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이상범 가옥 (서울시 종로구 필운대로 31-7, 누하동 178)
이상범화백이 1942년부터 작고한 1972년까지 그의 가족 3대가 함께 살았던 가옥이다
ㄱ자형 안채와 ㅡ자형 행랑채로 구성된 전형적인 도시형 한옥이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으로 2005년 등록문화재 제171호로 지정되어 서울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지금도 고풍스러운 가구와 살림살이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생활공간이자 작업실이기도 했던 이 집에 애착이 남달랐다고 한다
생전, 행랑채 끝방을 사용했던 이상범 화백은 자신의 방을 중심으로 대문간에 면한 방과 대청에 면한 건넌방을 각각 남녀 손님용 응접실로 사용해 생활공간과 사회적 활동 공간을 구분했다
이상범 화백이 이 동네에 처음 자리잡은 집이 바로 앞 2층 양옥에 있던 한옥이었는데 이상범 화백이 죽은 후 네째 아들이 살면서 2층 양옥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1938년 그 옆에 한칸짜리 청전화숙(靑田畵塾)을 마련하고 배렴, 박노수등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며 후배들을 양성했다
동양화가인 청전(靑田) 이상범 화백은 지금까지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산수화가로 손꼽히는 인물로 '청전양식'이라는 독창적인 화법으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한국적 산수 풍경화를 그린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산천을 담은 수평 구도의 편안한 양식을 선보여 뭇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이상향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전 이상범 가옥의 마당 한편에 있는 장독대 벽에 그려진 이 벽화는 이웃에 살던 천경자 화백이 그렸다고 한다
(이상범이 그렸다는 설도 있다 - 청전화실에 살고 있는 넷째 며느리에게 물어보았으나 모르겠다고 하신다)
♤ 청전 이상범
동화일보에서 삽화를 그리는 미술 담당 기자로 근무하던 1936년, 일정기말소 사건(이길용의 일장기 말소 제안에 동조하여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처음 삭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에 가담하고, 1942년 10월과 12월 두 번의 전시를 통해 벌어들인 돈을 육군과 해군에 헌납하여 일제의 전쟁에 협력한다
그리고 1943년 8월 6일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라는 징병제 개시 기념 시리즈에서 김종한의 시 나팔수의 삽화를 그림으로서 또 한번 친일 활동을 하였고 후에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되게 된다
한국전쟁 당시 장남 이건영이 북으로 자진월북 하면서 생이별의 아픔까지 겪게 된다
천경자 집터 (서울시 종로구 필운대로 31-3, 누하동 176)
천경자 화백이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살던 한옥 집터이다
지금 천경자 화백이 살던 집터에는 아무런 표지판 하나 없이 집이 헐리고 근대식 건물(아이엠에이 건축사사무소)이 들어서 있다
♤ 천경자
1924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였고, 2015년 8월 6일 미국 뉴욕에서 사망한 대한민국의 동양화가 이자 수필가이며, 대학교수이다
(개명 전 이름은 천옥자이다)
1952 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 내놓은 그림 ‘생태(生態)는 천경자 화백의 작업을 화단이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65년 동경 이도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홍익대 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과장을 역임했다
1991년 미인도(1977년 작) 위작 사건(천경자는 위적이라 주장, 현대미술관측은 진품이라 주장)이 세상을 시끄럽게 했을 때 법원이 진품 판정을 내리자 "내가 낳은 자식을 내가 몰라보는 일은 절대 없다". 며 절필 선언을 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 뒤 천화백은 4개월 후 다시 돌아와 그림에만 몰두하기 위해 카리브해, 자메이카, 멕시코로 스케치 여행을 떠난다
생애 마지막 전시라고 생각하고 72세 때인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15년 만에 가진 대규모 전시는 8만 명이 모여 줄을 서서 볼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다
1998년 일시 귀국하여 93점의 작품을 서울시립 미술관에 기증하고, 다시 미국으로 떠났으나 2003년 뇌출혈로 병상에 누운 뒤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지내다 2015년 8월 6일 사망하였다
해당 판결(2017년 11월 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5 단독 박강민 판사)은 진품, 위작 논란을 떠나서 이 작품의 진위가 천경자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기 때문에 사후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천경자의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판결한 것은 아니다
2019년 7월 18일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 에서 1,2심 무죄판결을 최종 확인지었다
노천명 집터 (서울시 종로구 필운대로 26-21, 누하동 225-1)
1919년 경성에 와서 1949년 독신인 채 양녀와 이 집에 안착했다가 1957년 병마(뇌빈혈)로 숨질 때 (46세)까지 거주했던 곳이다
이 곳(필운대로 26-19, 21, 23, 25) 일대 모두가 한옥 숙박시설(이화한옥)로 운영 중이다
♤ 노천명
1911년 황해도 장연 태생으로, 본명은 노기선이었 는데 어릴 때 병으로 사경을 헤맨 뒤 지금의 이름 으로 개명하였다
또 그는 부친이 사망한 뒤 1919년 경성으로 올라와 종로구 체부동 이모 집에서 살면서 진명보통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1934년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러다 해방된 후 1949년 이곳 누하동 225-1번지 로 이사를 와서, 1957년 6월 이곳에서 숨졌다
노천명의 시신을 수습한 법관 김홍섭(1915년~ 1965년)의 회고에 따르면 몇 권의 책과 앉은뱅이 책상 외에 변변한 가재 도구도 없는 손바닥만 한 낡은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여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어 교회 신자들이 수습해 줬다고 한다
1935년 <시원> 창간호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고, 대표작인 <사슴>이 실려 있는 시집 <산호림 珊瑚林>(1938)을 펴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族屬)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드려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노천명은 대표작 <사슴> 때문에 시적 낭만을 지닌 순수한 소녀처럼 연상되지만, 오만할 정도의 도도함 과 결백증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 1943년에는 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 기자가 되어 '승전하는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등 다수의 친일 작품을 발표했다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었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다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서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님의 부름을 받들고서>
(매일신보 1943. 8. 5일)
해방 전인 1945년 2월 25일 시집 <창변>을 출간 하며 성대한 출판 기념회를 했는데 그 시집에는 친일시 9편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불과 6개월 뒤 일본이 패전하고 해방이 되자 그는 그 시집에서 친일시 9편을 빼고 계속 출판했다
해방 후에는 거센 친일파 척결 분위기에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일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이 발발했다
곧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미쳐 피난 가지 못한 노천명은 이때 월북 작가인 임화, 김사량 등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다시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 자 노천명은 좌익분자 혐의로 자그마치 20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여러 문인이 구명운동을 벌였고, 약 6개월간 투옥한 뒤 1951년 4월 석방됐다
그 후 노천명은 공보실 중앙방송국에서 일하고, 3차 시집을 발표했지만 건강이 악화됐다
1957년 6월 16일엔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쓰러졌고, 46년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사망 후 처음엔 서울시 광진구 중곡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70년 서울시 도시개발로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1리(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장명산 중턱의 벽제 천주교 묘지로 이장 하였다
♤ 노천명, 최정희, 모윤숙 3인방은 사이가 너무 좋은 나머지 친일 행위에서도 우정을 발휘하여 일제의 우리 문인 회유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1942년에 가입하는데 같은 시기에 반민족 악질 친일파로도 세 여성이 함께 변절을 한 것이다
첫댓글 인왕산 자락길은 여러번 걸었지만 인왕산 아래 서촌마을은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귀한 자료들을 볼 수 있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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