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 와인
한가한 오후시간, 컴퓨터 친목 카페에서 싱겁을 떨고 있는데,
포도주 어떻게 담그면 맛있냐는 친구의 전화가 왔다.
닉이 ‘포도주’인 사이버 공간에서 나인 듯 포도주님인 듯 살짝 취한 채 시간을 보내던 터에
친구의 전화를 받고 보니, 세상살이 시 공간의 스침이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창 포도 철이다. 올여름 날씨가 유난히 뜨거웠던 때문일까, 포도가 달고 또 풍작이라
값도 예년보다 싸다. 이렇게 흔할 때가 되니 정작 집에서 포도주 담글 일이 없어지는구나,
그 시절엔 포도가 무척 귀했었는데,,,
이맘때가 되면 내 가슴은 낭패로 곤두박질치곤 한다.
단칸방을 흥건하게 적시며 흐르는 끈끈하고 향기로운 액체, 모로 누워 깨져버린
진갈색의 커다란 유리됫병과 멍하게 굳어버린 어머님의 얼굴,
세간도 별로 없이 사과박스로 가구를 대신하던 김천의 신혼집으로 어머님은
과일이며 곡식 채소들을 청도에서 4시간여의 완행열차를 타고 양껏 들고 오시곤 했다.
그때는 아이들도 없었고 나 역시 입이 짧을 때라, 힘들게 가져오신 물품들이지만
별로 요긴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서툰 살림에 식사대접이며 잠자리 준비가 오히려 어려웠지만,
정말로 단언컨대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때, 방이 너무 협소했던가? 전등 불빛이 어두웠던가? 간작은 새댁이 덤벙댔던 걸까?
내 몸 어디쯤이 그 술병에 부딪쳤는지, 그래서 깨져버렸는지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시든 채소 한 잎 떨어진 곡식 한 알도 허투로 넘기지 못하는 어머님이셨다.
첫아이를 가지고 몸이 안 좋아서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심장이 약하고 혈압이 매우 낮으니
출산은 반드시 큰 병원에서 하라고 했다. 한의원에서도 같은 말을 하면서
포도주를 한잔씩 마셔보라 권하였고, 그리하여 친해진 포도주이다.
그 후로 굳이 큰 병원을 찾지 않았고 별다른 몸보신 없이도 잘 지내고 있으니,
그 한의사의 처방이 효과가 있었지 싶다.
건강 욕심인지 그냥 여유나 멋 때문인지 해마다 포도주를 조금씩 담았다.
그걸 어머님께 드릴 때마다 나는 조마조마 했었지만,
어머님은 끝내 그날 밤의 일에 대해 한마디 말씀 없으신 채 먼 길 떠나셨다.
딸들은 엄마표 포도주가 맛있다며 한 병씩 챙겨가곤 하였지만, 지금은 잘 담그지 않는다.
이제 와서 내가 마시자고 그런 걸 장만하기가 내키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카페의 닉을 ‘포도주’로 정하였으니,
내 무의식의 세계에 어머님의 포도주가 깊게 자리하고 있었나보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만 즐겨 자주 마시지는 않는 편이다.
‘우리 한잔 하자’ 이 말을 좋아한다. 잔을 들고 건배하는 그 시간이 즐겁고,
첫맛의 향기로움과 부드러움이, 톡 쏘는 유쾌한 자극이 좋아서이다.
그래서인지 내 주량은 막걸리, 소주, 맥주, 양주... 각자 잔에 딱 한잔이다. 좀체 더 이상은 넘지 않았고
입맛이 원하지도 않는다. 혹여 정신 놓고 비틀거릴까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딱 한 잔, 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냉정하고 무례하고 얄팍한 사랑이다.
내가 만든 포도주는 술이라기엔 싱겁고 약이라기엔 달다,
이도 저도 아닌, 어느 한 가지 딱 부러지게 해내지 못하면서 무언가에 취한 듯
현실과 슬쩍 괴리되어 살고 있지 싶은 내 처지가 이와 같은 듯싶다. 그 어느 곳에서도,
심지어 술에서도 제대로는 취해보지 못하는 웅크린 행보가 스스로 안쓰럽다.
이제 곧 추석이다. 백화점 선물코너에는 3천만 원 와인세트도 진열되어 있다는 저녁뉴스지만,
그런 고급품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 샤또 라뚜르니 사시까이아, 보졸레 누보, 로마네 꽁띠...
이름조차 값져 보이는 명품와인들은 그저 무심한 귀동냥일 따름이다.
추억과 감사, 사랑과 용서 그리고 건강과 화합을 어우러 주는 우리 집 포도주가 내게는 최고의 와인이다.
딸들과의 홍콩여행에서 기념으로 크리스탈 와인 잔 하나를 샀다.
딸이, 잔을 세트로 사지 왜 한 개만 사느냐며 참견을 한다.
‘한개만 있으면 된다.’ 마주앉아 느긋하게 과일주 한 잔 나눌 여유도 없이 고생한 남편이 가고 없는데
황혼녘에 뉘와 마시려고 술잔을 구색 맞춰 살 것인가.
옷이 사람의 날개이듯 술잔도 술의 날개인가,
그 잔에다 술을 따르면 무슨 술이라도 달리 보이지만, 와인 잔에는 와인이 제격이다.
외롭거나 한가할 때, 기쁨에 기꺼울 때 슬픔에 슬플 때 그 잔에다 포도주를 따른다.
제 속의 기포며 미세한 파문까지도 그대로 내비치고야마는 바보처럼 투명한 잔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를 보듯
사람에, 일에, 자연에… 여직도 미지근한 그 성정을 놓지 못하고
취한 듯 아닌 듯 살아가는 이 세월이 고맙기 그지없다. (12, 2장)
첫댓글 추억과 감사,사랑과 용서,건강과 화합을 어우르는 와인 한 잔이 주량이시군요 ㅎㅎㅎ
그 옛날의 추억 때문에 닉네임을 포도주로 하셨군요
다른 술은 몰라도 와인만은 와인잔에 부어 마셔야할 당연한 이유가 있죠
이 나이가 되고보니 가끔씩 술 한 잔은 마셔야할 때가 있지요.
그런데 못난 저는 선천적으로 '아세트알데히드' 분해효소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아 본의 아니게 분위기를 망칠 때가 많지요.
친구들과 술 한 잔도 하고 노래도 잘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모임 때 술 잘 마시고 실수 안하는 친구가 부럽습니다.^^*
어~~ 오로라, 천사
잘 있었제, 우리 한잔 하자. 사이다 환타도 좋고... ㅎㅎ
(긴글올려죄송, 댓글주셔감사)
도요님 표 포도주~ 꽤 오래된 역사와 함께 한 그 맛~ 또 한 잘 숙성된 깊은 세월 맛으로 어떤 고급 와인보다 특별 한 맛 아닐까요~
저도 크리스탈 큰 와인 잔에 쨍 부딪치고픈 유혹이 왜 슬금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