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8월 25일
✿1960년 08월 25일 로마올림픽 개막
1960년 8월 25일 ‘영원한 도시’ 로마에서 84개국 5396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17회 올림픽이 개막됐다.
이 대회에서는 다른 어느 때보다 극적인 우승자들이 많이 탄생했다.
우선, 가장 빛나는 활약을 한 사람은 에티오피아의 무명 마라토너 아베베였다. 로마제국의 ‘정복의 길’로 대표되는 아피아 가도를 맨발로 완주, 2시간15분16초2분이라는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이것은 올림픽신기록이자 아프리카 흑인 선수로서 얻은 올림픽 최초의 우승이었다. 2위 역시 아프리카 모로코의 라지가 획득, 이로써 1ㆍ2위 모두가 아프리카에 돌아갔다. 아베베는 4년 후 동경올림픽에서도 2연패를 달성, 세계신기록을 경신하는 쾌거를 이뤘다.
가장 극적인 우승자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에 걸렸던 미국의 여자 육상
선수 루돌프였다. 그녀는 여자육상100mㆍ200mㆍ400m 3종목에서 우승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한편, 복싱 라이트헤비급에서 케시어스 클레이(무하마드 알리)가
우승함으로써 그는 이후 은퇴할 때까지 약 6천800만달러라는 기록적인 수입을 거둬들이며 가장 고가의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또한 헝가리출신의 50세 선수 게레비치는 선수로서 가장 장수한 우승자로 오늘날 기억되고 있다. 그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이후, 6번째로 출전한 이번 대회에서 6번째 금메달을 획득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비극적인 패자로는 사이클 100km 단체전 레이스 후 사망한 덴마크의 옌센이 꼽힌다.
그의 사망원인은 흥분제 과다복용이었다.
이로써 그는 올림픽사상 약물복용사망 제1호가 됐다.
▶2012년 오늘,
미국 우주비행사 #닐_암스트롱 (Neil Alden Armstrong)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관상동맥 협착증세로 사망
( 1930년 8월 5일 미국 오하이오 주 와파코네타 에서 출생~ )미국의 우주비행사, 시험 비행사, 대학 교수, 해군 비행사로,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사람이다
▶2009년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상원의원 별세
▶2009년한국 첫 우주발사체 나로호(KSLV-1) 발사 실패
한국 첫 우주발사체 나로호(KSLV-1)가 2009년 8월 25일 오후 5시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됐으나 과학기술위성2호를 정해진 궤도에 올리는 데는 실패했다. 궤도 진입 실패와 관련해 러시아 제작 액체로켓을 포함한 상·하단 로켓 엔진의 추진력과 자세 제어 또는 분리 과정이 논란이 되었으나 페어링(위성보호덮개) 분리 실패가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발사 후 나로우주센터에서 열린 언론 브리핑에서 “발사 후 1단(하단) 엔진과 2단(상단) 엔진은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위성을 2단 로켓에서 정상적으로 분리시켰으나 목표궤도에 정확히 올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나로호의 임무는 발사 후 540초에 상단 고체로켓에 붙어 있는 과학기술위성2호를 분리시켜 지구상공 306㎞ 궤도에 진입시키는 것. 하지만 나로우주센터 발사지휘센터는 분리 30초 전(발사 후 510초)에 이미 상단로켓의 고도가 360㎞라고 발표했다.
목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한 과학기술위성2호의 위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과학기술위성2호가 자칫 ‘우주 미아’가 될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창진 한국연구재단 우주단장은 이와 관련, “과학기술위성2호는 상용위성과 달리 자체 자세제어능력이 없어 궤도를 수정할 수 없다”며 “실험위성이 문제일 뿐 우주발사체 자체의 발사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패 원인으로 지목된 페어링 덮개 분리는 바로호 발사 후 첫 중요단계로 페어링은 위, 아래 두 개가 하나의 짝으로 이뤄졌는데 이 중 위쪽 페어링 분리가 안 된 것으로 보인다. 페어링이 분리되지 않은 채 비행을 했기 때문에 나로호는 정상 속도보다 느리게 이동한 것으로 보이며, 이 때문에 나로호에 탑재된 과학기술위성2호가 지구를 돌기 위한 속도를 얻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느린 속도로 분리된 위성은 추락하거나 대기권 비행 중 전소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로호는 발사에 앞서 7번 예정을 연기했으나 결국 임무에 실패했으며, 향후 원인 규명 및 추가 발사 역시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야 함에 따라 독자적인 발사체 기술 확보가 우주 개발 사업에 절대적인 핵심 요소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정부는 나로호 발사를 계기로 2016년까지 3조60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우주개발진흥기본계획’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우주개발진흥기본계획의 중요한 골자는 바로 한국형발사체(KSLV-II) 개발 사업이다.
▶2003년인도 뭄바이서 연쇄 폭탄테러로 200여명 사상
▶2001년단사천 한국제지 회장 별세
▶2001년황용주 전 MBC 사장 타계
▶1999년국내 이동전화 가입자 2000만명 이상,
국민 2.3명당 1대꼴
▶1999년`황혼이혼` 소송을 낸 70대 할머니 승소
▶1994년국제우취연맹(FIP) 총회 개최
▶1992년전 민중당 대표 김낙중씨 등 4명 보안법 위반 구속
▶1992년노태우 대통령, 민자당총재직 사퇴
▶1991년컴퓨터 운영체제 `리눅스` 처음 공개
핀란드 헬싱키대학 학생인 리누스 토발즈가 중형 컴퓨터에 쓰이던 유닉스 운영체제를 PC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 컴퓨터 운영체제(OS) `리눅스`를 1991년 8월 25일 뉴스그룹에 처음 공개했다. 리눅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리눅스의 성공은 결코 토발즈 한 사람이 이뤄낸 것은 아니었다. 소프트웨어는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 한 전세계 수천명의 프로그래머들이 함께 만들어낸 공동 창작물이었다.
토발즈는 OS 핵심부분인 커널을 개발했지만, 리처드 스톨만이 주도하는 GNU 프로젝트에 참여한 수만명의 프로그래머들은 보조 프로그램 및 다양한 응용 소프트웨어를 내놓아 성능을 개선시켰다. 스물한살의 풋내기 대학생이 만든 리눅스는 탄생 10년째인 2001년 8월, 세계 서버 운영체제 시장의 27%를 차지할 만큼 성장했고, 초기에는 1만 라인이던 리눅스는 1천만 라인의 방대한 프로그램으로 거듭났다.
▶1990년전 이화여대 총장 김옥길 여사 별세
▶1989년보이저2호 해왕성 접근
▶1986년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경기도 과천 서울대공원안에 새로 지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준공 및 개관행사가 1986년 8월 25일 오후 3시에 현장에서 열렸다. 개관식에는 문공부장관, 국회문공위원장, 서울시장, 예총회장, 현대미술관장 등 1천여명의 문화예술계인사가 참석했다.
1984년 3월 29일 착공, 총1백88억원을 들여 2년4개월 만에 완공된 신축미술관은 2만평의 부지위에 연건평 1만2백72평의 철근콘크리트건물로 9개 전시장과 1만평규모의 야외조각장을 갖추고 있다. 미술관은 봉화대모양의 램프코어를 중심으로 왼쪽에 원형조각전시장, 오른쪽에 말발굽형 회화 전시장이 있고, 앞쪽에는 도서실 강당 등 교육시설이 들어섰다.
개관과 함께 `한국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전` `아시아현대미술전` `프랑스 20세기 미술전` `美와이즈만 컬렉션전` 등 4개 기념전시회가 일반에게 공개됐다.
▶1986년영광 원자력발전소 원전 1호기 완공
▶1985년첫 공인중계사 자격시험 실시
▶1981년소말리아, 리비아와 단교
▶1981년다케이리(竹入),
일본 공명당위장(公明黨委長) 방한
▶1979년먼데일 미국 부통령 중국방문
▶1978년중공 베트남 국경서 유혈분쟁
▶1977년금산 제2위성통신지구국 완공
▶1972년경복궁 중앙국립박물관 개관
▶1972년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대구권 지정
▶1968년 오늘,
프랑스 남태평양 수폭 실험
핵보유국 '핵실험'결과 지구는 망가지고 있다!!
https://youtu.be/blL4o_FJAXE
중국홍수!
그 밖에...
▶1967년 오늘,
미국 #조지_링컨_로크웰 ( George Lincoln Rockwell) 미국 버지니아 주 알링턴 카운티 에서 사망 (1918년 3월 9일 미국 일리노이주 블루밍턴에서 출생~)
미국 나치당의 창시자
록웰은 인종분열을 부추긴 혐의로 기소됐다가 풀려난다.
해군장교 출신인 록웰은 히틀러를 우상으로 삼고 유대인과 흑인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주창했다.
그는 이듬해인 1967년 8월 그를 추종했다가 당에서 쫓겨난 사람에게 피살된다.
▶1965년무장군인 고려대학교에 난입
▶1958년뇌염으로 전국 국민학교 휴교령
▶1958년 오늘,
미국 영화감독 #팀_버튼 (Tim Burton)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뱅크 에서 출생 ~미국의 영화감독이자 작가이다. 과거 월트디즈니 컴퍼니에서 일하다가 퇴사했다./수상 2005년 베니스국제영화제 미래디지털
영화상 및 2006년 영국 애니메이션상 최우수작품상
2008년 휴스턴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감독상
데뷔:Pee-wee’s Big Adventure, 미국, 1985
▶1956년`킨제이 보고서`를 낸 알프레드 킨제이 사망
▶1956년미국의 발명가 조지 워싱턴 피어스 사망
▶1954년대한우표회가 주최한 제1회 우편전시회 개최
▶1953년 6.25 전쟁포로 교환
1953년 오늘 판문점!
6.25전쟁 중 잡힌 전쟁포로 교환이 시작된다.
같은 해 6월 8일과 7월 27일 각각 체결된 포로교환협정과 정전협정에 따른 후속 조치다.
포로 교환 첫 날 공산군 측이 유엔 측에 인도한 포로는 4백 명!
유엔 측이 공산 측에 인도한 포로는 2천7백53명이었다.
포로교환은 이후 9월 6일까지 33일 동안 계속된다.
이 기간에 공산군 측은 만3천4백64명의 포로를 유엔 측에 넘긴 반면유엔군 측은 이보다 6배 정도가 많은 8만2천4백93명을 공산 측에 인도한다.
▶1950년딘 소장, 인민군에 포로로 잡혀
6·25 개전 초기, 소련제 T34 탱크에 우리 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급기야 육군본부는 대전으로 후퇴했고 일본에서 급파된 미 제24사단도 대전에 포진했다. 그러나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금강 전선에까지 다다르자 육군본부는 다시 대구로 이동하고 24사단도 대전 철수를 결정한다. 충북 영동이 목적지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10개월간 군정장관을 역임했던 딘 소장의 장관시절 모습.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도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러나 남하 도중 만난 옥천·금산 분기점은 그에게는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금산으로 길을 잘못 든 것이다. 곧 진로가 잘못됐음을 깨달았지만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밤을 기다려 산쪽으로 우회했다. 깊은 밤, 딘 소장이 친히 부상병들의 물을 뜨러 갔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의식을 잃은 사이, 그를 찾지 못한 호위장교는 본부에 실종 사실을 알렸다. 1950년 7월 20일이었다.
이제 딘 소장 혼자뿐이었다. 산속을 헤맸고, 86㎏이던 체중도 58㎏으로 줄었다. 방황 36일째인 8월 25일, 전북 진안을 지날 때 길을 안내하겠다는 청년을 믿었던 게 잘못이었다. 그의 밀고로 공산당 자위대에 붙잡힌 것이다. 지옥 같은 3년간의 포로생활이었지만 “육체는 포로라도 정신은 포로가 아니다”라며 버텼다. 1953년 9월 4일, 교환포로 제1호로 자유의 품에 안겼다.
▶1948년북한, 총선거 실시
▶1945년미국 인천에 상륙.
미국 소련 양군의 북의 38도선 분담점령을 방송
▶1944년. #드골 파리에 개선, 프랑스군, 파리 해방시키다
▶1936년동아일보,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제패
사진 일장기 말소게재
1936년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4면과 『동아일보』지방판 조간 2면 및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에 베를린올림픽대회마라톤 우승자 손기정(孫基禎)선수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없애버린 사건.
1936년 8월 독일 베를린에서 거행된 올림픽대회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소수의 우리 선수가 몇 개 종목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마라톤부문에서 손기정·남승룡(南昇龍) 두 선수가 우승후보로 지목되었다. 1935년 3월에 있었던 올림픽파견 마라톤예선대회에서 손기정은 2시간 26분 14초라는, 당시 세계기록 2시간 31분 37초보다 5분이나 앞서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올림픽의 꽃이라는 마라톤 경기가 시작된 8월 9일 밤 11시(한국시간)에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군중이 보도기관 앞에 모여들었다. 다음날 새벽에 손기정선수가 우승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손기정의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 2로, 세계인류의 꿈인 2시간 30분의 벽을 깬 것이다. 당시의 민간지 『동아일보』·『조선일보』·『조선중앙일보』는 연일 대대적으로 손기정의 우승을 보도하였다.
그런데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월계관을 쓴 손기정의 사진을 입수하여 각기 8월 13일자에 게재하면서 손기정의 유니폼 가슴에 그려져 있는 일장기를 지워서 실었는데, 이때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아일보』가 다시 8월 25일자 기사에서 손기정 유니폼의 일장기를 지워서 실었는데, 이것을 일본관헌이 발견하고 문제 삼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진의 일부를 기술적으로 첨삭하는 일은 가끔 있어왔기 때문에, 눈에 거슬리는 일본국기를 지워버리는 일에 『조선중앙일보』·『동아일보』 제작 당사자들은 서로서로 마음이 통한 것이었다.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는 8월 29일자로 무기정간 처분을 당하였고, 『조선중앙일보』는 9월 5일부로 자진해서 휴간하였다. 특히 1920년 4월 창간된 이래로 『동아일보』는 네 번째로 무기정간을 당한 것인데, 사진게재가 문제된 것은 처음이기도 하지만 세계언론사상 그 예가 드문 것이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의 송진우(宋鎭禹)사장·김준연(金俊淵)주필·설의식(薛義植)편집국장 등이 자리를 물러났다. 그리고 사회부의 현진건(玄鎭健)부장과 이길용(李吉用)·장용서(張龍瑞), 조사부의 이상범(李象範)화백, 사진부의 신낙균(申樂均)·백운선(白雲善)·서영호(徐永浩), 그리고 『동아일보』의 자매지인 월간 『신동아』에 전재한 책임으로 최승만(崔承萬)잡지부장 등 8명의 사원이 구속되었다.
이들 구속자들은 40여 일의 고초를 겪은 끝에, ①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 하지 않을 것 ② 시말서를 쓸 것 ③ 다른 사건이 있을 때에는 가중 처벌을 각오할 것 등의 서약서에 서명하고 풀려났다. 『동아일보』는 약 9개월간의 장기정간 후 1937년 6월 3일자로 속간되었다.
▶1933년조선소방사업령 공포
▶1923년경성전기, 안국동 선 전차 운전 개시
▶1921년미국 독일 평화조약 성립
▶1919년이승만, 워싱턴에서 임시정부한국위원회 결성
▶1918년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출생
▶1912년중국동맹회, 국민당으로 개편
▶1912년독일의 정치가 에리히 호네커 출생
▶1908년방사능 발견한 프랑스 물리학자 헨리 베크렐 사망
▶1900년독일 철학자 니체 사망
ㆍ병적인 상태로 마지막 10년
그는 19세기를 살았지만 20세기를 예언한 인물이었다. 독일 철학자이자 시인, 저술가, 미학자였던 프리드리히 니체. 그는 해체와 부정과 허무의 철학으로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서양의 근대성 전체에 도전했다.
니체는 1844년 독일 뢰켄에서 태어났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5세 때 숨졌고, 어머니·누이와 함께 조부모 집에서 자랐다. 본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배우고 문헌학을 공부했다. 라이프치히로 옮겨가 그리스 고전문헌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쇼펜하우어를 읽고 바그너 음악에 심취했다 한다. 1869년 스위스 바젤대학의 교수가 되어 고전문헌 강의를 시작했으나 이듬해에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나가야 했다. 하지만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통과 질병에 시달리다 바젤로 돌아왔다.
1872년 발표한 <비극의 탄생>은 정신적 고향이던 그리스 고전과 근대를 넘나드는 예술론을 보여준다. 니체에게 그리스는 우아하면서도 역동적인 삶의 원형인 반면, 근대는 천박하고 더럽혀진 시대였다. 그는 이 저작에서 비판의 대상인 근대문화를 ‘그리스 문화가 사라진 이후에서 현재까지’로 확장시킨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이상과 디오니소스적인 충동을 그리스 문화의 두 가지 예술원리로 보았다. 삶의 기쁨과 슬픔, 긍정과 부정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를 통해 하나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에게 삶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으로 비친 것은 그리스 비극에 나타난 디오니소스적인 충동이었다.
사회가 안정되고 문명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권태에 빠져든다. 그 결과는 말초적인 쾌락, 그리고 문화적인 타락이다. 니체는 따라서 발전된 사회가 필연적으로 허무주의(니힐리즘)로 향해간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유럽은 이미 역사적 소명이 끝난 봉건주의와 기독교적 위선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니체는 허무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가 오기를 고대했다. 그는 한물간 도덕 대신 인간 본래의 능력을 극대화한 초인이 나타나 인류를 이끌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훗날 히틀러의 나치즘에 철학적 발판이 되어주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니체의 말년은 우울했다. 건강이 몹시 나빠져 1879년 35세의 나이에 바젤대학에서 퇴직하고 요양생활에 들어갔다.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정신병원에 들어간 니체는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병적인 상태에서 보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던 니체는 1900년 8월25일 바이마르에서 죽었다.
▶1885년서울-인천간 전신업무 시작(우리나라 최초의 전기통신 실용화)
▶1884년프랑스 제4공화국 초대 대통령 오리올 출생
▶1841년스위스의 외과의사 코허 출생 - 1909년 갑상선 연구로 노벨상 수상
▶1828년우루과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1776년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 사망
▶1466년과전법 혁파, 직전법 실시
▶1451년고려사 139권(卷) 완성
▶1270년카페 왕조에서 가장 인기있던 프랑스의 왕(1226-1270 재위) 루이 9세 사망
첫댓글 오늘의 역사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의역사 잘 보고 갑니다.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오늘의 역사 감사합니다~영아님~^^
감사합니다
오늘의 역사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