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큐슈 지방을 다녀와서
25일 일요일에는 형제들이 모여서 매형 생신잔치를 하느라 일본 출발 준비를 소홀히 하여 26일 아침시간이 바빴다. 시간이 늦어 자동차를 가지고 송정초교로 갔다. 8시에 송정초교에서 관광버스로 부산을 향해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겨우 8시 정각에 학교에 도착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김우성 선생님이 우리보다 늦게 도착하였다. 8시 20분경에 송정초교를 출발하여 올림픽대로를 달려 반포 경남아파트 앞으로 갔다. 거기에 우리와 함께 일본 여행을 동행할 일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 중에 일부는 동남아시아 여행을 함께 다녀왔고 일부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약간 어색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올림픽대로가 많이 막혀서 9시 40분경에야 경부고속도로를 타게 되었다.
우리 팀을 A팀, 반포 팀을 B팀이라고 호칭을 했다. 이 번 여행은 부부 동반으로 가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나도 아내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행 인원이 남자가 10명 여자들이 6명으로 모두 16명이 함께 출발한 것이다. B팀은 남여 모두 합하여 15명 되어 우리들의 여행 총 인원이 31명이 되었다. 우리 팀은 여행을 위한 준비를 간단하게 하였는데 B팀은 여행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B팀에서는 떡도 준비하고 우리들의 점심 도시락도 준비하여 추풍령 휴게소에서 함께 나누어 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 달리는 버스에서 김우성 부장님의 사모님이 우리들의 건너편에 앉으셔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처음 보는 사이라서 나이와 가족에 대해 물으셨다. 큰애가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고 나이가 48세라고 하니 깜짝 놀라셨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는다고 하신다. 사모님이 미인이고 마치 패션모델과 같다는 말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오후 3시 30분경에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우리들의 가이드를 만나서 그에게로부터 여행에 대한 안내를 받고 출항 준비를 하였다. 거기에서 양천 스카우트대원들과 그들을 인솔하는 교사들을 만났다. 또 전중만, 임명자, 이상자교장과 이무련 교감님을 만났다. 대원들의 인솔 책임자로 동행하고 있는 중이란다. 4시 30분경에 출국 수속을 마치고 승선을 했다.
배정 받은 방을 보니 2등 실의 다인실이었다. 우리들 방에는 20여명이 함께 가도록 되어 있었다. 약간 두꺼운 보료에 두장의 담요가 하루 밤을 지새우기 위한 도구로 지급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들 중에 여자들이 머무는 옆방과는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배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갑판에서 부산항의 정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일행들은 함께 몰려다니면서 점점 얼굴이 익혀지니 서먹한 감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시 경에 저녁식사를 하였다. 배에서 지급되는 식사는 생각보다 부실하였다. 우리들이 학교에서 먹는 급식보다도 낮은 수준의 반찬이 나왔다. 그러나 시장이 반찬이라 그것도 모두들 맛있게 먹었다. 일행들 중 그러한 정보를 알고 온 사람들은 미리 몇 가지 반찬을 개인별로 준비하기도 하였다. 나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미리 준비한 것은 별로 없었다. 20시 30분경에 징소리가 배에 울려 퍼지고 뱃고동 소리를 울리며 우리 일행을 태운 배(성희호)는 일본 시모노세끼항을 향해 출발하였다. 스피커에서는 우리의 민요 아리랑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커피를 한잔하고 선내의 휴게실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였다. 안교장님, 오종렬 부장, 김우성 부장 등 몇몇 고스톱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선실에서 일전을 벌이고 있었다. 지루한 여행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서 배에 있는 노래방에 갔다. 우리 일행이 노래방에서 놀고 있을 때에 B팀의 일행들도 노래방으로 몰려와 함께 노래를 하며 놀았다. 한 시간 동안 노래를 부르며 놀던 사람들이 흥에 겨워서 3층 스텐드 바에 가서 더 놀자고 한다. 그 곳은 식사 시간에는 식당으로 이용이 되고 밤에는 스텐드 바로 이용되는 멀티홀이었다. 10시 30분경에 올라가니 11시경에 영업이 끝나기 때문에 손님을 받을 수가 없다고 한다.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오는 배에서는 저녁 식사를 하고 바로 올라와서 즐기자는 의견 합의를 보고 내려왔다. 내일의 관광을 위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하였다. 세수를 하기 위해서 화장실에 갔다. 간단한 세수는 화장실에서 가능하고 머리를 감는다거나 샤워를 할 경우에는 목욕탕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쉽게 오지 않을 듯하여 소주 한 잔을 마셨다. 소주의 힘을 빌려 한 숨 자고 일어나니 새벽 6시 경이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서로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웃고 있었다. 그 사연을 들어보니 저녁에 늦게까지 소주를 즐기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화장실을 간다는 것이 옆에 놓여진 가방의 손잡이를 잡고 방문이 안 열려서 화장실을 갈 수 없다고 하였단다. 그래서 방문이 있는 방향을 가르쳐 주었더니 화장실을 다녀오더라고 한다. 술이 취하여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라고 할까? 일본의 섬들이 여명에 싸여 그 자태를 서서히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아침 7시 경에 식사를 하고 8시 30분경에 하선을 하여 입국 수속을 밟았다.
시모노세끼항을 나서자 말자 일본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일본 기사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가방을 받아서 짐칸에 실어주었다. 일본인 특유의 친절한 모습을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시모노세끼를 벗어나자 멀지 않은 곳에 관문대교가 있었다. 관문대교는 바다 위에 놓여진 다리로 큐슈와 혼슈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그 규모가 컸다. 관문대교를 지나 멀지 않은 거리에 모지항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 곳은 과거에 일본이 서양과 무역을 할 때 번창 했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한 빨간 벽돌의 서양식 건물들이 있었다. 그 곳을 특별히 레토로(과거회상)라고 명명하고 있었다. 일본의 초기 상업 시대에 세계로 향하는 철강을 선적하던 1920년대의 항구의 모습을 잃지 않으려는 듯 항구에는 많은 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내륙으로 통하는 만 안쪽으로 통하는 입구에는 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그 다리 아래로 배가 통과할 때에는 다리를 들어주어 배가 통과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마침 10시 경에 다리가 열려서 배가 통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깨끗한 거리와 정리된 골목의 모습이 안정된 모습으로 비춰졌다. 화장실에 갔더니 깨끗하게 사용되고 있었고 지붕에는 채광을 위한 투명한 구멍이 있었으며 화장실 입구 문짝은 없었다. 그 이유는 그 곳 지방은 영하의 날씨가 별로 없기 때문에 화장실이 잘 얼지 않아 외부 문짝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모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하모니 랜드를 구경하였다. 하모니랜드는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공원으로 우리나라의 서울랜드 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마침 우리가 도착하였을 때에는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었다. 퍼레이드의 내용은 우리나라의 롯데월드의 것과 비교 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 곳에 위치한 식당에서 8000원 정도 하는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식당에서 나오는 도시락은 우리나라의 것과 별다른 차이점은 없었으나 반찬이 달고 느끼하며 도시락이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었고 반찬도 한 번에 다 먹을 수 있는 정도로 적은 양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도시락을 다 먹고 나니 배가 불렀다.
키츠키 무사 마을을 둘러보았다. 옛 성이 있었던 부근에는 반드시 그 성을 지키는 무사들이 기거하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키츠키 무사 마을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특별히 한 가옥만을 공개하고 있었다. 가옥의 내부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었고 외부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다다미 집의 내부 크기는 다다미의 장수에 따라 구분한다고 한다. 다다미 한 장의 크기는 0.5평이기 때문에 다다미의 장수가 몇 장이냐에 따라 집안의 내부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마을은 구릉 위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무사 마을 위에서 보니 멀리 성이 보였다. 바닷가에 위치한 성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마을 거리에는 돌로 포장이 되어있었고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무사 마을을 뒤로하고 아지모라는 곳에 위치한 히가시시야노 폭포를 보았다. 폭포는 큰 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여 폭포까지 걸어가는 데에는 5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러나 길에 내렸던 눈이 얼어 있어서 미끄러웠다. 폭포의 높이는 20-30m정도가 될 것 같았으며 갈수기인 데에도 불구하고 수량이 제법 많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폭포 아래에는 폭포수가 떨어지면서 얼어서 얼음 탑을 이루고 있었다.
벳부로 향하는 길목에 NHK중계탑이 위치한 높은 곳에서 벳부 시내를 바라보았다. 곳곳에서 온천 김이 무럭무럭 솟아올라 시내 전역이 온천지대 임을 알게 하였다. 벳푸에는 약 2,800개로 추정되는 틈과 웅덩이로부터 뜨거운 증기가 분출되고 130,000 킬로리터가 넘는 화산의 뜨거운 물이 솟아나고 있다. 벳푸는 뿌엿게 뿜어내는 증기로 인해 마치 도시 자체가 끓고 있는 듯이 보였다. 벳푸의 굽어진 만을 따라 서 있는 전통적인 여관에는 뜨거운 물에 잠겨 고질병을 치료하거나 갈라진 바위틈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적색의 탕, 펄펄 끓는 백색의 탕 또는 껄떡거리는 진흙 탕 등과 같은 지옥 온천이 있다고 한다. 온천색깔이 다른 것은 포함된 광물의 성질 차이에서 생기는 것이다. 멀리 산기슭에 보이는 큰 건물이 벳부 스기노이 호텔이라고 한다. 그 곳에서 우리가 일박을 하게 된단다. 바다를 끼고 펼쳐진 시내 전경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어 벳부가 큰 도시임을 알게 하였다.
벳부 시내 입구에 들어서니 유황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버스가 주차장 멈추고 일행들이 내린 곳은 유노하나가 만들어 지는 곳이었다. 그 곳에는 노란 유황 가스가 곳곳에서 분출되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유노하나라는 것은 땅에서 피어나는 유황기둥이었다. 유황 가스가 분출되는 곳에 지붕을 해서 유황이 물에 녹지 못하게 하면 그것이 꽃처럼 아름다운 유황기둥을 이루게 되는데 그것이 유노하나이다. 유노하나는 질병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유노하나를 둘러 본 후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그 식당에서는 회초밥을 먹었다. 전통식 일본의 회초밥은 한국의 초밥 집에서 먹는 것과 맛에서 별 차이가 없어 맛있게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드디어 우리가 머물 벳부의 스기노이 호텔에 도착하였다. 그 호텔은 벳부에서 가장 큰 호텔로 온천장도 최신식 시설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벳부의 온천 수는 생활용수나 난방, 지열 발전 등에도 이용되고 있으며 이 곳 스기노이 호텔에서는 전기 소비량의 약60%를 지열의 자가발전으로 조달하고 있다. 871호 호텔 방을 배정 받았다. 호텔은 2인 1실로 된 방이었고 방에는 두 개의 침대가 놓여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일본 방송만 나오니 볼 수가 없다. 냉장고에는 음료수와 술 종류가 있었으나 그것은 냉장고의 문을 열고 내부 장치에 손을 대면 카운터에서 자동으로 비싼 가격으로 계산이 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이용하지 말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던 것이다. 옷장에는 일본 옷차림의 유까타가 있었다. 온천을 갈 때에는 이 유까타를 입고 신발은 실내화(게다)를 신고 가야한다고 한다. 처음으로 입어보는 유까타가 어색하기 짝이 없다. 팬티 바람에 유까타를 가운처럼 걸치고 온천장에 갔다. 온천장에는 야외 온천이 멋있었다. 야외 온천으로 나가니 하늘의 별이 빛나고 있었고 멀리 언덕 아래로 벳부의 시내 정경이 보이고 시내 너머에는 검은 바다가 어둠을 삼키고 있었다.
온천욕을 끝내고 일행은 한방에 모여 간단하게 소주를 나누었다. 그 동안에 나는 호텔로비로 내려와 공중전화를 찾았다. 집에 안부전화를 하고, 도쿄 영사관에 총영사로 근무하고 있는 처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근무하는 처남댁이 방학이 되어 도쿄에 와 있었다. 반갑게 전화를 받으며 도쿄에 와서 며칠 동안 더 머물다 가라고 한다. 안부를 물은 후에 일행이 있어서 도쿄에 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끝냈다. 방으로 돌아오니 술자리가 끝났다. 처가 배가 출출하여 잠이 올 것 같지 않다고 한다. 저녁을 일찍 먹고 오랫동안 온천욕을 하여 소화가 다 된 모양이다. 호텔 내에 있는 매점에 가서 사발면을 샀다. 가격이 우리 돈으로 1800원 가량하였다. 호텔 객실로 와서 더운 물을 끓여 사발면을 먹으려니 그 맛이 느끼하여 도저히 그냥 먹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싸간 고추장을 국물에 풀고 깻잎을 곁들여서 먹으니 제 맛이 났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온천욕을 간단히 하고 7시경에 아침 식사를 하였다. 아침은 뷔페식으로 하였다. 밥도 있고 반찬도 다양하였으며 특히 내가 좋아하는 과일과 빵이 있어서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8시 3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관광을 시작하였다.
벳부 시내에 위치한 해지옥이라는 곳을 갔다. 그 곳에는 온천수가 솟아 올라오는 곳으로 그 온도가 100도를 넘어서 해지옥, 산지옥이라는 이름들이 붙었다고 한다. 해지옥에는 온천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고 온천수도 뜨겁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일행 중에 한 명이 온천수가 얼마나 뜨거운지 본다고 밖으로 흘러나오는 물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화상을 입을 뻔하였다. 온천수로 익힌 달걀을 먹어보는 것이 이 코스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모두들 방금 아침 식사를 한 뒤라 먹으려는 사람들이 없었다. 기념사진 촬영만 열심히 하고 그곳을 나왔다.
벳부의 면세점을 관광차가 들렀다. 여러 가지 기념품들이 있었지만 가격들이 너무나 비싸 살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열쇠 고리 하나도 가장 싼 것이 우리 돈으로 5500원 정도를 하고 있었다. 15,000원하는 파스를 어머니께 드리기 위해 사고 애들에게 줄 지워지는 볼펜 몇 자루 사고, 기념 열쇠고리를 몇 개 산 후에 차로 돌아왔다. 그 곳에는 우리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학생들이 돈을 쓰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5천엔, 천엔짜리 지폐를 물 쓰듯 쓰고 있었다. 그 학생들은 모두들 청소년 단체 소속의 학생들이었다. 외화를 낭비하는 연습을 하러 온 학생들처럼 보여서 조금은 안타까웠다. 그 곳에 있는 물건들은 면세를 한다고 하지만 결코 가격이 싸게 책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 곳에서 1500엔을 하는 물건을 일반 가게에 가면 1000엔에 구입할 수 있다. 5% 소비세를 물고 사더라도 1050엔이면 구입이 가능하다.
벳부에서 아소산으로 향하는 길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산을 가로 질러 가는 길이고 하나는 산을 돌아서 가는 길이란다. 그런데 며칠 전에 내린 눈으로 산길이 위험하여 돌아가야 한다고 하더니 우리가 산 부근에 이르렀을 때에 날씨가 풀려 눈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여 지름길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지름길인 산길은 매우 험한 길이었다. 고개를 넘고 꼬불꼬불한 길을 달려갔다. 아소산으로 가는 길은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되어 지루하게 느껴졌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 일본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던 미소라히바리(예명: 아름다운 하늘 종달새라는 뜻)의 공연 테이프를 시청하며 갔다. 미소라히바리는 아버지가 한국인이라서 우리나라 사람의 피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 일본에서 출세를 위해서 한국계 사람이라는 것을 숨기고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녀가 일본에서 우리나라의 이미자씨와 같은 가수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반가웠으나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활동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본인들이 우리 한국인을 얼마나 무시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미소라히바리는 많은 인기를 누렸으나 50대 초반에 아까운 나이로 뇌종양 때문에 일찍 세상을 하직했다고 한다.
산길에는 아직도 눈이 군데군데 녹지 않아서 위험하게 느껴졌다. 산기슭 응달 진 곳에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눈꽃이 아름답게 보였다. 일행들 속에서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멀리 보이는 아소산은 하얀 유황김 기둥을 높이 뿜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그 아소산이 폭발하여 지금은 민간인이 화산 분화구 부근까지 가는 것을 통제하고 있다고 한다.
아소산 입구에 쿠사센리라는 넓은 풀밭이 있었다. 구사센리는 에보시다케의 북쪽 기슭에 있는 풍요로운 대초원이며 초원이 조성된 때에는 방목된 소나 말이 유유히 풀을 뜯는 모습을 만날 수도 있다고 한다. 그 곳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점심에도 뷔페식이었으나 아침에 먹은 것만큼 실속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쿠사센리(천리가 되는 풀밭)를 산책하였다. 그 풀밭에는 눈이 덮여서 눈밭을 이루고 있었다. 쿠사센리 구릉 너머로 아소산이 보였다.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버스로 아소산으로 올랐다. 아소 산이란 나카다케, 다카다케, 기지마다케, 에보시다케, 네코다케 등의 아소 5악의 총칭으로 세계 최대급의 복식화산이고 나카다케는 현재도 활동 중인 활화산이며 로프웨이로 분화구 가까이까지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갔을 때에는 아쉽게도 통제 때문에 분화구를 볼 수 없었다. 멀리서 기념 촬영을 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사마루와시에서 원숭이 쇼를 관람하였다. 큰 원숭이와 작은 원숭이가 나와서 재롱을 부리는 모습이 귀여웠으나 한 편으로는 그들이 저런 쇼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측은 한 마음이 앞섰다. 관중들 앞에서 인사하기, 재롱부리기, 축구공을 골대에 차 넣기, 농구공 위에서 공 굴리며 나아가기, 허들 넘기, 링 통과하기, 계단을 뛰어넘고 물구나무서기로 계단 내리고 오르기, 장죽을 짚고 걷기 등의 쇼가 지루하지 않게 하였다.
다음으로 아소 팜랜드를 관광하였다. 그 농장에서는 젖소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음식들이 진열되어 팔려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농산 가공물이 진열된 쇼핑 센터에는 사러 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서 주로 관광객들에게 판매를 하거나 도매상들이 와서 물건을 대량으로 구매해 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우리나라도 이런 형태의 관광 농장들이 만들어져서 농산물 개방에 대처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아소팜랜드에는 식당, 온천, 그리고 방갈로가 갖추어져 있어서 관광객들이 하루 밤을 묵어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방갈로를 배정 받아 가 보니 마치 에스키모들이 사는 이글루와 같은 모양의 집이었다. 콘크리트 돔 형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아 지진이 났을 경우에 안전을 최대한 생각한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평면 지붕이 무너졌을 때에는 지붕 아래에 빈 공간이 존재할 수 없지만 돔 형태의 지붕이 무너지면 벽체가 무너지더라도 돔 형태가 유지되어 지붕 아래에 빈 공간이 형성되어 안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순전히 나의 추측). 방갈로 안에는 침대가 4개 화장대, 화장실 겸 샤워장 시설이 있고 텔레비전, 옷장도 있었다. 그 방갈로가 수백 개가 마을처럼 위치하고 있고 그 방갈로 사이로 길이 있어서 셔틀 버스가 투숙객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숙소에 여장을 풀고 온천욕 준비를 하여 식당으로 갔다. 저녁에도 뷔페식 음식이었다. 식사 후에 온천장에 갔다. 실내 온천장은 우리나라의 목욕탕의 시설과 비슷하였으나 실외 온천장은 다양하였다. 위스키탕, 한방탕, 증기탕, 사우나실 등이 다양하게 있어서 잠깐씩 그곳을 들러도 오랫동안 온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온천욕을 끝낸 후에는 역시 소주 한 잔씩을 나누고 각자 숙소로 가서 잠을 청했다.
아침 6시 전화기에서 모닝콜 소리가 나서 잠을 깨었다. 아침 온천욕을 간단히 즐기고 아침 식사를 하였다. 아침도 어제 저녁에 먹은 것과 같은 형태의 뷔페식 식당에서 먹었다. 그런데 온천욕을 하고 식사 시간 끝 무렵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식사 행렬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침을 제대로 챙겨 먹으려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줄을 서지 않고 뒤 부분의 몇 가지 음식만 가져다가 대충 먹고 나왔다. 오전 8시 정각에 출발하는데 벌써 7시 40분이되었기 때문이다. 숙소로 달려가 급히 짐을 챙기고 나왔다.
구마모토 성을 관광하였다. 나라의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구마모토 성"은, 19세기 말의 전쟁 때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며, 현재의 "덴슈 각"은 약 40년 전에 재건된 것이다. 그 성은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우리나라를 공격할 때에 울산성이 너무나 튼튼히 방어를 하고 있어서 공격하기가 어려웠던 점을 생각하여 울산성의 외부 모양을 기본 모델로 축성하였다고 하였다. 성 주위에는 인공 연못을 파서 외적이 쳐들어오기가 어렵게 하였고 성곽의 높이도 매우 높아서 적의 공격이 용이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성의 전체적인 건물은 일본 고유의 모양대로 되어있었고 높이가 7-8층 건물 정도가 되어 보였다. 성을 지탱하는 돌담은「무샤가에시」라고 불리어 적이 기어올라 올 수 없도록 위로 갈수록 점점 바깥쪽으로 뒤집히고 있는 구조이고 성내에는 농성 때의 식량 확보를 위해 은행나무가 많이 심겨 있다. "덴슈 각"내부에는 역대 성주의 유품과 무구, 옛날 무사들이 사용했던 여러 가지 병기와 제복이 진열되어 있었고 구마모도 성이 소실되었던 것을 재 축성하는 모습도 모형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꼭대기에 올라가니 구마모토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넓은 평지에 위치한 구마모토 시가 모두 보였고 멀리에 야트막한 산이 보였다. 이런 구마모토의 지형적인 형태 때문에 시민들은 달맞이 해맞이를 이 구마모도 성에서 한다고 한다. 특별한 것은 이 구마모도 성이 매우 잘 정비가 되어 있었으며 지금도 계속 복원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서 일본인들의 문화재에 대한 애착을 엿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문화재를 외국 관광객들에게 무료로 개방하여 자기 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에게 자연스럽게 자기 나라의 문화재를 선전하는 효과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문화재를 방문할 때마다 입장료를 물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꼭 문화재 보존 경비를 위해 입장료를 징수해야 한다면 외국인들에게 만이라도 면제하여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많이 접하고 우리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해 주는 것이 우리를 세계에 알리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와인 공장을 방문하였다.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포도를 원료로 하여 와인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간단히 와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견학하고 시음 시간을 가졌다. 다양한 와인을 무료로 주었는데 포도의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다른 맛을 내는 와인이 생산되고 있었다. 맛있는 포도 와인을 한잔 정도 마시고 나니 취기가 얼굴에 올랐다. 버스에 올라 테재부천만궁으로 가는 동안에는 와인의 취기 때문에 정신없이 잠을 잤다.
테재부천만궁은 신사의 일종이다. 거기에는 학문의 신"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의 학부모들은 자기의 자식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잘되기를 기원하기 위해서 매년 수험철이 되면 전국에서 합격기원이나 학업성취를 위한 참배자들이 모여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곳 신사를 방문하는 일본 사람들 때문에 외국인들이 관광하는데 많은 지장이 있었다고 했다. 그 시기가 막 지나고 나서 우리가 방문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별 무리 없이 관광을 할 수가 있었다.
"덴만 궁"에는 연간 100회 이상의 축제가 열리며, 도깨비술, 거짓말바꾸기을 비롯하여 "텐만 궁" 최대의 축제인 "진코시키 대제"등이 행해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오노보리" 의식은 국가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내려 신사 건물이 있은 곳까지에는 우리나라의 합격 엿에 해당하는 "우메가에 모치(떡)"를 파는 찻집이 늘어 서 있고 다양한 선물을 팔고 있는 가게들도 있었는데 그 가격이 면세점보다도 오히려 싸게 팔고 있었다. "
다자이후 덴만 궁"은 매화의 명소로 알려져 있어,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추모하여 "교토"에서 날아왔다고 전해지는 "도비우메"는 해마다 다른 매화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것으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국보급 문화재를 수장하는 보물전도 있다. 천만궁 입구에는 학문의 신을 상징하는 지주들이 세워져 있었고 정문 앞에는 커다란 고목이 천만궁의 역사를 자랑하듯 서 있었다. 길을 따라 들어가니 먼저 연못이 나왔다. 그 연못은 인공으로 조성된 것 같았는데 분수와 정원수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게 보였다. 연못 위로 난 돌 다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학문의 신을 모신 신사가 나왔다. 그 앞에는 사람들이 무릎을 굻고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고 앉아있었다. 신사 안에 위치한 우물에서는 자기의 몸을 깨끗이 하고 기도를 드리기 위해 손을 씻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가게에서는 학문 정진을 잘하게 하는 부적을 팔고 있었다. 신사 안에는 매실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에서 생산되는 매실로 술을 담아 신사에 참배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한 모금씩 마시게 하는 의식이 있다고 한다.
신사 건물 뒤에는 그 곳을 참배하러 오는 사람들을 위한 식당이 운영되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그 식당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그 도시락은 첫날 하모니랜드에서 먹었던 도시락과 같은 형태였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도시락을 식당에서 판매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도시락은 미리 준비하여 쌓아 놓을 수도 있고 도시락에 음식을 조금씩 담아서 내기 때문에 음식물 낭비도 막을 수 있으며 인건비도 절약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을 보고 일본인들의 합리적인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후쿠오카에서 일본인들의 소방 방재 훈련 시설을 견학하였다. 그 곳에서는 다양한 소방 방제 시설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안내하는 아가씨의 설명을 듣고 체험 시간을 가졌다. 먼저 불이 난 건물에서 대피하는 방법에 대한 체험이었다. 작은 방을 여러 개 만들어 놓고 불이 난 것과 같이 연기를 피워 놓았다. 우리들은 그 방들을 유도등을 따라 통과하면서 건물 밖으로 대피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깜깜한 방에서 실제로 대피하는 훈련을 거치므로 실제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훈련이었다. 다음에는 지진과 강풍 체험 시간이었다. 진도 5와 7정도의 지진을 실제로 체험하면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 대피 요령을 익혔다. 지진이 나면 일단 전기 가스를 차단하고 식탁 밑이나 건물의 빈 공간으로 몸을 피하여 건물이 붕괴되었을 때 자기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강풍의 세기에 따라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강도가 어느 정도 인지를 체험하였다. 시속 30m정도의 강풍이 불면 사람의 몸도 가누기가 어렵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고 나니 자연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소화기 사용 방법에 대한 훈련이었다. 그 훈련은 훈련장 앞 벽면에 실제 화재 장면을 비춰주고 그 화면에 소화기를 뿜어 불을 끄는 것을 실습 하는 것이었다. 화면이 나올 때에 너무 늦게 소화기를 뿜는다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소화기를 뿜으면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런데 정확하게 소화기를 사용하면 그 불이 꺼지게 되어있었다. 시뮬레이션에 의한 훈련이지만 실제 상황과 유사하여 훈련 시설로는 너무나 훌륭하였다. 외국인들에게까지 훈련 기회를 주고 자기 나라는 이러한 훈련으로 소방 방재에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는 듯하였다.
후쿠오카로 향하는 길목에 백제의 유적이 있는 곳을 지나갔다. 옛날 백제가 멸망할 때 요직에 있던 인물들이 이곳으로 피해 와서 정착하고 살았다. 그 때에 일본은 백제인 들에게 이 지방의 정치를 부탁하여 관청을 짓고 이 지방을 다스렸다고 한다. 지금은 그 관청의 터만 남아 있고 지나오는 길에 그 터를 차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이 기억하기 싫은 역사이기 때문일까? 그 관청의 복원을 하지 않고 있었다.
후쿠오카의 바닷가에 위치한 하카다 타워를 관람했다. 엘리베이터로 타워 꼭대기를 올라 후쿠오카 시내 전경을 보았다. 바다와 섬과 해안선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하카타"의 이름으로 알려진 "후쿠오카 시"는 "규슈 지방"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비행기와 철도가 집중하는 곳이기도 하다. 매년 봄에 행해지는 항구 축제인 "하카타 돈타쿠"는, 어린이들과의 가장행렬, 그리고 손으로 춤을 추며 시내를 행진하는 축제인데, 300개를 넘는 단체, 약 2만 5천 명의 시민이 참가하며, 200만 명을 넘는 관광객으로 붐비는 화려한 축제라고 한다.
하카다 타워를 끝으로 모든 관광 일정이 끝나고 시모노세끼항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관문대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갈 때에 지나쳐 갔던 관문대교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였다. 일본에는 홋카이도, 혼슈우, 큐슈, 시코쿠의 4개의 섬이 있는데 이 섬들은 모두 관문대교와 같은 커다란 다리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그 다리들은 모두 관광 자원의 역할을 하고 있단다. 우리나라의 남해 대교나 서해대교, 영종대교와 같은 것들도 모두 관광자원이 되고 있는 것과 같았다.
시모노세끼항에 도착하니 5시 30분경이 되었다. 버스가 도착하자 몇 명의 한국인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시모노세끼에 살고 있는 일행의 친척들이었다. 일행 중에는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은 딸 아들과 함께 여행을 하셨다. 그 할아버지는 오래 전에 이 곳에서 사셨던 분이었고 그 분의 친척들 몇 분이 아직도 이곳에서 남아 생활을 하시고 계신다고 한다. 몇 십 년 만에 친척들의 상봉이 눈물로 얼룩지고 거동이 불편하신 할아버지의 흐느낌은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간단하게 출국 수속을 마치고 배로 올랐다. 배정된 방은 117호 다인실이었다. 짐을 풀고 곧바로 저녁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휴게실에서 커피를 한잔 한 후에 뉴우스를 보았다. 선내에 있는 사람들이 궁금하여 선실로 가니 방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불을 깔려고 보니 방이 좁아서 다 깔 수가 없었고 이를 사무장에게 말하니 사무장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반응을 보여 일행이 심하게 항의를 하자 몇 명의 일행을 4인실에 추가 배정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고 한다. 내가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후였다. 얼른 흩어져 있는 담요들을 정리하고 다시 휴게실로 가서 텔레비전을 시청하였다.
9시경에 일행은 다목적 홀로 갔다. 4인 기준으로 테이블 하나에 25,000원씩을 주고 단란 주점처럼 노래와 춤을 추며 노는 곳이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 우리 일행이 자리를 잡고 놀이를 시작할 무렵 다른 팀들이 들이닥쳤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상태에서 시간이 흘러가고 노래도 늘어지는 노래들을 불러서 흥이 오르지 않았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 빠른 템포의 노래를 부르고 우리 일행들에게도 4/4박자의 빠른 노래를 주문하였다.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오르자 옆에 있던 팀들도 노래를 신청했다. 그런데 우리가 분위기를 띄워 놓으면 그들이 나와서 늘어지는 노래로 분위기를 망쳐놓았다. 다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 아내를 불러서 함께 춤을 추었다. 잘 추지도 못하는 지루박 춤을 흉내 내기도 하고 브루스 음악이 나오면 그냥 기본 스텝만을 밟으면서 분위기를 띄워 보려고 했다. 드디어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무대 위로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 중에 정주명 교장님은 지루박과 브루스를 제대로 배운 것 같았다. B 팀의 여자 분과 함께 춤을 추는데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정도의 춤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김우성 부장님, 박정승 부장님들이 지루박과 브루스 춤을 추고 계셨다. 나는 더 이상 무대로 나가기가 쑥스러워졌다. 내가 추는 것은 스텝도 없이 막 돌리는 춤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추기가 민망하였다. 그러나 일행들에게 춤을 출 수 있는 용기를 제공하고 분위기를 띄워 놓았으니 나의 춤도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자리에 앉아 있자니 한 잔 마신 맥주 기운이 올라 졸음이 몰려왔다. 하는 수 없이 혼자서 먼저 나와 세수를 하고 미리 잠을 청하였다.
새벽 3시 30분경 잠이 깨어 화장실을 다녀왔다. 피로가 어느 정도 가시고 나니 옆에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가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게 하였다. 몽롱한 상태로 누워 있다가 보니 5시 30분경이 되니까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한잠도 잘 수 없었다고 하고 몇몇 사람들은 고스톱을 치며 늦게 까지 놀았다고 하였으나 나는 맥주의 취기 때문인지 4시간 정도는 잘 잔 것 같았다.
세수를 하고 6시 경에 식당으로 올라가 마지막 선내식을 먹었다. 가져갔다가 남겨온 반찬들도 모두 나와서 푸짐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다. 8시 30분경에 입국 수속을 마치고 부산항 여객 대합실을 나오니 갈 때에 태워주었던 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분의 태도는 일본인 기사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안녕하셨느냐는 인사에도 대답이 없고 우리들의 짐을 실어 주지도 않았다. 일본인 기사들은 짐을 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버스에서 내릴 때에는 언제나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아직도 우리의 친절 써비스는 많은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부산에서는 태종대에 잠시 내려서 바닷가를 산책하였다. 태종대 자갈밭에는 자연의 모습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 쓰레기로 지저분해진 모습이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몇 차례 태종대를 들리긴 했으나 자갈밭에 내려가 보기는 대학 시절에 가 본 것 외에는 기억이 없다. 그 때 크라스의 남여 친구들이 몇 명 함께 태종대를 찾았다. 얇고 납작한 돌을 골라 물위를 튀겨 멀리 보내기를 하였다. 그런데 많은 남녀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돌을 던지다가 가랑이를 너무 벌려서인지 바지가 찢어져 버렸다. 얼른 바위 뒤에 가서 예비로 가져갔던 청바지를 갈아입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혼자 웃음 지었다. 모자상에서 잠깐 머물고 다시 광안리로 향했다.
부산 시내의 거리는 차량들로 붐벼 많이 막혔다. 한참을 달려가니 광안대교가 나왔다. 광안대교의 특징은 2층으로 된 다리라는 것이다. 일본의 고가 차도가 2층으로 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였었는데 이렇게 2층으로 다리를 놓은 것이 우리의 교각 건설 기술도 많이 발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해안선을 따라 꼬불꼬불 돌아가던 길이 광안대교의 개통으로 훨씬 가깝게 달려 갈 수 있었다.
광안리 해수욕장 부근의 횟집에서 회를 먹었다. 이 집은 우리와 함께 갔던 일행 중에 이지영씨라는 분이 고향이 부산이라 우리를 안내한 곳이다. 일인당 1만 7천원의 비용으로 먹었는데 스키다시가 적었으나 회가 푸짐하여 좋았다. 점심을 먹고 술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반주를 즐기는 동안 광안리 해수욕장을 산책하였다. 광안리 해수욕장에서는 광안대교가 바로 쳐다보였다. 하얀 모래밭에는 비둘기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바닷가에 비둘기가 이렇게 많이 있는 것이 신기하였다.
올라오는 버스 안은 분위기가 매우 부드러워졌다. 김재현 총무가 술 한잔을 먹은 탓인지 구수한 재담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고, 반주도 없이 부르는 노래 솜씨들이 수준급이었다. 중간에 사회를 맡은 오종렬 부장의 재담도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두 분이 고생하여 준 덕분에 서울까지 지루하지 않게 도착하였다.
버스가 드디어 반포에 도착하였다. B팀 일행이 내리고 우리는 작별 인사를 고하고 다시 송정초등학교로 향했다. 잠시 후에 B팀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들의 가방이 거기에 내려졌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그 가방이 올 때까지 길가에 버스를 세워 놓고 기다렸다. 10여분 후에 B팀의 총무 역할을 했던 분이 자기 차에 짐을 싣고 나타났다.
송정초등학교에 버스가 도착하여 안귀수교장님과 천응문부장님을 함께 모시기로 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확인 해보니 자동차의 미등을 끄지 않은 채로 4박 5일을 그냥 보낸 것이다. 밧데리가 완전 방전이 되어 있었다. 함께 모시기로 했던 일행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교원나라 자동차 보험에 전화를 걸어 시동을 걸어 달라고 부탁했다. 15분 쯤 후에 써비스 기사가 나타났다. 출발하던 날 아침시간을 바쁘게 보내다 보니 그런 실수가 나타났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사람들의 친절함, 깨끗한 거리의 모습, 열악한 자연 환경조건에서도 그것을 잘 활용하면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 합리적인 생활 방식들이 많은 점을 느끼게 하였다. 이 번 여행은 경비에 비하여 좋은 경험을 했던 여행이었다.
* 참고 사항
크루즈 여행 경비 449,000원
가이드 팁 31명이 50만원 지급
여행기간 2004년 1월 26일 - 1월 30일
일본에서는 모든 지불금액에 대해 5%의 소비세가 징수된다.
첫댓글 여행기를 읽어보면 여행했을 때 그 기분을 살릴 수 있어서 좋더라. 혹시 여행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읽어보라고 올렸다. 나의 흉도 들어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잘 안보여주는데 친구들이니까 ....
머니 머니 해도 머니가 최곤데...머니도 안들고 일본 여행을 멋지게 했다네..자세하게 올린 여행기가 많이 참고가 될껄쎄..근데 선새임들도 지금보니 할거 다 하는 구먼 ㅎㅎㅎ 고생했네..글 올리느라고..
아이고 흉보지 말거래이. 친구끼리 모른체 해주라.
아직 안봤네 담에 보고....