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해맞이동산 바로 옆 쉼터에 시인 이상과 화가 구본웅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시인 이상과 화가 구본웅
구본웅은 1906년 서울에서 천도교인(손병희 교주 의 비서)이자 잡지 '개벽' 편집장을 지낸 출판인이며, 사업가이고 재력가였던 구자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구본웅 은 동네 젖동냥으로 컸는데, 세 살 때 유모가 아이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척추 장애인(일명 꼽추)이 되었다
산후통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부친 구자혁 은 새 아내를 맞았는데, 그가 바로 '변동림'의 언니 '변동숙'이다
(나중에 이상의 아내가 되고, 또한 이상이 죽고 난 후 이름을 '김향안'으로 고쳐 김환기와 재혼하는 그 변동림이다)
구본웅은 친어머니가 안 계셨고, 이상은 백부의 손에 컸으니 같은 동네에 살면서 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이 둘이 금방 친해진 것은 '동병상련' 때문이었 는지 모른다
1926년 이상은 명문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진학한 반면, 구본웅은 '신체적 결함'을 이유로 경성고등 보통학교로의 입학이 좌절되었다
이 때 구본웅은 자신이 선물로 받은 사생상(화구를 담는 상자)을 이상에게 주었다
가난했던 이상은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필명을 '상(箱)' 으로 하고, 앞글자는 사생상이 나무로 만들어졌으니 '나무 목'이 들어간 성씨 중 다양성과 함축성을 지닌 이(李)씨를 택하여 상을 합친 '이상(李箱)' 이라는 필명이 탄생되었다
그리고 구본웅은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집안의 전폭적인 지지로 '화가'가 되어도, 무엇을 해도 좋다는 암묵적인 동의를 얻어 일본 유학을 가게 된다
구본웅이 일본 대학에서 미술 이론을, 태평양미술 학교에서 미술 실기를 공부하고, 이과전, 독립전 등 당대 일본의 재야 그룹전에 당당히 이름을 알린 후 귀국했을 때가 1933년이다
그리고 이상이 도쿄로 떠나는 1936년까지, 그 짧은 3년간의 시기에 이 둘은 늘 함께 붙어 다녔다
'텁수룩한 머리와 창백한 얼굴에 숱한 수염이 뻗친 이상'과 '꼽추인 데다가 땅에 끌리는 인버네스를 입은 구본웅'이 함께 거리를 거닐면 곡마단이 온 줄 알고 아이들이 뒤를 따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33년 3월 이상은 처음으로 각혈을 시작하였고, 1935년 구본웅은 여전히 각혈을 하며 성치 않은 몸으로 고뇌에 잠긴 우울한 친구 이상의 창백한 인상을, 검은 바탕에 강렬한 빨간색을 가미해 그려 놓았다
이상은 1936월 10월 도쿄로 갔다가, 이듬해 4월 불령선인으로 몰려 구치소 생활을 겪은 후 2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원래 허약했던 구본웅은 한국전쟁 중인 1953년 거의 영양실조와 폐렴으로 새어머니와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47세의 생을 마감했다
♤ 변동림(卞東琳)과 김향안(金鄕岸)
대한민국의 여성 수필가, 미술평론가, 겸 서양화가 이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문학소녀 변동림(卞東琳, 1916~2004)도 시인이자 소설가 이상과 뜨거운 연애를 한 모던걸이었다
그녀는 이상(李箱, - 본명 김해경 金海卿, 1910~ 1937)의 친구인 화가 구본웅의 나이어린 이모였다
구본웅은 친모가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후 계모인 변동숙의 손에 자랐다
계모 변동숙은 구본웅을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그런데 변동숙의 아버지가 훗날 새장가를 들어 자신과 스물여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 이복여동생을 낳았다
그녀가 바로 변동림인데, 연상의 조카 구본웅의 친구 이상과 커피를 마시고 데이트를 하면서 문학을 논하다가 사랑에 빠졌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
이상이 폐병을 앓고 있음을 아는 변동숙은 펄펄 뛰며 반대했지만, 변동림은 1936년 6월 이상과 결혼을 강행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상의 호적에는 변동림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부부에게 신혼의 즐거움은 잠시뿐이었다
폐결핵은 점점 심해졌고, 구본웅은 천재이자 연하의 이모부인 그가 그렇게 허망하게 삶을 마감하도록 놔둘 수 없다며, 일본으로 가서 요양하라고 돈을 건넸다
결혼 4개월 만인 1936년 9월의 일이다
일본에서 요양하던 이상은 1937년 2월 공원을 산책하다 ‘불령선인(不逞鮮人, 명령을 듣지 않는 조선인)’이라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옷차림이 허름하거나 용모가 단정치 못한 조선인은 무조건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되던 시절이었다
이상은 니시칸다 경찰서에 34일간 구금되었는데, 이때 건강이 다시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다
얼마 후 변동림은 도쿄에 거주하는 이상의 친구에게 빨리 일본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도쿄 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한 이상이 매우 위독하다는 내용이었다
이상은 변동림이 병원에 도착하고 며칠 후인 1937년 4월 17일, “멜론이 먹고 싶소”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우리 근대문학사의 천재는 이렇게 박제가 되었다
21세에 청상(靑孀)이 된 변동림은 이상의 유골을 안고 현해탄을 건너 미아리 공동묘지에 매장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묘소는 유실되었다
이상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7년 후, 자녀가 셋이나 있는 화가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 1974)와 살림을 차렸다
변동림이 김환기와 동거를 시작하자 이복언니 변동숙은, 부인이 있는 김환기의 첩살이를 하는 건 결국 본부인을 내쫓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라며 결사반대했다
이에 변동림은 변씨 가문과 아예 인연을 끊겠다며 이름을 김향안(金鄕岸)으로 바꿨고, 얼마 후 김환기는 본부인과 이혼했다
김향안과 김환기는 월북화가 근원 김용준이 살던 성북동 ‘노시산방’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후 집 이름을 ‘수향산방(수화 김환기와 향안이 사는 집)’으로 바꿨다
김향안은 1955년 김환기와 함께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미술평론을 공부했고, 다시 1963년 뉴욕으로 공부를 떠난다
1974년 목디스크 수술을 받기위해 뉴욕 유나이티드 병원에 입원한 김환기는 그게 마지막이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김환기 나이 예순둘)
김향안과 결혼한지 꼭 30년이 되는 해였다
그로부터 꼭 30년이 지난 2004년 2월 29일 김향안 도 뉴욕에서 사망한다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웨스터체스터 공동묘지 에 그토록 묻히고 싶어했던 남편의 묘지 바로 옆에 나란히 누웠다
예술가의 아내 뿐만이 아니고 수필(파리와 뉴욕에 살며)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등을 발간하고 개인전을 여는 등 스스로 예술가였던 그녀의 인생은 한국예술사에서 두 천재의 아내로 영원히 기억된다
1974년 김환기가 죽은 후 흩어진 유작과 유품을 모아 1975년 상파울루에서 김환기회고전을 열고 1978년 환기재단을 설립하여 김환기 예술을 알리는데 힘썼다
1992년 고인이 생전에 그토록 좋아했던 성북동 (수향산방)을 닮은 곳을 찾아 종로구 부암동 산기슭 에 환기미술관을 설립하였는데 개인이 사비로 만든 최초의 미술관이다
♤ 만약??
만약 이상이 동경에 가지 않았더라면,
동경에 갔더라도 일경에게 붙잡혀 감옥살이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이상이 죽지 않고 살았다면,
변동림은 김향안이 되지 않았을까?
두 사람의 바람대로 이상을 따라 동림도 동경으로 가고 둘이 함께 유학 생활을 했더라면,
그래서 이상과 변동림이 마치 김환기와 김향안이 그랬듯 파리와 뉴욕으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며 살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삶에는 만약이란 것이 없다
이상은 젊은 나이에 죽고, 변동림은 경성에 머문다
그리고 화가 김환기를 만나 젊을 때의 "오만한 지성"과는 다른 사랑을 한다
얽히고 설립 가계도
제7대 대한민국 국립발레단 7대 단장(2014년 ~ 현재) 강수진은 구본웅의 외손녀이다
잠시 걸어 '황소 화가' 이중섭 안내판이 있는 쉼터에 도착하였다
'황소 화가' 이중섭
이중섭의 1953년 작 ‘황소’는 힘차게 발을 내딛는 황소의 몸짓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이중섭의 소 그림 가운데 가히 대표작이라 부를 만하다
이 작품이 2010년에 서울옥션 경매에 나와 큰 화제가 됐으나 최종 낙찰가는 예상을 크게 밑도는 35억 6천만 원이었다(물론 이 역시 적은 금액이 결코 아니지만)
1954년의 '싸우는 소'를 보면 죽을 힘을 다해 일어서고자 하는 의지가 보이지만,
1년 후(1955년)에 그린 '싸우는 소'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분노, 좌절, 체념만이 읽힌다
♤ 길 떠나는 가족
1955년 1월 미도파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갖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아들 태현에게 쓴 것이다
태현에게,
나의 태현아 건강하겠지, 너의 친구들도 모두 건강하니?
아빠도 건강하다.
아빠는 전람회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아빠가 엄마, 태성이, 태현이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아빠가 앞에서 황소를 끌고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그림을 그렸다.
그럼 몸 성해라.
아빠
이 그림은 춘화로 낙인찍혀 철거당하고 어렵게 개최한 개인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친구 집에 얹혀 살며 미도파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준비했던 누상동 집(서울시 종로구 누상동 166-202)
이중섭은 생존 당시에는 '화단의 이채' 정도로 평가받으며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일본에 머무르던 가족과 만나지 못한 채 1956년 9월 6일 40세 나이에 서대문 적십자병원 에서 행려병자로 서러운 삶을 마감하고서야 '정직한 화공', '우리화단의 귀재', 요절한 천재화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시신은 무연고 처리되어 사흘간 방치되었다가 홍제동 화장터를 거쳐 화장된 유골은 3등분 되어 일부는 일본의 그의 부인에게로 또 일부는 망우리의 묘소로 갔다
그리고 나머지는 박고석(화가)이 보관하다가 정릉 에 수목장으로 뿌려졌다
3분 여 숲길을 내려가면 수성동 계곡이 나온다
수성동 계곡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 179-1)
수성동 계곡은 종로구 옥인동과 누상동의 경계에 자리한 인왕산 아래의 첫번째 계곡으로 조선시대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이라 선비들이 휴양을 즐기던 계곡이다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의 수성동이 등장하면 서 더욱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 장동팔경첩
인왕산 남쪽 기슭에서 백악 계곡에 이르는 장동 지역, 현 효자동과 청운동 일대의 가장 뛰어난 여덟 군데의 승경을 종이에 수묵으로 세로 33.1cm, 가로 29.5cm 크기로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다
그 대상은 백운동(白雲洞), 대은암(大隱巖), 청풍계 (淸風溪), 청송당(聽松堂), 창의문(彰義門), 독락정 (獨樂亭), 취미대(翠徵臺), 청휘각(晴暉閣)을 일컫는다
(간송미술관 소장본 장동팔경첩은 <필운대>를 비롯하여 자하동, 청송당, 대은암, 독락정, 취미대, 청풍계, 수성동을 담았다)
♤ 옥인시범아파트
옥인시범아파트는 1971년 수성동 계곡 바로 옆, 인왕산 자락을 타고 9개동 308가구가 지어졌다
무지막지하게 산 위에 계곡 위에 꾸역꾸역 건물을 지어 채워 넣었다
커다란 건물 사이로 수성동은 묻혀버리고 계곡과 산은 아파트에 가려 버렸다
더 이상 세상에서는 '수성동'이란 이상향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아파트가 만든 새로운 풍경은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계곡의 풍광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괴물 같은 덩어리였다
그렇게 전설 속에 묻혀버리고 만 수성동 계곡은 40년이 지난 2011년이 되어서야 지난날의 잘못을 깨닫고 아름다운 자연 유산을 되살리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다시 세상에 등장한다
인왕산 도시자연공원 추진의 전환점이 된 것은 아파트 철거과정에서 겸재 정선의 '수성동 계곡'에 나오는 '기린교'가 발견되면서부터이다
자료에 따르면, 기린교는 너비와 두께 각각 35cm, 길이 3.7m의 장대석(長臺石) 2개를 붙여 만들 것으로 총 너비가 70cm이며 다리의 좌우에는 난간이 박혀 있다
기린교의 발견으로 개발 초점이 '인왕산 녹지를 침범한 아파트'가 아니라 '수성동 계곡을 가리는 아파트'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수성동 계곡과 기린교는 서울시 기념물 제 31호로 지정되었다
수성동 계곡은 서울시 기념물 중 최초의 자연물이라 는 기록을 갖는다
한경지략,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인왕산 수성동에 효령대군(孝寧大君 : 태종 2남, 1396 ~ 1486년)과 안평대군(安平大君 : 세종 3남, 1418 ~ 1453년)의 집이 있었고 그 근처에 기린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