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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광화문에서 ‘촛불’을 안 들어도 되는 나라!!
크리슈나무르티 : 꺼지지 않는 촛불,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위하여
-- “미륵” 시대를 살면서, “내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QUESTIONER: How can one see anything directly, without the help of the image?
질문자: 어떻게 하면 이미지를 개입시키지 않고 딱 바로 볼 수 있습니까?
KRISHNAMURTI: First of all, know you have an image; then discard the image. Then you will know how you can look directly.
You all have images, haven't you? You certainly have an image about the speaker - otherwise you would not be here. Your image about the speaker is preventing you from listening to what is being said. If you had no image about the speaker you would say, "Well, tell me. I will listen, and see if what you are saying is true or false." Or, you would see what is true in the false. So long as you have an image you are not in relation with anything. To be free of that image you must know how images are built up - how images, words, symbols are constructed by thought every day. You look at somebody and it gives you a delight, a pleasure. It gives you a feeling of warmth, and you think about that person and imagine what he is. So you have built an image which is giving you pleasure. If you can be free of that image you can look at that person very clearly, very simply. But first you must know the image you have, in order to be free of that image.
크리슈나무르티: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이미지를 지니고 산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어떻게 딱 바로 볼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전부 다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들은 이 강연자에 대한 이미지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 그렇지 않다면, 여기 강연 들으러 오지도 않았겠지요. 그렇게 강연자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지니고 있는 그 이미지가, 강연 내용을 올바로 듣는 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이미지를 지니지 않았다면, “글쎄, 얘기해봐라, 들어보자. 그래서 당신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아보겠다.” 하거나 또는 스스로 거짓 속에서 참을 보거나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한, 실제 대상과는 그 어떤 관계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우려면 그게 어떻게 형성이 되는지 알아야만 하지요 - 매일매일 생각을 매개로 이미지와 언어와 상징들이 어떤 식으로 해서 형성되는지를 말이지요. 여러분들이 누군가 어떤 사람을 쳐다봤는데, 그게 즐거움과 기쁨을 줬단 말이지요. 그게 자신에게 따뜻한 감정을 줬기에,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일까 상상해보기도 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쾌락을 주었던 이미지를 형성해가는 거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런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 사람을 아주 명확하고도 소박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일단 먼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우려면 말이지요.
-- J.K., Talk 3, Students, Rajghat, 17 December 1967.
[김기호님이 게시물을 공유했습니다. 2017년 12월 29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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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9]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You certainly have an image about the speaker - otherwise you would not be here
당신은 분명히 이 강연자에 대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 아니라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삶을 살아가면서 말씀입니다, 해도 보고 달도 보고 별도 보고 나무와 풀과 꽃과 새들도 보고, 또한 안 볼 수가 없는 인간들도 보면서 살아가는데 말이지요.
그렇게 수많은 대상들을 바라본다고 해도, 항상, 언제나 ‘이미지’를 가지고 그것으로써 반응할 뿐입니다. 자신과 대상 사이에 항상 ‘이미지’를 개입시켜서 보는 것입니다. ‘색안경’이지요.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니 이게 ‘깨끗한 시야’로서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란 말씀이지요. 사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이미지’로 보는 거니까요. ‘이미지’는 언제나 과거에 형성된 것입니다. “‘현재’라면 ‘이미지’가 작동할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러니 지구상 모든 인간들은 과거로써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인”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저 말씀은, 어떻게 관심이 생긴다면, 이미지 형성 과정부터 잘 보고 이해하라, 그 얘기지요?
그리고 정작 ‘이미지’ 때문에 ‘관계’가 다 망가진다는 건데요, 그게 바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일어나는 폐단입니다. 250만년 또는 350만년 쌓여온 폐단이겠지요. 이른바 ‘적폐’입니다. “적폐” 중에서도 완전 대빵이지요. 인간관계에서 ‘이미지’를 문제 삼는다는 말은, ‘이미지’를 만들어온 바로 그 ‘생각’하는 능력을 문제 삼는다는 말이고, 그것을 이해하고 해결해서 자유롭게 사랑하고 베풀면서 살다 가자, 그런 얘기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런 어마어마한 걸 얘기하면서 어떻게 ‘적폐청산’에 접목시켜서 사람들 이목이라도 좀 집중시켜보려는 얄팍한 꼼수 부리지 마라고 하시겠지요? 그런데 말씀이지요, 그걸 적폐라고 부르거나 말거나, 우째도 해결은 해야 할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쪼끔 꼼수면 또 어떻습니까?” 여러분들께서는 누가 꼼수 부린다고 그냥 말려드시겠습니까?
귀엽게 봐주신다면 몰라도, 최소한 ‘촛불시민’이라면 그냥 동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인정해주는 가장 냉철한 지성의 소유자들 아닙니까! 문득, 참여정부 때 황우석 교수 줄기세포 사건이 생각납니다만, 여기서 “저렇게” 운운한다고 해도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요? 사회적으로 전혀 이슈가 되지도 못 하는 일이니까, 염려 완전 붙들어 매셔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촛불정신’에 ‘자유인’을 끌어다 붙인다면서 그건 ‘억지’라는 반박에도, 저는 아무 말씀 안 드립니다. 꼭 ‘적폐’라고 불려야만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혹시 인연이 되어서 번역된 거 읽어보시고, 관심이 생기면 또 그렇게 계속 가보시면 되는 일이고, 가다 말고 쉬었다 간다고,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거기서 ‘고해’로 안 살게 되는 사람이 생겨난다면, 그건 그냥 그 사람 복이지요, 뭐.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복”이고요.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이 사회적으로 무슨 영향이 미치느냐 마느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설령 문제가 되는 때가 온다고 해도 한참 나중 일이지요. 저렇게 ‘고해’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 나오지도 않는 상황에서, 뭐 하나 껄끄럽게 생각할 것도 전혀 없지 않습니까? 말로야 어느 골짜기 나무 가지에서 새 한 마리, 지저귀든지 말든지 세상에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 골짜기 잠시 표롱표로룡 소리 들리다가 한 생명 끝나면 그냥 사라지는 것입니다. 물론 그게 꽃처럼 피었다 진다면 더 좋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봄에 꽃 진 자리 저만치 또 피어주면 좋겠습니다만 말씀이지요. 각설, 어쨌거나 자기 자신이 이미 이미지를 지니고 산다는 걸 분명히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미지 때문에 ‘인생이 고해’로 되는 것이기도 하거든요. ‘나’ 자체가 이미 이미지니까요.
잠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대충 훑어볼까요?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동양인’이라는 것도 이미지요, ‘단군 왕조’니 ‘배달민족’이니 ‘한반도’니 ‘남조선’이니 ‘경상도’니, 그 가운데서도 또 혈연 · 지연 · 학연이니, 그 속에서 또 자주 만나느니 친하느니 하는 그런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이미지로 형성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대차이’니 ‘개·돼지’니 ‘흙수저’니, 하여간 꼬리표 따위들은 몽주리 다 이미지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상대방을 ‘맑은 눈’으로 못 보는 것이지요. ‘왜놈·떼놈’이라 부르면서 그 사람을 제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한국인을 ‘조센징’이라고 부르는 일본 사람도 마찬가지지요. 어쨌든 저런 모든 것들이 우리 의식을 채우고 있는 항목들 아닙니까! 그게 다 이미지들이지요, 뭐. 그러니 상대방을 맑은 눈으로 보자면, “고요 속에서 주의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겠습니다.
또한 그런 사람 만나봤다고 해도, 자기 스스로가 그런 차원에 있지 못하면, 그걸 ‘알아챌’ 수도 없겠습니다. 그래서 ‘눈 밝은 사람’만이 역시 ‘눈 맑은 사람’을 알아본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여기서 번역한 사람의 눈이, ‘과연 맑으냐 탁하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로지 개인 각자가 스스로 문제일 뿐이니까요. 맑기야 짜다라 뭐가 그리 맑겠습니까만.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핵심을 한 번 더 강조합시다. “우선 자기 스스로 이미지로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이미지 없이 대상을 딱 바로 그대로 볼 수 있다면, ‘그 속에 모든 것들이 다 있다’는 말씀도 하신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무엇이’ 그 ‘다 있다’는 것 속에 포함되는지는 역시 각자가 알아낼 수밖에 없는 알맹이들이겠지요. 이 위기의 시대, 인생길 훠이훠이 홀가분하게 가는 사람이 “참된 인간”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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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9] 다시는 광화문에서 ‘촛불’을 안 들어도 되는 나라!!
출처를 보니까, 인도 라자트 크리슈나무르티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하신 말씀인데 말씀이지요, 참, 인도 저 사람들은 저렇게 어린 학생들 질문이 이런 정도의 수준이란 말이니까, 어찌 부럽기도 합니다만,
또 우째 저다지도 ‘거지’가 우글거리는 나라란 말일까요? “성자”와 “거지”가 함께 가장 많은 나라, 그게 인도라고도 하지요? 그러니까 ‘거지’만큼 뭘 가진 게 없어야, “성자”가 많이 생길 수 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요?
하루 1 달러 이하로 사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저 ‘이미지’를 포함해서 저는 가진 게 별로 없습니다! 꼭 저만 그렇겠습니까만, 인도라는 나라, 정말 거의 불가사의한 나라입니다. 더불어 이어지는 불가사의 하나 더. 이렇게 ‘부자 나라’가 되었다는 대한미국에서는 왜 다 큰 사람들도, 아니 인생 황혼에 접어들고 거의 죽을 때가 다 되어가는 사람들마저도, 하다못해 저런 ‘이미지’ 질문도 한번 아예 안 해본다는 말일까요?
그러면서 무슨 뭔가로 ‘세계사의 유례가 없다’ 소리 하나 들었다고 어깨 빡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도 “샴페인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소리 들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말씀이지요. 그렇게 사람들이 두텁지가 못 하니, 스스로들 “촛불혁명으로 딱 정권 바꾸는 것밖에 못 했다”는 소리나 하고들 널부러져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종교”의 핵심으로서 세계적으로도 ‘나’를 문제 삼는 게 과반수니 어쩌니 할 만큼, 엄청 거대한 흐름으로 조성된 건 아니라고 합시다. 그래도 여기는 겨우 100여년 만에 외래종교가 아주 판을 칠 만큼 넓고도 깊게 퍼져서, 고스란히 그냥 믿어버리고 복 달라는 소위 ‘종교성향’이 왕성한 나라 아닙니까. 그런 만큼 진짜배기 참으로 참되고도 새로운 “진리의 흐름” 역시, 세상 어떤 나라 못지않게 아주 우르릉 쿵쾅 담대하게 흘러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이 가장 왕성하게 활성화되고 열매를 맺는 나라!! 그리하여 국민이고 시민이고 간에,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나라!! 자손대대로 다시는 광화문에서 ‘촛불’을 안 들어도 되는 나라!!
참, 가슴 뿌듯한 소리들 아닙니까? 진짜로 그렇게 된다면 말입니다. 정말, 을씨년스러운 세모 분위기에, 유독 이 아침은 그런 밝은 ‘이미지’에 휩싸여서 희망차게 맞이하게 되는군요!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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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9] ‘보는 것’ 그리고 ‘아는 것’
‘딱, 보면 보인다!’는 말씀인 것같은데요. 인간이고 세상이고 간에, 그게 제일 어렵지요? 그게 단지, 바로 이 ‘나’ 때문이라는 말씀 아닙니까.
저기서 “생각”을 알아챈다는 것과 “이미지”를 알아챈다는 게, 뭐, 그다지 다른 건 아니겠지요? 근원적인 문제는 평생을 이 ‘나’에 쫓겨 다니다가, 별로 의미도 없이 사라져간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한평생 살면서, 바로 그 철칙과도 같은 “사실”을 문제로 삼아라! 그 말씀이지요만. 그저, 이냥 이대로, 세상이 제시하는 가치에 휘둘려 살아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부터가 문제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는 다들 바로 그 문제를 ‘문제로 삼으라!’고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지금 역시, 여전히 그렇게 안 가르치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진짜로 “행복”합니까?
다른 모든 생명체들은 허여받았거나 그냥 공짜로 태어났거나 간에, 반듯한 제 생명력으로 온전한 “삶”을 고스란히 그대로 누리고 가는 거 아닙니까? 거기서 무슨 군집이니 사회니 한다고 해서, 그게 ‘인간’들과 정말로 무슨 관계가 있기는 있단 말일까요? 인간 빼고 저 모든 “생명”은 우주적인 “지성”에 따르는 거 아닙니까? 거기서 왜 꼭 ‘인간’만 빠져야 한단 말입니까? 그러니 금수저, 은수저, 헬조선 어쩌구나 하는 거지요.
다들 ‘정치’ 한 파벌에 쏠려 있고, ‘종교’ 한 집단에 파묻혀 있는 주제에, 저다지 근원적인 문제, 그런 사실에 “관심” 생길 여유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애들부터나마 좀 제대로 가르치자’는 생각이 떠오를 수도 없는 거지요. 하기사 “대멸종”이라고 해도, 다들 꼼작달싹 안 하고들 있는 꼴에, 달리 그 무엇이 당하겠습니까. ‘이번 생은 망했다’고 하지만, 그야말로 이번 “대멸종”을 그저 ‘인간’ 때문입니다. 다 산 사람이야 그렇다고 해도, 저 애들은 어째야 하는 겁니까?
일찍부터 문제였습니다만, 구태여 ‘대멸종’ 아니라도, 수많은 종교들로 이미 갈가리 찢어진 세상, 지구촌에.. 한번씩, 고작, ‘이게 다, 대멸종에서 살아남는 인간들 들어보라고 마륵께서 오셨단 말일까?’ 그런 생각이 드는 통에 말씀이지요. CD 또는 USB 담아서 툰드라 땅 깊숙이 파묻어 놓으면, “원본” 그대로 길이 ‘보존’이야 될 테니까요. 그것만 해도 ‘당근’ “인류사 초유의 일”이겠지요? ‘인류 사대 성인’의 말씀이 “원본”으로 남아 있는 게 세상 그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이승은 물론이고 아마도 저승까지, 그 어디 어떤 사회고 간에, ‘경제’라는 건 모든 구성원들이 그 최대의 관심을 쏟아붇고 있는 영역임이 분명한데도, 딱히, 제대로 해결되는 꼴이 안 보이는 겁니다만, 도대체 ‘그거’ 하나도 좀 말끔하게 해결이 안 되는데, 별로 관심없는 영역, 그런 분야가, 막상 “인생”의 ‘아킬레스근’인, 이, 참, ‘환장할 노릇’을 어찌 해야 할까요? 그야말로 딱 그거 하나 좀 제대로 “선도”할 수는, 전혀, 택도 없겠지요?
본문 말씀, 저때 ‘보는 것’은 ‘아는 것’과 바로 연결이 되지 싶습니다만. 대개 우리가 아는 것들은, 사실상 ‘보는 것’ 또는 ‘보이는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머리 말씀이지요. 그만큼 얼토당토 않는 주제로 살다가는 거 아닙니까? 막상, ‘아는 것’들이 인생에, 행동에 전혀 도움 안 되는 거지요. 그거 아니라면, 그래도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제구실을 좀 하게 될 거 아니겠습니까?
꼭 무슨 ‘지식인’ 덕볼 일 없다 해도, ‘아닌 거’ 보고 ‘아니오!’ 했다면, 인간 세상, 어떻게든 산다는 게 ‘좀 행복할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니나 내나 전혀 안 그렇거든요. 시시각각 ‘그 꼴’을 또 ‘안 보려고’ 도망이나 다니고 있는 주제에, 보이기는 뭐가 보이겠습니까. 보여도 ‘안 보이는 척’이나 하겠지요.
구질구질, 여전히 말이 늘어집니다. 모든 거, 다 물리치고 그냥, 한 인간으로서 ‘척 보면 압니다!’ 쯤 되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분께서 아예 안 계시는 것도 아니고 말씀입니다.
지금 내 모습이, 저런 ‘능력’을 다 가리고 있는 거라서, 모름지기 그렇게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저만치 밀쳐놔야지요. 여전히 그 말이 그 말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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