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믿을 수 없는 우리를 믿어 주시고 우리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공산주의는 믿고 맡기지 않습니다. 전부 국가가 잡고 개인에게 어떤 재산을 맡기지 않고 혜택을 차단시키며 자유를 완전히 차단시키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입니다. 공산주의는 감시체제입니다. 그냥 맡겨서 잘 하라고 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서로 경계하고 긴장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맡기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가 알아서 잘 하라”라고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서 교회를 맡겨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피 흘려 세워주신 교회를 맡게 된 것은 큰 복입니다. 성경에 있는 달란트 비유를 보면 다섯 달란트를 일정한 기간 동안 그냥 맡겼습니다. 맡겨서 잘 하면 기뻐하시고 또 더 맡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귀한 하나님의 나라 교회를 맡긴 것은 최대의 복이고 영광이고 행복입니다.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이라는 복음송이 있는데, 교회는 실로암입니다. 내 눈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곳, 이 실로암을 주님이 관리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맡겨 주셨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잘 되는 것도 맡기셨기에 잘 되는 것입니다. 안 맡긴 나라는 잘 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안됩니다. 안 맡긴 결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지금이라도 맡기기만 하면 잘 살게 됩니다. 중국은 안 맡겼다가 맡기니까 금방 잘 살게 되었습니다. 맡기면 잘사는데 맡기지 못하니까 공산주의 국가가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늘날까지 누룩처럼 계속해서 확장되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땅 끝까지 계속해서 확장될 수 있는 비결은 맡기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셔서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주의 종들로서 아름답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만들어야 할 엄청난 책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냥 다 맡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인이 기뻐하시고, 주인이 원하시는 교회로 잘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남에게 전가할 것 없이 내가 책임을 져야 하고 또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그 책임을 남에게 인계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잘 되는 것만큼 국가가 잘 되고, 교회가 교회의 책임을 다할 때 국민이 국민의 책임을 다하고, 얼마나 교회가 부흥하느냐, 교회가 바로 세워졌느냐에 따라 국가가 바로 세워지고 민족이 바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 나라의 운명은 교회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목회를 하느냐, 어떻게 성도를 돌보느냐에 따라서 이 민족의 장래와 세계의 앞날이 달려 있습니다.
제가 독립국가연합에 가서 교회 문을 닫으니까 모든 문이 닫히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자기 몫을 다하면 잘 될 것이고 교회 문을 닫으면 다른 문도 닫힐 것입니다. 교회가 쇠퇴하면 이 나라도 쇠퇴하고, 교회가 길을 잃어버리고 흔들리고 방황하면 이 나라 정치, 경제도 흔들릴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한국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오는 것이 교회에 어려움이 왔기 때문에 국가의 어려움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교회가 앞서가야 모두 따라오니 강단은 나라를 위하여 앞서가는 영적 길을 닦아야 합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교회를 최고의 교회로 만들어서 주님께 바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건축할 때 교회를 교회답게 사도행전의 교회로, 교회의 사명을 다하는 교회로 만드는 재료를 저는 기도와 말씀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개척하면서부터 이 두 가지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교회에 가득 차도록, 이 두 가지 때문에 교인들이 모이도록 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은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도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만 전무하기로 결심하고 모든 것을 집사님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우리가 넘겨주면 안 되는 것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그 외의 것은 안 넘겨주면 안 넘겨줄수록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데 지장이 많습니다. 기도와 말씀 외의 것에 관심, 마음, 시간을 빼앗기면 결국 에베소서 2장 22절에 말씀한 대로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교회는 지어져 가는데 우리가 짓는 일에 많은 손해와 낭비를 치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맡기시고 굉장한 기대를 갖고 계십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청지기이고, 사환이고, 종이기 때문에 이 땅의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날마다 보시고 기다리십니다.
삼성의 정원을 조경하는 일을 우리 교인 가운데 한 분이 하는데 회장님이 늘 와서 본답니다. 잘 하는지 못 하는지 늘 본답니다. 그것을 보고 흡족해 한답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가는 길은 형통하게 열리는 것입니다. 이분은 삼성에서 일을 하면서 삼성 회장이 원하는 대로 정원을 멋있게 꾸미니까 회장이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합니다. 공산주의는 있는 자와 없는 자를 하나로 만들어 없는 자로 통일시키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잘 하는 것으로 통일시켜서 잘 하는 자가 들어가는 천국은 있으되 못 하는 자가 들어가는 준 천국은 없습니다. 잘 하는 사람만 들어갑니다. 그래서 주님은 잘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것을 좋아하고 모든 일에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주님은 믿음이 좋아야 기뻐하십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커야 기뻐하시지 적으면 기뻐하지 않습니다. 충성해야 기뻐하고, 사랑해야 기뻐합니다. 잘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잘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자를 찾으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적지만 아름다운, 주님이 늘 오셔서 거니시는 교회를 만들 수 있도록 꿈과 계획과 목표를 갖고 목회를 해야 합니다.
사람은 참 이상합니다. 사업할 때 잘 된다 잘 된다 해야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주지 안 된다 하면 안 빌려 준답니다. 그래서 요사이 증권가에도 안 된다는 소문이 나기만 하면 회사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악성 루머가 무섭습니다. 실제로 잘 되고 있는데도 안 된다는 루머가 퍼지면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사업하는 분들은 남들에게 안 된다는 말을 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요즘 기가 막히게 잘 된다고, 이상하게 잘 된다고 해야 돈이 잘 들어오고 길이 열립니다.
목회자들도 모여서 안 된다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안 된다는 교회에 누가 가겠습니까? 된다는 데 가지, 안 된다는 데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는 참 잘 된다. 우리 교회는 참 좋다”라고 하면서 교인들 앞에서 행복한 표정을 지어야 교인들이 오지 목사가 불행해 보이는 곳에 뭐하러 갑니까? 목사가 울려고 하면 그렇지 않아도 괴로운데 더 울려고 가겠습니까? 우리가 웃어야 합니다. 우리가 된다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았다고 해야 합니다. 내가 기쁘다고 해야 합니다. 내가 성령 받았다는 이야기를 해야 성도들도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주식회사가 잘 됩니다.
목표를 세울 때 적당한 교회를 목표로 하면 안 됩니다. 적당히 목회할 생각은 말아야 합니다. 최고의 목회, 훌륭한 목회, 주님 마음에 드시는 목회, 주님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어 하는, 주님이 기뻐하는 목회를 하도록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목회자로 들어섰다는 것 자체로 자기 자신에 대한 욕심은 포기해야 합니다. 주인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는 것이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 영광에 참여해 남은 찌꺼기의 영광을 거두고, 주인이 타고 가시는 뒤차로 따라가서 주인과 함께 영화를 누리는 것이 우리입니다. 주인이 잘 되고, 주인이 기뻐하고, 주인이 수지맞도록 하고, 자신에게 수지맞는 일이 없어도 주인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것이 바로 종의 길입니다.
제 고향 친구 가운데 덕환이라고 하는 머슴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머슴과 친구가 되어 잘 지냈습니다. 덕환이는 옛날 이야기도 잘 하고, 노래도 잘 하고 참 재미있었습니다. 어떤 친구보다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덕환이 하고 밤에 자주 만나서 놀았습니다. 이 덕환이의 생활은 주인을 위한 생활입니다. 밤에도 나와 놀면서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위하여 밤에 꽈야 하는 만큼의 새끼를 갖고 와서 꼬고 잠깐 놉니다. 비가 와도 그 아이는 못 놉니다. 비올 때 하는 일이 따로 있습니다. 새벽에도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나와 함께 놀다가도 “덕환아!”하고 부르면 빨리 뛰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덕환이가 한 번도 찡그리는 것을 못보았습니다. 신경질 내면서, “아이고 이놈의 신세”하며 살았다면 머슴으로 하루인들 어떻게 살겠습니까? 평생 머슴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런 머슴을 누가 쓰겠습니까? 항상 순종 잘 하고, 기뻐하고, 주인이 잘 되는 것을 좋아하고, 주인의 농사가 잘 되는 것을 좋아해야지 주인 잘 되는 것을 싫어하면 누가 그 머슴을 쓰겠습니까? 그러니까 머슴은 자기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인이 잘 되어서 주인이 주는 것 가지고 먹고 사는 것이 머슴입니다. 덕환이는 얼마나 즐겁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주의 종, ‘둘로스’의 삶은 주인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좋아하고 주인의 넓은 밭의 곡식이 무르익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는 삶입니다. 내 것은 많은데 주인의 것은 없고, 내 밭은 곡식이 희어졌는데 주인의 밭은 쓸쓸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가톨릭 교회를 보면서 가톨릭 교회의 좋은 점은 신부나 수녀가 결혼을 안 하고 사례비도 얼마 안 받고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주의 종은 누가 주어서 먹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목회를 하면서 사례비에 대해서는 일단 자유로워야 합니다. 교회를 맡은 사람은 누가 주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먹고 살기 때문에 우리가 평생 먹고 사는 데 대해서는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 자유는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레위 지파에게 성막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시대에는 예수 안에서 새로 부름받은 레위 지파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같다고 고린도 전서 9장 12~14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 시대에 성전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었듯이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를 맡았다고 하는 것은 이미 먹을 것도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나 건강에 대해서 일절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회막의 비밀입니다.
교회의 비밀은 일하는 자는 걱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옛날에 보면 머슴들에게 먹는 것 하나는 마음껏 먹도록 줍니다. 그래서 머슴들 밥 주는 것을 보면 밥그릇 위까지 수북이 올라오도록 퍼서 줍니다. 오늘 우리가 열심히 일하면 밥그릇이 커질 줄로 믿습니다. 그런 염려는 일절 하지 않아야 교회가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녀들 걱정을 얼마나 합니까? 그러나 그 선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까이 오시는 주님의 손길을 우리가 많이 경험해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 여러 명의 부목사가 있는데 그 중에 머리를 잘 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은 교회에서 전세를 얻어주었는데 그 전세를 가지고 우리 모르게 집을 하나 샀습니다. 계약금을 지불하고 사 가지고 몇 억을 벌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 사람이 아무리 잘해도 “전세 전세” 이것이 머리에 떠오르고, “너는 전세 가지고 해먹었지?” 이것이 내 마음에 자리잡혀 있습니다. 그것을 나중에 다 돌려 받아도 자기 머리로 몇 억을 벌었다는 것 때문에 내 눈에 걸린 것입니다. 그래서 보고하러 올라와도 ‘전세 가지고…’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너무 돌려치기를 하면 주님이 볼 때 내가 아무리 목회를 잘 한다 해도 “너는 전세 가지고…”라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종으로서 주님을 위해 살면서 주님 앞에서 깨끗하게 주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가는 즐거움, 이 영광이 축복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잘 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주신 이 교회에 대해 우리가 참으로 주인 앞에 내어놓을 수 있는 교회로, 주인이 최고로 기뻐하는 교회로 목표를 정해서 나아가면 우리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꿈을 많이 가졌습니다. 목회가 안 될 때도 꿈은 꿀 수 있으니까 늘 꿈을 꾸어야 합니다. 제가 “실로암”이라는 찬양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노래 가사 중에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 목회자가 새벽을 찾아 떠나는데 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아직까지 새벽이 안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저의 삶이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은 기도하면 응답도 빨리 오는데 내 기도에는 응답이 안 옵니다. 다른 사람은 빨리도 목회에 성공하는 데 나는 왜 이렇게 밤이 깊고 새벽이 안 오는 것입니까? 그래서 저는 새벽이 안 와도 늦은 새벽을 기다리면서 계속 목회에 대한 꿈을 가졌습니다. 확실히 꿈은 꾼대로 됩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구상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밀어주시고 도와주십니다.
저는 저녁 예배나 낮 예배나 새벽 예배나 일년 365일 모든 예배 때마다 항상 성도들이 꽉 차게 모여야 한다는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주일날만 교회에 왔다가 가고 교회 문이 닫혀 있으면 안 됩니다. 교인들은 항상 교회에 소망을 갖고 찾아와야 합니다. 저는 그런 목회를 꿈꿨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도 보통 한 번밖에 안 모이는데도 저희교회는 1년 사시사철 4부입니다. 4, 5, 6, 7시까지 계속 교인들이 움직입니다. 교회 문은 닫혀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한 주간 동안 어떤 예배실도 비어 있지 않습니다. 계속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시끄럽습니다.
저녁 예배 때도 빈 자리가 없습니다. 조금만 늦으면 본당에 못 들어옵니다. 저희 본당이 4천 석인데 지하 1, 2층까지 앉을 자리가 없도록 가득 찹니다. 교회는 이런 꿈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많이 모여야 합니다. 많이 찾아와야 합니다. 교회는 부흥해야 합니다. 여기에 맞는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야구하는 분이 아무리 자기가 야구를 잘 한다 해도 잘 안 된다 싶으면 그 안 되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되는 것만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맞아도 안 되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맞는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도 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웃는 것 하나도 징그럽게 웃으면 부흥이 안 됩니다. 매력적으로 웃어야 부흥되고 몸서리나게 웃으면 쳐다볼 생각을 안 하게 됩니다. 의복 하나까지라도 성장과 관계된다면 우리는 그 방법을 빨리 선택해야 합니다.
수영 선수는 1등을 하기 위해서 머리도 깎고 몸에 있는 털도 민답니다. 0.001초라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0.001초라도 단축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데 한 영혼을 건지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합니다. 교인을 기르다가 조금 속상하다고 할 말 다 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자식 기를 때도 모든 것을 참아야 합니다. 교인도 어린아이 기르듯이 오줌 똥 가려내고 오래오래 참아서 양육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을 몇 백 년 걸려서 길러냈으니 우리도 조급한 마음으로 교회 성장이나 부흥을 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신약에는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 말씀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말씀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 말씀이 왜 귀합니까?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 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말씀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아들이 전해지고, 아들의 생명이 전달되고, 아들의 은혜가 듣는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교회라는 운동장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이는 곳이고,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세워졌고, 또 우리는 말씀을 전함으로써 삽니다.
기도와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이 두 가지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우리 인간은 그 말씀을 듣고, 말씀을 들음으로써 우리 인간은 복을 받습니다. 말씀은 위에서 시작하여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이고 기도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갑니다. 야곱의 사닥다리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했듯이 말씀은 위에서 내려오고 기도는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의 종들을 통하여, 예언자들을 통하여 전할 때 그 말씀을 듣는 우리는 복을 받습니다. 또한 우리 인간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 이야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듣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듣고, 서로 하고 듣고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상행선과 하행선, 이것이 왕복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두 가지 왕복만 잘 되면 이 도로를 통해서 엄청난 말씀이 주어지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의 거래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기도 시간을 만들어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전해서 “새벽기도는 말씀의 잔치다” 이렇게 온 성도들이 말씀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에스겔은 앞으로 세워질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한 교회에서 말씀을 통하여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교회를 통하여 말씀과 기도의 교회를 만들면, 교회라는 운동장을 이 두 가지로 풍성하게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이 민족의 앞날에 임할 것이고 우리를 통하여 세계 위에 크게 임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설교를 짧게 하려고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설교 시간이 짧으면 안 됩니다. 설교를 길게 해야 됩니다. 저는 저녁 예배 때 보통 2시간을 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물밀 듯이 밀려 옵니다. 길게 하면 몸서리가 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짧게 하면 몸서리가 납니다. 사랑할수록 시간이 긴 것이 좋고 좋을 수록 오래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귀한 말씀을 우리가 짧게 한다면 바로 전달해야 할 것을 충분히 다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도취하고, 말씀에 은혜 받고, 말씀을 많이 듣고, 많이 배우고, 많이 외우고, 많이 묵상하고, 말씀을 통하여 감격해서 많이 울고, 내가 운 것을 전해 주고서 울게 하고 내 뜨거운 것을 전해 주어서 뜨겁게 하고 내가 받은 감사를 전해서 감사하게 하고, 내가 발견한 놀라운 진리로 교인들로 깜짝 놀라게 해서 정말 말씀이 가지고 있는 어마어마한 위력과 능력을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생에 듣던 말씀 평생에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려주시오.” 이 말씀에는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자꾸 들려달라고 해야지 “그만 하시오”해서는 안 됩니다. “너무 깁니다. 지루합니다” 해서는 안 되고 맛을 봐가지고 “또 들려주시오. 또 들려주시오. 평생 들려주시오”해야 합니다.
두 가지 은사가 있는데, 목회자에게 주신 은사는 전하는 은사이고 교인에게는 듣는 은사가 있습니다. 평생 듣는 것이 팔자입니다. 듣는 데 싫증내면 그것은 교인으로서 길이 막힙니다. 30년 들어도 처음 들은 것같이 생각해야지 “30년 들었다. 20년 들었다”하면서 졸기만 한다면 문제가 많습니다. 교인은 평생 들어도 또 듣고 싶고 처음 듣는 것같이 듣는 데 미쳐야 교인으로 길이 열리게 됩니다.
교인에게 전하는 것을 가르치면 안 됩니다. 항상 가만히 앉아서 듣도록 해야지 거기에서 다른 어떤 유혹을 받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교인에게는 불행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항상 전함으로 행복하고, 전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신나고, 강단에 올라가면 춤을 추고, 전체를 사로잡을 수 있는 말씀의 배우가 되어야 됩니다. 말씀 전하는 시간이 오면 말씀으로 입을 다물게 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강단이 운동장입니다. 강단에 서면 하나님의 말씀이 소낙비와 같이 내려오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가정에는 음식을 장만하는 아내가 있으며 먹어주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똑같이 행복합니다. 부인은 음식을 장만하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부엌에 들어가는 것이 싫어 “내 팔자야”한다면 부인으로서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과 비교하면 어머니 역할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음식을 만들 때 요리하는 자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는데 자기 입에 맞아야 교인들 입에도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맛을 보고 맛본 것을 확인하고 맛이 좋다고 생각될 때 주어야 합니다. 맛보기 위해서 맛보고 소금치고, 맛보고 조미료치고, 맛보고 고춧가루 넣고 해서 간을 맞추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언제나 교인들에게 말씀을 내놓아서 기쁘고 즐겁게 먹을 수 있도록 우리가 말씀을 상황에 맞추어서 전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거 진짜니까 이대로 먹으라고 하면 못 먹습니다. 잘 먹도록 맛을 봐가면서 요리를 해야 합니다. 저는 서울에 와서 음식이 맛 없는 이유를 어디에서 찾았느냐 하면 너무 영양만 따져 만드는 것에서 찾았습니다. 우리 고향에서는 꽁치 찜을 하더라도 꽁치는 한 마리 넣고 나물과 무를 솥에 넣고 그 위에 고기는 조금 넣고, 닭을 한 마리 잡으면 우리집만 먹는 것이 아니라 대여섯 집이 같이 먹을 정도로 끓이는데 여기서는 닭 한 마리만 갖다 놓고 먹으니까 맛이 없습니다. 설교는 심심하게 해야 맛있습니다. 닭고기만 한 상 가져다 놓으면 못 먹습니다. 꽁치만 갖다가 쌓아 놓으면 꽁치에 몸서리가 납니다. 꽁치는 조금 맛보도록 해야 맛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리를 잘 만들어야 또 와서 먹고 싶고 또 와서 먹고 싶지 첫 번에 몸서리를 치는데 어떻게 또 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전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늘 알아야 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좋은 식당을 운영하려면 다른 좋은 식당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좋은 설교자가 되려면 좋은 설교자를 찾아다니면서 여름 한 달 동안은 순회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다니면서 심심한 설교를 들어봐야 됩니다. 부흥하는 교회는 말씀의 진액을 주지 않습니다. 설교학적으로 보면 한심합니다. 그런데 부흥합니다. 우리가 굉장히 ‘학적’으로 한다고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몸서리를 치는 것입니다. 예배를 잔치같이 만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커도 몇 년 안에 얼마든지 훌륭한 교인으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꾸준히 먹이면 교인은 자라납니다.
구약의 배경 어디에서 교회를 볼 수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부터 택하셔서 시내산에서부터 하나님과 관계가 시작되는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시내산에서부터 두 가지 길이 열립니다. 하나는 율법, 하나는 성소, 성막입니다. 시내산에서부터 계속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은 시내산이 이어집니다. 오늘의 회당도 계속 말씀을 배우는 곳입니다.
저희 교회 부목사 아들이 히브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하나는 3학년이고 하나는 1학년인데 지난 번에 온 식구가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너 학교에서 뭐 배우냐?” 그러니까 “창세기 배워요”라고 그럽니다. 초등학교에서 창세기를 배우고, 대학 졸업할 때까지 성경을 안 배우는 날은 하루도 없습니다. 학교가 시내산입니다. 말씀을 귀히 여깁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나라에서 인물이 안 나오는 것은 시내산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시내산으로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늘 들어도 자꾸 듣고 싶어져야 되는데 오늘 우리의 시내산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나라가 없어져도 말씀은 계속 있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는 계속 있었습니다.
그 다음은 회막입니다. 회막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곳입니다. 제사 지낸 다음에 기도하는 곳입니다. 제사 지내고 난 다음에는 성소에서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잘사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지혜롭습니다.
교회는 이 두 가지 나무를 길러서 선교도 하고, 봉사도 하고, 구제도 하고, 사회 사업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두 가지 나무, 기도와 말씀 증거만 집중적으로 잘 하면 다른 것은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모이면 기도하고, 모이면 성경 말씀 듣고, 말씀 좋아하고, 그래서 말씀 읽기 운동을 하고 말씀 쓰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일천 번제를 만들어 가지고 전 교인들에게 일천일새벽기도, 성경쓰기, 자녀들에게 성경 써서 물려주기 운동을 합니다. 그래서 삼형제면 세 번 적어야 되고 오형제면 다섯 번 적어야 됩니다. 성경을 많이 적습니다. 성경 읽고, 쓰고, 듣고, 묵상하고, 성경 말씀 보고 집에도 성경 걸어놓고 유대인들과 같이 걸어가면서도 말씀 생각하고 항상 말씀을 위에 놓고 말씀을 최고로 생각하고 말씀 따라가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온 우주 세계가 다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개혁한 목표는 “오직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높이 올려야 됩니다. 다른 것을 높여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 높이는 설교를 하면 안 됩니다. 예화라도 “내가 어느 대통령 만나고 왔는데…”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말씀을 높여야지 대통령을 왜 높입니까? 절대로 다른 것은 높이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만 높여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최고로 높여야 합니다. 목사는 다른 데 취미가 있으면 안 됩니다.
저한테 어떤 운동을 하느냐고 묻는데 저는 탁구를 조금 좋아합니다. 한 주일에 몇 번씩 시간 나는 대로 하는데 다른 운동은 하지 않습니다. 목사에게 가장 맞는 운동은 탁구라는 생각을 합니다. 첫째는 돈이 안 듭니다. 둘째는 운동 가운데 공간을 가장 적게 차지합니다. 농구도 넓고, 배구도 넓고, 골프도 넓고, 볼링도 넓은데 탁구대는 어디든지 설치해서 할 수 있으니까 공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또 탁구는 온몸 운동이고, 공이 땅에 떨어지면 주워야 하니까 겸손해집니다. 부목사와 같이 해도 땅에 떨어지면 저쪽에 가서도 주워와야 되니까 종의 자세로는 탁구가 맞습니다. 그래서 탁구가 목회자에게는 여러 가지로 참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외에는 우리가 취미를 들일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귀한 말씀을 주셔서 강단에 서는 것이 취미이지 다른 취미가 뭐 필요합니까? 강단에 올라가면 수만 명이 모여드니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이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데 다른 취미를 갖겠습니까?
등산 붐이 일어나서 산을 너무 좋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산을 너무 좋아해서 우리 나라 산만 해도 대단한데 외국의 산까지 올라가서 얼마나 많은 분들이 산에 올라가다 죽는지 모릅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배 한 분도 아들이 서울대학교 4학년 학생이었는데 여름에 설악산에 올라가다가 추락해서 죽었습니다. 산에 올라가다가 많이 죽습니다. 올라가기 위해서 돈이 얼마나 많이 듭니까? 너무 산을 높이 보기 때문입니다. 산을 대단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산을 너무 아름답게 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뭐하려고 그렇게 산을 아름답게 봅니까?
저희 어머니는 제가 어렸을 때 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 뭐하려고 그렇게 산을 자꾸 쳐다보고 올라갑니까? 산은 아름다운 말씀의 산, 교회라는 성산을 높이 보고 다른 것은 낮추어 봐야 합니다. 목회자들은 신문에 나오는 기사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뭐 대단한 것입니까? 그것은 낮추어 볼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수석을 귀하게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수석을 주우러 다닙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수석으로 보여 잘 생겼나 못 생겼나 살펴봅니다. 앉아 있는 김 장로가 검은 수석으로 보이고 권사님은 흰 수석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수석 주우러 자꾸 다녀보십시오. 그렇게 안 보이겠습니까?
어떤 분은 난을 아름답게 봅니다. 난 하나에 1억 3천만 원씩 하는 것도 있다는데 그것이 뭐가 그리 귀합니까? 목회자는 다 시시하게 봐야 말씀의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그것 가지고 먹고 사는 것도 아니요, 그것 가지고 천국 가는 것도 아닙니다. 못 갑니다. 등산했다고 하나님께 상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 상 받을 일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함으로 교회가 잘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에만 전무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구약은 율법과 예언인데 대체로 책망의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신약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 되어서 책망하는 말씀이 아니고 죽음에서 살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할 때마다 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수십 년 전에 한경직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설교를 들으면 안 믿는 사람이 회개하고 그날 구원함을 받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일 설교는 꼭 전도 설교를 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목회에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생명을 주는 설교, 많은 사람이 살아나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낮 설교를 준비할 때는 처음 나오는 분들도 다 은혜받을 수 있도록 회개하고, 죄사함 받고, 성령 받고, 구원함을 받을 수 있도록 말씀을 준비해야 합니다. 신약의 복음은 은혜의 말씀입니다. 저주가 아니고 책망하는 것보다는 예수를 믿음으로 새로워지고 새로운 아브라함의 조상이 되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는”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저는 새벽기도를 하면서 새벽기도라는 채널을 말씀으로 채웠습니다. 예를 들어 9월에 새벽기도를 하면 어떤 한 주제를 가지고 적어도 그 한 주제에 대해서는 교인들이 풍성한, 신학적으로 한 과목을 마스터할 정도로 그 분야는 다 채워줍니다. 주제가 아브라함이라면 한 달 동안 그 주제에 대해서 풍성하게 교인들이 잠기도록 아브라함을 전해 줍니다. 야곱을 해주고, 기독론을 해주고, 성령론을 해주어서 그 한 달은 완전히 그 주제를 가지고 계속 이어져나가서 말씀으로 은혜를 받도록, 그 말씀에 기초해서 기도의 문이 열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기도 운동을 많이 해도 시험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기도 조금만 하면 마귀에게 걸리는 일도 참 많습니다. 오늘날까지 기도 운동을 일으키면서도 이단의 유혹을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기초가 되니까 여러 이단들이 생겨나도 교인들이 하나도 안 움직입니다. 주변에 많은 이단들이 와서 유혹해도 전혀 움직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 듣고 기도하고, 받고 올리고 하니까 기도한 것이 응답으로 내려오는 경험하고 이것이 계속 드나들면서 교인들의 삶이 만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교인을 다 이끌고 가려고 하면 큰 교회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이 나를 믿고 맡기듯이 저도 다 믿고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말씀과 기도하는 일만 전심전력하고 교인들에게 다 맡기는 것입니다. 분야별로 다 맡깁니다. 부목사들에게도 한 교구씩 다 맡깁니다. 저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서 이 교회를 앞에서 이끌고 갑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교인들이 다 목사에게로 나오게 하는 것은 교회 성장에 지장이 많습니다. 뒤에서 조금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가만히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맡기는 것입니다. 다 잘 하는 교인이 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말고 목회해야 합니다. 뒤에서 말썽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맡은 분들이 책임이 있기 때문에 내가 열심을 다하듯이 그 맡은 분도 열심히 잘해주어서 교회가 잘 될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새벽기도 하면서 국내 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까지 새벽기도 운동이 많이 전해져서 새벽기도가 안 된다는 나라들도 이제는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필리핀에 있는 분이 우리 교회에 다녀가면서 새벽기도를 배워가지고 가서 가톨릭 국가에서 교인이 만 명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가 새벽기도 때문에 성장했다고 해서 저희들이 모셔다가 부흥회를 한 일도 있었습니다. 새벽기도 하면, 새벽을 모으면, 새벽에 일어나면,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말씀 들으면 교회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농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네 곳의 농촌 교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제일 어려운 교회를 맡아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말씀만 잘 전하면 농촌 교회에서도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농촌에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어디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에 집중하면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명성교회를 개척한 지 금년 7월 6일로 17년이 됩니다. 장로교회로서는 저희교회가 큰 교회라고 그러는데 저는 저희 교회가 제일 큰지는 잘 모르지만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주신 것만은 확실합니다. 숫자적으로는 제일 많이 모일지도 모릅니다. 예산도 제일 많을지 모릅니다. 장로교에서는 하나님이 기적을 주셨습니다. 보잘것없는 저 같은 사람이 17년 전에 개척을 해가지고 목회하면서 느낀 것인데 자신의 부족함을 너무 감추려고도 하지 말고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내 할 일만 다 해서 교회만 바로 일으키려고 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조그만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에디슨은 초등학교를 석 달밖에 못 다니고 학교에서 퇴학 맞았지만 발명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링컨 역시 아무것도 없는데도 인류 역사에 최고의 정치가가 되고 위인이 되었습니다. 루스벨트는 소아마비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이나 대통령을 역임했습니다. 파스칼은 어머니, 아버지가 다 돌아가신 고아 출신인데도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토벤은 귀가 멀어가지고 소리가 안 들려도 훌륭한 작품을 얼마든지 작곡할 수 있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 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까 못한 일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음성이 좋지 않다고 하는데 말씀만 잘 전하면 그 노래가 꾀꼬리 음같이 들립니다. 음성에 대한 핸디캡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넬슨이나 나폴레옹은 키가 작았지만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습니까?
좋은 신학대학교 못 나온 것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고, 말씀 열심히 바로 전하면 교회는 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되면 나도 되고, 민족도 되고, 우리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교회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첫댓글 믿음에 길에서 더욱 담대히 믿음으로 인도하는 귀한 말씀이지요 항상 귀한 종의 사역 잘 감다하시니 주의 은혜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