
윤동주 문학관에 있는 모든 자료는 영인본이다
시인의언덕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7-3)
윤동주문학관 옆에 있는 계단을 따라 오르다가
뒤돌아 보면, 개방되어 있는 물탱크 윗부분이 보인다
윤동주는 누상동(서울시 종로구 옥인길 57, 누상동 9)에서 하숙 생활을 했을 때(1941년 5월 ~ 9월, 약 3개월 반 정도) 종종 인왕산에 올라 시상을 다듬곤 했다
따라서 2009년 7월, 그를 기리며 이곳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었다
언덕 한가운데는 자그마한 반원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어 주변으로는 자연스레 쉼터들이다
그 곁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섰다
앞면에는 '서시'가 새겨져 있고, (‘죽는 날까지 하늘 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시인의 마음이다)
뒷면엔 '슬픈 족속'이 새겨져 있다
그는 1941년 5월 연희전문학교 기숙사를 나와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 하숙집을 얻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청운공원의 제일 높은 자락에 자리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서시'는 누상동 하숙 시절에 쓴 시로 알려져 있으나 누상동을 떠나 북아현동으로 옮긴 후인 1941년 11월에 발표되었다
(혹 누상동 하숙 시절 시상을 가졌을 수는 있다)
부암동 쪽으로는 한양도성 성곽이 지난다
성곽 쪽 길 끝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시인의 눈인 양 언덕을 굽어본다
언덕에서도 가장 높은 장소다
♤ 장안연우(長安煙雨)
안개비가 내리는 3백년 전의 서울 풍경으로
서울 시내에 내리는 안개비라는 뜻이다
멀리 관악산, 우면산, 청계산이 보인다
청운문학도서관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36길 40, 청운동 4-20)
인왕산의 경사 지형과 자연 경관을 고려하여 설계된 공공 도서관으로, 청운시민아파트(청운동 일대의 판자촌을 철거하고 1969년 말 준공한 11동 - 531세대)를 2005년 9월 모두 철거하여 2007년 1월 '청운공원'을, 2009년 7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개장하고, 2010년 12월 '윤동주 문학전시 관' (2012년 7월 리모델링하여 '윤동주문학관'으로 재 개관)을 개관하고, 2014년 11월 전통 한옥 형태의 ‘청운문학도서관’을 개관하였다
한옥은 지하층에서 대여한 책을 읽을 수 있는 열람실 역할을 하는데, 한옥의 대청마루, 누마루, 툇마루에 앉아 남쪽으로 탁 트인 경관을 바라보면,
한옥의 안마당과 인왕산 자락의 푸른 숲, 저 멀리 도심의 빌딩 숲이 한 눈에 담겨 자신이 잠시도시의 복잡한 삶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 묻힌 공간에서 쉼을 얻고 있음을 깨달으며 여유를 느끼게 된다
한옥 본채 곁에 있는 작은 연못 위에 지어진 아담한 크기의 정자에서는
옛 선비들이 즐기던 풍류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첫댓글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오르면 조망이 뛰어나지요. 인왕산 나지막한 산이지만 정말 멋진 조망을 선사하는 산이지요. 인왕산 자락길의 이빨바위도 생각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