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촬영.
팔달문,八達門 / 1794년 (정조 18) 창건, 2013년 해체 수리.보물
수원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입니다. 지금은 팔달문을 열어 놓아 내부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옹성 밖에서 본 팔달문입니다. 모델과 비교해서 성문의 크기를 가늠해 보세요.
옹성의 천장에 그린 용 문양 뒤로 보이는 팔달문이 웅장해 보이죠.
팔달문의 홍예 아래에서 본 옹성입니다.
세계유산 화성, 世界遺産 華城.
화성은 조선 시대 화성유수부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수원의 행정기구인 읍치를 팔달산 동쪽 아래로 옮기고,
1794년에 축성을 시작해 1796년에 완성했다. 전체 길이는 5.74km에 달한다.
4개의 성문을 비롯해 망루의 일종인 공심돈, 대포를 둔 포루, 요충지에 세운 누각인 각루, 군사 지휘소인 장대 등을 두루 갖췄다.
화성은 지형을 살려 쌓는 조선의 축성 전통을 따르면서도, 새로운 방어 시설을 도입한 성곽이다.
실학자 정약용은 조선과 중국의 축성 방식을 총망라하여 성곽의 규모와 방어 시설, 재료를 계획했고, 자재를 쉽게 들어 올리는 거중기와
튼튼한 수레 유형거를 발명하여 공사 비용도 줄였다. 축성의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공사 보고서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건축도면과 축성 기계의 그림, 사용한 재료의 치수와 수량까지 수록되어 있어 현재까지도 <화성성역의궤>를 바탕으로 수리 보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화성은 동서양의 기술 교류를 보여 주는 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지형을 살린 우수한 군사 건축물로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화성은 성곽뿐 아니라 18세기 말에 만들어진 성곽 도시이자 계획 신도시라는 점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 서울과 삼남 지방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에 자리 잡은 화성에는 경제적으로 부강한 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정조의 뜻과 실학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 현지 설명문 -
성문 옆에 있어야 할 적대는 도로 개설로 일부 성벽과 함께 철거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나기로 한 장소인 롯데리아에는 회원들이 많이 와 계셨네요. 늦지는 않았지만,
임박한 시간에 가서 모닝커피까지 얻어 마셨습니다.
오전 9시 30분, 인원이 다 모여
롯데리아를 나와 화성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화성 안내소 앞입니다.
이곳서부터 배 교수님이 창포님이 마련해온 특식이 들어 있는 무거운 가방을 끌고 가다가, 계단에선 메고 올라갔습니다.
숨쉬기도 힘든 계단길을, (앞에 보이는 붉은 깃발이 보이는 남치를 지나서부터는 붉은 깃발이 흰색 깃발로 바뀝니다)
성길로 들어서자 바로 성벽에 치(雉)가 나타났습니다. 남치입니다.
남치, 南雉
남치는 남포루와 팔달문 서쪽 남서적대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화성에는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남치는 서쪽 경사지에 만들었기 때문에 치성의 길이가 짧고 폭도 좁다.
서 3치와 마찬가지로 치성 안쪽에 돌로 담을 쌓고 출입구를 냈는데 이 구조는 적대와 비슷하다. 남치는 원형이 잘 남아 있다. - 현지 설명문 -
적대 - 성문 양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대.
남치를 지나자, 남쪽을 상징하는 붉은색 깃발이 서쪽을 상징하는 흰색 깃발로 바뀌었습니다.
서쪽 성벽에 있는 가파른 계단길.
회원들이 연식이 좀 되는 분들이라, 오르막에서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ㅋㅋㅋㅋㅋㅋ
우회전하여, 쉼터에서 무거운 별식을 먹고 가기로 했습니다.
가방에서 꺼낸 별식은
바로 국수입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이렇게 무거운 음식을 산까지 지고 오다니...
현장에서, 삶아온 국수에 고추장과 각종 양념을 넣어 비빈 후 고명까지 얹었습니다. 거기다가 단호박 찰밥까지 더했네요.
국수를 비비는 모습.
맛있어 보이죠.
14명이 먹기엔 버거울 만큼 많은 양입니다.
고명으로 준비해온 계란말이와 소고기.
단호박 찰밥.
모두가 다 감탄하며 맛있게 먹었습니다.
지나치던 등산객이 대박이라고 말할 정도로 정말 상상을 초월한 오찬이었습니다. 수고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식사 후 경대장님의 숲속 해설이 있었습니다. 포루에 대한 해설이었는데 바로 옆에 포루가 있네요.
화성에는 포루(砲樓) 5곳과 포루(舖樓) 5곳 합해서 10곳의 포루가 있는데....
포루(砲樓)와 포루(舖樓)의 구별 방법은 조금 있다가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도록 확실하게 갈켜드리겠습니다.ㅎㅎㅎ
남포루 南砲樓 / 1796년(정조 20) 창건, 1975년 누각 복원.
남포루는 팔달산의 남쪽 기슭 경사지에 지은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그중 남포루는 규모가 가장 작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포루 내부 높이가 균일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지형에 따라 각 층의 높이가 다르다.
남포루 1층은 1.7m, 2층은 1.25m로 만든 반면 누각이 있는 3층은 높이 3m 이상을 확보하였다. 남포루는 포루 중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다.
현지 설명문 -
3층의 남포루.
숲속의 강의실.
특식을 먹고 해설을 들은 후 홍난파 선생의 노래비를 지나 산성으로 오릅니다.
특식을 먹을 때 성 밖에서 보았던 남포루입니다. 밖에서 볼 때는 3층이었지만 안에서 보면 1층으로 보입니다.
포루(砲樓)는 화포를 쏘는 시설이고 포루(舖樓)는 치(雉) 위에 지은 누각으로 병사들이 감시를 하며 쉬는 곳입니다.
윤대환 회원님이 들고 갔는데, 세상에 화성을 한 바퀴 다 돌 때까지 쓰레기 버릴 곳이 없어 황당했습니다.
쓰레기를 도로 가져가라는 건, 이해가 되지만 평지 쉼터에는 쓰레기 버릴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남암문까지 올라왔습니다.
서남암문, 서남포사, 西南暗門, 西南舖舍 / 1796년(정조 20) 창건, 1975년 서남포사 복원.
서남암문은 화성 서남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화성의 5곳 암문 가운데 유일하게 문 위에 군사들이 머무는 포사(舖舍)를 세웠다.
이곳은 지형상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서 특별히 포사를 만들어 침입을 대비했다.
암문에는 화공에 대비하여 오성지도 설치하였다.
이름은 암문이지만 성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라 용도를 거쳐 서남각루(화양루)로 나가는 문이다. - 현지 설명문 -
오성지 -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물을 담는 통
서남암문의 용이 그려져 있는 천장화.
서남암문을 나와 용도에서 돌아본 서남암문입니다. 홍예 바로 위에 오성지(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물을 담는 통)가 보입니다.
서남암문에서 서남각루(화양루)까지 가는 길을 용도라고 합니다.
용도,甬道 / 1796년(정조 20) 창건, 1975년 복원
용도는 좁고 긴 성벽으로 둘러싸인 통로를 가리킨다. 이곳은 좌우 지형이 급경사를 이루면서도 우뚝 솟아 있어 남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만약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서남암문 밖으로 좁고 긴 성벽인 용도를 만들었다.
용도 중간에는 좌우에 치성을 하나씩 만들어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했다. 용도 끝에는 서남각루가 자리 잡고 있다. - 현지 설명문 -
치성 - 성곽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
용도 좌우에 하나씩 설치한 치성입니다.
서남각루,西南角樓(華陽樓) / 1796년(정조 20) 창건, 1975년 복원.
서남각루는 화성 서남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로 '화양루'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화성 축성 초기에는 서남각루를 만들 계획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곳은 남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로 만약 적에게 빼앗기면
공격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여 서남암문 밖으로 길게 용도를 내고 그 끝에 각루를 세웠다.
건물 전면은 장수가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벽돌을 깔았고, 후면은 바닥을 높이고 창문을 달아서 실내에서도 주변을 살필 수 있도록 했다.
조선 정조 21년(1797) 정월, 화성을 찾은 정조는 화양루에서 시작하여 성곽 일대를 두루 살폈다. - 현지 설명문 -
회장님과 쓰레기봉투. 화장실에도 매점에도 쓰레기통이 없습니다.
서포루,西舖樓 / 1796년(정조 20) 창건, 1975년 누각 복원
서포루는 서암문과 서 3치 사이에 있는 치성 위에 군사들이 머물 수 있도록 누각을 지은 시설이다.
치성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중 중요한
5곳의 치성 위에 동 1포루, 동 2포루, 서포루, 북포루, 동북포루를 만들고 적의 동향을 감시했다.
서포루는 서장대 쪽으로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동북포루와 형태가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포루 누각은 복원했으나 치성은 원형이 잘 남아 있다. - 현지 설명문 -
舖樓(포루)는 雉(치) 위에 지은 누각으로 성안에서 보면 지상에서 떠있지만, 砲樓(포루)는 지상과 붙어 있습니다.
효원의 종.
효원의 종각 앞에 있는 서암문입니다.
서암문, 西暗門 / 1796년(정조 20) 창건, 1975년 수리.
서암문은 화성 서쪽 팔달산 꼭대기 성벽에 설치한 비상 출입문이다. 암문이란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다.
서암문은 성벽을 안쪽으로 90도 꺾어 들어가도록 쌓고 그 사이에 문을 내 바깥에서 알아차리기 어렵다.
화공에 대비하기 위한 오성지나 적을 감시하기 위한 별도의 방어 시설을 두지 않고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살렸다. - 현지 설명문 -
서장대, 西將臺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자리 잡은 군사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
서장대는 시야가 트여 있어 멀리 용인 석성산 봉화와 현릉원 입구까지 한눈에 살필 수 있었다고 한다. 서장대는 아래층은 사면 3칸,
위층은 1칸으로 위로 가면서 좁아진 형태다. 아래층은 장수가 머물면서 군사 훈련을 지휘하고, 위층은 군사가 주변을 감시하는 용도로 썼다.
정조는 서장대에서 군사 훈련인 성조를 거행했는데 1795년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위층 처마 밑에 걸린 '화성장대'와 '시문' 현판은 모두 정조의 작품이다. 1795년 성조가 끝난 뒤 정조는
'화성장대' 현판의 글씨를 직접 쓰고 만족스럽고 기쁜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화성에서 유일하게 정조가 지은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산상 서성, 山上 西城.
산상 서성은 화성을 축성하면서 네 구간으로 나눈 성벽 가운데 팔달산을 낀 경사지에 쌓은 서쪽 성곽을 말한다.
서장대를 중심으로 팔달산 정상에서 남북으로 펼쳐지는 성벽 구간에 해당된다.
북쪽은 서 2치부터 화서문까지, 남쪽은 서암문부터 서남각루를 포함하여 남치 아래까지 모두 14개 시설물을 아우른다.
이 구간은 경사진 지형을 살려 여러 방어 시설을 배치한 점이 돋보인다. 서성 구간에서 눈여겨볼 시설은 서장대와 서남각루, 화서문이다.
팔달산 정상에 지은 서장대에 오르면 성 안팎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남암문 밖에 만들어 놓은 서남각루(화양루)에서 바라보는 주변 조망도 뛰어나다. 화서문은 창건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14개의 시설물은
남치, 남포루, 서남암문, 서남각루(화양루), 서삼치, 서포루, 서암문, 화성장대, 서노대, 서 2치, 서포루(砲樓), 서 1치, 서북각루, 화서문입니다.
화성장대에서 본 수원 시내.
정조의 어필인 화성장대 편액.
정조가 화성장대에서 군사 훈련을 지켜본 후 감회를 읊은 시 / 1795년 현판 제작, 2020년 복제
정조는 1795년 수원 행차 넷째 날인 윤 2월 12일에 서장대에 올라 장용영 외영 군사들의 훈련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튿날 새벽까지 실시된 군사 훈련을 참관한 후 정조는 군사들을 칭찬하고 견고하게 쌓은 화성 성곽에 대해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날의 훈련을 기념하고자 친히 시를 짓고, 이 시를 현판에 새겨 서장대에 걸도록 하였다.
본래 서장대 2층에 게시되어 있었으나 복제본은 1층에 두었다. 원본 현판은 국립고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장용영 외영(壯勇營外營) - 정조의 친위 군사조직 중 화성을 지키는 부대. - 현지 설명문 -
御製(어제) 임금이 짓다.
華城將臺(화성장대) 화성장대에서 친히
親閱城操(친열성조) 군사 훈련을 점검하고
有詩題于(우시제우) 지은 시를 문위에 걸다
楣上(미상)
拱護斯爲重(공호사위중) 현륭원 호위 중요하지만
經營不費勞(경영불비노) 세금과 노역 쓰지 않았네
城從平地廻(성종평지회) 성곽은 평지 따라 둘러있고
臺倚遠天高(대의원천고) 먼 하늘 기댄 장대는 높다랐구나
萬垛䂓模壯(만타규모장) 많은 성가퀴 구조 굳건하고
三軍意氣毫(삼군의기호) 군사들 의기 호기롭네
大風歌一奏(대풍가일주) 대풍가 한 곡조 연주함에
紅日在鱗袍(홍일재린포) 붉은 햇살이 갑옷을 비추는구나 - 현지 설명문 -
서노대, 西弩臺 / 1795년(정조 19) 창건, 1971년 복원.
서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로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있다.
서노대는 화성의 서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팔달산 꼭대기에 있어 적을 감시하기에 적합하다. 팔각형의 몸체가 위로 가면서 줄어드는
안정적인 형태로, 안에는 흙을 채우고 겉은 벽돌을 붙였으며 여덟 방향의 모서리는 돌로 깎아 마감하였다. - 현지 설명문 -
특식을 지고 남포루(南砲樓)까지 올라올 때 흘린 땀을 화성장대에서 닦는 배 교수님
서장대에서 화서문을 향해 내려가는 길입니다.
서이치,西二雉 / 1796년(정조 20) 창건, 1975년 수리.
서2치는 서포루와 서암문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서2치는 팔달산 정상으로 향하는 급한 경사지에 자리 잡고 있어 규모가 작다. 붉은빛을 띤 다양한 크기의 성돌이 잘 남아 있는데,
평지 성벽보다 규모가 큰 장방형 석재를 하부에 설치하여 하중을 지탱하도록 했다. - 현지 설명문 -
서이치 아래에 있는 서포루(西砲樓)입니다.
서포루(西砲樓) / 1796년(정조 20) 창건, 1975년 복원.
서포루는 팔달산 중턱에 설치한 화포를 갖춘 시설이다.
화성에는 동포루, 서포루, 남포루, 북동포루, 북서포루 5곳의 포루가 있는데 주변 지형 조건에 따라 크기를 달리했다.
서포루는 경사지에 지었기 때문에 평지에 설치한 북서포루와 북동포루보다 규모를 작게 만들고, 화포와 총을 쏘는 구멍의 숫자도 줄였다.
포루는 3층 구조로 아래 두 층에는 화포나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있고 상층에는 누각이 있다.
서포루 상부의 누각은 복원했으나 벽돌로 만든 하부에는 창건 당시의 모습이 일부 남아 있다. - 현지 설명문 -
서일치,西一雉 / 1796년(정조 20) 창건, 1975년 수리.
서1치는 서북각루와 서포루 사이에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이다.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했다.
성벽에 8곳, 용도에 2곳의 치성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형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치성은 보통 좌우 방어 시설과 100m 이상 거리를 두고 만들었으나, 서1치는 서북각루에서 약 55m 떨어진 지점에 있다.
화서문에서 뻗은 성벽이 팔달산 정상을 향해 크게 꺾이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치성을 가깝게 설치한 것이다. - 현지 설명문 -
서북각루,西北角樓 / 1796년(정조 20) 창건, 1975년 복원.
서북각루는 화성 서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다.
서북각루는 팔달산으로 오르는 경사지에서 성벽이 휘어진 곳에 자리 잡아 서북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층에는 군사들이 머무는 방에
온돌을 놓았고 위층은 마룻바닥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면에 널빤지 문을 달고 구멍을 내서 적을 감시했다. - 현지 설명문 -
서북각루의 굴뚝.
서북각루의 아궁이.
화서문으로 내려갑니다.
쓰레기봉투도 함께, 회장님과 윤선생님 답사 내내 수고하시네요.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옹성
옹성과 서북공심돈.
화서문, 華西門 / 1796년(정조 20) 창건, 보물
화서문은 화성의 서문이다. '화성의 서쪽'이란 뜻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서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화서문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세웠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화서문은 장안문과 팔달문에 비해 격을 낮추어 석축의 규모도 작고, 1층 문루에 팔작지붕 형태이다.
창건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18세기 건축기술을 보여준다. - 현지 설명문 -
쉼터
화서문의 천장 그림.
아직도 쓰레기와 이별하지 못했습니다. ㅋㅋㅋ
작성자 : 칠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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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 만족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