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역사문화공원~소이산 정상]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소이산(좌)과 철원역사문화 전시관(우)
소이산 정상의
소이산 전망대에 관한
안내문
소이산 평화 마루공원에 관한
안내문
소이산 정상 직전에 있는
옛 미군막사
옛 미군막사에 관한
안내문
소이산 정상
소이산(362m) 정상에서 바라본
금학산(좌)과 고대산(우)
[위 사진부터 이어지는 7장의 사진은
소이산(362m) 정상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360도 파노라마 조망하면서
촬영한 사진들이다.]
소이산(362m) 정상에서 바라본
(좌로부터) 금학산, 고대산, 신탄리역
소이산(362m) 정상에서 바라본
백마고지역
소이산(362m) 정상에서 바라본
(가까운 곳부터) 철원평야, 삼자매봉, 백마고지, 북한의 효성산
소이산(362m) 정상에서 바라본
철원역(폐역, 좌)과 노동당사(우)
소이산(362m) 정상에서
멀리 보이는
철원군 동송읍의 학저수지
소이산(362m) 정상에서 바라본
금학산(좌)과 고대산(우)
[ 이상으로 파노라마 조망 끝 ! ]
소이산(362m) 정상에서
금학산(좌)과 고대산(우)을 배경으로
이성수
소이산(362m) 정상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금학산(좌)과 고대산(우)
소이산(362m) 정상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남한의 백마고지(좌)와 북한의 김일성 고지(우)
[ 김일성 고지는
북한이 한국전 최고의 전승지로
선전하는 전적지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고지를 1211고지로 부르며,
북한 교과서에서도 소개되고 있다.]
[ 김일성 고지는
궁예가 태봉국을 세웠을 때
도읍의 진산으로 삼았던
산이기도 하다.]
소이산(362m) 정상에 있는
철원 평야 방향
조망 경관 안내도
소이산(362m) 정상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남한의 백마고지와
그 뒤로 보이는
북한의 효성산
소이산(362m) 정상에서
줌으로 확대촬영한
노동당사
소이산 정상에서 철원역사문화공원으로
갈 때
통과하는
터널
터널에 전시되어 있는
철의 삼각지 전투에 관한
안내문
다시 돌아온
옛 미군막사
철원 고대 쌀이
맛 있는 이유
철원 용암대지에 관한
안내문
2024년04월12일(금요일) 철원군 [백마고지 전적지 충혼탑&노동당사&철원역사문화공원&소이산 정상&철원향교&도피안사] 탐방기 산 : 철원군 [백마고지 전적지 충혼탑&노동당사&철원역사문화공원&소이산 정상&철원향교&도피안사] 산행코스: [ 백마고지 입구 버스 정류장 ~(0.7km)~ 백마고지 전적지 충혼탑 ~(4.1km)~ 노동당사 ~(0.2km)~ 철원 역사문화공원 ~(1.3km)~ 소이산 정상 ~(2.8km)~ 월하리 힐링 벽화마을 ~(0.9km)~ 철원향교 ~(0.7km)~ 도피안사 ~(0.6km)~ 도피안사 버스 정류장 ] (11.3km) 일시 : 2024년 04월 12일(금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철원군 철원읍 : 최저기온 7도C, 최고기온 23도C]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4시간 소요) 05:52~07:00 연신내역에서 3호선 지하철을 타고 출발하여 종로3가역으로 가서 양주역행 1호선으로 환승해서 의정부역으로 이동 [1시간8분 소요] 07:00~07:34 의정부역에서 연천역으로 가는 1호선 전철 승차 대기 07:34~08:26 의정부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연천역으로 이동 [52분 소요] 08:26~08:30 연천역 3번 출구로 나와서 연천역 버스 정류장까지 도보로 이동 [4분, 265m 이동] 08:30~08:35 연천역 버스 정류장에서 신탄리역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39-2 버스 승차 대기 [39-2 버스는 농어촌버스임에도 배차간격이 20분대로 짧은 편이다.] 08:35~09:00 연천역 버스 정류장에서 39-2 버스를 타고 신탄리역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25분, 29개 정류장 이동] 09:00~09:23 신탄리역 버스 정류장에서 백마고지 입구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13번 버스 승차 대기 09:23~09:35 13번 버스를 타고 신탄리역 버스 정류장에서 백마고지 입구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12분, 4개 정류장 이동] * 09:35~09:43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에 있는 백마고지 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산행출발하여 백마고지 전적지 충혼탑으로 이동 [백마고지전적관(白馬高地戰蹟館) 소재지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1길 72 [산명리 1822-3] 목차 정의 개설 건립 경위 변천 구성 현황 정의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산명리에 있는 백마고지전투의 전시관. 개설 백마고지전투는 6·25전쟁이 절정에 이르렀던 1952년 10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3㎞ 북방에 있는 무명의 한 작은 고지를 둘러싸고 한국군과 중공군이 치열하게 접전하였던 전투이다. 한국군 보병 제9사단과 중공군 제38군 3개 사단이 전력을 기울여 쟁탈전을 벌인 끝에 우리 국군의 승리로 매듭지어진 전투라 할 수 있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0일 동안 백마고지 전투를 벌인 결과 아군과 적군 2만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는데, 전투 과정에서 발사한 포탄만 적군 측 5만 5000발, 아군 측 22만 발이었다. 또한 아군과 적군이 12차례의 공방전을 벌이며 24회나 주인이 바뀌었다. 백마고지전투가 끝난 후 산의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마고지전투는 한국군의 방수(防戍) 능력을 높이 평가받은 일전으로서 보(步), 전(戰), 포(砲), 공(空)의 협공이 긴밀하게 이루어진 고지 공방의 범례가 되는 결전이기도 하였다. 백마고지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현재 백마고지전시관이 건축되어 6·25전쟁 당시 치열하였던 현장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이와 동시에 민족상잔의 비극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되새기고 있다. 건립 경위 백마고지전시관은 백마고지전투에서 희생된 한국군, 미군, 중공군 등 전사자의 영혼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변천 백마고지전시관은 1990년 5월 3일 건립되었다. 현재는 DMZ 안보투어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구성 백마고지전시관은 ‘기념의 장’, ‘회고의 장’, ‘다짐의 장’ 등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격렬한 전투 현장을 재현하였으며, 높이 22.5m의 기념탑을 세웠다. ‘기념의 장’에는 통일에 대한 염원과 전승을 기념하기 위한 전적비가 설치되어 있다. 특히 당시 백마부장이었던 김종오 장군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 내에는 백마고지 탈환의 모습이 담긴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서 정상을 눈 앞에 두고 국군이 적의 기관총으로 더 이상 전진을 할 수 없게 되자, 제 9사단 제 30연대 1중대 3소대장 강승우 소위가 오귀봉 하사, 안영권 하사와 함께 수류탄을 뽑아 들고 육탄 돌격을 감행하였다. 결국 기관총 진지를 폭파한 후 장렬하게 전사하였고, 아군은 백마고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하여 탄피로 만들어진 조형물이다. ‘회고의 장’에는 아군과 적군의 전사자를 추도하기 위한 위령비와 분향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다짐의 장’에는 전망대, 자유의 종각 등이 설치되어 있다. 현황 백마고지전적관은 현재 국군 희생자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망대와 함께 자유의 종각도 건립하여 추모의 공간이자 안보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입장요금 : 무료(출입통제 없음) ] [백마고지 전투 날짜 1952년 10월 6일 ~ 10월 15일 장소 : 강원도 철원군 서북방 395고지(백마고지) 결과 :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의 승리 지휘관 대한민국 김종오 제9사단장 소장 대한민국 임익순 제30보병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김영선 제1대대장 대한민국 김봉철 제29보병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이대철 제1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김경진† 제2대대장 소령 대한민국 이주일 제28보병연대장 대령 대한민국 최창용 제3대대 중령 대한민국 전부일 제51보병연대장 대령 아군 병력 국군 제9사단 예하의 제28 ,29, 30연대 병력 2만 명 국군 제51, 52, 53 포병대대 국군 제53전차중대 미군 제213자주포병대대 미군 제955중포병대대 미군 제73전차대대 중화인민지원군 병력 중화인민지원군 제38군단 6개 연대 지원부대병력 총병력 4만 4056명 각종포 55문 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장융후이 대장 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戰鬪)는 6.25 전쟁 당시인 1952년 10월 6일 ~ 10월 15일까지 10일간 백마고지에서 한국군과 미군이 중국인민지원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당시 강원도 철원 서북방에 위치한 395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가 되어 중공군과 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재개되었다. 당시 제9보병사단은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 부대를 물리쳤던 김종오 소장의 지휘하에 1952년 9월 중순부터 철의 삼각 지대를 이루는 강원도 철원에 투입되어 395고지를 기점으로 우측 중강리까지 11km에 이르는 철원 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때 제9보병사단 정면으로 포진한 중공군 제38군 예하 113, 114 보병사단의 예비 부대로 제112보병사단이 후방에 대기 중이었다. 이를 간파한 김종오 소장은 1952년 9월 22일 좌측 전방의 395고지에 임익순 대령의 제30보병연대, 우측 전방에는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를 전개시키고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를 예비 부대로 하여 유사시 양 연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또한 유사시를 대비해 전부일 대령의 제51보병연대를 대대 단위로 분산시켜 평야 일대에 위치한 취약한 주저항선 방어를 강화하였다. 전투 과정 10월 6일 저녁 중국인민지원군 대장 장융후이는 제38군단 6개 연대의 지원부대병력 등 총병력 4만 4,056명과 각종포 55문의 지원을 받으며, 일제히 봉래호의 제방을 폭파시켜 역곡천을 범람시킴으로써 국군을 기습 공격했다. 이로 인해 제3대대가 증원 병력을 투입하는 데 차질을 빚어 중공군이 395고지로 맹렬히 돌격했고 제30보병연대 1대대장 김영선 소령의 휘하 군대와 3차례나 전투를 치렀으나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러나 10월 7일 중공군은 다시 제4차 공세를 감행해 2개 대대로 1대의 전초 기지를 포위해 지속적으로 보병 돌격과 지원 포격을 감행해 395고지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에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가 투입되어 2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395고지를 탈환했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10월 8일 중공군 제38군 예비 연대를 투입해 제5차 공세를 가해 오전 8시 다시 395고지 정상을 점령했으나 최창용 중령의 제28보병연대 제3대대가 반격하여 23시에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불과 3일 동안 5차례에 걸친 공방전으로 중공군 제38군 113, 114보병사단의 피해가 심각했으나 국군 제28보병연대는 물론 제30보병연대도 재편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할 피해를 입어 김종오 소장은 제29보병연대의 투입을 검토한다. 10월 9일 다시 중공군이 제6차 공세를 펼쳐 제30보병연대는 전력이 바닥나 3시간 만에 고지 정상과 우측 능성을 내주고 후퇴하지만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가 투입되어 역습을 감행해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그러자 중공군 제38군 사령부는 제112보병사단의 연대까지 동원해 10월 10일 대규모 인해 전술을 펼치고 제9보병사단의 잔병들도 참호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펼쳤다. 이날 3차례의 함락과 탈환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중공군이 최종적으로 고지를 장악했으나 10월 11일 오전 이대철 소령의 제29보병연대 1대대가 김경진 소령의 2대대 병력을 증원받아 고지를 탈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김경진 소령은 전투 과정에서 박격포탄을 맞아 전사했다. 이후에도 전투는 4일 동안 계속되어 10월 15일 새벽 제28보병연대는 기습을 감행해 395고지를 완전히 장악하고 제29보병연대도 고지 북방의 전초 기지를 탈환해 중공군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전투는 종결되었다. 결과 및 영향 이 10일 동안 12차례의 공방전으로 백마 고지는 황폐화되었고 중공군은 1만 명,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중공군 제38군은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해 재정비에 착수했고 국군 제9보병사단도 혹심한 손실을 입어 재편성이 필요했다. 또한 이 전투에서 국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도 강승우 중위,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 김경진 소령, 이성덕(1929년 1월~1952년 10월) 소위, 김광수 대위 등 많은 인물들도 전사하였다 . 전투 기간 동안 미 공군이 주간 669회, 야간 76회의 출격 기록을 세우며 중공군을 폭격했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제5공군은 745회 출격했다. 네이팜탄 358발을 포함해 폭탄 2700발을 백마고지에 투하했다. 중공군 제38군은 3개 보병사단 9개 연대 중 7개 연대에 걸쳐 1만 명을 잃게 되었다. 특히 이 전투에서 잃은 군대가 정예병이라 차후 신병이 보충되더라도 숙련을 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명칭 유래 백마고지는 원래 무명의 395고지였으며 현재의 백마고지로 불리게 된 유래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확정된 유래는 없지만 두가지 유력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치열한 공방전으로 인한 엄청난 포격으로 인해 나무가 모두 쓰러지고 산등성이가 허옇게 벗겨져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여 백마고지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설이다. 두번째는 백마고지의 야간 전투시 백마고지를 뒤덮은 수많은 낙하산 조명탄들이 터져서 내려오는 하얀 섬광을 영국 외신기자가 영국 옥스퍼드셔주의 벅셔 다운즈에 있는 Whitehorse Hill과 모양이 비슷한다고 생각하여 이를 사용했고 AP통신사, INS통신사 등을 통해 'White Horse Hill'라는 명칭을 사용한 기사가 전세계로 타전되었다. 그리하여 'Los Angeles Times', 'Monroe Morning World' 등 미국 신문사들이 10월 7일자 기사부터 'White Horse Hill'라는 명칭이 들어간 기사들을 재배포하면서 공식적인 명칭에 이르렀다. 한편 국내언론에서는 1952년 10월 8일 이전에는 '백마고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395고지 수색전', '395고지 전초전' 등으로 표기되었고 10월 8일부터 백마고지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이 기사 역시도 AP통신사발 기사이다.] * 09:43~10:06 백마고지전적관과 백마고지 전적지 충혼탑을 탐방한 후 상승각(常勝閣)에서 백마고지를 사진촬영 [백마고지 전적지 충혼탑이 있는 봉우리는 백마고지가 아니라 백마고지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백마고지는 지금도 군사시설과 병력이 차지하고 있다.] * 10:06~10:50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금강산로 265 번지에 있는 노동당사로 이동 [강원도 철원읍 관전리에 있는 노동당사(勞動黨舍)는 1946년에 완공된 3층 건물이다. 6.25전쟁(六二五戰爭 , Korean War)이 일어나기 전까지 북한의 노동당사로 이용되었다. 현재 이 건물은 6.25전쟁 때 큰 피해를 입어 건물 전체가 검게 그을리고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게 나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6.25전쟁과 한국의 분단현실을 떠올리게 해서 유명가수의 뮤직비디오 촬영지나 유명 음악회의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현재 철원 노동당사는 철원군(鐵原郡)이 안보관광코스로 운영하고 있으며,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2001년 2월 근대문화유산에 등록되면서 정부 차원의 보호를 받고 있다.] [19년 전, 서태지가 철원 노동당사에서 꾸었던 '꿈' [강원도 자전거여행 ②] 철원 승일교에서 백마고지역까지 2/2 오마이뉴스 기사 등록일 : 2013.04.28. 군탄공원에서 도피안사로 가는 길은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멀리 돌아가야 한다. 자동차도 아니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로는 상당히 먼 거리다. 길을 가던 도중에, 애초 왜 이 길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자동차가 잘 다니지 않는 길을 택한 탓에 길을 찾는 일도 쉽지 않다. 그래도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길에서 철원이 아니고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뜻밖의 풍경과 마주친다. 요즘은 철원도 관광이라는 이름의 개발이 잦은 까닭에 원시 상태의 한탄강을 보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런데 이 길은 거의 날것 그대로의 한탄강을 보여준다. 평야 한가운데로 깊은 협곡이 지나가고 그 협곡 위로는 논과 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그 논과 밭이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것도 순전히 자전거여행을 하는 덕에 맛볼 수 있는 묘미다. 우연히 발길을 들여놓은 곳에서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과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짜릿해진다. 이런 감동은 자동차를 타고 다닐 때는 좀처럼 맛보기 힘든 것이다. 자전거는 이렇게 협곡 아래를 유유히 흐르는 한탄강을 가로지른 뒤, 철원평야 위로 농로나 다름이 없는 한적한 도로를 끝없이 달려간다. '피안'을 잃은 도피안사, '평화'를 꿈꾸는 노동당사 도피안사는 겉보기와는 달리 역사가 꽤 깊은 절이다. 88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해 오늘까지 그 이름을 이어오고 있다. 오랜 세월을 지나온 만큼 우여곡절도 많이 겪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절은 1100여 년 전의 그 절이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1898년에 화재로 소실된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다시 한국전쟁 중에 완전히 불타 없어진 절을 1959년에 재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절을 재건할 당시, 절터 땅 속에 파묻혀 있던 철불이 발견됐다. 이 철불이 천년이 넘은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이다. 그렇게 해서 겨우 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철불과 절 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삼층석탑이 거의 전부다. 도피안사는 이 철불과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재건됐다. 그 후로도 도피안사에서는 절을 '재건'하는 일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가 없다. 절 한쪽 마당에 공사 자재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1988년에 대적광전과 삼성각 등을 개축하거나 증축했다. 하지만 절을 고쳐 짓는 공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도피안사'는 '도선국사가 산수 좋은 곳을 찾던 중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과 같은 곳에 이르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지금의 도피안사에서는 피안을 떠올리는 일이 쉽지 않다. 전쟁 중에 불타 없어진 것은 도피안사뿐만이 아니다. 도피안사를 떠나 노동당사를 향해 가는 길에, 다 부서지고 벽체 일부만 남아 있는 교회 건물 한 채가 나타난다. '철원 감리교회'다. 이 교회 역시 전쟁의 참화를 겪어 완전히 파괴된 상태로 남아 있다. 그 풍경이 상당히 끔찍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남긴 참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철원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극한의 참화는 아무래도 '철원 노동당사'까지 가야 볼 수 있다. 건물 자체만 놓고 봤을 때, 노동당사는 이 모든 참상의 결정체다. 노동당사는 멀리서 봐서는 외관에 거의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벽체 말고 사실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벽체만 남아 있는 게 더 기괴하게 보인다. 벽이란 벽에 모든 총탄과 포탄 자국이 남아 있다. 건물이 앞뒤 좌우를 불문하고, 어디 한 군데 성한 구석이 남아 있는 걸 찾아보기 어렵다. 불에 탄 흔적도 그대로다. 노동당사 위로 총탄과 포탄이 비 오듯 쏟아졌던 게 분명하다. 그런 상태로 벽체를 유지한 채 서 있는 건물이 참으로 기이하다. 노동당사는 마치 죽음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다. 한국전쟁 당시 노동당사 일대는 옛 철원읍의 시가지에 속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일대에서 이 건물 외 다른 건물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전쟁통에 모두 다 사라졌다. 앞서 지나쳐온 감리교회도 그 중 하나다. 이 일대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알 수 있다. 노동당사는 철원이 북한에 속해 있을 때, 조선노동당 철원군 당사 건물로 쓰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전성기 때 이 건물에서 '발해를 꿈꾸며'를 뮤직비디오로 찍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뮤직비디오는 서태지가 노동당사 안에서 흰 비둘기를 날리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노래 가사는 그보다 더 인상적이다.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노래 가사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 한민족인 형제인 우리가 서로를 겨누고 있고 우리가 만든 큰 욕심에 내가 먼저 죽는 걸 진정 너는 알고는 있나 전 인류가 살고 죽고 처절한 그날을 잊었던 건 아니었겠지... (중략)... 언젠가 작은 나의 땅에 경계선이 사라지는 날 많은 사람의 마음 속엔 희망들을 가득 담겠지 난 지금 평화와 사랑을 바래요…"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 노래를 발표한 지 어느새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그 사이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해를 꿈꾸며'를 통해 말하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없다. 그들이 노래하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노래는 여전히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노동당사가 평화의 상징이 될 날은 언제가 될까? 한 집 건너 한 집 지뢰 폭발, 희망을 잃지 않은 대마리 노동당사에서 백마고지 전적지가 있는 곳까지는 약 2km다. 이제 이 여행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그런데 백마고지 전적지까지 가는 길이 예사롭지 않다. 도로 양편으로 철조망이 쳐 있고, 그 철조망 위에 역삼각형 모양의 작은 지뢰 표지판이 매달려 있다. 지뢰 매설지역이다. 그 지뢰 표지판을 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다. 이 지역은 아직도 상당 부분이 지뢰 지대로 남아 있다. 휴전선 일대는 지구상에 지뢰가 가장 조밀하게 매설된 지역 중에 하나다. 문제는 그 지뢰들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얼마나 매설됐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지뢰 폭발 사고는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민통선 안에서는 지금도 간혹 지뢰 폭발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백마고지가 있는 대마리는 특히 지뢰 폭발로 목숨을 잃거나 장애를 입은 주민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대마리는 정부가 1960년대에 민통선 안으로 농민들을 집단 이주시켜 농토로 개간한 지역이다. 당시 정부는 이곳에 이주하는 농민들에게 땅과 주택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이 지역에서 지뢰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어떠한 보상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게 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그 후로 농민들은 땅을 개간해 살면서,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지뢰 폭발 사고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그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죽은 자는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땅에 묻히고, 살아남은 자는 평생을 사고로 인한 후유증을 앓으며 살고 있다. 그렇다고 대마리 주민들이 희망을 버리고 좌절 속에 살아온 것은 아니다. 주민들은 외지인들은 상상하기 힘든 고난을 겪으면서도 결코 그들의 땅을 포기하지 않았다. 백마고지 전적지를 향해 가는 길목에 이곳이 '대마리 백마고지'가 있는 곳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표지석이 서 있다. 그 표지석에 목숨을 걸고 대마리를 일군 마을 주민들의 강한 의지가 서려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대마리가 최근에는 'DMZ와 평화가 공존하는 체험형 관광마을'로 거듭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철원군은 국비와 지방비 25억 원을 들여 '철새도래지 등 생태관광자원'을 개발하고 '2km 철책탐방 코스'를 조성하는 등 이 마을을 평화생태마을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이다. 물론 그 계획에는 한반도에 평화가 계속될 거라는 기대가 담겨 있다. 한국전쟁 최대 격전지 '백마고지'에서 다시 되새기는 평화 백마고지 전적지에는 백마고지 전승 기념비와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철원은 서울로 이어지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백마고지는 곧 철원과 서울을 지키는 최전선이었다. 그로 인해 한국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백마고지를 놓고 북한국과 중공군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기록에 의하면, 1952년 10월 6일에서 15일 사이 10일간 백마고지에서만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전투가 무려 24차례나 벌어졌다. 붉은 피가 산을 덮고, 시체가 시체를 덮는 전투가 계속됐다. 그 사이 아군은 이곳에 22만여 발의 포탄을, 중공군은 5만5000여 발을 쏟아 부었다. 이 전투에서 아군과 적군 모두 2만여 명이 사망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격전이었다. 전투가 끝났을 땐 산등성이가 마치 백마가 쓰러져 누워 있는 것처럼 하얗게 벗겨졌다고 한다. '백마고지'라는 이름은 그 모양에서 연유했다. 당시 어떤 전투가 벌어졌는지는 영화 <고지전>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실제 전투가 벌어졌던 백마고지는 위령탑이 서 있는 곳에서 비무장지대 안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있다. 위령탑 뒤로 자유의 종이 걸려 있는 상승각이 있다. 종각에서 백마고지가 빤히 바라다 보인다. 산은 여전히 헐벗은 모습을 하고 있다. 백마고지 전적지 주변으로는 철원평야와 마을이 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지극히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 풍경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으려니, 세상에 평야처럼 평화로운 곳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백마고지 전적지에서 내려와 백마고지역을 향해 가는 길 건너로 '두루미평화관'이 보인다. 그 이름에 평화를 소망하는 주민들의 뜻이 담겨 있다. 건물 외관이 앞서 지나쳐 온 노동당사를 닮은 것도 의미심장하다. 대마리 주민들은 노동당사에서 동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암울했던 과거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다 같이 잘 사는 평화로운 미래를 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 건물 왼쪽 측면에는 '상허이태준문학비'와 이태준 동상이 서 있다. 작가 이태준은 철원 태생이다. 월북 작가라는 낙인이 찍혀 아직까지 홀대를 받고 있는 문인들 중에 한 사람이다. 철원에서 그의 동상을 보는 것도 의외다. 우리는 두루미평화관에서 이 마을 주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백마고지 전적지에서 백마고지역까지는 1km 조금 넘는 거리에 떨어져 있다. 백마고지역은 최근에 만들어진 역답게 제법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다. 허허벌판에 현대식 역 하나가 서 있는 게 조금 생뚱맞아 보인다. 시골역이 전혀 시골역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 안은 여느 시골역 못지않은 소박한 풍경을 보여준다. 이 역에는 역 직원이 상주하지 않는다.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을 주민들과 군인들이다. 주민들과 군인들이 뒤섞여 서로 잡담을 나누고 있다. 관광객은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의 남북 관계가 이곳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백마고지역은 2012년 11월에 개통됐다. 경원선이 끊어진 지 60년만이다. 이 작은 역이 경기도 연천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무려 6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린 것이다. 백마고지역은 개통과 동시에 경원선의 남한 쪽 최북단 종착역이 됐다. 이 역이 다시 원산까지 가는 데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까? 지금으로서는 이 철도를 다시 이을 날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좀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처럼 대립과 갈등이 계속되는 상태에서는 아무도 평화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철원은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고장이다. 철원평야를 관통해 지나가는 한탄강은 하늘이 내린 보물이나 마찬가지다. 이 아름다운 고장에서 전쟁의 참상을 기억해내야 하는 일이 가슴 아프다. 철원이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날이 가문 탓인지 도로 위로 먼지가 몹시 심하게 날린다. 마른 땅을 촉촉이 적셔주는 봄비가 그립다. 평화가 그립다. [주요 경유지] 승일공원 – 순담계곡 – 군탄공원(군탄사거리 좌회전) -철원읍 – 철원초등학교·철원중학교 – 동온교(문혜천) - 철원군노인전문요양원 – 한탄강 – 냉정저수지 – 봉우교 – 장흥초등학교 - 철원농업기술원 – 오덕사거리(직진) - 학보교(대교천, 건너기 전 우회전) - 도피안사 – 도피안사교(건너자마자 우회전) - 한다리교(다리 건너 계속 직진) - 철원 감리교회 – 노동당사 – 백마고지 전적지 – 백마고지역] * 10:50~10:55 철원 노동당사를 사진촬영 * 10:55~10:57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 366-1 번지에 있는 철원역사문화공원으로 이동 * 10:57~11:20 철원역사문화공원의 옛 철원 시가지 복원거리와 철원역사문화 전시관을 탐방 [1930년대 철원군은 인구 8만 명 이상이 거주하였던 강원도 3대 도시였으며, 철원읍 시가지에는 철원군청, 철원경찰서, 철원극장, 철원역, 학교, 은행 등 근대적인 시설이 운영되었던 곳이다. 철원역사문화공원은 그 당시 경제적으로 번성했던 철원읍 시가지를 축소판으로 재현한 곳으로 옛 철원 시가지에 있던 건물들을 당시 사진을 토대로 똑같이 복원해 놓았다. 중앙거리를 따라 이동하면 기념품이나 지역 특산물을 파는 문화상점, 복고다방 등이 옛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근대 문화거리와 역사문화 전시관으로 나누어 관람 및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철원역사문화공원 입구에 종합안내소가 있어 여기서 안내 책자를 받아서 구경하면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주말에 방문하면 거리 광장을 배경으로 모던타임즈라고 하는 공연도 야외에서 진행되어 풍성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다. 철원역사문화공원은 철원중에서도 북쪽 끝에 있으며, 대중교통으로는 오기 어렵고 자가용을 이용해야 한다. 입장료와 주차장 요금이 모두 무료라서 여행하기에 부담이 없다. 특히 철원역에서는 소이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모노레일을 운영하고 있는데, 모노레일은 유료로 운행되며, 소이산 정상을 오르는 동안 드넓은 철원평야를 감상할 수 있다. 소이산 모노레일 이용요금 : 성인 5,000원 / 청소년 3,000원 / 어린이 2,000원 이용시간 : 09:00~18:00] * 11:20~11:45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 산 4 번지에 있는 소이산(362m) 정상으로 이동 ["6.25의 아픈 상흔, 철원 소이산에서 치료하세요"...소이산 '안보관광지'로 각광 펜앤드마이크 기사 입력일 : 2023.06.24. 김경동 기자 소이산 정상에 서면 철원평야 너머 북녘의 산하가 아스라히 펼쳐지고 백마고지, 철원역, 제2땅굴, 노동당사 등이 한눈에 들어와 그같은 조망으로 실향민도 많이 찾아 소이산 모노레일도 개장 11개월 만에 탑승객 10만명 돌파 정상까지 생태산책로 따라 쉬엄쉬엄 걸어도 1시간 남짓 소이산(所伊山)은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에 있는 해발고도 362m의 산이다. 고도는 낮아도 정상에 서면 철원평야가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6·25전쟁과 관련된 사연이 많은 백마고지, 철원역, 제2땅굴, 노동당사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너머로 아스라히 이어지는 북녘의 산하까지 감상할 수 있다. 최근 소이산의 정상까지 올라가는 모노레일을 많은 실향민들이 찾는 것도 그같은 조망 때문인지 모른다. 철원군(군수 이현종)에 따르면 지난해 7월 28일 운행을 시작한 소이산 모노레일은 이달 23일까지 10만 명이 탑승했다. 가동률은 평일 75%, 주말의 경우 95%를 웃도는 것으로 분석했다. 소이산 모노레일은 8인승 차량 4대가 왕복 1.8㎞ 구간을 30여 분 동안 운행하는 관광시설이다. 상부 승강장에서부터 소이산 전망대까지 약 200m의 무장애 데크 길을 따라 운행한다. 그러나 굳이 모노레일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무장애데크길을 따라 쉬엄쉬엄 걸어올라가면 훼손되지 않은 소이산의 청정 생태계에 흠뻑 취해볼 수 있다. 소이산은 수많은 지뢰와 군사시설 등으로 일반에 열리지 않았다가 2012년 철원군과 군의 협의로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이란 타이틀 아래 정상까지 둘레길이 개방됐다. 전체 구간은 지뢰지대로 철책을 곁에 두고 걷는 '지뢰꽃길'(1.3㎞), 자연 그대로의 오솔길을 걸으며 소이산의 생태환경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생태숲길'(2.7㎞), 철원평야와 평강고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봉수대오름길'(0.8㎞)로 나뉜다. 원점회귀형으로, 2시간이면 넉넉히 걸어서 돌아올 수 있다. 한편 철원군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자 지난해 철원역사문화공원도 모노레일과 함께 개장했다. 역사공원 방문객 수도 지난 23일까지 35만 명을 기록했다.] * 11:45~11:55 소이산 정상에서 주위 풍경을 사진촬영 [소이산 전망대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산명호저수지와 그 뒤로 북한의 평강군이, 북동쪽에는 북한의 김화군이, 동쪽에는 철원군 김화읍이, 동남쪽에는 고석정 국민관광지가, 남쪽에는 철원 금학산(947m)이, 남서쪽에는 연천 고대산(832m)이, 서쪽에는 백마고지역이, 서북쪽에는 백마고지 전적지가 위치한다.] * 11:55~12:38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월하리에 있는 월하리 힐링 벽화마을로 이동 * 12:38~12:41 월하리 힐링 벽화마을의 벽화를 사진촬영 [철원 월하리 '달아래 마을', 미술로 다시 태어나다. 파이낸셜뉴스 기사 입력 : 2018.06.27. 11:11 서정욱 기자 27일 철원군은 월하리 ‘달아래 마을’이 2009년도 문화관광부 후원 마을미술 프로젝트 사업의 일환으로 ‘달이 머무는 마을’ 미술로 꾸미기에 이어 올해 철원읍 마을공동체 사업으로 벽화 따라가는 길 월하리 마을지도 간판 사업 추진과 힐링벽화조성 사업을 완료하였다고 밝혔다. 월하리 달아래 마을은 안보관광 및 민북마을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농촌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볼거리 제공과 농촌민박과 먹거리 식당 안내 역할도 겸하고 있어 향후 농촌 지역의 경제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월하리 마을 힐링벽화는 지역작가 김선경 선생님의 작품으로 민들레 홀씨가 꿈과 희망의 빛으로 날아가는「후우~」가 대표작품이다. 홍중표 철원읍장은 “마을공동체 사업을 통해 지역작가들에게 작품활동 기회 부여하고, 일자리 창출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줄 있어 마을공동체 사업이 지역주민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성공적인 사업으로 마무리되었다.”고 말했다.] * 12:41~12:54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금학로 591 번지에 있는 철원향교로 이동 [철원향교(鐵原鄕校) 요약 :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에 있는 조선시대 향교. 창건연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중국 5성(五聖)을 비롯하여 설총, 안향 등 총 25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568년(선조 1)에 중건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완전히 소실되었으나 1637년(인조 15) 박무(朴茂), 박화(朴花) 등이 주도하여 복원하였다. 이후 1915년 동, 서재를 증축하고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재단을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징발되었다. 8·15광복 이후에는 공산 치하에서 건물과 토지가 몰수되어 고아원으로 사용되었으며 6·25전쟁 당시 모두 불탔다. 전쟁이 끝난 뒤 1957년 지역 유림들이 힘을 합하여 현 위치에 대성전, 명륜당, 부속사 등을 재건하였고 1988년 대성전 증축, 이듬해에 내삼문과 홍살문을 세워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2010년 4월 20일 철원 읍화지리 281 도피안사 부근으로 신축 이전하였다.] * 12:54~13:03 철원향교를 탐방 * 13:03~13:09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동송읍 도피동길 23 번지에 있는 도피안사로 이동 [도피안사 도피안사(到彼岸寺)는 대한민국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있는 절이다. 신라 경문왕 5년(865) 도선국사가 높이 91cm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제조, 철원읍 율리리에 소재한 안양사에 봉안하기 위하여 가다가 잠시 쉬고 있을 때 불상이 갑자기 없어져 그 부근 일대를 찾다가 현위치에 그 불상이 안좌한 자세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암자를 짓고 이 불상을 모셨다 한다. 당시 철조불상이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에 이르렀다 하여 절이름이 도피안사로 명명되었으며 절 내에는 도선국사가 제조한 국보 제63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제223호로 지정된 높이 4.1m의 화강암 재료로 된 삼층석탑이 보존되어 있다. 문화재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原 到彼岸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대한민국 국보 제63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제작시기 : 통일신라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原 到彼岸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은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도피안사에 있는 남북국 시대에 철로 만든 비로자나불 좌상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63호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6월 2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신라 48대 경문왕 5년(865년)에 제작되었으며, 머리에는 육계가 있으나 뚜렷하지 않고 불상의 얼굴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높고 안정된 이중 대좌(二重臺座) 위에 앉아 있으며, 불상의 높이는 91cm이다.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화개산에 자리잡은 도피안사는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도선대사가 창건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原 到彼岸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은 국보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48대 경문왕 5년(865년)에 제작되었으며, 머리에는 육계가 있으나 뚜렷하지 않고 불상의 얼굴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과 같다. 높고 안정된 이중 대좌(二重臺座) 위에 앉아 있으며, 불상의 높이는 91cm이다.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鐵原 到彼岸寺 三層石塔) 대한민국 보물 제223호(1963년 1월 21일 지정) 시대 통일신라 소유 도피안사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423 좌표 북위 38° 14′ 24″ 동경 127° 13′ 08″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鐵原 到彼岸寺 三層石塔)은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도피안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도피안사 법당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그 구조가 특이해서 보통 4각의 돌을 이용하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8각 모양의 돌로 높게 2단을 쌓았다. 아래층 기단의 8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이 기단의 맨 윗돌에는 윗층 기단을 괴기 위한 높직한 8각의 괴임돌이 놓여져 있는데, 이곳에는 연꽃무늬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윗층 기단은 매우 높으나 각 면에 꾸밈이 없다. 다만, 기단의 맨윗돌 아랫면에 다소 두툼한 느낌의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둘러 놓았다. 탑신과 닿는 곳에는 높은 3단의 받침을 두어 1층 몸돌을 괴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기단의 꾸밈새는 석탑의 기법이라기보다는 불상의 기단 기법으로 보이며, 덮개돌 윗면의 높은 괴임형식은 9세기 통일신라의 석탑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수법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에 각각 하나의 돌을 사용하였다. 각 층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층은 4단, 2·3층은 3단인데, 조각이 얕아서 다소 무거워 보이긴 하나, 네 귀퉁이가 한껏 위로 들려 있어 아름다운 모습이다. 기단의 꾸밈새에서 보이는 특이한 양식, 지붕돌 받침이 4단, 3단으로 일정치 않은 점 등이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임을 보여준다. 탑을 만든 시기는 법당 안에 모셔진 불상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 절을 건립할 당시 불상과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13:09~13:32 도피안사를 탐방 * 13:32~13:35 도피안사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산행 완료 * 13:35~14:11 도피안사 버스 정류장에서 신탄리역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13번 버스 승차 대기 * 14:11~14:30 도피안사 버스 정류장에서 13번 버스를 타고 신탄리역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19분, 10개 정류장 이동] * 14:30~14:55 신탄리역 버스 정류장에서 연천역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39-2 버스 승차 대기 * 14:55~15:20 39-2 버스를 타고 신탄리역 버스 정류장에서 연천역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25분, 29개 정류장 이동] * 15:20~15:41 1호선 연천역에서 종로3가역으로 가는 열차 승차 대기 * 15:41~17:51 연천역에서 1호선 열차를 타고 종로3가역으로 가서 3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연신내역으로 간 후 6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구산역으로 이동 [2시간10분 소요] [백마고지 전적비&노동당사&철원향교&도피안사] 지도 [소이산&철원역사문화공원&노동당사]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