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한족(漢族)의 기원과 뿌리
중국이라는 국명은
중국 신해혁명( 1911-1912) 이후 부터 사용한 이름이다
그전에는
지나국으로 불리워졌다.
차이나는 지나의 서양식 발음이다.
지나는 변방이라는 뜻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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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中國)을 영어로 표기하면 China(支那)이다.
‘가지 지(支) + 나라 이름 나(那)’ 즉 ‘곁가지 나라’라는 뜻이다.
과거에는 중국을 지나(支那)라고 불렀고,
China는 '변방의 나라' 라는 뜻이다.
원래 중국(中國)이란 말은 ‘가운데(中) 나라(國)’ 라는 뜻인데,
동양의 과거 중국. 한국. 일본 등의 어느 지도(地圖)에도
중국해(中國海)란 표기는 없다.
단지 동지나해(東支那海), 남지나해(南支那海)라고 표기되어 사용했었다.
지나(支那)란 뜻은 ‘따로 세운 나라’ 라는 뜻이며,
지점(支店) 혹은 지사(支社)과 같은 말이다.
세종대왕(1397-1450)의 훈민정음 언해본(諺解本)을 보면,
중국은 황제 계신 나라로 우리가 늘 이야기하던 강남(江南)이니라.’ 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중국이란 이름이 생기기 전에는
그곳은 우리에게 늘 곁가지인 강남(江南)이었을 뿐이다.
그러면 중심이 되는 본국은 어디인가?
예전에는 동이족(東夷族)이 본국(本國)이고,
한족(漢族)이 지나(支那)였다.
현재 중국(中國)측의 사전(辭典)을 찾아보면,
“중국(中國)이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중원(中原. 황하강 중부)
즉 나라의 한 가운데, 천하(天下)의 중심지(中心地)이며,
중국(中國)이란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서 나라 이름으로 사용치 못하도록
신해 혁명(1911-1912) 이후에 나라 이름으로 처음 사용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中國)은 신해혁명(辛亥革命) 당시 쑨원(孫文손문)이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으로 나라 이름을 제정한 것을 줄여서 중국(中國)이라 불렀다.
즉 중국(中國)이란 국호(國號)는 신해 혁명(1911-1912) 이후에 최초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중국(中國)이란 호칭은 과거 중국 기록에 여러 번 언급되었다.
맹자(孟子)의 진양북학우중국(陳良北學于中國)
혹은 목천자전(穆天子傳)의 수우중국(樹于中國) 등에 기록된
중국(中國)이라는 글자는
그 나라 내에서 임금이 있는 가운데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중원(中原)은 황하(黃河)강 중부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결국, 오늘날 쓰이는 중국(中國)이라고 호칭은
중화 인민 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과거에는 왜 중국(中國)을 한자로 ‘지나(支那)’
영어로 ‘China’ 라고 호칭했을까?
중국 민족은 한족(漢族)이 근간을 이룬다.
한족(漢族)의 기원과 뿌리는 화하족(華夏族)인데,
화하족(華夏族)은 남방(南方) 타이족(傣族태족.다이족)의 방계(傍系)이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잡아 먹고 주로 육식을 하였으며 행동이 문란(紊亂)하고 자유스러웠다.
또한 어린 아이가 칭얼거리는 듯한 발음의 언어를 구사했다.
화하족(華夏族)이라는 명칭은
춘추전국시대(春秋時代)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화하(華夏)가 민족(民族)의 명칭으로 처음으로 기재되었다
진(秦. BC 221-206)의 진시황(秦始皇)이
춘추전국시대(春秋時代)를 마감하고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을 불완전 통일하면서
화하족(華夏族)은
부단히 사위(四圍)의 여러 족속과 혼혈(混血) 융합하는 과정을 밟아 성장 발전을 하였다.
그 이후, 한(漢. BC202-AD220)의 유방(劉邦)이
중국 대륙을 최초로 완전 통일하면서 드디어 한족(漢族)이 형성되었다.
이 말은 거꾸로 뒤집어 말한다면 한(漢)의 유방(劉邦) 이전에는
한족(漢族)이 없었다는 것이 된다.
황하(黃河)강 유역 일대를 터전으로 한족(漢族)은
유사 이후에도 끊임없이 사이(四夷)
즉 동이(東夷). 남만(南蠻). 북적(北狄). 서융(西戎)과 충돌 교섭하는 사이에
그들을 흡수하고 동화시켜 민족적으로 발전 팽창의 과정을 밟았다
한족(漢族)의 뿌리인 화하족(華夏族)은
동남 아시아 지역에서 북상하여 황하(黃河)강 중류 지역을 중심으로
독특한 문화를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북방 동이족(東夷族)과 문화 양식이 다르다.
예컨대 동이족(東夷族)이 온돌 문화라면 화하족(華夏族)은 침대 문화이다
중국 사람들 중에 온돌(구들장)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조선족(朝鮮族)일 가능성이 크다.
화하족(華夏族)은 그들이 동남 아시아 지역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말과 언어를 알타이어족(Altay language)이 아닌 남방 계통의
티벳어(Tibet language) 계통의 한장어(漢藏語)를 사용한다.
그들은 동일한 황인종들임에도 불구하고
북방 알타이어족들과 다른 유럽 언어 구조와 동일한 남방계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화하족(華夏族)의 활동 무대는 주로 중국 중부 및 남부 지역이었고,
동이족(東夷族)의 활동 무대는 중국 북부 지역이었다.
동이(東夷)는 말을 타고 활을 잘 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인데,
동쪽(東)에서 큰 활(大弓)을 메고 다니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동이족(東夷族)은 황하(黃河)강 이남 유역은 절대 들어가지 않았다.
특히 양자강(揚子江) 지역은 쌀을 수경 재배 2모작 하는 지역으로
수전(水戰)에 익숙지 못한 기마병(騎馬兵)들이 쳐들어 왔다가
진흙탕에 빠져 엄청 고생을 겪곤 했다.
그래서, 몽골 원(元)나라 이전의 이민족 정복 왕조들은
중국 북부 지역만을 차지하고 만족했다.
중국 최초의 청동기(靑銅器) 문명이
하(夏. BC 2,205-1,766) 나라부터 시작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청구(靑丘) 배달(倍達)의 치우 천황(蚩尤, BC 2,707년 즉위)이 개척한
청동기(靑銅器) 문화가 중국으로 전해져
하(夏. BC 2,205-1,766)의 청동기 유적을 낳았고
하(夏) 다음으로
은(殷. BC 1,600-1,046).
주(周. BC 1,046-771)로 전해졌다.
중국의 하(夏). 은(殷). 주(周)의 문명은 알고 보면,
동방의 배달국(BC 3,897-2,333)과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에서 전파된 것이다.
그래서, 하(夏). 은(殷). 주(周) 시대까지만 해도
중국 지역은 동이족(東夷族)이 나라를 세웠고
동이족(東夷族)이 지배했기 때문에 동이족(東夷族)의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時代)에 공자(孔子)는
논어(論語)에서 항상 이상적인 인간 즉 군자(君子)가 되어야 한다고 늘 설파하면서
구이(九夷=동이東夷. 고대 한국)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고,
고인(古人. 동이족)에게서 배운다고 했다.
고대 중국의 전통은 동이족(東夷族)의 전통과 대부분 같았다.
하지만, 진(秦. BC 221-206). 한(漢. BC202-AD220)을 거치면서
미개한 화하족(華夏族)이 대거 유입되면서
고대한국에서 건너간 고유 전통이 대부분 무너져 버렸다.
대만(Taiwan) 대학의 서량지(徐亮之)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BC 2,000년경 한족(漢族)의 뿌리인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황하(黃河)강 및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동이족(東夷族)이 경영하고 있었다.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라고 하였다.
지금 중국인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漢族)의 뿌리 조상들은
동이족(東夷族)이 지배한 이후에야
겨우 중국 땅으로 들어온 것이며,
그들이 중국으로 들어올 무렵에는
이미 배달(倍達. BC 3,898-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명이
만주(滿洲) 일대에 찬란하게 꽃을 피우고 있을 때이다.
러시아(Rusia)의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Shirokogoroff)는
중국사(中國史)에서 "BC 3,000년경 동이족(東夷族)은
이미 황하(黃河)강의 중류와 하류에 살았으며,
지나(支那)족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 천자 배달(倍達)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東夷族)의 나라인
강회(江淮) 지방에 진출하였다" 고 주장했다.
중국(中國) 란저우(蘭州) 대학 생명 과학원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한족(漢族)과 소수 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는데,
13억 중국인 가운데 92%를 차지하고 있다는 한족(漢族)은
실제 조사 결과 유전학적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라고 2007년 02월 13일 발표했다.
한족(漢族)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서양(西洋)의 개념으로서 민족(民族)이란 언어, 생활 양식,
심리적 습관, 문화, 역사 등을 같이 하는 인간 집단을 가리킨다.
그러나, 한족(漢族)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지역에 따라
그 심리적 습관이나 문화, 생활 양식 뿐만 아니라
언어 자체도 다양하고 서로 틀리기 때문에
민족이라는 범주에 넣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한족(漢族)이 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민족으로서 성장 발전해 왔다면
그 또한 민족이라 할 수가 있다고 규정한다.
그래서, 한족(漢族)은 이미 혈통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인 개념이다.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
첫댓글 중국 상대는 동이계열이 지배를 하고, 춘추전국을 지나
진시황이 통일을 이룹니다.
그는 훈족으로 보기도 하나 용갱의 신하나 병사들이 상투를
틉니다.
상투는 동이계열의 유습입니다.
민중은 동이계열 지배계급이 최초로 방계로 넘어가는 사변이지요.
한의 유방은 선비족입니다.
선비족은 흉노의 북쪽지역에 분거했지요.
당조도 선비족입니다.
송 조광윤은 미상?
원은 몽고, 요는 거란, 금은 여진, 명의 주원장은 조선인, 청은 여진,
중국은 유목민족이 지배한 나라지요.
몽고, 흉노, 선비, 거란은 단군조선의 위성국이었습니다.
여진 숙신은 단군조선의 후예들입니다.
중국 민족구성에서 북방계열이 대부분이며 하화족은
세계를 통틀어 5천만 정도로 봅니다.
이들을 중국 민족의 기원으로 봅니다.
하화족이 중국을 지배한 사례가 없지요.
중국 곧 해체되면 상당 지역이 우리쪽으로 흡수가 될 듯.
@태허루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3~4세기 유럽을 벌벌떨게 만들고,
로마를 멸망시키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훈족의 아틸라왕이
고구려 후손이라고 하더군요.
이탈리아 어원이 아틸라에서 유래했다고 하더군요.
현재 루마니아 불가리아에 아틸라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함.
드라큐리가 아틸라왕을 가리킨다는 말이 있더군요.
문제가 많은 글이네요.
잠자코 그냥 넘어가기가 힘이 들어 한 줄 남깁니다.
한 무제, 동중서, 사마천.
이 세 사람이 힘을 합쳐
한웅 천황과
자오지 천황의 역사를 지워버리는 지우개였음을 모르니
이와같은 글이 나옵니다.
한 무제의 <추풍사>.
동중서의 저작들.
사마천의 <사기>.
보통 인물들이 아닙니다.
이 세 사람이 구축한 거짓의 도깨비 빤스를 벗겨버려야 됩니다.
권력이 뒷바침해주니
동중서가 천인감응설로 사람을 꼬드기고,
쓰마치엔은 아시아 역사를 삼황오제부터 기술합니다.
그 이전은 신화 또는 전설의 영역으로 몰아 넣어버리지요.
역사에는 혼이 있는데
역사를 모르면 우리의 미래를 무슨 비젼으로 개척할 수 있을까요
본문은 한족의 유래에 대해 설명한건데 문제가 있는지요.
한족은 중국을 지배한게 아니라,
한나라 이후에 나타난 소수민족이라는 말이 되겠지요.
그전에는 환인.환웅이 임긍인 동이족이 중국을 지배..
지금 중국도 50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
실제 한족은 소수인데,
한족의 대우가 좋으니까 한족으로 속이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요.
한족이 세운나라는,
진.한.당.송,명나라 뿐이라고 하더군요.
물론 그 이전에 한반도에 우리민족이 살고 있었지요.
15.000년전 청원군 소도리에서 볍씨를 재배해서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 증명
소도리 볍씨 ----검색
(세계 최초의 재배볍씨로 판명)
@우전 네~~~
감사합니다.
진, 한, 당, 송, 명.
이 모두 다같이
창건자들은 우리 겨레의 일파라고 봅니다만....
꼭 거기 가봐야 아는 게 아니고
한웅 천황 하나만 잡고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어요.
제가 현재 우리 배달겨레의 역사를 타이핑 중인데 조만간 마무리되는 대로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화하족의 기원, 한족의 기원에 관한 부분은 저도 한 수 배웠음을 알려드립니다.
싸움(용봉쟁투, 화하와 동이의 전쟁)은 자오지 천황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더군요.
그러면서 뒤섞여 버려
도무지 알 수 없이 헷갈리게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6천년간의 이합집산에서 수 많은 방계가 흘러나와요.
@알타이 황제헌원과 치우천황이 이복형제란 말이 있더군요.
그럼 둘다 동이족이라는 말이겟지요.
@우전 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좋은책을 추천해주어 감사합니다.
지나라는 명칭은 진나라가 중국을 최초 통일후 서방에 이름이전해지는과정에서 진-친-지나로 불리웠다는게 정설로 알고있읍니다만, 우리나라도 고려시대 서방에 알려져 고려가코리아로 불리워진거 아닌가합니다
조선은 3조선체계입니다.
하얼빈)을 중심으로한 진 조선, 탕지보를 중심으로한 번조선,
평양을 중심으로한 마조선의 3국체제입니다.
번조선에 치우천자 후예들에게 지키게한 것은 용감무상한
그들의 기예로 이민족 침략을 막기 위함이지요.
진은 기원이
진조선의 국명에서 유래되었다 함이 정확할 겁니다.
3조선이 붕괴되면서 한반도 남부에 3한를 세워 옛 영광을
기약한 걸로 보입니다.
단순조선 강역은 고리국 동명성왕이 단군조선을 계승합니다.
이 3한의 땅은 백제 신라의 기원지가 아니라 대륙이 확실할겁니다.
이 삼한을 왜가 임나일본부 허구를 양성하는 곳이지요.
대륙의 삼국 중 신라. 백제를 억지로 우겨넣으니
@태허루 그 공백기간를 만들어 왜 역사로 날조를 합니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백제와 일본을 대파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추정컨데 왜는 양자이남을 근거로, 신라는 양자 이북을
백제는 황하 이남을 중심으로 일어났을 것으로 봅니다.
왜는 이 역사적인 사실을 알았고, 3한의 역사를 정립하지
못한 한국사를 이용 3한지역을 왜구 점령지처럼 날조하지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네..읽어주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