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가와에서 삿포로에 도착해서 야경을 보며 왓카나이의 007기를 회상하다!
여행 8일째인 7월 6일 아침 북해도 의 삿포로 札幌駅(찰황역) 에서 08시 25분에 출발하는
특급 スバカムイ 5호를 타고는 숲과 들이 펼쳐진 홋카이도 평원을 북쪽으로 달립니다.
9시 50분에 홋카이도 중앙에 위치한 아사히가와 旭川(욱천) 역에 내려서 6분후인 9시 56분에
비에이 를 거쳐서 후라노 로 가는 옛날 증기 기차 를 타는데...... 일본인들은
전통을 오래토록 지키는걸 소중히 생각하는지 이런 옛날 증기기차 가 달린다는게 놀랍습니다?
30분 후에 비에이 美瑛(미영) 에 내려서 마을을 둘러보고는 다시 로컬 열차 를 타고
나카후라노역 中富良野 에 내려 걸어서 "팜 도미타" ファム 富田 를 구경합니다.
비에이 美瑛(미영) 와 후라노 富良野(부량노) 는 아름다운 산과 라벤다꽃 이 충만한
대지로 1983년에 방영된 드라마 “기타노쿠니카라 북の國から” 로 유명하다나요?
다시 후라노 라벤다역 에서 증기 기차 를 타고 한시간 남짓 달려서 아사히가와 旭川(욱천)
역에 내려 공원 같은...... 나무들이 우거지고 조각상 들이 늘어서 있는 가로수길
보행자 전용 도로 를 걸어서 시가지와 공원을 구경한 다음 18시 25분 기차에 오릅니다.
아사히가와 역을 출발한 기차는 서남쪽으로 1시간 25분을 달려서 19시 50분에
삿포로 札幌(찰황) 역에 도착해서는 역사 내에서 인어 브론즈상 을 봅니다.
덴마크 코펜하겐 항구 인어 공주 의 절반 크기로 제작한 것으로 삿포르시 마스코트 라고
하는데..... 그러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JR Tower 에 오르는데 왠 청년에게
위치를 물었더니 따라오면서 까지 가르쳐 주겠다기에, 밤이고 해서 간신히 따돌립니다.
여행 가이드북에는 620엔 입장권을 사서 T38 최고층 에 오르면 동쪽으로 후라노가 보이고
북쪽엔 바다로 일몰을 구경할수 있다지만 어두워 졌으니 그냥 창가에서 무료로 봅니다.
고층 건물 창가에서 삿포로 밤거리 를 내려다 보니 문득 여행계획서 를 작성하면서
홋카이도 북부 에 있는 "왓카나이와 레분초" 를 볼까 망설였던게 생각이 납니다.
왓카나이 에 간다면 바로 마주 보이는게 바로 사할린 인데...... 조선인들은
일제 강점기인 1939년 부터 징용되어 끌려간 비운의 땅 입니다.
인류 5천년 역사에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 은 동서양 할 것 없이 똑 같네요?
1945년 해방의 기쁨도 잠시...... "조선인들은 무국적자" 가 되고 일본인들만 귀국선 을
타고 떠나는데, 아무도 신경써 주지 않으니 “임자없이 버림받은 사람들” 이라!
어제만 해도 일본인 이었으나 일본 국적을 잃었지만 한국 정부는 탄생하지 않은 것입니다?
25,000명 사할린 한인중 경상도 출신은 71% 에 달했다는데 모두 2년 기한으로 끌려온
노동자들로 북한 지역 출신은 8% 에 불과한터라..... 일부만 북한으로 귀국 하고
나머지는 러시아 귀화를 거부 한채 "무국적자" 를 고수하면서 귀국할 날만 기다립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해방후 3년간은 "미군정" 시기로 나라 마저 없었으며 1948년 이승만
정부 가 수립되었으나 세계최빈국으로 실업자 가 넘쳐나고 먹을 것이 없으니
국내인들 마저 춘궁기에 굶어죽는 판에.... 사할린 한인 을 챙길 여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6.25 전쟁 ( 콜롬비아군 병사 가 부산에 내렸는데 세상에 이토록 가난한 나라 가 다 있다니
믿을수가 없다고 했으니.... ) 과 이승만 정부를 거쳐 박정희 정부에서는 소련과 국교가
없으니 정부도 손을 놓고 있다가 노태우 정부에서 1990년에 비로소 소련과 수교 를 합니다.
그 이후 한인 1세들이 영주 귀국을 하는데 25,000명 중 죽은 사람이 더러 있었다고는 해도
숫자는 400명 이라? 숫자가 예상보다 적은 것은 정부에서 본인의 귀국만 허락 하니
현지에서 결혼해 자식을 낳고 50여년을 살았는데 그럼 부인과 자식들은 버리고 와야 하나?
경산이 고향인 김윤덕은 1981년 까지 탄광에서 일했는데 귀국을 바라고 온갖 불이익 을
감수하면서 1990년 까지 무국적자 로 살았으니..... 당시 1950~ 60년대에는
북한이 한인들을 회유하는 터라 부인 김쾌임의 친정식구들은 북한행 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은 불과 80명의 사할린 거주 자국 동포들을 위해 12명 규모 총영사관 을 설치했으나
대한민국 정부 는 "25,000 명 한인들에 대해 무관심" 으로 일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국교 수립 이전 에라도 교섭을 통해 동포들을 도울수 있었건만 전혀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사할린 교포들 에 대해 오랫동안 도울 생각 없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그렇다
치고 일본인과 한국인들은 감성 도 전혀 다르니..... 1983년 9월 1일 미국 뉴욕을 출발해
앵커리지를 경유해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 KAL 007 기 가 소련 전투기 미사일에 격추 되었습니다.
대통령기를 몰았던 베테랑 조종사 는 앵커리지 에서 자동항법장치 로 비행했는데 평소 항로를
수백 KM 나 이탈해 몇시간 동안이나 소련 영공 을 날고 있었는데 어떻게 모르고 있었을까요?
캄차카반도와 사할린 일대는 소련 ICBM 핵미사일 잠수함기지 가 있는 곳으로 당시 소련은
ICBM 을 발사 준비 를 하고 있었다는데, 이런 첨예한 동서냉전 상황에서 당일
거의 같은 시간대에 옆 항로에서는 미군 첩보기 RC 135 기 가 함께 날고 있었던 것이니.....
기장이 항로를 잘못 입력한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자동항법장치에 손을 댄 것일까요?
미군 첩보기 와 챌린저 위성 과 알래스카 기지 에서는 앵커리지를 출발한
대한항공 007기가 소련영공을 몇시간째 날고 있었는데 왜 지적하지 않았던 것 일까요?
소련 조종사 겐나디 오시포비치 는 20년이 지난후 흑해 크라스노다르 자택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 를 통해 20년 동안 악령에 시달리며 보드카 중독이 되고 우울증 에 걸리기도
했다며 자신이 격추한게 "민간 여객기라면" 유족에게 머리숙여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여객기를 개조한 미군 정찰기" 가 수시로 날아와
자신이 출동한 것만도 7년간 무려 "500회" 에 이르렀고,
비행기는 점멸등 외에는 꼬리 스포트라이트는 켜져 있지 않았으며...
민간 비행기는 꼬리 스포트라이트 를 켜야 하는데 꺼져 있었던 데다가........ 비행기에다가
불빛으로 신호를 보내고 조명탄 4발을 쏘아도 반응이 없어 민간기는 아니라고
생각했고 주파수도 맞지않고 영어도 모르니 통신은 불가능해 격추명령에 따랐다고 합니다.
그 5년전인 1978년 4월 파리를 출발해 미국 알래스카 앵커리지 로 가던 대한항공 902편 은
도중에서 방향을 180도로 되돌려서는 민감한 소련 군사기지 무르만스크로 비행합니다.
대한항공기는 소련의 핵심 핵전력 군사기지 상공을 비행한지라 소련기가 쏜
미사일 을 맞고 얼어붙은 호수에 불시착해 2명이 죽는 정도로
수습해 108명은 살았는데.... 당시도 조종사는 소련 영공임을 몰랐던 것이라?
관성항법장치(INS)가 없었던지라 비행기 승무원들이 30분에 한번씩 경로를 확인하고 수정
했다는데... 서쪽 미국으로 가던 비행기가 왜 동쪽 소련으로 방향을 180도 바꿉니까?
왼쪽에서 떠던 태양이 오른쪽에서 뜨고 그린란드 육지가 아니라 바다가 나타나는데도
비행을 계속했던 것은 풀리지 않는 의문 이라....... 기장은 후일 미국으로 이민 갔다나요???
1274년 고려 는 말과 식량을 긁어 모으고 배 900척을 건조해서 병사 8천명에 뱃군 7천명을
동원해 몽고군 앞잡이로 바닷길 을 안내해 일본을 침략해 화살받이로 죽었으며.....
1281년 고려는 1만을 내어 재차 침공하는데, 이후 원수를 갚는다고 왜구가 창궐 하니
공민왕과 우왕 시절 합쳐 38년간 무려 470회라! 약소국의 처지 라는게 대강 이와 같습니다.
소련은 민간 여객기가 아닌 군용비행기 로 알았다고 부인하자... 왓카나이 일본 통신부대 에서
감청한 자료로 반격하는데, 하지만 미소가 서로 상대방의 방어와 대응태세 확인 에
혈안 이 되었던 시기에 발생한 두 사건은 음모론 으로 비회되었던 것이니 약소국의 비애 라?
세월이 흐르고 왓카나이 소야곶 앞바다에서 희생당한 유족들이 배 를 타고 바다로 나가
꽃을 던지며 "추념식" 을 가졌는데, 한일 두 나라 사람들이 서로 전혀 다른게....
망자를 소리쳐 부르며 울부짓다가 갑판을 데굴데굴 구르며 통곡하는 여인들은 한국인 이고!
검은 옷을 입고 단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소리내어 울지도 않고 슬픔에 북받쳐 손수건으로
눈물만 꼭꼭 찍어내고 있는 흐트려지지 않는 자세의 여인들은 일본인 이라?
일본인은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에도 그걸 드러내 보이는걸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러고는 전망대를 내려와서는 빌딩 10층에 1960년대 일본 거리를 재현한 라멘공화국 으로
매달 투표로 라멘왕 을 선발하기도 한다는 역 앞 에스타 빌딩 은 찾지를 못해 포기합니다.
저녁을 먹으려고 들어간 식당이 하필 양고기 요리 전문집인 징기즈칸 바비큐 인데.....
마눌이 가격표를 보더니 너무 비싸다며 질겁을 하면서 빨리 나가잡니다?
무안하지 않고 자연스레 나가야 하는데 어쩐다? 해서 소바나 덴뿌라가 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니 주인이 죄송하다면서 여긴 징기즈칸 바비큐 전문점이라 소바는 없으니 길을 건너
건너편 빌딩 지하로 가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본어에 능숙하지 못한 것을 보고는
캄캄한 밤중에 길을 몾찾아 고생하겠다 싶었는지.... 여종업원에게 직접 데려다 주라네요?
그 소바집이라면 오다가 보았기로 알지만 너무 아는체 하기도 곤란한지라 “다이죠부데스”
라고 말했건만.... 여종업원도 다이죠부데스로 되받으며 기어이 안내 를 해 주네요?
저기 길 건너편에 보이는 저 빌딩에 상호 가 보이지요? 라고 확인 까지 해주고는
식당 종업원 처녀는 몇번이나 고개를 숙여 절하고는 되돌아 갑니다. 처녀가 친절하다고?
일본을 아홉차례 여행하면서 이보다 몇배 더한 친절을 하도 여러차례 경험 하다 보니...
이정도 친절에는 무감각 합니다.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은 뉴스가 아니고 사람이
개를 무는게 뉴스 라고..... 친절하지 않은 일본인을 만나면 그게 놀라운 일이네요?
하지만 2012년 MB 독도 방문후 혐한 분위기 가 고조된지라 이젠 극우파들을 조심 해야!
그래도 관광객들이 거리와 식당에서 만나는 일본 사람들은 여전히 친절한데, 건널목을 건너 빌딩
지하로 내려가 뜨거운 소바를 시키니 우동 처럼 보이는데, 맥주 까지 합쳐 2천엔이 나오기로
잘 먹고는 홋카이도 대학 앞에 있는 호텔로 돌아옵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