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게(臨終揭)
보우(普愚, 1301~1382)
사람의 한평생은 무럭품처럼 허무해
팔십여 년 세월이 일장춘몽이라네
오늘 죽으면 가죽 자루를 벗어던지니
또 하루 붉은 해가 서산에 저문다
人生命若水泡空(인생명약수포공)
八十餘年春夢中(팔십여년춘몽중)
臨終如今放皮帒(임종여금방피대)
一輪紅日下西峰(일륜홍일하서봉)
사람의 목숨은 그저 물거품처럼 속이 텅 빈 것이자, 순간에 꺼져버리는
헛된 것이다. 참 허무한 것이 사람 목숨이다. 미처 활짝 피지도 못한
열일곱 꽃봉오리건 낡고 찢어진 80년 묵은 가죽 자루건 한바탕 봄날의
꾸므 일장춘몽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니 애면글면 걱정을 끓이며 살
일이 아니다. 남을 해치며 제 목숨과 제 욕심만 차리는 일은 더더욱
해선 안 된다. 나 하나 죽어 없어지는 것이 해가 서산에 지는 것과 무
엇이 다르리오. 태양은 내일 또다시 떠오를 텐데, 무엇을 아쉬워하리오.
고려 말기 태고국사의 말씀이다. 그러한 오해 말라. 내 목숨은 파피처
럼 여길지언정 남의 목숨은 온 세상과도 바꿀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
이다. 임종게는 고승이 입적할 때 수행으로 얻은 깨달음을 후인에게 전
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을 뜻한다.
[작가소개]
보우[ 普愚 ]
호 : 태고(太古), 시호 : 원증(圓證)
시대 : 고려
성격 : 승려
<정의>
고려후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로서 불교계의 통합을 도모한 승려.
<개설>
본관은 홍주(洪州). 속성은 홍씨(洪氏). 첫 법명은 보허(普虛), 호는 태고(太古). 법명은 보우(普愚). 홍주(洪州: 현재 충청남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홍연(洪延)이며,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宗祖)로서, 불교계의 통합과 정계(政界)의 혁신을 도모하였다.
<생애와 활동사항>
13세에 출가하여 회암사(檜巖寺)광지(廣智)의 제자가 되었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행하였다. 19세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참구하였고,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한 뒤, 선(禪) 수행에 몰두하였다.
1330년(충숙왕 17) 용문산 상원암(上院庵)에서 관음기도를 하고, 1333년(충숙왕 복위 2) 성서(城西) 감로암(甘露庵)에서 정진하였으며, 1337년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圓覺經)』을 읽다가 모든 알음알이를 타파한 뒤, 송도(松都)의 전단원(栴檀園)에서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던 중, 1338년 1월 크게 깨달았다.
그 뒤 양근(楊根)의 초당에서 어버이를 봉양하며 1,700칙(則) 공안을 점검하였고, 1339년소요산 백운암(白雲庵)에서 「백운가」를 지었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중흥사(重興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太古庵)을 창건하여 5년 동안 머물 때 「태고암가」 1편을 지었다.
1346년(충목왕 2) 원나라 연경(燕京) 대관사(大觀寺)에 머물 때, 궁중에서 『반야경(般若經)』을 강설하였다. 1347년 7월 호주(湖州) 천호암(天湖庵)에서 석옥(石屋)에게 도를 인정받고, 「태고암가」의 발문과 가사(袈裟)를 받았다. 1348년 귀국하여 중흥사에 있다가, 미원(迷源)의 소설산(小雪山)에서 4년 동안 깨달음 뒤의 수행을 하였다. 이 때 「산중자락가(山中自樂歌)」를 지었다.
1352년(공민왕 1) 궁중에서 설법하였으며 경룡사(敬龍寺)에 있었는데, 홍건적의 난을 피해 소설산으로 옮겼다. 1356년 왕의 청으로 봉은사(奉恩寺)에서 설법하였고, 그 해 4월 왕사(王師)로 책봉되어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1362년 왕은 그를 희양산 봉암사(鳳巖寺)에 있게 하였고, 1363년 가지산 보림사(寶林寺)로 옮기게 하였다.
그 때 왕에게 총애 받던 신돈(辛旽)을 경계하는 글을 올리고 전주 보광사(普光寺)에 가서 머물렀다. 1368년신돈의 참언(讒言)으로 속리산에 금고(禁錮)되었는데, 이듬해 3월 왕이 이를 뉘우치고 다시 소설산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1371년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한 뒤 영원사(營原寺)에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381년(우왕 7) 양산사(陽山寺)로 옮겼는데, 우왕은 다시 국사로 봉하였다.
1382년 소설산으로 돌아와서 12월 17일 입적하였다. 나이 82세, 법랍 69세였다.
<학문세계와 사상>
그는 왕도의 누적된 폐단, 정치의 부패, 불교계의 타락 등에 대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공민왕에게 서울을 한양으로 옮겨 인심을 일변하고 정교(政敎)의 혁신을 도모하기를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민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묻자, 거룩하고 인자한 마음이 모든 교화의 근본이자 다스림의 근원이니 빛을 돌이켜 마음을 비추어 보라고 하였고, 때의 폐단과 운수의 변화를 살피라고 하였다. 또한 선문구산(禪門九山)을 통합하여 종파의 이름을 ‘도존(道存)’으로 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는 혼수(混修), 찬영(粲英), 조이(祖異) 등이 있다. 『태고집(太古集)』에는 그의 사상과 경지를 알게 하는 법어와 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2권과 『태고유음(太古遺音)』 6책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원증(圓證)이다. 중흥사 동쪽 봉우리에 탑을 세워 탑호를 보월승공(寶月昇空)이라 하여 영골을 모셨으며, 사리는 양산사, 사나사(舍那寺), 청송사(靑松寺), 태고암에 분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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