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 수필
추억의 국화빵
灘川 이종학
유별나게 맹위를 떨치던 더위를 슬며시 밀어내더니 갈바람이 제법 냉기를 뿌리며 살랑거린다. 나뭇가지에서 맴돌며 떨어지는 물든 낙엽들이 조심스럽게 보도 위를 구른다. 아, 가을이구나, 아니 아, 세월이 빠르게 가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이런 상념에 손이 자연스럽게 점퍼 호주머니에 들어갈 때쯤이면 버릇처럼 국화빵을 선두로 풀빵, 붕어빵, 군고구마, 군밤 같은 서울 길거리를 점철했던 먹거리의 아련한 추억이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서민의 구미를 자극하는 것인 듯하면서도 한민족의 혼과 더불어 명맥을 이어온 명물들임을 부인할 수 없다. 캐나다 이민살이 25년이 되었음에도 이들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그 알싸한 위력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지난 8월에 미국 엘에이에 갔었다. 엄청난 혹서였다. 덥다가 아니라 뜨거웠다. 화씨 100도를 넘다 드는 열기가 숨 막히게 했다. 그래도 차나 사람들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인다. 하루는 한식 베이커리가 있는 쇼핑몰에 들어갔다. 냉방이 잘된 곳이라 몸도 식히고 모처럼만에 한국 빵이 먹고 싶었다. 종류가 다양한 데다가 단맛이 은근하고 쫄깃한 육질이 그리워서다. 역시 손님이 만워사례였다. 빵가개의 수많은 접객용 식탁이 모자랄 정도다. 그런데 빵가개 바로 가까이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보였다. 국화빵을 사먹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란다. 이 뜨거운 한낮에 뜬금없이 국화빵이라니? 그러다 보니 좀 전까지 빵가개 진열장을 기웃거리던 아내와 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어느새 국화빵 행렬의 뒤꽁무니를 향해 가고 있었다. 고급 빵은 놔두고 하찮은 풀빵에 불과한 국화빵을 먹겠다고 추억의 유혹에 넘어가다니, 웃음이 입 언저리에 묻었다. 하긴, 나도 갑자기 국화빵 냄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때 나는 밤늦게 집에 돌아오곤 했다. 야근(夜勤)에다 술판까지 거치다 보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아이들 밤참거리는 잊지 않았다. 밤참의 종류는 계절이나 유행에 따라 여러 가지였는데 그중에서도 서리가 올 때쯤부터는 국화빵이 인기 짱이었다. 미아리 버스종점에서 내리자마자 길가에다 자그맣게 포장을 치고 국화빵을 굽는 아주머니에게 가서 신문지 봉지 가득 국화빵을 담아 들고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급히 간다. 국화빵은 김이 무럭무럭 따끈할 때 먹어야 제맛이 난다. 미묘한 온도 조절에 묘미가 있는 게 국화빵이다. 갓 구워낸 국화빵 하나를 입안에 넣고 씹으면 입천장이 화끈거려 허헉거리면서도 달콤한 팥앙코와 구수한 밀가루 풀내가 어우러진 환상적인 감칠맛에 두 눈이 스르르 감긴다. 이것이 바로 잡맛이 깡그리 도망친 서민 특유의 정겨운 맛이다. 국화빵은 일단 식으면 그야말로 미끈 텁텁한 밀가루풀로 전락하고 만다. 제 속에 갈무리한 열기와 바깥 한기가 기막히게 조화를 이루는 먹거리다.
우리의 전통적인 풀빵은 밀가루풀을 쑤듯이 밀가루를 물에 풀어서 빵틀에 부어 굽는 빵이다. 그래서 모두 풀빵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지금처럼 팥이나 꿀 같은 ‘앙코’를 넣지 않고 밀가루를 풀 적에 소금간을 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 최초로 이렇게 구워 만든 풀빵에서 파생된 것이 국화빵이다. 그 밖에도 붕어방, 오방떡 같은 종류가 있다. 그중에서 국화빵은 국화 무늬가 새겨진 빵틀을 처음으로 가지고 들어온 일본인에 의해 전해졌다는 일부 민속학자의 주장이 있다. 빵에 일본을 상징하는 국화(國花)인 국화(菊花) 무늬가 새겨졌대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예부터 우리 민족의 국화 사랑은 각별하다. 도자기를 비롯한 수공예품과 각종 음식에는 국화 문양이 많을 뿐만 아니라 산야 어디에서나 국화를 볼 수 있고 집안에서도 국화를 소중히 가꾼다. 국화차는 건강 음료수로도 사랑을 받는다. 아마 일본인이 아니라 국화 문양이 새겨진 우리의 전통적인 다식판(茶食版)에서 연유된 듯하다.
아무래도 1945년 이후 미국의 구호식량으로 밀가루가 들어온 뒤부터 국화빵 같은 풀빵 종류의 먹거리가 우리 민족 애환의 한 자락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우리 조상은 밀가루를 장만하기가 그리 녹녹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밀을 물에 담그었다가 조리로 잘 이러 햇볕에 빠짝 말리고 나서 맷돌로 갈고 체로 쳐서 가루를 내는 과정이 정말 많은 노역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힘들게 밀가루를 내면 겨우 밀가루 음식 만들어 먹기도 어려워서 풀빵 같은 주전부리 음식 장만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미국의 구호 밀가루가 배급되면서 밀가루음식이 풍족해졋다. 국화빵 같은 풀빵에다가 호떡, 만두까지 가세해서 먹거리가 풍요로워졌다.
일제 강점기의 철저한 수탈과 남북 분단, 6·25 전란, 정치, 경제의 난맥상으로 우리 민족은 최악의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화빵 같은 풀빵은 먹거리 이상의 역할을 했다. 허기를 면해줬고 삶에 등불이 되기도 했다. 고등교육을 받은 아내가 길거리에앉아 국화빵 장사를 해서 내조한 덕으로 학위를 받고 대학교수로 성공한 사람이 있다. 내가 잘 아는 학자다. 국화빵으로 신분을 구분하려는 딱한 사람들을 가끔 본다. 얼마나 못 살았으면 어려서 풀빵을 다 먹고 살았을까? 하긴, 김치와 된장에 발암물질이 있으니 먹지 말라고 한다. 입내가 지독한 비문화적인 한식(韓食)은 피해야 한다고 소위 한국 지식인들은 문화인인 양 외치고 매스컴들은 대단한 특종처럼 떠들어댄 적이 있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사람은 제 입맛에 맞는 음식을 선호한다. 그리고 음식에도 기막힌 향수가 있다. 우리 엄니가 끓여준 된장찌개만큼 맛있게 끓이는 사람 있으면 어디 나와봐라! 제 민족의 전통음식, 전통풍습을 버리는 것이 세계화가 아니라, 제대로 보존해서 세계에 알리는 일이 바로 세계화의 진수다.
우리 가족은 미국땅 한복판에서 그것도 고급 빵집 앞에 서서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살았다는 거지빵, 풀빵, 국화빵에 훔뻑 빠지고 말았다. 둘러보니 우리 가족 이외에도 국화빵에 매료된 젊은 일행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